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의 브루클린 뮤지엄 전시회


뒤샹은 모처럼 뉴욕으로 와서 우드, 패츠 부부, 스테타이머 자매, 캐서린, 그리고 옛 친구들과 해후했다.
이 시기 캐서린은 대규모로 국제 현대미술 전시회를 기획하여 브루클린 뮤지엄에서 11월에 유치하기로 했다.
캐서린은 전시회를 통해 약 300점을 소개하려고 했으며, 작품을 수집하는 일을 뒤샹이 도왔다.
뒤샹은 바우하우스에도 갔고, 캐서린을 데리고 파리에 있는 예술가들의 작업실을 방문하기도 했다.
피카소는 뒤샹의 연락을 받고서도 회답하지 않았다.
캐서린은 다른 사람들을 통해 그와 함께 피카소를 만났다.
전시회는 11월 19일에 개최되었는데 1913년의 아모리 쇼 이래 가장 커다란 규모의 전시회였으며, 뒤샹의 <큰 유리>도 전시회에 포함되었다.
스티글리츠가 뮤지엄에서 기획한 강의를 통해 <큰 유리>가 전시회에서뿐만 아니라 이 시대의 가장 훌륭한 작품이라고 주장했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전시회가 끝나고 캐서린은 운반상의 문제로 <큰 유리>를 뮤지엄 창고에 보관하도록 요청했다.

브루머 화랑에서 열린 브랑쿠시의 전시회는 성공적이었다.
세관에 억류된 작품들은 브랑쿠시의 승소로 세금을 내지 않고 돌려받았지만 그때는 2년이나 지난 1928년 11월 26일의 일이었다.
뒤샹과 로세가 구입한 퀸이 소장한 6점이 7,100달러에 팔렸는데 그 가격은 퀸이 지불한 것보다는 적었지만 뒤샹과 로세가 지불한 금액에 비하면 충분한 이윤을 남겼다.
브랑쿠시는 전시회를 열고 이내 파리로 돌아갔으며, 뒤샹은 뉴욕에 남아 있다가 전시회가 끝난 12월에 남은 작품들을 시카고로 운반하여 아트스 클럽에서 한 달 동안 전시회를 열었다.
시카고 『이브닝 포스트』의 평론가 불리엣은 브랑쿠시의 작품에 관해 뒤샹과 인터뷰했다.
뒤샹은 1927년 1월 뉴욕으로 돌아왔는데 그때 퀸의 소장품들에 대한 두 번째 경매가 있었다.
그는 피카소의 드로잉 2점과 드랭의 드로잉 1점 그리고 형 레이몽이 플래스터로 제작한 <고양이>를 구입했다.
뒤샹은 퀸이 소장한 형의 조각 19점을 경매가 있기 전 미리 구입하고 싶었지만 돈이 모자라 구입하지 못했다.

뒤샹은 팔리지 않은 브랑쿠시의 조각을 가지고 2월 늦게 파리로 돌아왔다.
그는 돌아오는 배에서 젊은 줄리앙 레비와 이야기하느라 지루한 줄 모르고 여행을 마쳤다.
레비는 브루머 화랑에서 자신을 뒤샹에게 소개했다.
영화에 관심이 많은 레비는 현대미술에 대한 이해가 생기면서 미술 전반에 걸친 관심이 더욱 생겼다고 했다.
레비는 부유한 부동산업자 아버지를 설득하여 브랑쿠시의 대리석으로 제작된 <공간의 새>를 전시회에서 구입했다.
레비는 그 후 뉴욕에 화랑을 열고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작품을 주로 취급하는 유명한 딜러가 되었다.
레비는 자서전에서 “뒤샹과 여행하면서 우리는 라운지에 앉아 … 담배를 피우고, 맥주를 마셨으며, 그는 체스에 관해 열심히 말했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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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기를란다요의 제자가 된 미켈란젤로


