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만 레이는 엘시와 동거하면서


만 레이는 엘시와 동거하면서 아드리엔느에게 그리움에 가득 찬 편지를 보냈지만 그녀로부터 답장을 받지 못했다.
아드리엔느는 파리에 그냥 남아 있기로 했다.
만 레이가 그녀에게 보낸 편지는 일 년 후에 되돌아왔다.
프랑스 우체국이 제대로 가동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편지에서 그는 뉴욕에서 안주하기에 정신적으로 교란스럽다고 적었는데 뉴욕을 떠난 지 19년 만에 돌아온 그로써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나이 오십에 그는 다시 시작해야 했다.

만 레이는 친구를 통해 “반은 사람이고 반은 양의 모습을 한 가는 눈을 가진” 여인을 소개받았다.
줄리엣 브라우너로 그녀는 남은 그의 인생에 반려자가 되어주었다.
그는 줄리엣을 모델로 하여 사진을 찍고, 드로잉과 그림을 그렸다.
마샤 그래햄의 댄스단에 소속된 적이 있는 줄리엣은 날씬했고, 예술가들의 모델이었으며, 윌렘 드 쿠닝과는 한때 동거한 적이 있었다.
1920년대 후반에 뉴욕의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보헤미안 생활을 한 적이 있는 줄리엣은 헐리우드에서 친구의 소개로 만 레이와 데이트한 후 애인이 되었는데, 만 레이의 말로는 그녀를 팔에 감으면 털처럼 가볍게 느껴진다고 했다.
그는 줄리엣이 자기로 하여금 아드리엔느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있게 했다고 말했다.

만 레이는 줄리엣에게 헐리우드의 프랭클린 애비뉴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 겸 호텔에서 동거하자고 제의했다.
두 사람은 얼마 후 넓은 아파트로 옮겼는데 헐리우드의 심장부 성 조지 스트리트에 있는 높은 천장에 식당과 부엌이 따로 있는 훌륭한 곳으로, 만 레이는 “이곳보다 더 훌륭한 곳을 난 상상할 수 없었다”고 대단히 만족해하며 회상했다.
그는 아파트에 암실을 만들고 사진을 직접 인화할 수 있도록 했다.
1941년 1월 중순에는 길 건너에 있는 자동차 딜러에게 가서 신형 그래햄 페이지를 월부로 구입한 후 엘시에게 보낸 편지에 파란색의 잠수함처럼 생긴 훌륭한 자동차라고 자랑했다.
그는 줄리엣과 함께 자동차로 캘리포니아 주의 대부분 지역을 여행하면서 캘리포니아 꿈을 이루는 생활에 만족했다.
그는 늘 정장차림이었다.
전쟁 중이라서 가솔린이 귀했지만 직업사진가였기 때문에 필요한 양의 가솔린을 늘 살 수 있었다.

그는 파리에서의 생활을 늘 그리워하여 엘시에게 보낸 편지에 “캘리포니아는 아름다운 감옥소”라고 적으며, “난 이곳 생활을 좋아하지만 파리에서의 생활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일본이 1941년 12월 7일에 진주만을 폭격하면서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자 세계대전은 더 이상 대서양 건너편의 일만은 아니었다.
캘리포니아 주 주민들은 일본군대가 쳐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하고 불안해했다.
만 레이는 파리에서 그린 그림을 두 상자에 넣어두었는데 그것들이 전쟁 통에 사라지지나 않을까 몹시 염려되었다.
뒤샹은 1941년 4월 27일자로 편지를 보냈는데, 아드리엔느가 그림을 잘 보관하고 있으며, 자동차는 나치에게 빼앗기기 전에 일찌감치 그녀가 팔았다고 전해주었다.
만 레이는 캘리포니아 주에서 패션 사진가로 조금씩 성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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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나폴리 공화국

안주가의 나폴리 왕 로벨트가 1343년에 사망하자 그의 질녀 조반나가 대를 이어 옥좌에 오른 후 40년 동안 여왕으로 군림했으며 이때 나폴리 왕국은 크게 퇴보했다.
그녀가 16살 때 백부인 왕은 항가리의 안드레아 공작을 사위로 삼았다.
안드레아 공작은 처음부터 조반나가 마음에 들지 않아 밤이면 침실에 들이지 않고 문을 잠가버렸다.
이에 여왕은 매일 정부를 갈아들이며 음란한 행위를 일 삼았다.
그녀는 잘 생기고 건장한 호위병을 침실로 끌여들여 섹스를 한 후 살해하여 침실에 뚫어놓은 구멍을 통해 몰래 시신을 버렸다.

