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형
김만형(1916~84)은 개성 태생으로 개성 제2공립보통학교(원정소학교), 경성제일고보(경기중학)을 다녔으며, 1934년 동경의 제국미술학교에 입학하여 5년을 계속 다녔지만 1941년에 졸업했다.
서양화과 순위 1등으로 졸업했다.
그는 제1회부터 제6회까지 재도쿄미술협회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한편 1937년부터 인물, 풍경 등을 그린 작품으로 선전에 입선하여 화단에 신예로 부상했다.
1940년과 1943년에 걸쳐 두 번의 개인전을 여는 등 제국미술학교 출신으로 1940년을 전후하여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다.
1938년작 <풍경>과 1945년작 <수국>을 제외하면 『조선미전 도록』, 『조선일보』, 『동아일보』에 실린 흑백사진 외에 남아 있는 작품이 없다.
그는 1940년 선전에 <군상>과 <썬룸에서>를 출품했으며, 그해 5월 31일자 『조선일보』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서양화 <군상>으로 특선의 영광을 차지한 김만형 씨는 개성 출생으로서 작년에 도쿄에 있는 제국미술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현재 적선정에 있는 아틀리에 속에 파묻혀 연구중에 있다. 김만형 씨는 독립전에 입선된 일이 있는데, 이번 조선미전에 특선한 것은 두 번째이다.”
윤희순은 1940년 6월 12~14일 『매일신보』에 기고한 비평의 글에서 적었다.
“김만형 씨의 <군상> <썬품에서>를 본다면 풍윤한 마티에르가 깊이가 있고, 싱싱한 생명의 끝없는 노래를 듣는 느낌을 주고 있다.
그러나 <썬룸>의 구도까지가 양풍의 건축이고, 그 인물의 의상은 조선옷이라 하더라도 그 얼굴, 포즈가 어느 곳인지 서양취를 보여준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완전히 우리들의 생활감에 썩 들어맞는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회화적 미가 회화의 요소라는 의미로 보아서 장중의 대표작으로 볼 수 있다.
과연 그러한 양풍 감각이 작자의 생활에서 발효되어 나왔다면 장래의 발전이 어찌될 것인가가 흥미 있는 것이다.”
구본웅은 1940년 7월호 『삼천리』 제134호에 기고한 ‘미전의 걸작’에서 적었다.
“… 김만형 씨 작 <군상> 외 1점, 이 양작은 이번 회화 부분에서 백미라 하겠습니다.
제작의 태도도 좋고 수법도 도度를 얻어 역域에 달한 작풍을 가히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고운 색감과 좋은 구상으로 아름다운 시를 가졌습니다.
이 작가에게 바란다면 가진 바 세계가 좁은 것을 넓힐 수 없을까 하는 점일 것입니다.”
대체로 비평가들은 김만형의 작품이 마티에르의 효과를 풍부하게 나타내지만 형태를 사실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덩어리로 보아 자유롭고 세련된 데포르마시옹을 나타내는 데 주목하고 이를 근대의 특징으로 꼽았다.
김만형은 자신이 강조하고자 한 작품에서의 마티에르 미에 관해 1940년 7월 『인문평론』 2ㅔ2권 7호에 기고한 ‘선전우감’이라 글에서 밝혔다.
“타브로가 아름다우려면 선, 색, 구성 등 각 조건의 미를 찾을 수 있겠지만, 나는 여기서 한 가지 더 마티에르(材料)의 미를 요구하고 싶다.
즉 유화구油畵具면 유화구의, 수채화면 수채화구가 가진 독특한 특질적 미를 살려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곳서 서양 본토의 참말 유화를 볼 기회가 없고, 동경 화단의 화류를 끌어 참된 유화구의 사용법을 모르나, 옛 작품은 고사하고 혹간 현대 작가의 작품, 가령 루오나 보나르, 피카소 등의 개인화집에 의한 소품을 동경서 보더라도 그 마티에르는 주옥같이 아름답다.
그런데 선전회장에서 보는 마티에르는 전연 이런 아름다움을 보기 어렵고, 거무죽죽하게 혼탁하였거나 머리에서 비듬이 떨어지듯 부슬부슬하거나 구토를 연상시킬 만치 화면 전체가 기름으로 줄줄 흐르거나 하는 작품이 태반이다.”
