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복진
최초의 근대조각가로 정관 김복진(1901~41)을 꼽는 이유는 그에 의해서 서양식 조소기법이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그에 의해서 조각가라는 말이 생겼고 조각이 중요한 예술이라는 인식이 생겼다.
김복진은 1901년 충청북도 청원군 남이면 팔봉리에서 구한국 시절의 군수 김홍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동생 소설가 김기진은 아예 마을의 산 이름을 따 자신의 이름을 김팔봉이라고 했다.
김복진은 충북 황간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지만 중간에 자퇴하고 서다에 다니다가 충북 영동공립보통학교에 편입한 후 졸업했다.
가족과 함께 서울로 올라온 그는 동생 김기진과 함께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김기진은 훗날 사회주의 문예운동의 선구자가 된다. 3학년 무렵 그는 철학과 문학에 심취했으며 1920년 19살 때 배재고보를 중퇴하고 그 해 9월에 일본으로 가서 동경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했다.
조선인으로 처음 일본에서 서양조각을 배우게 된 것이다.
동경미술학교에는 그보다 앞선 1915년에 김진석이 입학했지만 요절했고 김복진 입학 후인 1921년 곽윤모가 입학했지만 역시 병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복진은 근대 조각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오귀스트 로댕에 심취해 있었고 초기 작품은 로댕의 것을 모방한 것들이었다.
김복진이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하고 처음 사사한 조각가는 메이지 시대부터 활약한 다카무라 고운高村光雲(1852~1934)이었다.
그러나 입학 후 세 교수 분담제가 시행되어 1921년에 새로 부임한 다테하다 타이무(1880~1942)에게 사사하게 되는데 그 후 동경미술학교 교수진에 아사쿠라 후미오朝倉文夫(1883~1964), 기타무라 세이보北村西望(1884~1987)가 합세하면서 세 조각가는 오랫동안 이 학교 조각과의 삼총사로서 뿐 아니라 관전에서도 명성을 떨쳤다.
아사쿠라는 로댕 양식의 작품을 제작했고, 다테하다는 온화하고 정서적인 표현에 능해 여성상이나 동자상을 주로 제작했으며, 기타무라의 작품은 역동적인 남성상이었다.
김복진은 조각을 배우는 한편 1921년에 연극에도 심취했고, 이듬해 5월에 박승희, 방정환, 이서구, 이제창, 김기진 등과 함께 연극단체 토월회土月會를 결성하고 1923년 7월에 서울에서 창립 공연을 가졌다.
이때 그가 맡은 역할은 자금동원과 무대장치였다. 첫 공연은 실패했지만 9월의 2회 공연은 성공했다.
그는 1923년 안석주와 토월미술연구회를 창립하여 후진을 지도하다가 10월에 일본으로 가서 1924년 여름까지 동경 포전영화촬영소에서 영화를 연구했고 제전에 <나상>을 출품하여 입선했다.
그는 자신의 졸업작품 <女>는 양손으로 가슴을 움켜 안은 로댕의 <이브 Eve>를 모방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이 시기에 그는 각기병을 앓았으며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한 후 귀국하여 청주에서 요양했다.
그는 1925년 1월에 서울에 올라와 서화학원 안에 작업실을 얻고 작품을 제작하는 한편 모교인 배재고보에 교사로 재직했다.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이 일본서 수학하고 돌아온 지 꼭 10년 만에 최초의 조각가가 돌아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