미켈란젤로 부오나르로티Michelangelo Buonarroti는 1475년 3월 6일 월요일 해뜨기 네 시간 전 토스카니 사람들의 마을 카프레세Caprese로 불리운 아레조Arezzo 근처 작은 언덕이 있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레조에서 북쪽으로 48km 가량 떨어진 작은 마을 아레조의 현재 공식 명칭은 카프레세 미켈란젤로이다.
미켈란젤로를 기리기 위해 마을 명칭 뒤에 그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가 태어날 무렵 아버지 로도비코Ludovico di Leonardo Buonarroti Simoni는 피렌체의 공무원으로 작은 도시 카프레세의 시장podesta이었다.
미켈란젤로는 둘째 아들이었고 첫째 아들 레오나르도는 도미니크회 수사가 되었는데, 가족에게 큰 실망을 안겨준 것 같다.
세째 아들은 부오나르로토Buonarroto로 불과 두 달 동안이었지만 시의원이 된 적이 있다.

로도비코는 6개월의 시장직을 마친 후 가족을 데리고 피렌체로 돌아와 시가 내려다보이는 산타 크로체 근처 작은 마을 세티냐노에 크지도 작지도 않은 농장을 경영했다.
그때 미켈란젤로는 태어난 지 한 달 되던 때였다.
부오나르로티 집안은 부유했으므로 피렌체에 저택을 갖고 있었고 시외에도 집이 있어 미켈란젤로는 두 곳에서 성장했다.
어머니 프란체스카Francesca Neri di Miniato del Sera는 그가 6살 때인 1481년에 타계했다.
어머니는 피렌체로 돌아와 타계하기 전까지 아들을 셋 더 낳았다.
아버지는 피렌체로 돌아온 후 아무 일도 안 하다가 미켈란젤로가 10살 때인 1485년에 재혼했다.

미켈란젤로는 어려서부터 돌깍기를 좋아했지만 아버지는 그가 조각가가 되는 데 반대했다.
그때만 해도 예술가란 직업은 부유층에서 볼 때 미천하게 취급되었으며 아버지는 그가 피렌체의 은행가이면서 상인이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들이 조각에 집념을 갖고 있음을 알고는 피렌체의 유명한 프레스코 화가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문하에서 수학하게 해주는 것이 아들의 장래를 위한 것이라고 판단하고 미켈란젤로가 13살 때 그로부터 수학하게 했다.
로도비코는 미켈란젤로가 기를란다요 문하에서 3년 동안 수학할 것을 약속하는 계약서에 서명했다.
미켈란젤로는 1488년 4월 1일부터 그가 말한 "기본 미술 the prime art"인 조각에 전념할 수 있었다.
기를란다요는 크고 매우 훌륭한 작업장을 갖고 있었고 미켈란젤로는 그로부터 드로잉과 템페라 그리고 프레스코를 그리는 법을 배웠다.

당시 화가의 문하에 들어간다는 것은 스승으로부터 배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의뢰받은 작업에 참여하여 부분적 일을 맡아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기를란다요의 작업에 부분적으로 기여한 것으로 두 점을 꼽을 수 있으며 1486~90년에 프레스코화로 제작된 <그리스도의 세례 Baptism of Christ>에서 세례자 요한 옆에 무릎을 꿇은 채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과 <동정녀의 알현 Presentation of the Virgin>에서의 누드로 앉아 있는 남자와 그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으로 추정된다.
기를란다요의 작품에는 과도한 감정이 나타나 있지 않다.
그는 회화적 이야기를 가볍게 여겼는데, 산타 마리아 노벨라의 성가대석에 그린 마리아와 세례자 요한의 생애의 경우 그림은 이야기적이더라도 성서를 모르는 사람은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그는 묘사하는 화가였지 이야기꾼은 아니었다.
그는 대상 자체가 관람자에게 즐거움을 주기 바랐고 생생하게 살아 있는 얼굴의 표정으로 그림이 생기 있게 했다.
당시 피렌체에서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매우 열렬하게 입체감과 해부, 색채기술, 대기의 원근법 등을 탐구했지만 그는 일반적 수준 그 이상이 못되었다.
그는 회화에서 실험을 하거나 새로운 것을 발견한 사람이 아니었다.
자기 시대의 평균적 특성을 갖춘 그는 그것을 이용해 새로운 기념비적인 효과를 창출하려고 한 예술가였다.
그는 세부적 관찰이 섬세하고 전체를 파악하는 점에서 위대했다.
그는 탁월한 도안가이자 위대한 화가였다.

