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니발과 시저 그리고 클레오파트라 
 

로마 공화국에서의 남자들의 군인 복무기간은 길었는데 16년 동안의 보병생활과 10년 동안의 기병생활을 해야 했다.
남자 모두 직업군인이나 다름 없었다.
전쟁에 임해서는 군인 5천 명이 기다란 창 모양으로 정렬한 후 전투에 임했다.
로마군은 서쪽에 있는 그리스 도시국가들과 싸우기 시작했고 2백 년 동안 서서히 인근 국가들을 점령해나갔다.
처음으로 그들은 해군을 대규모로 결성해 기원전 264~41년에 시실리와 싸웠으며 시실리를 정복한 후에는 사르디니아Sardinia와 코르시카Corsica에 총독을 두었다.

유명한 전쟁은 기원전 218~20`년에 있었다.
당시 그리스 일부 도시국가들은 로마로부터 보호받을 것을 약속받았고 카르타지나인Carthaginians이 스페인에 안주하면서 장군 하니발Hannibal이 그리스 도시국가 하나를 점령했으므로 로마와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 유명한 전쟁에서 하니발은 코끼리부대를 앞세워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격했으며, 트라시메네Trasimene와 카내Cannae에서 로마군을 기원전 217년과 216년에 섬멸했고, 이탈리아의 로마 식민지 도시국가들은 로마에 등을 돌리고 새로 부상한 영웅 하니발에게 아첨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중앙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은 하니발의 수중에 들어갔다.
하니발이 없는 동안 로마군은 카르타지Cartage와 스페인을 무차별하게 공격해 기원전 209년에 점령할 수 있었으며, 하니발의 동생은 대항했지만 기원전 207년에 로마군에 패하고 말았다.
기승이 당당해진 로마군은 아프리카로 진격했고 하니발은 그들을 자마Zama에서 맞아 싸웠는데 승리는 로마에게로 돌아갔으며 전쟁은 기원전 202년에 종료되었다.
하니발을 지지한 시실리에 대한 보복으로 로마는 그들의 주권을 빼앗았으며 시실리는 그때부터 로마에 속하게 되었다.

전쟁은 그후에도 지속되었으며 기원전 59년에 젊은 율리우스 시저Julius Caesar가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시저는 7년 동안 인근 국가들을 점령하게 되자 그의 사납고 얼음같은 냉혹한 성질은 더욱 나빠졌는데,
믿거나 말거나 전설에 의하면,
시저가 해적들에게 잡혔을 때 시저는 해적들과 함께 주사위를 던지는 놀이를 하면서 농담으로 자신이 자유로워지면 그들을 나무에 매달아 처형하겠다고 말했고, 해적들은 그의 말을 농담으로 듣고 웃어넘겼는데 시저가 나중에 자유로운 몸이 되었을 때 그는 해적들을 나무에 달아 처형했다고 한다.

시저가 가울Gaul을 점령한 후 군사령관으로 그곳에 계속 주둔하자 원로원은 그에 대한 우려를 표시하기 시작했다.
그의 행위에 반발한 사람들이 시저의 불법행위들을 고발하자 시저는 화를 내며 군대를 이끌고 루비콩Rubicon을 넘어 로마로 진격했다.
로마 공화국은 종말을 고할 처지에 이르렀으며 시저는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적들로부터 공화국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변명했다.
그때가 기원전 49년 1월이었으며 그후 오늘날까지 "루비콩을 넘었다"라는 말이 통용되기 시작했다.
이 말의 뜻은 "이제 돌이킬 수 없다"이다.