김만형은 루오, 보나르, 피카소 등의 화집을 통해 마티에르의 효과를 알았는데, 회화가 재료와의 싸움이라는 사실을 터득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적 묘사보다는 물감의 시각적 효과를 통해 자신의 사고와 감정을 표현하는데 역점을 두게 된 것이다.
그는 1942년 6월 『조광』에 기고한 ‘나의 제작태도’에서 이런 점을 밝히면서 “한 장의 타브로는 단순히 자연에서 잘라낸 대상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작든 크든 그 자체로 한 세계를 이루어야 하며, 자연을 관찰한 후 자기가 무엇인가를 감수하였으면 자기 두뇌 속에서 한 번 자연을 해체한 후 그것을 재구성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를 현실주의라고 명명하면서 말했다.
“그것은 단순한 자연주의가 아니며, 더 광범위하고 융통성 있는, 즉 그 내용에는 아직까지의 미술사를 전부 감추고 있는 새로운 현실주의다.
나는 사실적 수단에 의해 추상적인 자기 내용을 표현하고 싶은 것이다.”
김만형은 ‘나의 제작태도’에서 우리에게 유화구가 수입된 지 불과 수십 년에 지나지 못해 서양인과 같이 수백 년의 오랜 체험을 가지지 못하여 그것에 대한 연구와 지식이 부족할 수밖에 없음을 지적하면서 이 분야가 개척되어야 할 무한한 처녀지임을 밝혔다.
그는 유화구가 다른 매체에 비해 독특한 미가 있음을 지적하고 비취나 백옥처럼 견고하고 영롱한 색채이며 투명색과 불투명색이 있음을 지적한 후 마티에르의 미를 살리기 위해서는 더욱 복잡하고 연마된 기술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서양화에 대한 이런 식의 이해는 다른 화가에게서 발견할 수 없는 점으로 그가 좀 더 서양화에 대한 분석과 이해에 근접했음을 알게 해준다.
그는 1940년에 서울에서 개인전을 가졌고 동경의 주요 전람회에도 출품하여 입선하는 역량을 보였다.
그의 개인전은 1940년 8월 24~28일 정우옥에서 열렸고 40여 점이 소개되었는데 김용준은 전시평을 『문장』 10월호에 ‘김만형군의 예술 - 그의 개인전을 보고’란 제목으로 발표하면서 김만형을 가리켜 “그림이 무엇인지 알고 붓을 움직이는 화가”라고 극찬했다.
김용준은 김만형의 작품이 피에르 보나르, 모리스 드니, 오귀스트 르누아르를 상기시킨다면서 인물의 표정은 엘 그레코를 연상시키지만 엘 그레코의 엄숙한 맛은 없다면서 적었다.
“그가 르누아르나 보나르 계통의 사람이라는 것은 다시 말하면 그는 철두철미 컬러리스트란 말이 된다.
그는 인상파 직계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현대미술의 필연적 진로인 인상주의와 신낭만주의의 결합함으로 타개의 길을 밟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김만형은 1943년 10월 27~30일에는 화신백화점 7층 화랑에서 제2회 개인전을 열었고 이를 매일신보가 보도했다.
해방 후 그가 급진적인 좌경색을 보이며 조선미술동맹의 핵심간부로 활약한 이면에는 동료들과 진보적 의식을 같이 했기 때문이다.
그는 1947년에 조선미술동맹 서기국장을 맡았다.
그러나 정부 수립 후 조선미술동맹이 와해되자 이쾌대, 김만형, 최재덕 등과 함께 전향했으며 그는 1949년 12월에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가 주최한 ‘민족정신앙양 전국문화인 총궐기대회’에서 정부 수립 직전에 월북한 <길진섭에게 경고함>이란 규탄문을 낭독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해 제1회 국전에 추천작가로 참여하면서 풍경화 <연봉 連峯>을 출품했다.
그러다가 공산군 남침 상황에서 그도 조선미술가동맹에서 다시금 열성을 나타내다가 월북했다.
1952년 조선미술가동맹 평안북도 지부장을 맡았고, 1958년에는 조선미술가동맹 유화분과 지도원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