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 이야기 
 

이방인의 고전적 예술이 기독교 미술에 그대로 옮겨진 예를 300~325년에 대리석으로 제작한 <요나 이야기 릴리프 Relief with the Story of Jonah>에서도 볼 수 있다.
초기 기독교 미술에 구약성경의 주제가 많이 사용되었는데 이것도 그것들 중 하나이다.
요나에 관한 두 장면을 함께 묘사한 것으로 배로부터 바다 괴물에게 던져지는 장면과 괴물이 입을 벌리고 여니를 토해내는 장면이다.
벌거벗은 요나가 배 옆에 누운 모습으로 있는데 두 다리는 괴물의 입 속에 있다.
예수는 자신을 요나에 비유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기적을 보여달라고 하자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악하고 절개없는 이 세대가 기적을 요구하지만 예언자 요나의 기적밖에는 보여 줄 것이 없다.
요나가 큰 바다 괴물의 뱃속에서 삼 주야를 지냈던 것같이 사람의 아들도 땅 속에서 삼 주야를 보낼 것이다.
심판 날이 오면 니느웨Nineveh(앗수르의 수도)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은 요나의 설교만 듣고도 회개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요나보다 더 큰 사람이 있다.
심판 날이 오면 남쪽 나라의 여왕도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는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솔로몬보다 더 큰 사람이 있다.(마태복음 12:39~42)

요나
요나는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그곳 사람들의 죄악이 하늘에 사무쳤음을 외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다르싯Tarshish(스페인을 말함)으로 도망가려고 욥바Jobba로 가서 배를 탔다.
하나님은 바다에 바람을 일으키셨고 태풍을 거세게 몰아 배가 파선될 지경에 이르게 하셨다.
사공들이 변을 당한 까닭을 캐니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른 때문일 줄 알게 되었다.
요나는 자신을 바다에 던져야 바다가 잔잔해질 것이라고 말했고 사공들은 그를 바다에 던졌다.
그러자 바다가 잔잔해졌다.
요나는 큰 물고기에 삼켜져 사흘 밤낮을 고기 뱃속에 있었다.
하나님이 물고기에게 명령하여 요나를 뱉아내게 하셨다.

다시 하나님의 분부를 받고 요나는 니느웨로 갔는데 굉장히 큰 도시라서 돌아다니는데 사흘이 걸렸다.
요나는 하룻동안 돌아다니면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는 잿더미가 된다"고 외쳤다.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고 단식을 선포했으며 신분이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굵은 베옷을 입고 단식에 들어갔다.
이렇게 사람들이 회개하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내리려던 재앙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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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전에 조각부가 설치된 것은

선전에 조각부가 설치된 것은 1925년 제4회 때였고 조각활동의 주요 본거지가 되었다.
당시 조각의 활동무대는 동경의 제전(후에 문전)과 선전밖에 없었다.
김복진이 처음 출품한 것은 <나체 습작>과 남성 석고 두상 <3년 전>으로 제4회 선전을 통해 소개되었다.
<나체 습작>은 입선했고 <3년 전>으로 3등상을 수상했다.
이듬해 1926년 제5회전에는 전신나부좌상 <여 女>를 출품하여 특선을 차지했다.
원작은 현존하지 않는다.
선전도록에 나타난 조선인의 조각부 출품 작가들을 보면 소수였다.
제4회에 출품한 사람은 김복진과 전봉래 두 사람뿐이고, 제5회 김복진이 특선할 때 양희문, 장기남, 안규응이 출품했을 뿐이다.
제6회에는 구본웅이 <얼굴 습작>으로 특선했고 장기남, 양희문, 안규응이 출품했다.
제7회에는 2명, 제8회에 3명, 제9회에 4명, 제10회와 14회에는 4명이 출품했고, 제15회에 가서야 김복진을 포함하여 7명이 출품했으며, 제16회에는 특선한 김복진을 포함하여 11명이 출품했는데 선전에 가장 많은 조선인 조각가가 참여한 때이다.
특기할 점은 김경승의 활약으로 그는 제18회에 처음 출품했고 제19회에 김복진과 함께 특선했으며, 제20회와 21회에 입선, 제22회와 1944년의 마지막 전람회 제23회 때는 추천작가로 참여한 것이다.
조선인 조각가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기 시작한 것은 제19회에서 김경승과 김복진 외에도 조규봉이 특선한 때이며, 제21회에서 두 사람이 특선, 제22회에서는 김경승이 추천작가로 참여한 것 외에도 윤효중, 이국전, 조규봉 세 사람이 특선한 것이며, 재23회 마지막 선전에서는 김경승이 추천작가로 참여했고 윤효중과 조규봉이 특선에 올랐다.