미켈란젤로는 훗날 아는 체 하기를 좋아하는 기를란다요로부터 배운 것이 별로 없었다고 투덜거렸지만 그의 작품 <도니 톤도 Doni Tondo>(1504)와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1508)에서 기를란다요의 영향이 두드러져 그가 스승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음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초기 드로잉을 보면 그가 과거 피렌체 대가들 조토Giotto(1266년경~1337)와 마사초Masaccio(1401~28)의 작품을 연구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1490년경 14살 혹은 그 이전에 그린 드로잉 두 남자의 모습은 조토가 1335년경에 그린 <사도 요한의 승천 Ascension of John Evangelist>의 왼쪽 두 사람을 모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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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과 로세는 브랑쿠시를 만났는데


경매가 있기 1년 전에 뒤샹은 로세와 함께 그렇게 될 것을 예상하고 퀸의 아파트에 있는 자신의 그림 네 점을 미리 샀다.
퀸의 아파트에는 <어린 여동생에 관하여>, <체스 게임>, <갈색 피부>, 그리고 첫 번째 그린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가 있었다.
로세가 <어린 여동생에 관하여>를 구입했고, 뒤샹은 <체스 게임>을 구입한 후 그것을 브뤼셀에 있는 미술품 수집가에게 이익을 내고 팔았다.
<갈색 피부>는 스티글리츠가 1927년의 경매를 통해 구입했으며 아렌스버그는 쾌히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를 구입했다.

뒤샹과 로세는 브랑쿠시를 만났는데 그는 경매에 자기의 조각이 너무 많이 나오게 되면 값이 폭락하는 것이 아니냐고 우려했다.
퀸이 소장한 그의 조각은 30점이나 되었는데 그것들의 값을 뒤샹과 로세는 21,700달러로 어림했다.
두 사람은 운이 좋게도 29점을 8,500달러에 구입할 수 있었는데, 철도 재벌의 딸 찰스 럼지 여사가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럼지 여사는 첫 지불금 4,500달러 가운데 1,500달러를 먼저 지불하면서 <공간의 새>와 <어린 소녀의 토르소>를 가져왔으며, 나머지 4천 달러는 뒤샹과 로세가 6개월 안에 지불하기로 했다.
세 사람이 29점을 나눠 가졌다.

뉴욕의 미술품 딜러 조셉 브루머가 브랑쿠시의 작품들을 팔겠다면서 1926년 가을에 자신의 화랑에서 그를 위한 전시회를 개최하겠다고 했다.
브랑쿠시는 작품 일부를 가지고 9월에 미국으로 왔고, 뒤샹이 그의 작업실에 있던 20점을 직접 배에 싣고 뉴욕으로 왔다.
뒤샹이 항구에 도착한 것은 10월 2일이었다. 그런데 세관원이 상자를 열어보고는 미술품이 아니라며 세금을 물어야 한다고 했다.
미술품은 면세인데 세관원은 그것들을 미술품들로 간주하지 않았다.
뒤샹이 도착하기 전에도 사진작가 에드워드 스타이첸이 브랑쿠시로부터 직접 <공간의 새>를 구입해 가져왔는데, 세관원이 보더니 매끈한 청동임을 알고는 스타이첸이 기록한 가격 600달러의 40%에 해당하는 세금을 내라고 요구했다.
뒤샹의 짐을 조사한 세관원은 아마추어 조각가였는데, 브랑쿠시의 작품을 보더니 조각이라고 할 수 없는 상품에 불과하다면서 일방적으로 세금을 부과했다.
세금을 내지 않는 방법으로 세관원은 전시회는 허락하지만 나중에 그것들을 도로 파리로 가져가야 하고, 만일 미국 내에서 팔게 되면 구입한 사람은 가격의 40%를 세금으로 물어야 한다고 했다.
뒤샹은 브랑쿠시를 아는 필라델피아의 변호사 모리스 스파이서에게 법적 처리를 의뢰했다.