안드레아 공작은 아내의 부정을 눈감아주는 한편 시녀들과 놀아났다.
여왕은 이를 구실로 남편을 교살시켰는데 질투 때문에 죽인 것은 아닌 것 같다.
나폴리 시민들은 분노하며 여왕이 암살의 장본인임을 알면서도 공작을 살해한 범인을 색출하여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이때 여왕은 달란트의 공작 루이지와 결혼을 하고 싶어 했고 그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여왕은 하수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극형에 처하고 얼마 후 사내아이를 출생하여 교황으로 하여금 세례를 베풀게 했다.
한편 항가리의 왕 루이스는 동생 안드레아 공작의 암살을 전해 듣고 복수하기 위해 나폴리를 공격했다.
항가리 대군은 굶주린 이리떼처럼 나폴리로 몰려왔지만 여왕은 이미 도망쳐버린 후였다.
그들은 약탈을 자행하여 시민의 재난은 그칠 줄 몰랐는데 마침 페스트가 발생하여 항가리 군대는 황급히 철퇴하였다.

그동안 조반나는 달란트 공작과 결혼했으며 항가리 군대의 철퇴 소식을 듣고 남편과 같이 나폴리로 돌아왔다.
몇 해 되지 않아 달란트 공작은 아내의 정력을 감당하지 못해 죽었다.
여왕은 이 기회를 이용해 마욜카 공작을 잡는데 성공했다.
그는 미모에 양기에 가득 찬 힘 센 바람둥이 청년으로 생각되었지만 여왕의 정력을 감당치 못하고 7년 만에 죽었다.
만족을 모르는 여왕은 갱년기를 넘은 나이였지만 이번에는 부란슈비크의 후작 오토를 남편으로 맞았다.
후작은 전 남편들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여왕의 침실을 멀리 했다.
이를 두고 여왕은 정부를 얼마든지 가져도 좋다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그녀는 정부를 번번이 갈았다.
그러자 시민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음란이 나폴리의 풍조였더라도 시민들은 여왕의 잔혹성을 더이상 묵과할 수 없었다.
칼로가 1382년에 구데타를 일으켜 여왕을 교살하고 왕위에 오르자 시민들은 기쁨으로 들끓었다.

칼로가 1386년에 사망하고 그의 아들 라디스라오가 대를 이어 28년 동안 왕국을 통치했다.
그가 사망한 후에는 여동생 조반나가 여왕이 되어 통치했으며 동명의 이 여왕은 음란함을 이어받았다.
여왕에 즉위한 조반니 말카와 결혼했는데, 말카는 아내에게 통치를 맡기지 않으려고 여왕을 방에 가두고 수년 동안 포로 취급을 했다.
시민들은 여왕의 불행한 처지에 동정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그녀의 권력을 회복시켰으므로 여왕은 겨우 쇠사슬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자유로운 몸이 되자 여왕은 세르잔니라는 이름의 미남을 가까이 했으며 그는 여왕의 가장 측근으로 국사를 좌우했다.
세르잔니는 나폴리와 시치리아를 통합하려는 꿈을 갖고 시치라아 왕 아르폰소를 여왕의 양자로 삼아 왕위 계승자로 지명했으나 안주가의 반대에 봉착하자 마음을 바꿔 아라공가와의 양자 입적을 취소했다.
세르잔니가 지나치게 정치에 개입하자 중신들뿐 아니라 여왕조차 그에게 경계심을 품었으며 이윽고 조반나는 그를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1432년 8월 모든 사람이 축제에 들떴을 때 왕궁에서 그를 모살했다.
3년 후 조반나 여왕도 죽고 안주가의 레나트가 왕위에 올랐다.
이에 시치리아 왕 아르폰소는 군대를 이끌고 나폴리를 침공한 후 레나트를 쫓아내고 왕국을 손에 넣고 이탈리아 남쪽 반도와 시치리아 섬을 재통일했다.
아르폰소 이후 아라공가의 지배는 1501년까지 지속되었다.

