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의 몬테카를로 차용증서

그해 가을 체스 시합에 출전하면서 뒤샹은 여가가 생길 때 기본 재정문서 <몬테카를로 차용증서>를 제작했는데 레디 메이드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조작이 심했다.
뒤샹은 면도할 때 사용하는 비누 거품을 얼굴과 머리에 잔뜩 바르고는 머리카락을 양쪽으로 난 뿔처럼 만들어 만 레이에게 사진을 찍게 하여 차용증서에 삽입했다.
뒤샹은 자신의 사진을 도박장에서 사용하는 회전하는 행운의 바퀴 중앙에 붙였다.
배경에는 ‘모기 가정의 반주식moustiques domestiques demistock’이라는 그의 말장난이 연거퍼 적혀 있었다.
그는 <몬테카를로 차용증서>를 30장 프린트하고 모두 하단에 ‘뒤샹과 로즈 셀라비’라고 서명한 후 한 장의 가격이 500프랑이라고 했다.
<몬테카를로 차용증서> 뒤에는 뒤샹이 10만 번의 회전바퀴 실험 끝에 수학적으로 계산한 확률로 몬테카를로 도박장에서 돈을 투자할 것이고, 그렇게 해서 이익을 내게 되면 매년 이익금의 20%를 <몬테카를로 차용증서>를 구입한 사람들에게 배당하겠다는 법적 서류가 프랑스어로 적혀 있었다.

자크 두세가 차용증서를 한 장 구입했다.
아폴리네르의 애인이었던 화가 마리 로랑생 외에도 십여 명이 한 장씩 구입했다.
뒤샹은 한 장을 뉴욕의 『리틀 리뷰Little Review』의 편집자 제인 힙에게 보냈고, 제인은 다음 달 잡지에 “누구라도 미술에 관한 호기심을 투자로 해서 사업적으로 구입하기를 원한다면 여기 완전한 대작에 투자할 기회가 있다.
마르셀의 서명만으로도 투자를 위한 각 주식이 500프랑 이상의 가치는 있다”라는 말로 보도했다.
캐서린은 뒤샹의 행위가 매우 고약한 아이디어라고 판단하여 “마르셀처럼 예민한 감각을 가진 사람이 카지노 도박을 한다는 것은 심리적으로도 매우 나쁘다”고 했다.
캐서린은 뒤샹에게 <몬테카를로 차용증서>를 없었던 것으로 하고 몬테카를로에 가서 휴양만 하고 돌아오겠다고 약속한다면 5천 프랑을 줄 용의가 있다고 제의했다.
캐서린은 어머니처럼 뒤샹을 사고뭉치 아이 다루듯이 했다.

브르통도 캐서린과 마찬가지로 뒤샹의 몬테카를로 프로젝트를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매우 지성적이고 금세기 가장 고유한 정신을 소유한 뒤샹이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어떻게 그런 하찮은 일에 소비할 수 있을까?” 하고 우려했다.
브르통은 두세에게 뒤샹의 정신상태가 아마 절망적이기 때문에 그런 짓을 한 것 같다고 나름대로 분석했다.
초현실주의의 교황 브르통에게는 뒤샹이 가지고 있는 그런 식의 유머가 부족했다.
초현실주의라는 것이 원래 유머가 없고 진지하기만 한 것이 문제였으며, 뒤샹이 초현실주의 예술가들과 잘 어울리지 않은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뒤샹에게 미술은 유머와 익살이었지 전혀 진지한 것이 아니었다.
브르통이 이끄는 초현실주의의 강령은 전통으로부터 속박 받는 종교, 도덕, 가족, 그리고 고정관념에 근거한 이성주의로부터 벗어나 인생을 탈바꿈하자는 인간정신의 자유를 구가하는 운동이었다.
그들은 잠재의식의 세계를 인정하고 확대하는 데서 자유가 가능하다고 믿었으므로 비이성주의와 꿈과 즉흥적 판단을 찬양했다.
그들에게는 인생의 변화만이 목적이었는데, 이는 따지고 보면 과거 한 세기 동안 지속된 낭만주의와 다름없이 개인적인 경험과 내면적인 감성이나 느낌을 강조하는 것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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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레오나르도, 신도시를 계획하다