뒤샹이 미술품 딜러로 활동하자 그를 아끼는 사람들은 왜 그가 그런 짓을 하는지 납득할 수 없었다. 스티글리츠가 뒤샹의 전업을 가장 아쉬워했다.

카반느가 뒤샹에게 물었다.

카반느: 선생님은 새로운 일을 발견했는데 사람들은 전혀 예상치 못했습니다.
미술과 거리를 두겠다던 당신이 그림을 사고팔고 했으니까요.

뒤샹: 피카비아의 그림이었지.
주로 호텔 드루오에서 있었던 그의 그림들에 대한 경매에 내가 도운 것이지.
허구적인 경매였네.
피카비아가 경매를 통해 그의 그림을 팔 수는 없다고 하였기 때문이었어.
좋지 않은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느라고 그랬던 거야.
그것은 내게 아주 유쾌한 경험이었지.
피카비아에게는 매우 중요했는데, 그때만 해도 어느 누구도 그의 그림을 사람들에게 소개하거나 그의 그림을 열심히 팔려고 하지 않았거든.
난 그때 몇 점 샀는데 그 이상은 기억나지 않는군 …

카반느: 선생님은 당신의 작품을 도로 사서 아렌스버그에게 팔았다는데 …

뒤샹: 뉴욕에서 있었던 퀸 경매에서였네.
퀸은 1925년에 타계했고, 그가 소장한 것들이 경매에 부쳐졌지.
그때 난 브랑쿠시의 작품들도 샀네.

카반느: 상업적인 행위가 선생님 자신에게 모순되는 일이라고 생각지 않았습니까?

뒤샹: 아냐. 사람이 살고 봐야지.
난 돈이 필요해서 그렇게 한 거야.
사람이 먹고 살려면 무슨 짓이고 해야지.
먹는 것, 늘 먹는 것과 그림을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것은 별개의 문제일세.
하나가 다른 하나를 무시하지 않은 상태에서 두 가지가 동시에 발생하는 것이지.
당시 나는 그림을 파는 일에 주력하지는 않았네.
난 브루머 화랑에 나온 퀸의 소장품들 중 내 그림 한 점을 샀고, 그것을 1년인가 2년 후에 캐나다로부터 온 사람에게 팔았네.
매우 유쾌하더군.
쉽게 팔 수 있었으니 말이야.

카반느: 이 시기에 아렌스버그가 선생님의 작품들을 모아 필라델피아 뮤지엄에 주려고 결심했으며, 선생님이 그를 도왔습니다.

뒤샹: 그래, 맞아.

카반느: 본질적으로 선생님이 선생님 자신의 주가를 올리려고 그런 방법을 사용한 것은 아니었습니까?

뒤샹: 아냐, 아냐, 전혀 그렇지 않아.

카반느: 최소한 선생님은 사람들이 관람할 수 있도록 선생님의 작품들이 한 곳에 있기를 바라지 않았던가요?

뒤샹: 그건 맞아.
난 내가 만든 것들에 애착이 있었고, 그런 애착이 이런 형태로 나타나기를 원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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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화가의 정신은 신의 정신적 이미지로 변형되어야 한다

레오나르도는 책을 읽다가 흥미를 끄는 단어들을 적었고 매우 진지한 태도로 독서하면서 자신이 상상하는 이미지를 그리기도 했다.
그는 로베르토 발투리오Roberto Valturio가 1450년에 써서 1472년에 출간한 군사학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복잡한 무기들의 기술적 명칭들을 노트북에 적었으며 목판화의 도판을 좀더 구체적으로 드로잉했다.
그가 책에서 보고 모사한 무기들은 책에 기술된 것보다 개량되었거나 레오나르도 자신이 개조한 것들이다.
그는 독서를 바탕으로 좀더 새로운 유형의 디자인을 했고 스케치들을 밀라노 무기제조업자들에게 팔았다.
이런 일은 당시 보통이었는데, 발투리오 자신도 "시에나의 아르키메데스"로 불리운 타콜라Taccola, 독일인 콘라드 케이서Konrad Keyser, 4세기의 이탈리아 작가 베제티우스Vegetius로부터 아이디어를 빌려왔다.
레오나르도가 디자인한 비행접시처럼 생긴 놀라운 습격용 물체는 바퀴가 네 개 달렸으며 크랭크축으로 방향을 바꾸는데 이는 과학자들 특히 가이 데 비제바노Guy de Vigevano가 디자인한 바람개비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다.
그는 공격용 탈것을 삼차원으로 그렸으며 이 또한 새로운 고안이었다.