시저는 쿠데타에 성공한 후 폼페이에 충성했던 자들을 모두 쓸어버리기 위해 스페인으로 진격했으며 그는 이집트로 달아난 폼페이를 끝네 추격해 그곳에서 사살한 후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잘생긴 클레오파트라Cleopatra와 사랑에 빠졌다.
시저는 클레오파트라를 나중에 친구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빼앗겼고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의 아내가 되었다.
이들 부부는 기원전 31년에 자살하는 비운을 맞았다.
로마로 돌아온 시저는 자신에 반대하는 로마 군대를 아프리카로 가서 무찔러 없앴다.
그는 스페인에서 다시 군대를 강화하던 폼페이의 아들들을 살해했는데 이때가 기원전 45년으로 그가 루비콩을 넘은 지 4년 후의 일이었다.

시저는 절대권력을 장악했으므로 자연히 절대부패를 빚어냈는데 일인독재정치가 시작되었다.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던 천체학자가 그에게 1년을 365일로 그리고 매4년마다 하루를 보태는 달력을 소개했고 시저는 그것을 율리안 달력Julian Calendar이라고 명명한 후 유럽에 선포했다.
이것은 로마의 복잡한 전통주의 달려과 달랐으며 시저는 천체학자의 의견을 받아들여 기원전 45년 1월 1일부터 그가 제정한 달력을 사용하도록 선포했다.
15개월 후 기원전 44년 3월 15일 시저는 저승으로 떠나야 할 차비를 해야 했는데 자객들이 원로원에 있던 그를 살해했다.
자객들이 그를 살해한 동기는 매우 복잡했다.
시저의 업적에 관한 로마 시민들의 인식은 2년 동안 분분했지만 나중에 시민들은 그를 신으로 선언했다.
그후 로마인은 시저의 업적을 낭만적으로 회상하면서 전설의 주인공으로 말하기 시작했으며 그를 시저 아우구스투스Caesar Augustus라고 부르면서 새 역사가 그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믿었다.

기원후 10년경에 오닉스를 깍아 신화의 인물처럼 제작한 시저의 흉상을 보면 로마 여신들에 에워싸여 있고 왼쪽에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막 돌아오는 티베리우스Tiberius가 마차에서 내리고 있으며 하단에는 군인들이 그를 위해 트로피를 세우고 있다.

루브르 뮤지엄에 대리석으로 제작된 주바 1세Juba I의 흉상이 있는데 주바는 시적에 대적해 폼페이와 연합전선을 폈던 누미디아Numidia의 왕이었다.
시저가 폼페이를 살해하고 기원전 46년에 승리하자 주바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비운의 그의 흉상을 아들 주바 2세가 제작하도록 했는데 조각가는 주바의 얼굴을 이상적인 모습으로 묘사했다.
주바의 머리카락이 곱슬이었던지 조각가는 파마한 머리카락처럼 그의 머리를 온통 포도주 병마개처럼 만들었으며 수염을 덥수룩하게 했고 주바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심기가 편치 않은 표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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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보나르


프랑스 화가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1867~1947)는 베네치아 화파, 들라크루아, 고갱, 오딜롱 르동Odilon Redon(1840~1916) 등 위대한 색채 화가의 전통을 잇는 당대의 가장 중요한 순수 화가였다.
법학을 공부한 뒤 1888년에 파리 에콜 데 보자르와 아카데미 쥘리앙에서 수학하면서 그곳에서 만난 에두아르 뷔야르Edouard Vuillard(1868~1940)와 모리스 드니와 함께 1890년 화실을 얻어 함께 사용했다.
뷔야르는 고갱과 일본의 채색 판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평면성과 강하게 패턴화된 색면 양식을 발전시켰는데, 이를 장식적인 패널화, 무대장치, 채색 판화에 도입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로의 전환기에 그는 이미 말기 인상주의 양식으로 실내 정경을 조용하지만 미묘하며 민감하게 그리는 앵티미즘Intimisme의 대가가 되었다.
앵티미즘은 보나르와 뷔야르의 회화적 특징을 일컬은 용어로 1890년대 처음 사용되었는데, 인상주의자들이 풍경화에서 자연 세계의 색채를 정확하게 반영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데 반해 두 사람은 분위기를 표현하기 위해 종종 색채를 과장하고 왜곡시키면서 흔들림 없이 고요한 가정생활의 따듯함과 편안함을 전달하려고 했다.
뷔야르는 끝까지 본질적이 앵티미즘 양식을 고수했지만, 보나르의 작품에는 종종 앵티미즘이란 용어가 적합하지 않은 웅장함과 풍요로움이 있다.