레오나르도와 도나토 브라만테Donato Bramante(Donato di Angelo, 1444년경~1514) 두 사람 모두 수학에 관심이 많았고 알베르티의 이론을 좋아했다.
레오나르도는 건축에 관심이 아주 많았고 40살의 브라만테는 류트를 즉흥적으로 연주하기 좋아했고 또한 음악감상을 즐겼다.
두 사람은 각기 갖고 있는 지식을 나눴으며 많은 시간을 함께 했다.
브라만테는 시에도 관심이 많아 소네트를 쓰기도 했다.
그는 같은 나라 예술가들에게 시기심을 갖지 않았고 레오나르도의 재능을 칭찬했으며 훗날 라파엘로를 바티칸에 소개했다.

레오나르도는 강둑을 따라서 정돈된 이상적인 밀라노 도시를 구상했다.
노트북을 보면 그는 도시를 5천 채의 집이 있는 마을 다섯 개(우리나라의 구처럼)로 구획하고 각 마을에 30만 명이 거주할 수 있도록 도시를 계획했다.
그는 수로에 의한 십자형의 새로운 도시를 구상하면서 수로가 물품을 운반해주는 역할을 하고, 정원에 물을 대며, 풍차칸과 수문으로 거리의 먼지를 닦아내게 했다.
그는 높고 낮은 두 지역으로 구획하면서 높은 지역에는 사람들이 통행할 수 있도록 상류층과 고상한 건물들을 건립하고 수로 가까이 있는 낮은 지역에는 야수들이 돌아다니고 물품들을 보관하며 소매상인과 기술공 그리고 일반 시민이 거주할 수 있도록 했다.
그의 프로젝트는 오늘 날의 입장에서 볼 때 지독한 엘리트주의지만 레오나르도는 가난한 사람들의 주거지역을 따로 정함으로써 "끊임없는 고난으로부터 그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고 보았다.
건물의 외관을 높이고 거리의 폭을 넓게 해서 가능한 한 많은 빛이 건물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했으며 굴뚝을 지붕보다 높게 해서 연기가 위로 흩어지게 했다.
도로를 따라 하수도를 만들어 사용한 물이 주거지역에서 흘러나가도록 했다.
노트북에는 건물 내 화장실이 넉넉해야 하고, 걸터앉는 시트를 현대화하여 회전문처럼 360도 회전해야 하며, 천장에 많은 구멍을 내 숨을 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적혀 있다.

1484년 밀라노를 강타한 전염병 페스트로 인해 레오나르도는 도시계획에 좀더 적극적이었다.
페스트는 14세기에 많은 사람들을 죽음의 도가니로 몰아넣어 유럽 인구가 크게 줄 정도였다.
병에 걸린 사람은 격리되고 사용한 옷과 침구는 사망 후 불에 태워졌다.
땅을 파고 시신을 매장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페스트로 사망한 사람을 매장할 때는 많은 돈을 요구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의 시신은 방치되었고 야수들의 시체와 같이 수일만에 썩어 악취를 풍겼으며 자치제 기관에서 구덩이를 파고 묻어야 했다.
이 병은 공기로 전염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수건에 향수를 뿌려 코를 막았다.
보카치오가 『데카메론 Decameron』에서 적은 대로 "형제가 형제를 떠나고, 삼촌이 조카를 남겨두고 떠나며, 종종 아내가 남편을 두고" 떠났듯이 최상의 방법은 모든 걸 두고 공기가 좋은 먼 곳으로 떠나는 것이다.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은 울부짖으며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검은 죽음 black death"으로 불리운 페스트는 1479년 피렌체에서도 퍼진 적이 있었지만 수주 후 가라 앉았다.
그러나 밀라노의 경우 전 지역의 사분의 일에서 2년 동안이나 지속되었고 사망자의 수는 수만 명에 이르러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죽은 셈이다.
공작은 피신했고 점성술사의 충고를 받아들여 굴이나 곧 부패할 수 있는 음식물을 먹지 않았으며, 모든 방문객들을 멀리 떨어져 만났고, 편지는 강한 향수를 뿌린 후 뜯어보았다.