레오나르도는 기술적으로 천재였다.
그는 직물 짜는 기계를 발명했는데, 회전하고, 직물을 짜며, 대마를 꼬고, 펠트를 다듬으며, 바늘을 만들었다.
이와 같은 기계는 산업혁명을 예고했다.
그의 기계는 자동화가 되는 순간 대량생산에 들어갈 수 있어 이는 산업의 혁명이 된다.
그는 이전의 선두자들이 유용하고 즐거움을 주는 발명품들을 제작했다면서 자신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기계를 제작하기 바랐다고 했다.
그는 수차례에 걸쳐 자신의 기록을 정리해 책으로 출간하고 싶다고 했다.
"운동이 모든 삶의 원리이다"라고 한 그는 모든 물리적 현상이 4가지 힘potenze인 운동, 중량, 추진력, 충격에 의존한다고 했다.
바사리는 그가 종교에 복종하지 않는다면서 "과학적 지식을 기독교 신앙보다 우위적으로 간주했다"고 적었다.
바사리는 그의 지나친 자신감을 죄악으로 보았다.
1490년대 후반 레오나르도가 공중을 나르는 새처럼 물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사람이 나를 수 있다는 데 대해 더욱 더 진지하게 생각하자 바사리를 이를 전지전능한 신에 대한 반역으로 보았다.
화가로서의 레오나르도의 태도는 다음의 글에서 알 수 있다.
"화가는 모든 개별적인 것들과 모든 것들에 대해 마스터이다."

화가는 사랑과 더불어 영감을 주는 아름다움 것을 창조해낼 능력이 있어야 하며, 만약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괴상한 형상이나 웃게 만드는 코믹한 것이나, 혹은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들을 보기 원한다면 그런 것들도 창조해낼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화가에게는 목가적 풍경, 거대한 산, 격노한 대양뿐 아니라 자연에는 없는 신비스러운 형상과 모양들조차 창조해내는 힘이 있다고 보았다.
그는 "회화의 신성한 성격은 화가의 정신이 신의 정신적 이미지로 변형됨을 의미한다"고 적었다.
회화를 과학이라고까지 비약시킨 그는 시각세계의 딸로 묘사하면서 "자연의 손녀이자 신과도 관련이 있다"고 적었다.
그가 말한 신은 물론 카톨릭에서 말하는 신과 달랐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개념으로서의 신으로 자연의 조화 속에 내재한 신을 의미했다.
그에게 신은 곧 자연이었다.
그는 예술을 가족 관계로 보았으며 음악을 회화의 누이동생으로 묘사했고, 화염을 쇠의 어머니로 묘사했으며, 진리를 시간의 딸에 비우했다.
그는 자신을 자연 전체에 귀속시키면서 자신의 예술을 위한 일종의 계도의 나무를 상상하면서 자신을 창조자로 인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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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브랑쿠시의 작품을 구입하는 것에 관해

