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배우지 못한 사람의 박식


레오나르도가 밀라노에 도착하면서부터 쓰기 시작한 노트를 보면 주로 기계에 대한 관심이 많았으며 파비아 대학의 학식 있는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그 자신 학자가 되어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기계적인 문제에 대한 발견이 그로 하여금 방법론적으로 운동, 요소 등을 분석하게 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모든 것에 도전하며 과거 과학의 오류를 발견하고 새로운 사실을 알아냈다.
그는 아주 많은 것들이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채 있었고 수 세기 동안 잘못 해석되어 왔음을 알고 더욱 더 과학적 발견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그는 기존의 견해가 옳은지 그렇지 않은지를 실험하면서 반증을 찾아내 반대되는 의견을 제시했으며 자신의 의견에 허점이 없도록 동일한 실험을 반복하여 비판의 여지를 없앴다.
그에게는 대학에서 체계적으로 공부할 생각은 없었고 닥치는 대로 의문이 생길 때마다 관찰하고 관련 서적을 읽고 학식 있는 사람들을 찾아 가 묻곤 해서 의문의 답을 찾았다.
세계는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에게 속한다.
레오나르도는 세계를 설명하려고 노력했으며 그런 가운데 세계가 그에게 속했다.
1490년경의 레오나르도는 37살 혹은 38살로 노트북에 자신이 발견한 것들을 적고 또 적었는데, 왜래어 사전처럼 보일 정도였다.
한 권의 노트북에는 9천 자의 글자가 빼곡히 적혀 있으며 대부분 학문적 어휘이거나 외래어 혹은 새로운 어휘들이므로 보통 사람은 이해하기 어렵다.
네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에는 단어들이 알파벳순으로 아주 간략하게 정의되어 있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arduous: difficult, painful
힘드는: 어려운, 괴로운
Alpine: of the region of the Alps
알프스 인종: 알프스 산맥 지역의
archimandrite: leader of a group
수도원장: 그룹의 리더
ambition: rivalry and presumption
야망: 대항과 추정

syllogism: suspect way of talking
연역법: 의심스러운 화법
sophism: confused way of speaking
궤변: 혼란스러운 화법
schism: division
분립: 분열
stipendio: soldiersꡑ pay
봉급: 군인의 급료

레오나르도의 어휘 연결은 논리나 설명이 없는 자유로운 연결로서 일부 작가들의 연구 대상이 되었다.
그는 단어와 서술어도 많이 적었다.
그가 쓴 단어들은 일부 학자들에게 그의 잠재의식을 탐구하는 자료가 되었다.
그는 적었다.
"나는 아주 많은 모국어 단어들을 알고 있으므로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는 단어들이 부족하다고 말하기보다는 사물들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1490년대에 그는 독서를 많이 했으며 자신이 읽은 책을 노트북에 다양하게 인용하기도 했다.
그는 1497년과 1505년 두 차례에 걸쳐서 자신이 읽은 책 제목을 적어놓았는데, 170권 이상 되었다.
성서는 물론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오비드, 알베르티, 리비, 부르키엘로, 플리니,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과 수학, 수술 등 다양한 종류의 책을 읽었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서 "배우지 못한 unlettered" 사람이라고 했지만 그가 소장한 책은 당시 많은 학자들이 소장한 것들보다 많았다.
고대 과학 논문들은 필사본으로 전래되었으므로 구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아르키메데스의 『이동하는 물체들에 관한 논문 Treatise on Floating Bodies』의 경우 레오나르도가 라틴어 번역의 이 책을 구하는 데 수년이 소요되었다.
많은 고대 문헌들은 라틴어로 번역조차 되어 있지 않았다.
레오나르도는 문헌들을 읽기 위해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그의 나이 마흔이 넘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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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은 가짜 수염을 달고 

 