선전의 최다 출품 및 입선자는 이국전과 김경승이 7회, 김복진, 김두일, 윤효중, 조규봉, 장기남이 5회, 윤승욱(1915~?)이 4회, 안규응, 임순무, 이병삼, 홍순경 등이 3회에 걸쳐 출품했다.
서양화가로 조각을 출품한 사람은 구본웅, 아병삼, 주경(1905~79), 염태진 등이다.
선전 초기에는 양희문, 장기남, 김복진, 안규응, 임순무, 문석오, 원희연 등이 활약하고 후기에는 이병삼, 김두일, 홍순경, 안영숙, 한재홍, 이국전, 장익달, 김경승, 윤승욱, 김정수, 주경, 윤효중, 조규봉, 염태진, 이응세 등이 데뷔하며 이들 가운데 해방 후에도 괄목할 만한 활동을 보인 사람은 김복진, 이국전, 김경승, 윤승욱, 윤효중, 조규봉 등이다.

이 시기의 조각의 경향에 관해 이경성은 『한국 근대미술 연구』(1982)기술했다.
“결국 이 시기의 조각은 말이 조각이지 대부분 조소彫塑이고 혹간 목조가 섞일 정도였다.
다시 말하면 김복진이 수입하였다는 서양식 조각이란 바로 이 소조塑造인 것이다.
이 점토로 빚어서 석고로 완성시키는 소조는 이 기간의 전 조각계를 매혹시킨 새로운 수법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작품 경향을 보더라도 대부분 그들이 공부한 동경미술학교의 관학적官學的 아카데미즘이 지배적이었고

그리고 주제도 대부분 습작 정도의 것으로 얼굴이나 흉상 같은 소품을 다루어 그들의 기술적 연마를 닦았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시기의 조각을 볼 때, 아직 수입과정에 있고 그것도 일본식 양풍 조각의 편중으로 소조의 새로운 방법이 주는 재미에 의해 점토와 석고를 어루만질 뿐 조각예술의 본질까지는 자각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 시기에 활약한 조각가의 특성은 지성보다는 손재주가 있는 사람들이 많다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이 곧 이 시기의 조각이 무엇을 지향하고 어느 정도의 수준에 있었는가를 짐작케 해준다.”
당시 대부분의 조각가들은 조각의 초보 단계인 두상을 점토와 석고로 제작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제5회부터 제7회까지 연속적으로 출품한 안규응의 작품은 목재로 제작한 소품들이었고, 제19회전에 출품한 윤효중의 <아침>과 제23회전에 출품한 <현명 弦鳴> 역시 재료가 목재였다.
김기진은 안규응의 작품에 대해 “중심이 없고 입체감이 없으며 조화도 없는, 목재의 선택이 유치한 이런 작품도 조선에서는 조각이라고 하며 전람회에서 당당하게 입선한다”고 혹독하게 비판했다.
제10회전에 나문규가 처음 석재로 제작한 부조를 출품했으며 제17회전에 출품한 윤승욱의 작품 모두 석조였다.
이것들 외에 선전에 출품된 작품은 거의 점토 혹은 석고로 제작되었다.
그리고 누드조각이 처음 등장한 것은 제16회전에 출품한 김복진의 <나부>와 홍순경의 <수욕 水浴>이다.
이때부터 소재가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제16회전에는 여성조각가로 안영숙이 홍일점으로 참여했으며 그녀의 <제복시대>는 여학생을 모델로 제작한 석고 흉상이었다.

