<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 중에서 
 
위기를 극복한 메디치 가문


미켈란젤로는 볼로냐를 떠나 피렌체로 가고 싶어 했지만 피렌체에는 불 같은 성격의 설교자 기롤라모 사보나롤라의 영향이 매우 현저했다.
페라라 출신으로 피렌체 상 마르코의 도미니크회 수도원의 부원장에 선임된 후 사보나롤라는 부르주아의 부패한 생활을 힐난하는 설교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피렌체 대성당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설교하며 피렌체인의 방탕한 생활을 꾸짖으며 피렌체를 민주주의가 아닌 신정주의 체제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종교개혁의 선구자인 그는 피렌체를 새로운 예루살렘을 위한 근거지로 만들려고 했으며 그리스도가 유일한 통치자이며 왕이었다.
사보나롤라에 의해 피렌체인은 사치스러운 생활을 자제하게 되었고 심지어 책과 미술품을 불에 태우기까지 했다.
사보나롤라의 영향력 하에 있는 한 피렌체는 예술가들이 살기에 적당한 곳이 못되었고 특히 메디치가와 관련 있는 예술가들에게는 그러했다.
사보나롤라에게는 많은 적이 생겼고 무엇보다도 교황 알렉산더 6세가 그를 이단으로 본 것은 치명적이었다.

미켈란젤로에게는 새로운 후원자가 필요했고 그는 피에로의 환심을 샀다.
한편 피렌체에서는 민중이 벌떼 같이 일어나 메디치 궁전과 정원 그리고 피에로의 재정을 담당한 사람들의 집을 약탈했다.
시민들은 메디치 가문이 4대에 걸쳐 수집한 미술품들을 훔치고 흐트러뜨렸으며 남은 것들은 정부에 의해 경매에 붙여졌다.
피에로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가 얼마나 컸는지는 시그노리가 피에로와 추기경 조반니를 생포해 올 경우 5천 플로린을 주고 시신을 갖고 오게 되면 2천 플로린을 주겠다고 공약한 데서 알 수 있다.
샤를은 피렌체에 진입했고 자신의 요구를 약간 완화해 피렌체 시민을 달래면서 나폴리 왕국을 치기 위해 남쪽으로 진군했다.

시그노리는 1494년 12월 2일 베키오 궁전의 커다란 종을 쳐 시민들을 모으고 시민들로부터 직접 권력을 위임받아 20명을 선정하여 그들로 하여금 향후 1년 동안 담당할 새로운 시그로니와 행정장관들을 선임하게 했는데 약 3천 명의 선거권을 가진 남자들의 추첨에 의한 민주주의 방법으로 했다.
3천 명은 대의원과도 같은 역할을 했으며 대평의회가 되었다.
이는 피렌체가 처음으로 민주주의를 시도한 것으로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사건들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대평의회를 소집하기에는 베키오 궁전이 너무 작아 시모네 폴라이울로가 대평의회를 위한 공간을 ‘500인의 홀 Hall of the Five Hundred’를 개축해 마련했다.
8년 후 바로 이 홀에서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가 양쪽 벽에 프레스코화를 그리게 된다.
새로운 공화국은 1495년 6월 10일부터 집무에 들어갔다.

샤를이 이탈리아 전역을 헤집고 다니는 동안 피사는 밀라노와 베네치아와 동맹을 맺고 독립을 강화해 나갔다.
피렌체 평의회는 피사와의 전쟁에 돈을 댔다.
부자들로 하여금 강제로 돈을 빌려주도록 하고 대신 정부가 채권을 발행했지만 정부가 재정적으로 적자 상태가 되자 채권은 액면 가치보다 10% 떨어졌다.
1496년 재정은 바닥이 났으며 정부는 로렌초의 방법을 모방하여 가난한 신부들을 위한 혼인지참금으로 제공하기 위해 정부에 맡긴 돈에서 빌려와 썼다.
이러는 가운데 부정부패가 심화되었다.
게다가 1496년 11개월 동안 비가 거의 매일 오는 바람에 농작이 제대로 되지 못했다.
1497년 길에는 굶어 죽은 사람들의 시신이 널렸다.
정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곡물을 제공했으며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여자와 아이들이 밟혀 죽기도 했다.
1497년 메디치가에서 들고 일어나 피에로의 정부를 회복시키고 정부 지도자 5명을 사형에 처했다.
다섯 명은 헌법이 보장한 대로 평의회에 항소할 권리가 있었지만 이를 기각하고 처형했다.
시민들은 로렌초 시기의 평화를 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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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오키프는 뒤샹과의 만남을 생생하게