그해 가을 피카비아는 발레 <막간>을 위한 무대장식에 열심이었는데 안무는 장 보랭이 맡았으며, 작곡은 에릭 새티가 했다.
<막간>은 디아길레프의 위대한 라이벌 롤프 데 마레가 이끄는 파리에서 활동하는 스웨덴 발레단 수에도이스의 작품이었다.
당시 디아길레프와 데 마레는 근래의 예술가와 작곡가들과 협력하여 아방가르드 발레를 발표했다.
로베르 들로네의 가까운 친구이자 시인 브라이즈 센드라가 피카비아를 데 마레에게 소개하여 발레단과 인연을 맺게 했고, 페르낭 레제도 발레 작품 <세계의 창조the Creation of the World>를 위한 무대를 장식했다.
피카비아는 데 마레를 설득하여 젊은 필름 메이커 르네 클래어로 하여금 <막간>을 필름에 담도록 하고, 자신이 글을 삽입해 넣었다.
<막간>은 11월 27일에 공연하기로 예정되었으며, 주요 신문에 데 마레와 피카비아의 글이 실렸다.
피카비아는 관객들에게 공연을 보러올 때 진한 선글라스와 귀마개를 가져오라고 충고하면서 다다주의자들은 공연장에 와서 “새티는 꺼져라!”, “피카비아는 꺼져라!”라고 외치도록 주문했다.

11월 27일 샹젤리제 극장에는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입구에 毒럭U이란 팻말이 붙여진 것을 보았다.
毒럭U이란 극장이 문을 닫았다는 뜻도 되었다.
사람들은 피카비아가 자기들을 골탕 먹이려고 작정하고 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극장 건너편 술집에서 피카비아는 뒤샹과 만 레이와 함께 극장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내 말이 방송되었다.
그것은 피카비아의 장난이 아니라 주요 댄서 장 보랭이 갑자기 병이 나 공연이 취소된 것이었다.
일주일 후 <막간>이 공연되었을 때 평론가들은 처음부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무대 뒤의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관객들의 눈을 부시게 한 설치가 마음에 영 안든 것은 물론이고 소방수가 연신 양동이에 물을 담아와 무대에 퍼붓는 것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또한 발레리나 한 사람이 음악이 없을 때만 춤을 추더니 음악이 나오면 오히려 춤추기를 중단하는 것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관객과 평론가들은 모두 막간에 상영된 영화 <막간>이 훌륭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르네 클래어는 “프란시스 피카비아가 주문한 대로 하느라고 저는 별로 할 일이 없었어요”라고 했으므로 <막간>의 성공에 대한 칭찬은 피카비아의 몫이었다.

영화의 시작은 몸에 꼭 끼는 흰옷과 미니스커트를 입은 댄서들의 이미지가 병렬되어 나타나고 그런 장면이 유리판을 깔고 아래에서 위를 향한 모습으로 소개되었다.
파리의 야경이 삽입된 후 장면은 샹젤리제 극장의 지붕으로 바뀌었다.
극장 지붕 난간 끝에서 만 레이와 뒤샹이 체스를 두고 있었고, 체스 게임이 끝날 무렵 갑자기 거센 물이 체스판의 알들을 휩쓸었다.
댄서들이 깡충깡충 뛰는 장면이 한동안 계속되었으며, 장 보랭이 좌절한 사격의 명수로 등장했다.
그러다가 엉뚱하게도 낙타가 영구차를 끄는 장례식 장면이 소개되었다.
길게 늘어선 조객들의 행렬이 영구차의 뒤를 따라 파리 시가를 걸어갔다.
조객들의 발걸음은 자꾸 빨라져 결국 관은 길바닥에 떨어져 깨지고 원기를 회복한 시체(장 보랭)는 깡충깡충 뛰며 조객들은 사라졌다.

