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복진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김복진은 훗날 일본에서의 유학을 회고하며 “미술을 도매하는 상행위 수준이었다”고 했다.
그는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의 유미주의에 심취했으며, 항상 명주 두루마기에 칠피구두를 신었고, 장발머리에 공책 한 권을 옆구리에 끼고 다녔다.
그를 시작으로 전개된 조선의 전반적 근대조각은 서양의 기본적인 조각기법의 답습과 정착으로 겨우 자리를 잡았을 뿐이다.
김복진은 왕성한 활동을 보였는데 1926년에 제전에 출품하여 입선했고, 경성공업학교 도기과에 강사로 출강했으며, 1925년 10월에 문을 연 YMCA 미술연구소의 조각 강사로 후진 양성에 힘썼는데, 장기남, 양희문, 구본웅 등이 이곳에서 조각을 배웠다.
그는 이 연구소를 1927년 이후까지 운영했다.
그는 1925년 8월 24일에 창립된 조선프로레타리아 예술가동맹에 참여했으며 이듬해에는 김창섭, 안석주, 임학선, 이승만 등과 미술단체 창흥회를 결성했다.
당시 마르크스주의가 지성인들에게 유행병처럼 번졌고 그도 사상적으로 오염되어 조선프로레타리아 예술가동맹에 참여했고 이런 이유로 1928년 제3차 공산당 검거 시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26년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타계했고 6월 10일 국장으로 지낼 예정이었고 조선공산당은 이 때 민족적 투쟁을 벌일 것을 계획했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검거를 통해 조선공산당은 와해되었다.
서울청년회 회원들이 여러 세력을 모아 9월부터 당 재건운동을 펼쳤고 이때 재건된 당을 제3차 조선공산당이라 부르는데, 김복진이 이 일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한편 조선프로레타리아 예술가동맹은 1927년 9월 1일에 개최한 임시총회에서 정치투쟁 위주의 조직개편을 완료했다.
이때 김복진은 중앙위원 서열 제1순위이며 조사부 책임자에 선출되었다.
조선프로레타리아 예술가동맹 사무실은 견지동 천도교 교당 안의 두 칸짜리 방이었으며 김복진은 사무실에서 자고 먹는 형편이었다.
1928년 2월에 3차 조선공산당은 대량 검거되었으나 곧바로 재건사업을 통해 2월 27일에 제4차 조선공산당 재건과 3월 20일에 고려공산청년회 재건을 이룩했다.
김복진은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위원 및 선전부원 겸 경기도 책임비서에 선출되었고 특별기구인 학생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학생운동을 지도했다.

서대숙은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연구』에 적었다.

“국내의 학생들 사이에서 공산주의 활동은 1925년 11월에 조직된 학생과학연구회를 중심으로 행해졌다.
학생 그룹의 지도자들은 당에 대한 계속적 검거와 함께 체포되었다.
제4차 당의 고려공산청년회는 학생운동에 특히 중점을 두고, 전 조직을 개편하는 일을 김복진에게 일임하였다.
김복진은 여러 학교에 연구회를 만들고 독서회를 만드는 데 전력을 쏟았으며, 여기에서 학생들은 마르크스, 레닌의 혁명적 교의를 학습할 수 있었다.”

김복진은 1928년 8월 25일 동료 화가 이승만의 집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4년 6개월의 형량을 선고받았지만 취조기간을 포함해 1934년 2월까지 5년 6개월 동안 서대문 형무소에서 생활했다.
그는 감방 안에서 밥을 짓이겨 작품을 제작하자 이를 눈여겨본 간수들의 추천으로 형무소 목공소에서 목조불상 제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의 작품 모두 형무소 매점에서 진열 판매되었다.