나폴리 시민들은 안주가의 역대 왕들을 사랑했고 특히 최후의 여왕에게는 자식이 어머니를 의지하듯 친애의 정을 주었다.
아라공가는 외국인이었으므로 나폴리 시민들은 애정을 느끼지 못했으며 아르폰소 왕 자신도 외래의 정복자라는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그는 광대한 영토의 지배자로서 나폴리 왕국을 힘으로 다스리겠다는 점을 시민들로 하여금 알게 하려고 했다.
그는 과거 왕들이 본토 호족들에게 준 관직을 아라공 사람과 자기 측근들에게 주었는데, 그들은 오만하고 악습과 전제로서 주민들의 미움을 샀고 따라서 왕도 미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도 아르폰소는 신중하고 현명한 명군으로 나폴리를 호화롭고 능률적인 도시로 만들었다.
낡고 더러운 옛시가를 헐어버리고 일류 건축가를 초빙해 신시가를 건설하고 유명한 조각가와 화가들에게 장식을 맡겼다.
아르폰소 왕은 축제를 좋아했으므로 막대한 비용을 들여 나폴리 축제를 현란하게 만들었다.
그는 문화를 존중했으며 작가, 철학자, 시인, 예술가들을 비호했다.
아르폰소 왕은 정치에 능했으므로 교황청과 화해가 필요할 때는 주저 없이 화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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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만 레이는 나치가 점령한 파리를 빠져나오느라


히틀러의 군대가 1939년 9월 폴란드로 진군할 때 뒤샹은 메리와 함께 프랑스 남쪽에서 여름휴가를 즐기고 있었다.
뒤샹은 캐서린에게 보낸 편지에 “올 것이 온 것이오. 얼마나 오래 지속될까? 우리가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겠소?”라고 적었다.
두 사람은 12월 중순에 파리로 돌아왔다.
페기가 두 사람의 집에 묵으면서 뒤샹의 시간을 많이 빼앗았는데, 그녀는 6월에 런던에 개업한 화랑을 폐업했다.
페기는 화랑보다는 뮤지엄을 개관할 큰 계획을 가지고 미술사학자 허버트 리드를 고용하여 그로 하여금 현대미술에 관한 예술가와 미술품에 관한 자료들을 수집하도록 했다.
페기는 브라크, 레제, 클레, 칸딘스키, 그리, 피카비아, 글레이즈, 몬드리안, 미로, 에른스트, 탕기, 달리, 데 키리코, 마그리트, 만 레이, 반 되스부르크, 세베리니, 그리고 발라의 그림을 구입했으며, 조각으로는 브랑쿠시, 립시츠, 자코메티, 아르프, 무어, 그리고 펩스너의 것들을 구입했다.
피카소는 페기의 방문을 달가워하지 않았으며, 브랑쿠시는 그녀와 흥정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페기의 말로는 자기가 브랑쿠시와 여러 번 섹스를 했는데도 <공간의 새>를 4천 달러에 사라고 한다면서 비싼 가격이라고 투덜댔다.

독일군대가 덴마크과 노르웨이로 진군했고, 곧이어 네덜란드와 벨기에로 진군했다.
페기가 브랑쿠시의 화실에서 그와 함께 점심식사를 하면서 <공간의 새>를 구입할 때 독일군대가 파리를 향해 진군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뒤샹은 바닷가에 있는 동네 아르카총으로 갔으며, 달리와 갈라 부부 그리고 몇몇 예술가들도 이미 그곳에 거주하고 있었다.
메리가 며칠 후 그곳으로 왔고, 수잔느와 장 크로티 부부도 그곳이 안전하다고 판단해 오게 되었다.
그들은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라디오를 통해서 들었다.

만 레이는 나치가 점령한 파리를 빠져나오느라 어려움을 겪었다.
만 레이는 애인 아드리엔느 피델링과 함께 서쪽 해변가로 가려고 했지만 피난민들과 군용차들이 너무 많아 도저히 갈 수 없었다.
4주 후 그는 기차를 타고 비아리츠로 가서 그곳에서 미국인 작곡가 버질 톰슨을 만나 그와 함께 겨우 기차를 타고 리스본으로 갈 수 있었다.
리스본에는 피난민들로 가득했으며, 도시 전체가 아수라장이었다.
그는 운이 좋게도 미국으로 떠나는 배에 승선할 수 있었다.
미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다시 고향에 왔다는 느낌을 가질 수 없었다.
너무 오래 파리에서 생활했으므로 오히려 고향을 떠나 타향에 온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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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교황제도