보나르의 장식적 성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1890~1900년대였고, 이 시기에 그린 그림은 선 위주의 율동감과 장식적 특성이 돋보이는 점에서 아르누보 양식과 유사하다.
또한 그는 일본 목판화를 찬양하여 ‘일본풍 나비’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나비Nabis란 그와 폴 세뤼지에, 모리스 드니, 뷔야르 등이 결성한 그룹으로 1892~99년에 함께 그룹전을 연 단체의 명칭이다.
나비라는 명칭은 예언자라는 뜻의 히브리어에서 비롯한 것으로 색채 왜곡을 통해 종교적인 깨달음을 표현하려는 화가들의 모임이다.

보나르는 포스터 디자인에 눈을 돌린 최초의 예술가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무렵 프랑스 화단에서 보나르의 위치는 확고해졌으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그의 명성은 높아만 갔다.
그는 표현적인 장식적 회화를 그리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었으며, 그런 재능은 삽화나 무대 배경 및 여타의 장식 작업에서도 드러났다.
1915년경에는 자신의 작품에 불만을 갖고 회화의 형식적인 속성들에 더욱 심혈을 기울였다.
보나르는 본래 물감의 감각적 속성에 매혹된 색채 화가였지만 후기 작품에서는 구조적인 힘을 보여주었는데, 이런 측면은 대부분 간과되었다. 비평가 대니스 서턴은 “보나르의 작품은 붓자국과 색채가 아우러져 궁극적으로는 신비스럽게 반짝이는 효과를 내는 하나의 패턴을 창조하고자 한 그의 결심을 반영했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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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노반 문화 
 

에트루리아인은 로마로 이주한 후 원주민들의 문화를 받아들였는데 이런 문화가 볼로냐Bologna에서 발굴되었고 고고학자들은 그들의 문화를 빌라노반Villanovan이라고 부른다.
이트루리아Etruria 근처 엘바Elba에서 발굴된 쇠로 제작된 유물들을 보면 그들에게 대장업이 발달했었음을 알 수 있으며 현존하는 쇠로 제작된 무기들을 미루어 볼 때 그들이 그 지역을 무력으로 통치했을 것으로 쉽게 짐작이 된다.
루브르 뮤지엄에는 가는 유리로 된 상자 안에 쇠로 제작된 창, 칼, 방패, 그리고 팔과 다리를 보호하는 것들이 파손된 채 녹이 슨 모습으로 잔뜩 진열되어 있는데 그것들을 보면 왠 싸움박질을 그렇게도 잦게 했을까 싶다.

에트루리아인은 기원전 6세기에 티베르Tiber 강 남쪽 뚝에 교두보를 세웠는데 이 지역은 로마에 속했으며 로마는 라틴족이 살던 많은 작은 도시들 가운데 하나였다.
라틴족이 로마를 6세기 말까지 통치했는데 왕을 세웠다.
당시 많은 도시국가에서는 왕에 대적하는 햑먕이 분분했으며 그들의 마지막 왕이 기원전 509년에 쫒겨났다고 한다.
그 해가 역사적으로 정확한지는 알 수 없지만 왕이 서쪽 그리스인과 싸움박질하느라 힘이 빠진 권력누수 현상의 와중에서 혁명군들을 만나 내쫒긴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로마에서 발견된 유적들에는 에트루리아인의 것들이 남아 있음을 본다.
로마는 해상과 육로로 그리스와 교역하면서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었으며 그래서 두 문화가 병존하는 제법 진전된 국제 도시로 부상되었는데 종교적 의식과 행정적 요소에는 에트루리아인의 것들이 있었다.
루브르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는 기원전 6세기 후반에 제작된 한 쌍의 부부를 보면 남자가 오른손을 여자의 오른쪽 어깨 위에 얹은 모습인데 고대 아이오니아인의 조각을 상기하게 한다.
에트루리아인 부부를 모델로 한 조각에는 <부부의 석판 Sarcophagus of a Married Couple>(높이 1.14m 너비 1.0m)이란 팻말이 붙여져 있으며, 비스듬히 기댄 두 사람의 모습은 보통 향연에 참석한 사람들의 자세이고, 마치 기념촬영에 임한 듯한 모습이다.
두 사람이 상체를 90도로 세운 모습은 조각가가 전혀 사실주의에 입각하지 않았음을 알게 하는데 이런 사실주의에 대한 무관심은 에트루리아인의 일반적 경향이었다.