1934년 출옥한 그는 4월경 사직공원 근처에 미술연구소를 개설했고, 가을에 백천온천으로 가서 배화여고 교사로 있던 허하백과 결혼하고 잡지사, 인쇄공장 등을 운영했지만 실패했으며 작품 제작에 몰두했다.
형무소 수감생활과 사업의 실패는 그로 하여금 창작에 몰두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으며 그는 훗날 “인생의 행로는 반드시 고난을 배경으로 하여서만 그 색채가 뚜렷하다”고 술회했다.
그는 1935년에 속리산 법주사의 석가여래 입상을 커다란 규모로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높이가 80여 척이며 철근시멘트를 사용한 것으로 두부만 제작되었을 뿐 김복진의 사망과 자금문제로 일시 중단되었다가 1949년경 윤효중에 의해서 제작이 계속되었지만 체구의 주요 부분만 완성된 후 다시 중단되었다.
1959년 장기은 등 미대 출신의 조각가들이 제작했지만 완성하지 못했고 1963년경 국립박물관의 임천 등에 의해 원형과는 다른 모습으로 완성시켰다.
이것은 대규모이고 재료로 시멘트를 사용했으며 3, 4차례나 제작이 중단되는 바람에 작품으로 가치는 거의 없지만 두부의 솜씨에서 김복진의 재능을 짐작할 수 있다.
김복진은 1940년 39살로 병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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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가 성경에 처음 
 
알렉산드리아가 성경에 처음 언급된 것을 첫 순교자 스데반과 변론한 사람 중에 알렉산드리아인이 있었다는 사도행전 6:9에서 본다.
바울의 친구 중에 아볼로도 알렉산드리아인이었으며 바울이 자신이 로미 시민임을 내세워 황제의 재판을 받기를 원하자 로마로 호송되어 가기 위해 루기아무라 성에서 출발할 때(사도행전 27:6), 멜리데에서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갔다.(사도행전 28:11)
알렉산드리아에는 기원전 280년대 등대가 세워졌는데 높이가 180m로 세계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이다.
낮에는 거대한 동경으로 빛을 반사했고 밤에는 불빛을 뿜어 뱃길을 인도했는데 15세기 초에 두 번에 걸친 대지진으로 등대가 부서지고 지금은 그 자리에 요새 성채가 구축되어 있다.

알렉산드리아는 이집트의 북서부 지역에 위치한 도시로 로마와 아테네와 더불어 당대 3대 도시로 꼽혔다.
오늘날에도 이집트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며 카이로에서 220km 떨어진 지역으로 이집트인은 이곳을 아랍어로 이스칸다리아Iskandaria라고 부른다.
알렉산드리아의 역사는 알렉산더 대왕의 등장과 함께 시작되었는데 마케도니아의 완이 된 지 4년 되던 해 기원전 332년 이집트를 정복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알렉산드리아로 명명한 뒤 거대한 항구 도시로 변모시켰다.
알렉산더 대왕이 323년에 열병으로 갑자기 죽자 부하 장군들의 왕위다툼이 있었고 톨레미Ptolemy 장군이 이곳을 수도로 삼고 톨리메 왕조를 세웠다.
이 도시는 약 950년 동안 이집트와 유럽을 연결하는 국제 도시의 역할을 했다.

원래는 상업도시로 번영했지만 세계 최대 규모의 도서관이 건립되는 등 학문의 도시로 알려졌다.
당시 이곳 도서관에는 50만 권 이상의 파피루스 장서가 있었다.
이 도시에서 구약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하는 학자 70명이 70개의 독방에서 각기 70일 동안 번역을 마치고 서로 비교해 보니 똑같았더라는 과장된 에피소드도 전해진다.
이것이 유명한 70인역이다.