뒤샹의 부모가 1925년에 일주일 간격으로 타계했다.
넉 달 전 두 사람의 결혼 50주년을 기념하는 잔치가 성대하게 열렸는데, 귀가 어두운 어머니는 2월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추운 날씨에 장례식을 치르느라 아버지 외젠느는 갑자기 기운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으며, 이튿날 아파트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켜 76해의 인생을 마감했다.
외젠느는 뒤샹의 몫으로 1만 달러를 남겼다.
뒤샹의 말로는 아버지가 그동안 아들들에게 생활비로 지불한 돈을 일일이 기록했다가 유산의 몫에서 공제했으므로 여동생인 이본느와 막들렌느가 가장 많은 유산을 상속받았다고 했다.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른 후 뒤샹은 프랑스 남쪽 니스로 가서 여섯 달을 지내며 체스 시합에 출전했고, 자신이 확률로 산술한 행운의 바퀴를 돌리는 도박을 했다.
그는 에티 스테타이머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다.
“내가 작성한 통계가 내게 자신감을 주었소.
난 그런 방법으로 도박을 하려고 하오.
기계적 정신으로 기계를 대적하는 것이오.
운도 없고, 낭만적인 모험도 없소.”

그는 도박을 우연이 아닌 지성으로 승리할 수 있다고 보았다.
뒤샹은 두세에게 50프랑의 수표를 보내면서 <몬테카를로 차용증서>를 산 대가로 6개월치 이자를 보내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그때 돈을 번 모양인데 그후 다시는 이익배당금을 지불하지 못한 것으로 보아 그 후로 계속해서 돈을 잃었던 것 같다.
그러나 <몬테카를로 차용증서>는 결국 그것을 구입한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었다.
그것은 훗날 값비싼 미술품이 되었기 때문이다.

뒤샹은 체스 시합에 자주 출전했지만 이는 수입이 생기는 일이 아니었다.
그는 돈을 벌어야 했고, 궁리 끝에 미술품을 매매하는 딜러가 되기로 했다.
그는 피카비아로부터 그림 80점을 받아다 자신이 묵고 있는 호텔 이스트리아에 보관하고 카탈로그를 만들면서 서문에 글을 썼다.
그는 1926년 3월 8일에 그 그림들을 매매하기 시작했다.
두세가 와서 초기의 커다란 그림을 구입했으며, 로세가 다다시절의 기계적 양식의 수채화 여섯 점을 구입했고, 브르통이 다섯 점을 구입했다.
브르통은 그때 사적으로 미술품 매매를 하고 있었다.
뒤샹은 10%의 이익을 챙겼다.

이 일이 있은 후 뒤샹은 로세와 함께 퀸이 소장한 브랑쿠시의 작품을 구입하는 것에 관해 의논했는데, 퀸은 1924년에 타계했고 그가 수집한 것들 중에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대가들의 작품이 많았다.
뉴욕 센트럴 파크 서쪽에 있는 방이 11개 달린 그의 아파트에는 미술품들로 가득 찼다.
피카소의 작품만도 <목욕하는 사람>과 <우물가의 세 여인>을 포함해서 50점이 넘었으며, 드랭과 마티스의 작품들도 그 정도로 많았으며, 마티스의 유명한 <파란 누드>도 있었다.
그의 수집품들 중에는 전시회를 통해 한 번도 소개된 적이 없는 것들도 많았으므로 그의 아파트는 마치 보물창고 같았다.
브랑쿠시와 레이몽 뒤샹 비용의 중요한 작품들을 그가 대부분 소장했고, 세잔, 반 고흐, 고갱, 그리고 쇠라의 작품들도 여러 점 되었다.
퀸이 마지막으로 구입한 작품은 루소의 <잠자는 집시>였는데 그것은 지금 뉴욕의 모마가 자랑하는 작품들 가운데 하나다.
그는 대부분의 작품들을 파리에 거주하는 로세를 통해서 구입했다.
그래서 로세는 누구보다도 퀸의 소장품 내용과 가격에 관해 잘 알고 있었다.

퀸에게는 유산을 상속자가 없었고 유서에는 단지 세 점의 그림에 대해서만 언급되었을 뿐이다.
퀸은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이 현대미술품에 관심이 없는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퓌비 드 샤반의 그림 두 점을 그곳에 기증했고, 쇠라의 후기 대작 <서커스>는 루브르에 기증했으며, 나머지 작품들은 경매로 처분하도록 했다.
그의 소장품이 경매 처분된다는 소식은 국제 미술시장을 삽시간에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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