세계대전이 끝난 후 여러 나라의 작가, 음악가, 예술가들이 파리로 모여 파리는 다시 예술의 수도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뒤샹은 파리보다는 뉴욕을 선호했다.
왜 뉴욕을 선호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뉴요커들이 훨씬 더 자신을 혼자 있게 내버려두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34살의 뒤샹은 1922년에 다시 뉴욕으로 왔다. 링컨 아케이드의 작은 방으로 돌아온 그를 먼지가 잔뜩 낀 미완성의 <큰 유리>가 묵묵히 반겼다.
아렌스버그와 루이스 부부는 캘리포니아 주로 이주했는데 주요 원인은 재정적인 어려움 때문이었다.
루이스는 과음하며 친구들과 어울려 무질서한 생활을 하는 남편과 함께 먼 곳으로 이주하는 데 전적으로 찬성했다.
뒤샹이 그에게 “그곳에서 24시간을 무엇을 하며 지낼 수 있겠느냐?”고 묻자 아렌스버그는 “자연은 자주 스스로를 반복해야만 한다”고 대답했다.
그는 만 레이에게 보낸 편지에 <큰 유리>에 별로 시간을 할애하지 않고 있다고 적었다.
한 작품에 7년이나 몰두하다 보니 그는 작업에 진력이 났다.
“다른 미술품들에 비해 … 전혀 불필요한 것을 제작하고 싶다”고 그는 말했다.
유리에 작업하는 일이 실증난다면서 “나는 나 자신에게 왜 계속해서 작업해야 하는가를 묻는다”고 했다.

그는 프랑스어를 가르치며 겨우 생활할 만큼의 돈을 벌었다.
마샬 체스 클럽에 가는 횟수가 자연히 줄었고, 집에서 혼자 체스를 연구하는 일이 잦았다.
로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화가로 남느냐 아니면 필름 메이커가 되느냐에 관해 목하 궁리중이라면서 우선 체스에 빠져 있다고 적었다.
캐서린은 미술품을 구입하기 위해 18개월 예정으로 전 세계를 여행하는 중이었으므로 무명사회의 전시회는 그녀가 돌아올 때까지 중단되었다.
뒤샹은 한 달에 한두 번 웨스트 76번가에 있는 스테타이머 자매의 아파트로 가서 그녀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했는데 세 자매는 노처녀들이었다.
그곳을 맥브라이드, 패츠, 스티글리츠가 출입했다.
스티글리츠의 젊은 애인 조지아 오키프도 종종 그를 따라왔다.
오키프는 1924년에 스티글리츠의 두 번째 아내가 되었다.

오키프는 뒤샹과의 만남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때 그녀는 20대 초반이었다.

전 파티에서 누구를 만났는지 기억나지 않아요.
그러나 뒤샹이 그곳에 있었고, 대화가 이어졌지요.
전 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제가 차를 다 마시면 그가 의자에서 일어나 제 컵을 받아가지고는 우아하게 옆에 내려놓았는데 전 그런 장면을 과거에는 본 적이 없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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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 중에서 
 
미켈란젤로, 성 도미니크 교회를 장식하다

알도브란디는 미켈란젤로에게 조각을 제작하게 했는데 볼로냐의 성 도미니크 교회 내에 있는 성자 도미니크 무덤의 미완성 조각들을 제작해 채우는 것이었다.
도미니크의 무덤은 많은 순례자들이 찾는 베네치아의 명소였으며 예술적 기념비가 세워진 곳으로 소문난 곳이었다.
19살의 미켈란젤로는 1년이 조금 넘도록 작업했지만 겨우 작은 조각 3점을 제작했을 뿐이다.
그가 작업에 매우 신중을 기했음을 알게 해준다.
도미니크회의 창시자의 뼈가 묻힌 무덤 아르카Arca는 14세기 니콜로 피사노Niccolo Pisano(1220년경~84)에 의해 장식되기 시작했지만 미완성으로 남아 있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예술가가 뒤를 이어 장식했지만 여전히 완성하지 못하고 1492년에 사망했다.
그 예술가를 훗날 니콜로 델아르카Niccolo dellꡑArca(1435년경~92)이로 불렀다.
니콜로는 1470~3년경 왼쪽 무릎 위에 촛대를 받치고 있는 천사를 제작했는데, 이십여 년 후 미켈란젤로가 제작한 천사보다 4.5cm 작은 높이이다.
미켈란젤로에게는 니콜로가 제작한 것과 한 쌍으로 어울리는 형상으로 제작하도록 요구되었다.