에트루리아인이 왕을 세워 로마를 100년가량 통치했는데 로마인이 그들의 마지막 왕을 퇴위시키고 기원전 510년에 공화국을 세웠다.
공화국은 450년 동안 지속되었고 정체는 영국의 의회제도와 같았으며 로마 왕국의 위세를 떨칠 군사적 준비가 이미 되어 있었으므로 로마 왕국은 그리스와 더불어서 서양 문명의 주역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로마는 일인독재 정치체제로 돌아가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고 로마글자 SPQR은 '로마인의 원로원과 국민'이란 뜻인데 이런 원로원을 둔 의회제도는 헌법처럼 준수되면서 모든 주권은 국민에게 있는 제법 민주주의 정체가 지속되었다.
로마인 모두 정치에 참여했는데 물론 로마인 모두가 로마 시민은 아니었다.
법은 시민 대의원들에 의해 제정되었고 원로원과 시민 사이에 팽팽한 대립도 있었다.
원로원은 기원전 300년경에 생겼다.

로마인은 주로 농사를 지었고 로마 글자로 돈을 페큐니아Pecunia라고 하는데 그 뜻은 '양떼 혹은 소떼'이며 소의 경우 두 마리에 해당했다.
장례문화의 경우 시신을 화장한 후 뼈를 가루로 만들어 청동으로 된 용기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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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형


김만형(1916~84)은 개성 태생으로 개성 제2공립보통학교(원정소학교), 경성제일고보(경기중학)을 다녔으며, 1934년 동경의 제국미술학교에 입학하여 5년을 계속 다녔지만 1941년에 졸업했다.
서양화과 순위 1등으로 졸업했다.
그는 제1회부터 제6회까지 재도쿄미술협회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한편 1937년부터 인물, 풍경 등을 그린 작품으로 선전에 입선하여 화단에 신예로 부상했다.
1940년과 1943년에 걸쳐 두 번의 개인전을 여는 등 제국미술학교 출신으로 1940년을 전후하여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다.
1938년작 <풍경>과 1945년작 <수국>을 제외하면 『조선미전 도록』, 『조선일보』, 『동아일보』에 실린 흑백사진 외에 남아 있는 작품이 없다.

그는 1940년 선전에 <군상>과 <썬룸에서>를 출품했으며, 그해 5월 31일자 『조선일보』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서양화 <군상>으로 특선의 영광을 차지한 김만형 씨는 개성 출생으로서 작년에 도쿄에 있는 제국미술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현재 적선정에 있는 아틀리에 속에 파묻혀 연구중에 있다. 김만형 씨는 독립전에 입선된 일이 있는데, 이번 조선미전에 특선한 것은 두 번째이다.”