레오나르도는 전염병의 위협을 방지하기 위해 도시계획을 도심과 도시 밖으로 아주 넓게 확장해서 구상했다.
그는 지도와 밀라노에 관한 책자를 참조했는데, 그만이 도시계획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일찍이 알베르티, 비트루비우스Vitruvius, 필라레테Filarete가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당대에는 브라만테와 프란체스코 디 조르조 마르티니Francesco di Giorgio Martini(1439~1501/2)가 관심을 나타냈다.
레오나르도는 도시의 크기를 옛 요새와 새로운 요새 사이인 포르타 로마나로부터 포르타 토사(현재의 포르타 비토리아)까지 확장하고 전 지역의 십분의 일에 대한 구성을 디자인했다.
그의 프로그램에서 가장 두드러진 점은 사람들이 한 지역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한 데 있다.
도심에 성벽을 쌓고 한 지역에 인구가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주거지역이 목걸이처럼 일렬로 연결되게 하는 것이다.
오늘 날의 동네와 마찬가지로 각 주거지역 내에는 집중화된 상업시설(쇼핑센터 같은)이 있고 광장이 있다.

그가 자신의 도시계획을 누구에게 보여주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노트북에는 "존귀하신 루도비코 경에게"라고 적혀 있지만 미완성의 편지이다.
그가 정녕 자신의 도시계획이 실현될 것이라고 믿었는지도 알 수 없다.
엄청난 예산이 드는 거대한 계획을 자신이 맡아서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알 수 없다.

참고로 도나토 브라만테에 관하여

건축가이면서 화가인 도나토 브라만테Donato Bramante(Donato di Angelo, 1444년경~1514)는 건축에 있어 성기 르네상스 양식의 전형적 인물이다.
초기에 회화에 헌신했지만 건축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우르비노 근처에서 태어나 우르비노의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의 궁전에서 수학했고 라벤나와 만투아를 여행했다.
처음 그가 프레스코화를 그린 것은 1477년으로 베르가모의 포데스타 궁전 외관을 장식했다.
그가 밀라노에 안주한 것은 1480년경이었으며 1481년에 현존하는 건축에 관한 디자인을 판화로 제작했다.
이 시기에 그의 첫 건축물 산타 마리아 예배당을 디자인했다.
그가 그린 현존하는 유일한 프레스코화는 밀라노의 브레라Brera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1480~5년경에 그린 무장한 군인들의 모습이다.
브라만테는 1499년 로마로 갔으며 1506년에 성 베드로 성당을 개축하기 시작했다.
그가 로마에서 화가로 활약한 기록이 없어 그림을 더 이상 그리지 않고 건축에만 전념한 듯 보인다.
바사리에 의하면 바티칸 스탄즈에 있는 라파엘로의 프레스코화 <아테네 학파 The School of Athens>에 보이는 건축적 배경을 브라만테가 디자인했다.
라파엘로는 고마움의 표시로 그를 <아테네 학파>에서 수학자 유클리드Euclid로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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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체스에 대한 뒤샹의 집념