중세의 역사는 590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의 즉위로 시작되었다.
교황 제도의 성서적 의미는 마태복음서 16장 18~19절에 근거하며 그리스도로부터 지상의 대리자로 임명을 받은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하자 훗날 교황으로 추대되면서 로마의 주교는 자연히 베드로의 뒤를 잇는 교황이 되었다.
540년 로마의 부유한 원로원 가정에서 태어난 그레고리우스는 정부의 장관급에 등용되었지만 사임하고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많은 재산을 수도원에 바치고 수도사가 되어 근엄하고 금욕주의적 생활을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참다운 종이 되기에 노력하였다.
그는 가장 위대한 교황이며 교회사에 있어 가장 저명한 인물들 중 하나이다.
카톨릭 교회의 교리, 조직, 규칙에 있어 그는 여러 면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중세 카톨릭을 말하려면 반드시 그레고리우스 1세를 알아야 한다.
그의 증조할아버지도 교황으로 펠릭스 3세Felix III(483~92)이며 교황 아가페투스 1세Agapetus I(535~36) 역시 그와 같은 혈통이다.

당시 교황청은 프랑스, 이탈리아, 북아프리카에 막대한 교황령을 갖고 있었으며 교황청이 직접 관리하여 교황청의 유지비와 로마의 식량을 공급할 수 있는 재원이었다.
그레고리우스라는 유능한 행정가로서 교직자들로 하여금 재산을 관리하게 했다.
학자로서의 그의 위상은 암브로시우스, 아우구스티누스, 제롬과 더불어 4대 학자들 중 한 사람이었으며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 계보를 따랐다.
부패한 성직매매 행위를 바로 잡고 처벌했으며 교직자들이 보수를 강요하는 것을 엄금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성 아우구스티누스와 동명이인) 등 30여 명의 수도사들을 영국에 보내 전도하게 했으며 아우구스티누스를 처음으로 칸더베리 대주교에 봉했다.
그는 겸손하여 자신을 가리켜서 "하느님의 종의 종일 뿐"이라고 했지만 당시 서방 교회로부터 갈라져 있던 동방 교회까지 지배하면서 "나는 모든 교회의 머리가 되는 사도권을 가진 교황이다"라고 했다.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에 대해 그는 교회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두 팔에 해당하므로 영적이며 국가는 세속적인 면을 담당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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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페기 구겐하임의 화랑

뒤샹이 국제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전시회가 열리던 날 런던으로 간 이유는 페기 구겐하임이 화랑을 개업하여 축하해주기 위해서였다.
미국 구리왕의 딸로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한 페기는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따라 유럽을 자주 여행했으며, 아버지가 타계하자 미국보다는 유럽에 거주하기를 원했다.
그녀에게는 오빠가 일곱 명이나 있었고, 사업이 악화될 때 아버지가 타계했으므로 그녀에게 남겨진 유산은 45만 달러였다.
물론 많은 돈이었지만 보통 사람들이 그녀를 백만장자라고 말하는 것은 제대로 알지 못하고 한 말이었다.
미술에 관심이 많은 페기는 1938년 1월 24일에 런던의 콕가 33번지에 화랑을 열고 구겐하임 주느라고 불렀다.
페기는 첫 전시회를 장 콕토를 위한 개인전으로 열면서 근래 그의 그림과 드로잉을 소개했다.

페기는 한 해 전 열정적인 기질을 가진 전 남편 로런스 배일과 함께 파리에 왔을 때 전 남편을 통해 뒤샹의 애인 메리 레이놀즈를 만났는데, 배일은 과거에 메리와 정을 통한 사이였다.
페기는 메리의 친구가 되었지만 메리보다는 오히려 뒤샹에게 관심이 많았다.
뒤샹에 관해 매우 핸섬하다는 인상을 받은 페기는 “파리의 모든 여인들이 마르셀과 섹스하기를 원했다”고 했다.
페기 자신이 뒤샹과 섹스하기를 원해 그런 식으로 말한 것 같은데, 그녀의 바람기는 뒤샹의 바람기와 거의 같은 수준이거나 그 이상이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뒤샹은 이성적으로는 페기를 멀리하면서도 미술에 관한 사업에서만큼은 도우려고 했다.
하지만 미술은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페기는 말했다.

“난 현대미술품들을 제대로 구별할 수 없었다.
마르셀이 초현실주의, 입체주의, 그리고 추상미술의 상이한 점을 내게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그는 나를 모든 예술가들에게 소개했다. 모두 그를 좋아했고, 나를 반겨주었다.
그는 늘 내게 훌륭한 충고를 해주곤 했다.
나로 하여금 현대미술의 세계에 입문하게 한 그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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