콘디비에 의하면 미켈란젤로가 무덤을 장식한 두 점 조각은 <촛대를 든 천사 Angel holding a Candlestick>와 <성 페트로니오 San Petronius>이다.
<촛대를 든 천사>를 보면 박력 있는 근육을 한 천사의 날개가 몸체에 비해 작지만 젊은 미켈란젤로의 야심과 탁월한 기술이 한껏 돋보인다.
이것은 미켈란젤로가 제작한 작품들 중 가장 정감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선임자의 작품에 일치가 되도록 우미한 양식을 따라 제작한 것이다.
왼쪽 무릎을 꿇은 천사는 무거운 촛대를 오른쪽 무릎 위에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왼쪽 어깨로부터 주름진 옷자락을 허리 아래로 늘어지게 하고 마냥 늘어지는 옷자락을 천사의 벨트로 잡아맨 섬세한 묘사는 감탄할 만하다.
천사의 모습은 왕에게 경의를 표할 때의 제스처를 연상시킨다.

성 페트로니오스는 볼로냐의 수호성인으로 그의 손에는 도시를 단순화한 모델이 들려져 있다.
시에나 조각가 야코포는 앞서 성 페트로니오스를 조각으로 제작했으며 그의 조각은 볼로냐 시민에게 익히 알려져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야코포의 작품을 봐서 알고 있었다.
미켈란젤로의 입체적 모델은 단순한 형태이지만 도시 볼로냐를 상징하는 건물과 성벽으로 구성되었다.
높은 타워들은 단테의 <신곡> 제1편 ꡐ지옥편Infernoꡑ에 나오는 유명한 것들이다.
그는 왼발로 몸의 중량을 지탱하며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고 선 모습을 묘사했다.
<촛대를 들고 있는 천사>와 <상 페트로니오스>에서 조토와 마사초의 영향이 감지된다.

콘디비는 아르카를 장식한 작품으로 <촛대를 든 천사>와 <상 페트로니오스>만 언급했으므로 <상 프로콜로스 San Procolus>가 과연 미켈란젤로의 작품인지 논란거리가 되게 했다.
<상 프로콜로스>는 1572년에 끌어내려졌고 형편없는 방법으로 보수되었기 때문에 그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니콜로 델아르카가 제작하기 시작한 것을 미켈란젤로가 완성시킨 것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다.
<상 프로콜로스>는 오른손을 불끈 쥔 모습으로 매우 호전적으로 보인다.
이것과 <상 페트로니오스>를 제작할 때 미켈란젤로는 시에나 조각가 야코포 델라 퀘르시아Jacopo della Quercia(1374년경~1438)의 작품을 참조했다.
상 페트로니오스는 몇 조각가들에 의해 제작되었으며 에르콜레 데 로비르테Ercole deꡑ Roberti도 1475년에 제작했다.
미켈란젤로는 상 페트로니오스 정면에 장식된 델라 퀘르시아의 <상 페트로니오스> 외에도 데 로비르테의 작품을 참조했으며 프란체스코 델 코사Francesco del Cossa가 1473년에 제작한 제단화 <성 플로리안 St. Florian>의 야한 모습과 부드러운 에너지 그리고 드레스에서 영감을 받아 응용하기도 했다.
그는 이 두 제단화를 통해서 옷이 늘어지면서 생기는 우미한 주름에 대한 사실주의 묘사에 영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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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 중에서 
 
로렌초가 타계하다

미켈란젤로가 <계단에서의 마돈나>와 <켄타우로스의 전투>를 제작하면서 조각가로서의 길을 한 발 내디딜 때 피렌체의 통치자이며 은행가, 거상 로렌초가 타계했다.
로렌초는 그에게 아버지와 같았는데 특별히 그의 재능을 인정해주고 격려했으며 일찍이 로렌초의 보호 아래 들어온 미켈란젤로는 정신적으로 그를 의지했다.
로렌초는 늙어가면서 관절염과 팔 다리에 염증으로 인한 고통으로 괴로워했다.
그는 열서너 차례에 걸쳐 다양한 치료를 받았지만 고통을 더는 데 따뜻한 광천수에 목욕하는 것보다 나은 방법이 없다는 걸 알았다.
아내는 1488년에 세상을 떠났고 평소 아내에게 잘해주지 못한 그는 아내가 타계하자 몹시 슬퍼해 했다.
그녀는 로렌초의 자식을 많아 낳았고 7명이 생존했다.
로렌초는 정성을 다해 자녀들을 교육시켰으며 결혼을 통해 피렌체의 번영을 초래했다.
큰아들 피에로를 오르시니 여자와 결혼시켜 로마에 친구들을 만들어두었고, 막내아들 줄리아노를 사보이 공작 딸과 결혼시켜 프랑수아 1세로부터 네무르의 공작 칭호를 받게 했으며 프랑스와 피렌체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이 이루어지게 했다.
둘째 아들 조반니는 성직자가 되었다.
그는 성격이 좋았고 몸가짐에 있어 예를 갖추었으며 라틴어에 능통했고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았다.
로렌초는 이노켄티우스 8세로 하여금 조반니가 14살 때 추기경이 되도록 했으며 이는 교황으로서는 선례가 없던 일이었다.