겨울이 되자 화실이 너무 추워 뒤샹은 몇 블럭 떨러진 호텔 이스트리아로 옮겨 그곳에서 3년을 지냈다.
이 시기 만 레이는 예쁜 모델 키키와 사랑에 빠졌다. 몽파르나스에서 키키의 인기는 대단했으며 많은 예술가들이 군침을 흘렸지만, 운이 좋게도 미국인 만 레이의 차지가 되었다.
만 레이는 뒤샹이 묵고 있는 호텔 같은 층에서 키키와 동거했다.
그 싸구려 호텔은 늘 왁자지껄했는데 작가와 예술가들이 주로 묵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키키의 말로 뒤샹은 혼자 방에 있을 때가 많았고, 그의 방에 가면 테이블에 앉아 체스판을 바라보면서 골똘히 생각에 잠긴 그를 볼 수 있었다고 했다.
뒤샹은 자정이 되면 몽파르나스 블바드에 있는 커다란 카페 돔에 가서 계란요리를 주문해 먹고 한 시간가량 있다가 방으로 돌아와서는 다시 체스와 씨름했는데, 새벽 4시까지 그러기가 예사였다.
로세는 그가 이런 생활을 했으므로 섹스를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했다.

뒤샹은 1924년 봄 로세를 메리 레이놀즈에게 소개했다.
메리는 미국 여인으로 남편을 전쟁으로 잃고 1920년부터 파리에 거주하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세인트 루이스에서 1917년에 매튜 레이놀즈와 결혼했으나 남편이 징집되어 프랑스에서 복무하다가 이듬해 전사했다.
그녀에게는 친구가 많았다.
장 콕토와 브랑쿠시와 우정을 나누었으며, 잡지 『뉴욕커New Yorker』의 ‘파리로부터 편지’ 컬럼을 쓰는 작가 자넷 플랜너와는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뒤샹이 메리와 은밀히 정사를 한 것은 반 년 전부터였다.
로세는 그녀를 보자 그만 반하고 말았다.
로세는 그녀를 “아름답고 키가 크며 춤을 잘 추고 차분하며 고상하다”는 말로 표현했다.
로세는 뒤샹이 그녀의 집에 없을 때 찾아가 섹스를 했다.
로세는 뒤샹이 섹스를 하고 있는 여성들에게 추파를 던지는 고약한 버릇이 있었고, 뒤샹은 메리에게 로세가 그녀와 곧 섹스를 할 것이라고 일러주면서 “그는 나의 많은 애인들과 섹스를 했다”고 했다.
하지만 로세가 그녀와 섹스를 할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는데 뒤샹이 그녀를 매일 만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뒤샹은 메리의 집을 거의 매일 밤 찾아갔지만 틈틈히 카페 돔에서 만난 젊은 여인들과도 섹스를 했다.
로세는 그런 여인들을 “그에게 무가치한 여인들”이라고 했지만 로세도 무가치한 여인들과 섹스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뒤샹이 며칠 파리를 비운 후 돌아와 보니 자신의 여인은 동시에 로세의 여인이 되어 있었다.
하루는 로세가 지방에 있는 부모를 방문하러 가면서 뒤샹에게 “세 송이 꽃의 잔치”를 차려주었는데 그의 침대에 세 여인이 누드로 뒤샹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튿날 뒤샹은 로세에게 “세 여자가 내게 달려들었을 때 난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불행하게도 넌 그곳에 없었으므로 나를 도와줄 수 없었다”고 했다.
이 일을 메리가 알고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그녀는 로세에게 뒤샹이 자신과의 관계를 청산했다고 말했으며, 카페 돔에서 뒤샹을 만났을 때 술취한 김에 그에게 욕을 해댔다.
로세는 메리가 진정으로 뒤샹을 사랑했다면서 그녀는 그 후에도 계속해서 뒤샹을 만났고, 그가 자신을 버리지 않기만을 고대했다고 회상했다.

뒤샹은 독일로 가서 캐서린 드라이어를 만날 예정이었다.
두 사람은 바이마르에 있는 바우하우스를 방문하여 칸딘스키와 클레를 만나 뉴욕의 무명사회 전시회에 관해 의논할 예정이었다.
독일로 떠나기 전 뒤샹은 메리와 로세와 더불어 카페 돔에서 술을 마신 후 독일로 떠났는데, 그가 파리로 돌아왔을 때 메리는 로세의 여인이 되어 있었다.