뒤샹은 <막간>의 마지막 공연에서 무대에 등장했다.
무대에는 아내, 그녀의 정부, 정부의 아내, 경찰관, 하녀, 발레리나(장 보랭), 그리고 특별한 이유 없이 아담과 이브가 누드로 잠시 무대에 등장했으며, 이브는 아담에게 사과를 먹으라고 권했다.
이브는 러시아 미녀 브론자 펄무터로서 근래 예술가들의 모델로 인기가 있었다.
시인 르네 샤가 그때 사다리에 올라가 조명을 비추는 일을 했는데, 샤는 그날로 브론자에 반해 사랑에 빠졌고, 두 사람은 얼마 후 결혼했다.
아담은 가짜 수염을 달고 등장하여 무화과 잎으로 자신의 성기를 가렸는데 그가 바로 뒤샹이었다.
뒤샹은 “난 가짜 수염을 달고 무화과 잎을 들고 누드로 아담의 역을 맡았다.
이브는 젊은 러시아 여인 브론자였는데 완전히 누드였다.
르네 샤가 위에서 조명을 우리의 머리 위로 비추었는데 샤는 브론자에게 반해 몇 달 후 브론자와 결혼했다.
난 중매쟁이였다! … 그것은 매우 다다적이었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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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눈은 영혼의 창문이다


레오나르도는 인간이 "자연의 모든 현상들에 의한 향상을" 기억할 수는 없더라도 가능한 한 익히고 기억한다면 지식의 폭을 넓힐 수 있으며 새로운 오브제와 씨름할 때 어려움이 덜 하게 된다고 적었다.
그에게는 잠들기 전 기억한 것들을 드로잉하는 습관이 있었으며 그렇게 할 것을 화가들에게 권했다.
그는 이런 습관을 스승 베로키오로부터 익힌 것으로 짐작된다.
베로키오는 드로잉에서 탁월했고 이 점을 바사리가 지적했다.
바사리는 베로키오가 인내를 갖고 드로잉했으며 여인의 머리를 그린 것들은 매우 우아하며 이런 아름다움을 레오나르도가 평생 모방했다고 적었다.

레오나르도는 어떤 글이라도 드로잉보다 정확할 수는 없다면서 하나의 이미지는 한 권의 책과도 같다고 했다.
드로잉은 그에게 매우 중요했으며 끊임없는 훈련을 통해 생각하는 카메라와도 같았다.
그는 오브제를 자신의 거울에 반사시켜 종이에 옮겨 담았으며 망막과 종이는 일체가 되었다.
그는 아주 빠른 속도로 오브제를 재현해냈다.
그는 눈이 마음보다 실수를 덜 한다고 했으며 회화와 음악과 비교해서 "음악은 회화의 누이동생 the younger sister of painting"이라면서 소리는 오래 가지 못하므로 음악은 표현하는 순간 죽게 되고 반복을 통해 표현된다고 했다.
회화와 조각에 견주어서는 그 어떤 작품도 대리석이나 청동으로 뜬 작품보다 오래 갈 수 없고 회화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경이로운 것 miraculous thing"으로 좀더 지성적이며 열 가지 원리들 "빛, 어둠, 색, 부피, 모양, 위치, 거리, 근접, 운동, 조화"에 기초하므로 어떤 것도 재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눈을 "영혼의 창문 the window of the soul"으로 보았다.
당시 사람들은 눈에서 발하는 미립자들spezie에 의해 영상이 생기는 것으로 이해했지만 레오나르도는 눈이 발하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고 광선을 받아들일 뿐이라고 했다.
해부학적으로 눈을 관찰한 그는 렌즈를 발견했다.
당시에는 렌즈를 "수정의 유머 crystalline humor"로 불렀다.
그는 눈이 이미지를 거꾸로 받아들인다고 생각했으며 처음으로 입체 영상의 원리, 즉 삼차원 릴리프의 지각에 관해 언급했다.
당시 사람들은 한 순간에 빛이 세상에 가득 차진다고 믿었는데, 그는 빛이 지나간다고 보고 빛의 속도에까지 관심을 기울였다.
빛이 어떻게 발산하는가에 대해 그는 오늘 날 우리가 말하는 진동을 떨림tremore이란 말로 표현했다.
프랑스 수학자 페르마Fermat(1601~65)보다 한 세기 전에 그는 이런 근본적인 법칙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 근거해서 "모든 자연적 현상들은 가장 짧은 가능한 수단에 의해 나타난다"고 적었다.
그의 이런 실험이 훗날 럼포드Rumford의 광도계photometer를 예고했다.
그는 왜 하늘이 청색인지에 관해서도 설명했으며 다음과 같이 적었다.
“공기가 우리로 하여금 보게 만드는 하늘의 색은 본래 색이 아니지만, 이 색이 빛에 의해 뚜껑처럼 덮이게 되는 강한 어둠의 불명료함 아래서 빛나는 아주 작고 인지할 수 없는 미립자 속으로 증발되는 따뜻하고 습도가 있는 공기로부터 온다.”