윤희순은 1940년 6월 12~14일 『매일신보』에 기고한 비평의 글에서 적었다.
“김만형 씨의 <군상> <썬품에서>를 본다면 풍윤한 마티에르가 깊이가 있고, 싱싱한 생명의 끝없는 노래를 듣는 느낌을 주고 있다.
그러나 <썬룸>의 구도까지가 양풍의 건축이고, 그 인물의 의상은 조선옷이라 하더라도 그 얼굴, 포즈가 어느 곳인지 서양취를 보여준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완전히 우리들의 생활감에 썩 들어맞는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회화적 미가 회화의 요소라는 의미로 보아서 장중의 대표작으로 볼 수 있다.
과연 그러한 양풍 감각이 작자의 생활에서 발효되어 나왔다면 장래의 발전이 어찌될 것인가가 흥미 있는 것이다.”

구본웅은 1940년 7월호 『삼천리』 제134호에 기고한 ‘미전의 걸작’에서 적었다.
“… 김만형 씨 작 <군상> 외 1점, 이 양작은 이번 회화 부분에서 백미라 하겠습니다.
제작의 태도도 좋고 수법도 도度를 얻어 역域에 달한 작풍을 가히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고운 색감과 좋은 구상으로 아름다운 시를 가졌습니다.
이 작가에게 바란다면 가진 바 세계가 좁은 것을 넓힐 수 없을까 하는 점일 것입니다.”

대체로 비평가들은 김만형의 작품이 마티에르의 효과를 풍부하게 나타내지만 형태를 사실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덩어리로 보아 자유롭고 세련된 데포르마시옹을 나타내는 데 주목하고 이를 근대의 특징으로 꼽았다.  

김만형은 자신이 강조하고자 한 작품에서의 마티에르 미에 관해 1940년 7월 『인문평론』 2ㅔ2권 7호에 기고한 ‘선전우감’이라 글에서 밝혔다.
“타브로가 아름다우려면 선, 색, 구성 등 각 조건의 미를 찾을 수 있겠지만, 나는 여기서 한 가지 더 마티에르(材料)의 미를 요구하고 싶다.
즉 유화구油畵具면 유화구의, 수채화면 수채화구가 가진 독특한 특질적 미를 살려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곳서 서양 본토의 참말 유화를 볼 기회가 없고, 동경 화단의 화류를 끌어 참된 유화구의 사용법을 모르나, 옛 작품은 고사하고 혹간 현대 작가의 작품, 가령 루오나 보나르, 피카소 등의 개인화집에 의한 소품을 동경서 보더라도 그 마티에르는 주옥같이 아름답다.
그런데 선전회장에서 보는 마티에르는 전연 이런 아름다움을 보기 어렵고, 거무죽죽하게 혼탁하였거나 머리에서 비듬이 떨어지듯 부슬부슬하거나 구토를 연상시킬 만치 화면 전체가 기름으로 줄줄 흐르거나 하는 작품이 태반이다.”

김만형은 루오, 보나르, 피카소 등의 화집을 통해 마티에르의 효과를 알았는데, 회화가 재료와의 싸움이라는 사실을 터득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적 묘사보다는 물감의 시각적 효과를 통해 자신의 사고와 감정을 표현하는데 역점을 두게 된 것이다.
그는 1942년 6월 『조광』에 기고한 ‘나의 제작태도’에서 이런 점을 밝히면서 “한 장의 타브로는 단순히 자연에서 잘라낸 대상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작든 크든 그 자체로 한 세계를 이루어야 하며, 자연을 관찰한 후 자기가 무엇인가를 감수하였으면 자기 두뇌 속에서 한 번 자연을 해체한 후 그것을 재구성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를 현실주의라고 명명하면서 말했다.
“그것은 단순한 자연주의가 아니며, 더 광범위하고 융통성 있는, 즉 그 내용에는 아직까지의 미술사를 전부 감추고 있는 새로운 현실주의다.
나는 사실적 수단에 의해 추상적인 자기 내용을 표현하고 싶은 것이다.”

