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전에 조각부가 설치된 것은
선전에 조각부가 설치된 것은 1925년 제4회 때였고 조각활동의 주요 본거지가 되었다.
당시 조각의 활동무대는 동경의 제전(후에 문전)과 선전밖에 없었다.
김복진이 처음 출품한 것은 <나체 습작>과 남성 석고 두상 <3년 전>으로 제4회 선전을 통해 소개되었다.
<나체 습작>은 입선했고 <3년 전>으로 3등상을 수상했다.
이듬해 1926년 제5회전에는 전신나부좌상 <여 女>를 출품하여 특선을 차지했다.
원작은 현존하지 않는다.
선전도록에 나타난 조선인의 조각부 출품 작가들을 보면 소수였다.
제4회에 출품한 사람은 김복진과 전봉래 두 사람뿐이고, 제5회 김복진이 특선할 때 양희문, 장기남, 안규응이 출품했을 뿐이다.
제6회에는 구본웅이 <얼굴 습작>으로 특선했고 장기남, 양희문, 안규응이 출품했다.
제7회에는 2명, 제8회에 3명, 제9회에 4명, 제10회와 14회에는 4명이 출품했고, 제15회에 가서야 김복진을 포함하여 7명이 출품했으며, 제16회에는 특선한 김복진을 포함하여 11명이 출품했는데 선전에 가장 많은 조선인 조각가가 참여한 때이다.
특기할 점은 김경승의 활약으로 그는 제18회에 처음 출품했고 제19회에 김복진과 함께 특선했으며, 제20회와 21회에 입선, 제22회와 1944년의 마지막 전람회 제23회 때는 추천작가로 참여한 것이다.
조선인 조각가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기 시작한 것은 제19회에서 김경승과 김복진 외에도 조규봉이 특선한 때이며, 제21회에서 두 사람이 특선, 제22회에서는 김경승이 추천작가로 참여한 것 외에도 윤효중, 이국전, 조규봉 세 사람이 특선한 것이며, 재23회 마지막 선전에서는 김경승이 추천작가로 참여했고 윤효중과 조규봉이 특선에 올랐다.
선전의 최다 출품 및 입선자는 이국전과 김경승이 7회, 김복진, 김두일, 윤효중, 조규봉, 장기남이 5회, 윤승욱(1915~?)이 4회, 안규응, 임순무, 이병삼, 홍순경 등이 3회에 걸쳐 출품했다.
서양화가로 조각을 출품한 사람은 구본웅, 아병삼, 주경(1905~79), 염태진 등이다.
선전 초기에는 양희문, 장기남, 김복진, 안규응, 임순무, 문석오, 원희연 등이 활약하고 후기에는 이병삼, 김두일, 홍순경, 안영숙, 한재홍, 이국전, 장익달, 김경승, 윤승욱, 김정수, 주경, 윤효중, 조규봉, 염태진, 이응세 등이 데뷔하며 이들 가운데 해방 후에도 괄목할 만한 활동을 보인 사람은 김복진, 이국전, 김경승, 윤승욱, 윤효중, 조규봉 등이다.
이 시기의 조각의 경향에 관해 이경성은 『한국 근대미술 연구』(1982)기술했다.
“결국 이 시기의 조각은 말이 조각이지 대부분 조소彫塑이고 혹간 목조가 섞일 정도였다.
다시 말하면 김복진이 수입하였다는 서양식 조각이란 바로 이 소조塑造인 것이다.
이 점토로 빚어서 석고로 완성시키는 소조는 이 기간의 전 조각계를 매혹시킨 새로운 수법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작품 경향을 보더라도 대부분 그들이 공부한 동경미술학교의 관학적官學的 아카데미즘이 지배적이었고
…
그리고 주제도 대부분 습작 정도의 것으로 얼굴이나 흉상 같은 소품을 다루어 그들의 기술적 연마를 닦았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시기의 조각을 볼 때, 아직 수입과정에 있고 그것도 일본식 양풍 조각의 편중으로 소조의 새로운 방법이 주는 재미에 의해 점토와 석고를 어루만질 뿐 조각예술의 본질까지는 자각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 시기에 활약한 조각가의 특성은 지성보다는 손재주가 있는 사람들이 많다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이 곧 이 시기의 조각이 무엇을 지향하고 어느 정도의 수준에 있었는가를 짐작케 해준다.”
당시 대부분의 조각가들은 조각의 초보 단계인 두상을 점토와 석고로 제작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제5회부터 제7회까지 연속적으로 출품한 안규응의 작품은 목재로 제작한 소품들이었고, 제19회전에 출품한 윤효중의 <아침>과 제23회전에 출품한 <현명 弦鳴> 역시 재료가 목재였다.
김기진은 안규응의 작품에 대해 “중심이 없고 입체감이 없으며 조화도 없는, 목재의 선택이 유치한 이런 작품도 조선에서는 조각이라고 하며 전람회에서 당당하게 입선한다”고 혹독하게 비판했다.
제10회전에 나문규가 처음 석재로 제작한 부조를 출품했으며 제17회전에 출품한 윤승욱의 작품 모두 석조였다.
이것들 외에 선전에 출품된 작품은 거의 점토 혹은 석고로 제작되었다.
그리고 누드조각이 처음 등장한 것은 제16회전에 출품한 김복진의 <나부>와 홍순경의 <수욕 水浴>이다.
이때부터 소재가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제16회전에는 여성조각가로 안영숙이 홍일점으로 참여했으며 그녀의 <제복시대>는 여학생을 모델로 제작한 석고 흉상이었다.
해방 전 동경미술학교 조각과 출신으로 김복진 외에 문석오, 조규봉, 윤승욱, 김경승(1915~92), 김종영(1915~82), 김두일, 목조과 출신으로 윤효중이 있었다.
일본미술학교 출신으로는 김정수, 이국전 등이 있었다.
우리나라 조각가들의 작품은 거의 사실적 묘사에 바탕을 둔 두상, 누드 도는 착의의 인물상 등이었는데 이는 동경미술학교 조각과 교육과정에서 강조된 것이었다.
동경미술학교는 프랑스의 아카데미 교육제도를 모델로 했는데 이는 기술을 익히기 위해 석고조각의 모사와 인체 데생을 철저히 하는 것이었다.
김경승은 1989년 9월 『월간미술』에 기고한 ‘근대조각의 제1세대’에서 자기가 재학 당시 조각과 정원이 15명 안팎이었으며 서양화과의 지도교수제와는 달리 3명의 교수가 수업을 지도했는데, 점토와 석고를 가지고 처음에는 두상, 그 다음 반신상, 그리고 등신대로 옮겨가는 인체 모델 제작 위주였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교수들은 철저한 기본기를 익히기 위해 사실적인 기법 이외에 다른 것은 못하게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