해방 전 동경미술학교 조각과 출신으로 김복진 외에 문석오, 조규봉, 윤승욱, 김경승(1915~92), 김종영(1915~82), 김두일, 목조과 출신으로 윤효중이 있었다.
일본미술학교 출신으로는 김정수, 이국전 등이 있었다.
우리나라 조각가들의 작품은 거의 사실적 묘사에 바탕을 둔 두상, 누드 도는 착의의 인물상 등이었는데 이는 동경미술학교 조각과 교육과정에서 강조된 것이었다.
동경미술학교는 프랑스의 아카데미 교육제도를 모델로 했는데 이는 기술을 익히기 위해 석고조각의 모사와 인체 데생을 철저히 하는 것이었다.
김경승은 1989년 9월 『월간미술』에 기고한 ‘근대조각의 제1세대’에서 자기가 재학 당시 조각과 정원이 15명 안팎이었으며 서양화과의 지도교수제와는 달리 3명의 교수가 수업을 지도했는데, 점토와 석고를 가지고 처음에는 두상, 그 다음 반신상, 그리고 등신대로 옮겨가는 인체 모델 제작 위주였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교수들은 철저한 기본기를 익히기 위해 사실적인 기법 이외에 다른 것은 못하게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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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심판the Last Judgement 
 
선한 목자를 주제로 <최후의 심판 the Last Judgement>을 새긴 석관이 있는데 그리스도가 양과 염소를 구별하는 모습이다.
3세기 후반과 4세기 초 사이에 대리석으로 제작된 것으로 1924년에 발굴되었다.
주제는 마찬가지로 신약성경에서 온 것이지만 제작된 방법은 로마인의 것이다.
석관에 이런 장면을 조각한 것은 영생을 얻기 위해서였다.

예수는 말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떨치며 모든 천사들을 거느리고 와서 영광스러운 왕좌에 앉게 되면 모든 민족들을 앞에 불러 놓고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갈라 놓듯이 그들을 갈라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자리잡게 할 것이다.
....
그러면 임금은 "똑똑히 들어라.
여기 있는 형제들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이리하여 그들은 영원히 벌받는 곳으로 쫓겨 날 것이며,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 갈 것이다.(마태복음 25:31~)

석관 중앙에 앉아 있는 부드러운 얼굴의 예수 모습은 철학자의 복장으로 목자의 제스추어를 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오른쪽 여덟 마리 양들 중 가까이 있는 양의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고 있다.
왼쪽에는 다섯 마리의 염소가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는데 그리스도는 손을 들어 염소들을 쫓는다.
여덟 마리 양들은 온민족으로부터 의인으로 선택된 사람들로 그리스도가 염소들로부터 분류했다.
양들은 영생을 얻지만 염소들은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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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조미륵보살반가상>은 한국에서

일본 경도 광륭사에 있는 <목조미륵보살반가상>은 한국에서 간 것이다.
섹켈D. Seckel은 『극동 미술 입문 Einfubrung in die Kunst Ostasiens』(1960)에서 이 점을 시사했다.

이 초기의 일본 작품들이 한국의 양식을 어느 정도 변형했는지, 또는 그것들이 한국에서 수입된 것인지, 또는 일본에서 한국(또는 중국)의 예술가들이 만들었는지, 또는 한국(또는 중국) 예술가들에게 배운 일본인 제자들이 직접 제작했는지는 어느 경우를 막론하고 난해한 문제로 남아 있고 또 영원히 풀리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 까닭은 첫째, 반가상이 극동지역 전역에 보편화되어 있다는 사실과 둘째, 중국과 한국의 모든 원상이 거의 분실되어 실제적으로 비교해 해명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반가상이 한국에서 왔다는 것은 많은 연구가들의 의견이다.