과학에 대한 레오나르도의 관심과 연구는 여러 분야에서 각각 조명되어야 하는데 그는 음향, 물 관련 도구와 설치, 운동, 격발장치, 힘, 무게 등에 관해서도 연구했으며 지질학, 식물학, 음성학에도 일가견을 갖고 있었다.
과학자로서의 그의 위상을 정확하게 정하는 일은 과학자들의 몫으로 남겨놓아야 할 것이다.
그는 굴절작용에도 관심을 기울였지만 삼각법trigonometry을 충분히 알지 못했으므로 굴절의 법칙을 정립하지는 못했다.
증기의 속성에 관심이 많았지만 증기기관차를 제작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또한 갈릴레오보다 한 세기 앞서 일종의 망원경을 발명한 듯하다.
그는 "달을 확대해 보기 위해 유리로 만들었다"고 적었다.
렌즈를 연결시켰지만 그것들로 망원경의 효시가 될 만한 기구를 만든 것 같지는 않다.
그렇지만 그가 고안한 것은 혁명적 천문학에 근간이 되었다.
그에게는 행성들이 태양의 주위를 공전한다는 데 의심이 없었다.
당시 레오나르도가 과학에서 거둔 결실은 매우 크다.
과거 어느 누구도 질의를 일으키지 않는 것들에 호기심을 갖고 다양한 분야에서 끊임없이 연구했으며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이런 그의 독학 태도는 놀라운 것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인용했는데 자신의 좌우명과도 같았던 말이었다.

“인간은 자신의 재능으로 무엇을 했느냐 혹은 하지 않았느냐 하는 것으로 칭찬을 받거나 책망을 받을 만하다.”

돌 두 개를 한꺼번에 연못에 던질 경우 잔잔한 물 위에 두 개의 동심원이 생길 것이며 두 개의 동심원이 서로 닿더라도 모두 부서지지 않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는 일반적인 자연현상이지만 레오나르도는 이를 관찰하여 이는 물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러 하지 않음을 발견해냈다.
이에 관해 그는 "물이 타격을 받자 갑자기 열고 닫히는 것으로 운동이라기보다는 좀더 진동에 가까운 반응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적었다.
두 개의 동심원이 부딪쳐서 부서지지 않는 이유를 그는 "물은 미분자들로 구성된 동질이고 진동이 물 자체를 움직이지 않고서도 미분자들을 전파시키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이런 원리를 파도에 적용시킨 그는 소리와 빛은 동일한 방법으로 공중을 나아간다고 했다.

자연은 그에게 실험실과도 같았다.
그는 눈을 뜨고 바라볼 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을 보게 된다고 했다.
침전으로 생긴 산에서 조개껍질과 해초 화석을 발견하고는 바다가 한때 지상을 덮은 적이 있었다고 추론했다.
유리 볼에 물을 넣어 한 점으로 집중하는 렌즈로 사용했으며, 작은 구멍을 낸 종이를 벽에 대어 광선의 운동 경로를 시위했고, 어둠 속에서 횃불을 빠르게 움직여 불의 선을 보여주었으며, 탁상에 칼을 꽂아놓고 탁상에 진동이 생기게 하여 칼이 두 개로 보이는 환영을 보여주면서 눈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오브제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함을 지적했다.
그는 류트의 줄이 진동할 때는 이중으로 보이는 것을 시위했다.
눈이 시각적 인상을 곧바로 받아들이지 못함을 지적함으로써 눈이 거울처럼 단순하게 받아들이는 기능을 할 뿐이며 빛이 빠른 속력으로 투사되고 있음을 시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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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첫 초현실주의 선언문