알렉산드리아에는 성 마가 성당Church of St. Mark이 있는데 바울과 바나바가 결별한 후(사도행전 15:36-41) 아저씨 바나바를 따라서 이집트로 선교온 마가가 복음을 전해 창립된 교회로 알려졌다.
이것이 오늘의 곱틱Coptic 성당인데 교회 안에 주교들의 명단이 있고 첫 번째에 마가라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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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1840~1917)

프랑스 낭만주의의 가장 유명한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은 1875년 이탈리아에 가서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보고 앙트완느 부르델Emile-Antoine Bourdelle(1861~1929)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켈란젤로가 자신을 아카데미즘에서 해방시켜주었다고 밝혔다.
1878년 최초의 중요한 작품 <청동 시대 L’Age d’Airain>를 발표했는데, 이 작품은 모델링이 실재와 똑같아서 물의를 일으켰으며, 로댕은 살아 있는 모델의 몸에 틀을 떠서 만든 것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 작품의 교묘한 사실주의와 움직임에 대한 그의 애정은 이어지는 <걷는 남자 Walking Man>와 <설교하는 세례자 요한 St. Jean-Baptiste Prechant>을 위한 습작에서도 나타난다.

로댕은 1880년 정부의 의뢰로 장식미술관에 거대한 <지옥의 문 Gates of Hell>을 제작하기 시작했지만 20년 후에도 완성하지 못했다.
이 작품이 청동을 뜨여진 것은 그가 타계한 후였다.
<지옥의 문>은 기베르티가 피렌체 세례당에 세운 <천국의 문 Gates of Paradise>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으로 괴로워하며 몸부림치는 인물상과 군상은 시스티나 예배당 프레스코화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Last Judgement>, 단테의 『신곡 La Divina Commedia』 중 ‘지옥편’을 위한 19세기 중반 프랑스의 가장 유명한 삽화가 귀스타브 도레Gustave Dore(1832~83)의 삽화(1861), 윌리엄 블레이크의 동파화 등을 연상시킨다.
200명에 이르는 인물상 중 많은 작품이 그의 가장 유명한 단독 조각상의 기초가 되었는데, 거기에는 <생각하는 사람 The Thinker>, <키스 The Kiss> 등이 포함된다.

로댕은 성격과 동작의 표현과 모델링을 선호한 낭만주의적인 조각가였다.
만년의 많은 작품은 춤에서 영감을 받았다.
로댕의 작품에 덧붙여진 문학적·상징적인 의미는 20세기를 지배한 순수 조각 개념에는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낭만주의적인 문학적 특징을 지니는 데도 그의 작품은 삼차원의 공간에서 구도의 문제를 진지하게 탐구했다는 점에서는 동시대의 조류에 어느 정도 동참하고 있다.
로댕은 차세대의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그의 조수 중에는 부르델, 샤를 데스피오Charles Despiau(1874~1946), 아리스티드 마욜Aristide Maillol(1861~1944) 등이 있었다.

로댕의 미학은 그의 말에서 알 수 있다.
“형形의 깊어감을 파악하여 주요한 면을 명확히 나타내고, 너를 향해 돌출된 것으로 형을 상상하라.
모든 생명은 중심으로부터 샘솟아 안에서 바깥으로 퍼져간다.
소묘에서는 튀어나온 것과 들어간 것을 관찰하라.
외곽선이 아닌 오목과 볼록이 윤곽을 결정하며, 중요한 것은 감동하고 사랑하며 기대하고 전율하며 사는 것이다.
예술가이기 이전에 인간이어라!”

로댕은 입체로 조각상을 파악하고 특히 표면의 요철을 정밀하게 형성해 감으로써 작품이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는 “진실이야말로 미인이다”라고 했는데, 정신적인 의미로서의 내적 진실과 구체적인 의미를 지니는 촉각적인 진실을 의미한다.
이 점을 파악한 20세기 조각의 아버지 브랑쿠시는 “인간이 조각의 척도가 된 것은 로댕의 덕택이다”라고 했다.
로댕의 조각 미학을 전승한 사람이 아리스티드 마이욜과 앙트완느 부르델이다.
고대 그리스 조각으로부터 미켈란젤로를 통해 로댕까지 이어진 조각의 기본 개념은 진실을 미로서 이상화하는 것이었다.
로댕은 고전 조각과 현대 조각을 잇는 교량적인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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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느웨Nineveh 
 