미륵은 범어로 마이트레야Maitreya이며 무능승無能勝을 뜻하는 미래불이다.
‘원근이 무량하여 깊이를 측량할 수 없다’는 뜻이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적적하고 쓸쓸한 것이 본래의 자연’이라고 표현한다.
반가상, 석굴암 등 빼어난 조각품이 주변에 있었지만 일제시기에서 이를 우리나라 미술의 고유한 원형으로 보려는 사람이 없었다.

고유섭은 한국 불상에는 ‘어른 같은 아이’가 많다면서 한국인의 “질박質朴, 둔후鈍厚, 순진純眞이 형태의 피조跛調라는 것을 통하여 ‘적요한 유머’에 이르러 ‘어른 같은 아이’의 성격을 나타낸다”고 했다.
소박성은 그에게 있어서 ‘구수한 맛’으로 “얄성궂고 천박하고 경거망동하는 교혜巧慧로움이 아닌 것”을 뜻한다.
중국 미술에는 웅장한 건실미가 있지만 구수한 맛이 없고 한국의 미술은 양적으로는 작으나 구수하게 큰 맛이 있다는 것이다.
조요한은 고유섭의 지적에 동조하면서 일본의 일광묘日光廟나 천초관음당淺草觀音堂은 공중에 뜬 신기루와 같지만, 한국 건축은 어느 것을 보더라도 땅 속에 깊이 자리 잡고 반석처럼 서 있고, 중국의 불상은 불격佛格을 과시하려는 천상의 얼굴이나 <서산 마애삼존불>과 서산 군위의 <삼존석불>은 백제인과 신라인이 향토적인 얼굴이라고 했는데 그는 텐느의 자연환경설을 적용한 것이다.
고유섭의 우리 미술의 소박성에 동조한 조요한은 『예술철학』에서 <군수리 석조여래좌상>과 <석불두 石佛頭>는 각각 백제와 신라의 것으로 둘 다 청정무구한 동안童顔으로 한국인의 소박성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동시에 집착이 없는 불교 정신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소박하다는 것은 인위적이지 않다는 뜻이며 자연에 순응하는 것을 말한다.
김원룡은 조선의 목공품을 예로 들어 인공의 선과 면을 최소화하는 가운데 소박성을 유지했음을 『한국 미술사』에서 지적했으며, 이는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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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Ecclesia
 
성경은 교회를 하나님의 백성, 양의 우리, 경작하는 밭, 하나님께서 거처하시는 집, 성전, 우리의 어머니,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의 배필 등에 비유했다.
교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배가 있다.
배의 돛대mast는 보통 선장을 상징하지만 기독교 미술에서는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단순히 돛단배만 표시하면 '선교', '전도', '사도 바울의 선교 항해', '성 유다'를 상징하게 된다.
방주(배)와 무지개(창세기 7:8~9)는 '하나님의 약속', '인간과의 계약'을 상징한다.

카타콤(로마의 지하묘지)에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선지자들 요나, 다니엘, 노아 등이 그려져 있으며, 그리스도의 기적을 상징하는 오병이어(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도 그려져 있고, 죽음으로부터 부활한 라자로가 그려져 있다.
카타콤 예술가들은 새로운 도해iconography(아이콘은 이미지란 뜻이다)를 새로운 예술적 형태로 변형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방인의 예술이 기독교 예술로 그대로 옮겨졌음을 알 수 있다.

카타콤에는 '선한 목자 the Good Shepherd'의 모습도 있는데 인류를 사랑하는 것을 상징하는 이것은 이방인 예술로부터 받아들인 가장 널리 알려진 주제들 가운데 하나이다.
예수는 자신을 가리켜서 선한 목자라고 했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목자가 아닌 삯꾼은 양들이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가까이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도망쳐 버린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떼는 뿔뿔히 흩어져 버린다.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애 양들도 나를 안다.
이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요한복음 16: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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