의대에 재학한 적이 있는 브르통은 세계대전 때 군인병원 정신과에서 복무하며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저서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
1921년 여름 그는 비엔나로 프로이트를 찾아가 자신의 판단을 전하면서 그의 의견을 직접 청취했다.
프로이트는 브르통이 말한 무의식이 의식보다 낫다는 판단에 전혀 찬성하지 않았다.
브르통과 필립 수포는 2년 동안 자동주의 작문을 진전시켜 왔는데, 자동주의 작문이란 두 사람이 어두운 방에서 무아지경을 조장한 후 생각나는 대로 글을 쓰는 것이었다.
과거에 다다주의를 추구한 예술가들은 폰태느 애비뉴 42번지에 있는 브르통의 아파트와 카페 시라노에서 정기적으로 만나 꿈과 정신적 경험에 관해 의논하면서 무의식의 세계를 의식의 세계와도 같이 신뢰하려고 했다.

초현실주의는 원래 문학운동이었기 때문에 브르통은 뒤샹의 재치있는 말장난에 감동하였다.
피에르 드 마소는 1924년에 책을 썼는데 제목이 『놀라운 책: 로즈 셀라비에 관한 반영the Wonderful Book: Reflection on Rrose Selavy』이었다.
겉표지에는 거트루드 스타인이 “나는 마르셀을 배제시키려고 노력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라고 쓴 글이 있었다.
드 마소는 서문에서 뒤샹을 가리켜 “내가 아는 가장 위대한 천재”라고 적었다.
서문 다음에는 12페이지가 빈 페이지로 계속되었고, 다만 각 페이지 위에 달month만 표기되어 있었다. 책의 뒷커버에는 뒤샹의 어록 15가지를 실었는데 ‘질식시키는 이방인들Etrangler l'etranger’, ‘그날의 여인은 그날의 우편물을 희롱할 것이다Daily lady cherche demeles avec Daily Mail’, 영어로 된 ‘내 조카딸이 차가운 이유는 내 무릎이 차기 때문이다My niece is cold because my knees are cold’ 등이었다.
드 마소의 저서는 사람들의 인생을 초현실주의로 바꾸어 놓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브르통은 1924년 10월에 惇?초현실주의 선언문First Surrealist Manifesto藍?발표하면서 초현실주의가 공식적으로 출범했음을 고지했다.
피카비아는 파리에서 계속 발행하는 잡지 『391』에 “초현실주의는 다다의 형편없는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
앙드레 브르통은 혁명가가 아니라 야심가일 뿐이다”라는 말로 브르통을 공격했다.
이 시기에 피카비아는 기계주의 드로잉을 중단하고 사물의 형태를 묘사하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피카비아는 계속해서 다다주의자로 행세했다.
그는 『391』에 적었다.

“미술은 날조하는 것이 아니다.
미술은 단순하면서 드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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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개성과 특징을 중시했다