김만형은 ‘나의 제작태도’에서 우리에게 유화구가 수입된 지 불과 수십 년에 지나지 못해 서양인과 같이 수백 년의 오랜 체험을 가지지 못하여 그것에 대한 연구와 지식이 부족할 수밖에 없음을 지적하면서 이 분야가 개척되어야 할 무한한 처녀지임을 밝혔다.
그는 유화구가 다른 매체에 비해 독특한 미가 있음을 지적하고 비취나 백옥처럼 견고하고 영롱한 색채이며 투명색과 불투명색이 있음을 지적한 후 마티에르의 미를 살리기 위해서는 더욱 복잡하고 연마된 기술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서양화에 대한 이런 식의 이해는 다른 화가에게서 발견할 수 없는 점으로 그가 좀 더 서양화에 대한 분석과 이해에 근접했음을 알게 해준다.
그는 1940년에 서울에서 개인전을 가졌고 동경의 주요 전람회에도 출품하여 입선하는 역량을 보였다.
그의 개인전은 1940년 8월 24~28일 정우옥에서 열렸고 40여 점이 소개되었는데 김용준은 전시평을 『문장』 10월호에 ‘김만형군의 예술 - 그의 개인전을 보고’란 제목으로 발표하면서 김만형을 가리켜 “그림이 무엇인지 알고 붓을 움직이는 화가”라고 극찬했다.
김용준은 김만형의 작품이 피에르 보나르, 모리스 드니, 오귀스트 르누아르를 상기시킨다면서 인물의 표정은 엘 그레코를 연상시키지만 엘 그레코의 엄숙한 맛은 없다면서 적었다.
“그가 르누아르나 보나르 계통의 사람이라는 것은 다시 말하면 그는 철두철미 컬러리스트란 말이 된다.
그는 인상파 직계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현대미술의 필연적 진로인 인상주의와 신낭만주의의 결합함으로 타개의 길을 밟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김만형은 1943년 10월 27~30일에는 화신백화점 7층 화랑에서 제2회 개인전을 열었고 이를 매일신보가 보도했다.
해방 후 그가 급진적인 좌경색을 보이며 조선미술동맹의 핵심간부로 활약한 이면에는 동료들과 진보적 의식을 같이 했기 때문이다.
그는 1947년에 조선미술동맹 서기국장을 맡았다.
그러나 정부 수립 후 조선미술동맹이 와해되자 이쾌대, 김만형, 최재덕 등과 함께 전향했으며 그는 1949년 12월에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가 주최한 ‘민족정신앙양 전국문화인 총궐기대회’에서 정부 수립 직전에 월북한 <길진섭에게 경고함>이란 규탄문을 낭독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해 제1회 국전에 추천작가로 참여하면서 풍경화 <연봉 連峯>을 출품했다.
그러다가 공산군 남침 상황에서 그도 조선미술가동맹에서 다시금 열성을 나타내다가 월북했다.
1952년 조선미술가동맹 평안북도 지부장을 맡았고, 1958년에는 조선미술가동맹 유화분과 지도원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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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스의 지혜 
 

철학의 할아버지라고 불리우는 탈레스Thales는 천체에 관심이 많았던 인물로 그는 밤하늘의 별들을 넋을 잃고 바라보며 길을 걷다가 도랑에 빠져 동행하던 하인의 웃음거리가 된 적이 있었다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우리에게 전했다.

그가 이집트에 갔을 때 이집트 왕은 그의 지혜를 테스트해보려고 피라미드의 높이를 그날로 재어 오라고 주문했다.
탈레스는 피라미드가 보이는 들로 나가 1m 높이의 막대기를 땅에 꽂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왕과 사람들은 기이하게 생각했다.
막대기의 그림자가 막대기의 길이와 같을 때 탈레스는 일어나 피라미드 그림자의 길이를 재어 왕에게 보고했다.
왕은 그의 명석함을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탈레스는 일식을 예언하기도 했는데 근래 과학자들의 말로는 기원전 585년 그가 활동할 때 일식이 일어났을 것으로 추측한다.
과연 탈레스는 지혜로운 인물이었고 철학의 할아버지로 불리울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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