인류 문명의 4대 발상지로 알려진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일대의 티그리스 강 유역에 위치했던 니느웨는 현재 이라크에 속해 있다.
니느웨의 유적지로 두 개의 커다란 쿠운지크Quyunjiq(많은 양 무리의 뜻) 언덕과 네비 유누스Nebi Yunus(선지자 요나의 뜻) 언덕이 있고 성 주위에는 약 13km에 이르는 정방형의 성벽이 에워싸여 있다.
이 면적은 매우 커서 220만 평에 달한다.

요나서 3장 2절에 니느웨 성을 한 번 도는데 사흘이 걸린다고 했으니 그만큼 큰 것으로 외국인에게 알려졌다.
창세기에 니느웨가 처음 언급되었는데 대홍수 이후 노아의 아들 함이 구스를 낳고 구스가 니므롯이란 영걸을 낳았다.

"니므릇은 세상에 처음 나타난 장사였다.
그는 야훼께서 알아 주시는 힘센 사냥꾼이었다.
그래서 '야훼께서도 알아 주시는 니므롯 같은 힘센 사냥꾼'이라는 속담까지 생겼다.
그의 나라는 시날 지방인 바벨과 에렉과 아깟과 갈네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그 지방을 떠나 아시리아로 나와서 니느웨와 르호봇성과 가라를 세우고, 니느웨와 갈라 사이에 레센이라는 아주 큰 성을 세웠다."(창세기 10:8~12)

니느웨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세워진 장구한 역사를 가진 오래된 마을이며 부유한 성읍이었다.
니느웨 성벽의 높이는 30m에 달했으며 성벽 위에는 여섯 대의 쌍두마차가 동시에 달릴 수 있는 길과 성 주위에 18m 깊이의 연못이 둘러쳐져 있어 적이 감히 침범하기 어려운 낭공불락의 도성이었다.
성벽의 내부에는 병영과 무기고 그리고 궁량창고 등이 있었다.

열왕기하 19:35~37과 이사야 37:36~38을 보면 앗수르 왕 산헤립이 18만 5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치러왔다가 하나님의 권능으로 하룻밤에 몰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산헤립은 간신히 목숨을 보존하여 귀국해서 니느웨로 돌아갔고 그들이 숭배하는 신 니스록의 묘에 경배할 때 그의 아들들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에 의해 피살되었다.
니스록은 메소포타미아 종교 문헌에 언급되지 않는 것을 보면 주요 신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니스록은 앗수르의 국가 신 앗수르Ashur의 이름을 가리키는 듯하다.
일부 학자는 니스록 신을 누스쿠 신의 또 다른 명칭이거나 독수리 모양의 군기와 관련이 있을 거라고 말한다.

요나서에 의하면 니느웨의 상업이 번창하여 국민의 생활이 윤택해지자 범죄가 극심해져서 하나님의 멸망 심판의 대상이 되었다.
하나님이 요나를 그곳으로 보내 멸망을 경고하자 왕 이하 온 국민이 회개함으로써 일단 멸망을 보류했다.(요나 3:4~10)
앗수르는 기원전 606년에 바빌론에게 패망되었다.

니느웨에 관해 특기할 만한 것은 니느웨 도서관으로 1845~50년에 발굴되었다.
도서관의 규모가 컸으며 점토로 제작된 서판이 주로 발굴되었는데 설형문자 비문이 발굴되었으며 그 내역으로는 언어학, 천문학, 점성술, 종교적 문헌, 법전, 과학서적과 기구, 문학과 예술, 역사서와 연대표, 상업서, 각종 서간 등의 서판이 2만 6천 개나 있었다.