뒤샹은 파리를 몇 주 떠나 체스 시합에 참여하는 일이 잦았다.
그는 국내에서의 시합뿐만 아니라 국외에서 벌어지는 시합에도 참여했으며, 성적은 썩 좋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저조하지도 않았다.
브뤼셀에서 1924년 6월에 개최된 시합에서는 4등을 차지했는데 지난 해 3등에 비하면 부진한 편이었다.
그해 여름 그는 프랑스 국가팀으로 선출되었으며, 그해 파리에서 올림픽이 개최되었다.
첫 체스 시합도 명칭이 ‘올림피아드’였다.
프랑스팀은 17개국이 참여한 가운데 경합을 벌여 7등을 차지했다.
한 달 후 프랑스 챔피언 시합이 개최되어 13명이 경합을 벌였는데, 뒤샹도 참여하여 선전했지만 11등에 그쳤다.
9월에 루엥에서 개최된 지방 챔피언 시합에서는 그가 챔피언의 영예를 차지했다.
지방신문은 뒤샹의 승리를 축하했지만 그가 예술가란 사실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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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브라만테와 우정을 나눴다


레오나르도가 밀라노에 갔을 당시 그곳에는 일류급 음악가와 시인들은 많았다.
그곳에는 훌륭한 대학이 있었는데, 파비아에 소재한 대학에는 90명의 교수들이 법학, 의학, 철학, 수학을 가르쳤다.
최초의 그리스어 책이 발간되었으며 라스카리스Lascaris의 문법이 밀라노에 소개된 건 1476년이었다.
하지만 미술 분야에는 마스터가 한 명도 없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롬바르드 양식 Lombard style'이란 혼성적 방법으로 조토와 피사넬로Pisanello의 양식에 훗날 토스카니, 베네치아, 플랑드르 예술가들의 영향이 섞인 것이다.
빈첸조 포파Vencenzo Foppa(1427년경~1515)는 레오나르도가 밀라노에 오기 전까지 유일한 주요 예술가였다.
브레스치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타계한 빈첸조는 밀라노에서 주로 활약했다.
바사리에 의하면 그는 파두아에서 수학했고 원근법에 뛰어났으며 만테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레오나르도가 밀라노에서 활약했으므로 이 도시의 롬바르드 양식에는 또 다른 변화가 생겼다.

멜로조 다 포를리Melozzo da Forli(1438~94)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로부터 수학한 도나토 브라만테가 밀라노에 있었지만 그는 회화보다는 건축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회화를 포기한 듯 했다.
바사리는 그를 새로운 브루넬레스키라는 말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초상을 보면 둥근 얼굴에 강력한 인상을 풍긴다.
레오나르도가 밀라노 공작의 주문을 받아 말 탄 사람을 청동으로 제작하고 싶어 했듯이 브라만테 역시 공작으로부터 건축을 위임받아 디자인하고 싶어 했다.
자연히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다.

도나토 브라만테
건축가이면서 화가인 도나토 브라만테Donato Bramante(Donato di Angelo, 1444년경~1514)는 건축에 있어 성기 르네상스 양식의 전형적 인물이다.
초기에 회화에 헌신했지만 건축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우르비노 근처에서 태어나 우르비노의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의 궁전에서 수학했고 라벤나와 만투아를 여행했다.
처음 그가 프레스코화를 그린 것은 1477년으로 베르가모의 포데스타 궁전 외관을 장식했다.
그가 밀라노에 안주한 것은 1480년경이었으며 1481년에 현존하는 건축에 관한 디자인을 판화로 제작했다.
이 시기에 그의 첫 건축물 산타 마리아 예배당을 디자인했다.
그가 그린 현존하는 유일한 프레스코화는 밀라노의 브레라Brera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1480~5년경에 그린 무장한 군인들의 모습이다.
브라만테는 1499년 로마로 갔으며 1506년에 성 베드로 성당을 개축하기 시작했다.
그가 로마에서 화가로 활약한 기록이 없어 그림을 더 이상 그리지 않고 건축에만 전념한 듯 보인다.
바사리에 의하면 바티칸 스탄즈에 있는 라파엘로의 프레스코화 <아테네 학파 The School of Athens>에 보이는 건축적 배경을 브라만테가 디자인했다.
라파엘로는 고마움의 표시로 그를 <아테네 학파>에서 수학자 유클리드Euclid로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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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브랑쿠시의 <공주X>, <공간의 새>, <아담과 이브>