레오나르도는 "우리의 모든 지식은 우리가 느끼는 것으로부터 나아간다"고 적었는데 감각, 즉 분별하고 판단하며 반응하는 것을 통해 우리가 세상을 경험하게 됨을 지적한 말이다.
그는 이런 것들이 지식과 지혜의 근본임을 알았으며 지식과 지혜가 있으면 다가올 불행에 예방할 수도 대항할 수 있다고 보았다.
운동을 통해 건강한 몸을 가질 수 있듯이 감각을 훈련시키면 관망의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전체를 부분으로 나눠서 보는 것이 우선적으로 필요하고 "보는 것이 가장 신속한 감각적 운동들 가운데 하나로서 무한한 형상들을 상상하게 하지만 한 번에 한 오브제를 바라보게 된다"고 했다.
그는 적었다.
"사물의 형상에 관한 지식을 얻고자 한다면 세부적인 것에서 시작해야 하며 오로지 한 부분으로부터 그 다음 부분으로 나아가면서 이해할 때 전체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현존하는 드로잉들을 보면 그는 자신이 말한 대로 한 부분에 관해 깊이 연구했음을 알 수 있는데, 얼굴의 각 부분을 세밀히 관찰하는 가운데 코의 경우 한 장의 종이에 곧은 코, 주먹코, 옴폭한 코, 돌출한 코, 굽은 코, 보통 코, 사자코, 둥근 코, 뾰족한 코 등 열 가지 다른 형상들로 묘사하기도 했다.
그는 정면에서 바라본 얼굴을 열두 가지 형상으로 습작하기도 했으며 입술, 눈썹, 이마 등을 세밀하게 관찰함으로써 얼굴 전체에 대한 이해를 증폭시켰다.
그는 사람의 전신, 식물, 온갖 종류의 동물들도 이런 식으로 관찰하면서 오브제의 폭을 넓혀나갔다.

레오나르도는 알베르티의 영향을 받았지만 자연으로부터 가장 아름다운 것만을 추려내는 알베르티의 선택적 이론에는 동조하지 않았다.
그는 자연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모사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어떤 종류의 오브제들을 모사 대상에서 제외시키는 임의적인 한계 설정에는 반대했다.
논문을 보면 그는 미에 대해 어떠한 차등도 두지 않았고 모든 자연물의 미에 관해 언급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모든 자연이 동등하게 아름답다고 여긴 건 아니더라도 모든 자연을 화가는 동등하게 모방해야 한다고 했다.
화가와 시인 모두 "인체의 아름다움과 추함"을 묘사하는데, 추함이 아름다움과 대조를 이루는 가운데 각각 강렬하게 부상된다고 했다.
대조는 그에게 매우 중요한 개념이었고 아름다운 것보다는 개성적이고 특징을 지닌 것에 관심을 기울였다.

레오나르도는 오브제를 실재처럼 개성적이고 생동감 있게 묘사한다면 절대적인 조화의 표준에 부합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인물의 경우 다양성에 집착하면서 적었다.
"사람은 뚱뚱하고 작은 체격이든, 크고 마른 체격이든, 또는 그 중간이든 비례가 잘 맞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다양성을 포착하지 못하는 사람은 인물상들을 늘 한 모델의 형으로 그려놓음으로써 한 형제인양 보이게 한다. 이는 심히 비난받을 일이다."

다양성에 집착한 레오나르도의 개별적 묘사는 당시 화가들의 규범이 되었으며 수년 뒤 뒤러Albrecht Durer(1471~1528)가 이런 식으로 각 부위에 대한 관찰에 전념했다.
뒤러는 격자가 그려진 유리를 사용하여 더욱 더 과학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레오나르도는 도구를 사용하여 드로잉하는 것을 비난하면서 "그런 도구를 사용하는 사람은 도구 없이는 할 수 없게 되고 스스로 생각하지 않게 만들기 때문에 이런 나태는 정신을 파괴한다"고 했다.
그렇지만 드로잉이 바르게 그려졌는지 알기 위해 도구를 사용하는 것은 타당하다고 보았다.
그는 "도구가 없는 가운데 오브제를 드로잉하라"고 권하면서 적었다.
"그렇게 드로잉하게 되면 마음으로 오브제를 알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게 될 것이다. 그런 다음 기억을 더듬어서 원근법에 맞게 그려라. 그렇게 그린 것이 오브제를 보고 그린 것에 합당하지 않을 경우 어디에 실수가 있었는지 알게 될 터인데 다시는 동일한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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