요나는 인류의 구원을 위한 상징이었다.
근래 발굴된 250~275년 소아시아 서쪽 지역에서 제작된 조그만 대리석 조각에 요나의 모습이 있다.
조롱박 덩쿨 아래 비스듬히 누운 요나는 그리스인의 형상으로 제작되었는데 그리스인이 본다면 자신들의 신들 가운데 하나로 생각할 것이다.
요나는 그리스 신화에서 달 여신의 사랑받는 목동 엔디미온Endymion의 모습에서 변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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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진


최초의 근대조각가로 정관 김복진(1901~41)을 꼽는 이유는 그에 의해서 서양식 조소기법이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그에 의해서 조각가라는 말이 생겼고 조각이 중요한 예술이라는 인식이 생겼다.
김복진은 1901년 충청북도 청원군 남이면 팔봉리에서 구한국 시절의 군수 김홍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동생 소설가 김기진은 아예 마을의 산 이름을 따 자신의 이름을 김팔봉이라고 했다.
김복진은 충북 황간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지만 중간에 자퇴하고 서다에 다니다가 충북 영동공립보통학교에 편입한 후 졸업했다.
가족과 함께 서울로 올라온 그는 동생 김기진과 함께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김기진은 훗날 사회주의 문예운동의 선구자가 된다. 3학년 무렵 그는 철학과 문학에 심취했으며 1920년 19살 때 배재고보를 중퇴하고 그 해 9월에 일본으로 가서 동경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했다.
조선인으로 처음 일본에서 서양조각을 배우게 된 것이다.
동경미술학교에는 그보다 앞선 1915년에 김진석이 입학했지만 요절했고 김복진 입학 후인 1921년 곽윤모가 입학했지만 역시 병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복진은 근대 조각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오귀스트 로댕에 심취해 있었고 초기 작품은 로댕의 것을 모방한 것들이었다.

김복진이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하고 처음 사사한 조각가는 메이지 시대부터 활약한 다카무라 고운高村光雲(1852~1934)이었다.
그러나 입학 후 세 교수 분담제가 시행되어 1921년에 새로 부임한 다테하다 타이무(1880~1942)에게 사사하게 되는데 그 후 동경미술학교 교수진에 아사쿠라 후미오朝倉文夫(1883~1964), 기타무라 세이보北村西望(1884~1987)가 합세하면서 세 조각가는 오랫동안 이 학교 조각과의 삼총사로서 뿐 아니라 관전에서도 명성을 떨쳤다.
아사쿠라는 로댕 양식의 작품을 제작했고, 다테하다는 온화하고 정서적인 표현에 능해 여성상이나 동자상을 주로 제작했으며, 기타무라의 작품은 역동적인 남성상이었다.

김복진은 조각을 배우는 한편 1921년에 연극에도 심취했고, 이듬해 5월에 박승희, 방정환, 이서구, 이제창, 김기진 등과 함께 연극단체 토월회土月會를 결성하고 1923년 7월에 서울에서 창립 공연을 가졌다.
이때 그가 맡은 역할은 자금동원과 무대장치였다. 첫 공연은 실패했지만 9월의 2회 공연은 성공했다.
그는 1923년 안석주와 토월미술연구회를 창립하여 후진을 지도하다가 10월에 일본으로 가서 1924년 여름까지 동경 포전영화촬영소에서 영화를 연구했고 제전에 <나상>을 출품하여 입선했다.
그는 자신의 졸업작품 <女>는 양손으로 가슴을 움켜 안은 로댕의 <이브 Eve>를 모방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이 시기에 그는 각기병을 앓았으며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한 후 귀국하여 청주에서 요양했다.
그는 1925년 1월에 서울에 올라와 서화학원 안에 작업실을 얻고 작품을 제작하는 한편 모교인 배재고보에 교사로 재직했다.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이 일본서 수학하고 돌아온 지 꼭 10년 만에 최초의 조각가가 돌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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