브랑쿠시는 로댕의 영향을 받아 1906년에 대리석을 부드럽게 다듬어 사람 머리모양으로 제작하여 <잠>이란 제목을 붙였다.
다듬은 부분과 그냥 남겨둔 거친 대리석 사이에 극한 대조를 이룬 표현주의 조각이었다.
그는 나중에 같은 주제를 청동으로 제작했는데 그것이 <잠자는 뮤즈>이다.
그는 재료와의 싸움에서 승리했으며, 순화된 얼굴과 특징없는 머리의 모습을 나타냈고, 원래 비어 있는 물질의 성격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줄 알았다.
그는 “실제란 겉으로 나타나는 형태가 아니라 사물의 근원이다.
이 같은 진실에서 보면 사물의 겉모양을 모방하여 근원적인 실제를 표현한다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는 1920년에 <공주X>를 앙데팡당전에 출품했는데 남자의 성기 같은 형태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탄원서를 제출하여 경찰이 그 조각을 전시회장에서 치울 것을 명령했다.
시인 센드라와 레제가 나중에 그것을 도로 전시장에 가져다놓았지만 추잡한 예술가로 소문이 나서 그는 더 이상 파리에서 전시회를 열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돌과 쇠를 사용하여 시각적 느낌을 완전하게 묘사했는데 <공간의 새>와 <아담과 이브>에서 완벽주의가 나타났다.
<공간의 새>는 그가 1925년에 청동으로 제작한 것으로 새가 높이 나는 느낌을 상징적으로 추상화한 것이었고, <아담과 이브>는 1916년과 1921년 사이에 제작한 것으로 남자와 여자의 상징적인 모습을 토템 형태로 나무를 깎아 신비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는 <아담과 이브>를 밤나무와 참나무 그리고 석회석을 혼용하여 제작했는데 재료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갖고 독특한 감각을 지니고 있는 재료들을 적절하게 조화시켰다.
그의 조각들은 현대적 감각이 농후하면서도 고대 그리스시대 조각처럼 보였으며, 회화에서 세잔이 성취하고자 한 꽉 찬 그림에 비길 만했다.

형태를 단순하게 하고, 한 가지 유형으로 조각의 표면을 고르게 해서 형태를 순수하게 한 브랑쿠시는 나무를 깎거나 대리석과 그 밖의 돌들 그리고 청동을 유리알처럼 매끈하게 닦는 등 재료의 천연적인 특성을 현대조각에 소개했다.
그의 일대기를 쓴 아이오넬 지아누는 “브랑쿠시의 재료에 대한 선택은 조각의 내용에 따라 결정되었다.
대리석은 인생의 고유함을 숙고하게 하고, 나무는 인생의 모순되는 떠들썩한 혼란을 표현하기에 적당하다.
재료들의 조직과 특성들에 관한 그의 세밀한 지식이 그로 하여금 형태와 내용들 사이에 완전한 조화를 이룩하게 한다”고 적었다.

완벽주의자로 알려진 그를 차세대 조각가들이 존경하기 시작했다.
이사무 노구치는 그의 작업실에서 반 년 동안 수학한 후 제2의 완벽주의자가 되었고, 제3세대 조각가 리처드 세라는 그의 영향으로 제3의 완벽주의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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