로렌초는 피렌체를 통치하는 일에서 점차 손을 떼고 공적인 일과 사업을 큰아들에게 물려주었다.
그는 시골로 내려가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평화로운 생활을 했다.
그러나 이런 생활도 잠시였고 그가 1492년 3월 21일 카레지에 있는 별장에 당도했을 때 복부의 통증이 매우 심해졌다.
전문의들이 달려갔으며 의사가 그에게 보석을 갈아 마시게 했다.
그러자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로렌초는 피코와 폴리지아노에게 자신이 더이상 고대 사본을 수집하지 못하게 된 데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죽음에 임박해서는 사제를 오게 해서 무릎을 꿇고 성사고백을 했다.
로렌초가 자유를 파괴하고 젊은이들을 부패하게 만들었으므로 용서받을 수 없다고 사제가 완강한 태도를 취하자 로렌초는 서둘러 친구를 사보나롤라에게 보내 자신의 임종에 오도록 청했다.
사보나롤라는 와서 로렌초에게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선행되어야 한다면서 진심으로 하느님의 용서를 구할 것, 만약 더 살게 되면 생활태도를 바꾸겠다고 약속할 것,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할 것 등이었다.
사보나롤라는 나중에 따로 언급하겠지만 교황에 의해 이단자로 몰려 화형에 처해졌지만 개신교 입장에서는 종교개혁가로 칭송을 받는다. 그는 당시의 부패를 힐난했고 금욕주의를 통해 올바른 삶을 살 것을 피렌체인에게 촉구했다.
로렌초는 1492년 4월 9일 43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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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만 레이가 파리에 도착하자 뒤샹은


만 레이가 여름에 파리에 도착하자 뒤샹은 그를 역에서 반긴 후 차라가 묵다 일주일 전에 비운 싸구려 호텔에 투숙시켰다.
그 건물은 이본느가 소유한 것으로 뒤샹은 그 건물에서 이본느와 동거하고 있었다.
뒤샹은 만 레이를 데리고 카페 세르타로 가서 다다 예술가들에게 소개했으며, 다다와 관련된 사진 찍는 일을 그가 맡도록 했다.
피카비아가 그에게 사진일을 주었고, 폴 퐈르가 패션 사진을 찍도록 도와주었다.
그때 만 레이는 프랑스어를 구사하지 못했으므로 말을 배우느라 열심이었으며, 뒤샹을 졸졸 따라 다닐 수밖에 없었다.
뒤샹은 그와 함께 퓌토에 있는 자크 비용의 작업실로 가서 그곳에서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파리에는 미국인이 많았으며, 뒤샹은 스테타이머 자매에게 보낸 편지에 “그리니치 빌리지 전체가 몽파르나스 거리를 왔가 갔다 하는 것 같아”라고 적었다.
뒤샹이 그같이 적은 까닭은 만 레이와 함께 몽파르나스에서 마스덴 하틀리, 찰스 데머스, 그리고 헨리 맥브라이드를 만났고, 퀸도 만났기 때문이다.

퀸은 퓌토로 가서 자크에게 레이몽의 <말>을 청동으로 뜰 것을 의뢰했다.
로세는 퀸을 위해 미술품을 구입하는 일을 했는데, 3년 동안 그 일을 하면서 쇠라의 <서커스>와 루소의 <잠자는 집시>도 구입했다.
퀸은 1918년에 암수술을 받은 후 최고의 그림들만 수집하려고 했다.
퀸은 말년을 유감없이 살기 바랐다.
그는 마티스, 피카소, 새티, 브랑쿠시를 만났고, 브랑쿠시에게는 최신 골프 클럽을 선물로 주기도 했다.
브랑쿠시는 그 골프 클럽을 한동안 화실 벽에 잘 보이도록 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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