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카타르시스! 
 

이선생이 매우 중요하고도 어려운 걸 질문했군요.
이 어려운 말을 사람들이 잘도 사용하던데 나도 그들이 어떤 의미로 사용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6장 본문을 잠깐 봅시다.

육절 운율에 의한 모방과 희극에 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먼저 비극에 관해 이야기하기로 하자.
우선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으로부터 비극의 본질을 정의해보자.
비극은 진지하고 일정한 크기를 가진 완결된 행동을 모방하며, 쾌적한 장식을 가진 언어를 사용하되 각종의 장식은 작품의 상이한 제부분에 따로따로 삽입된다.
비극은 드라마적 형식을 취하고 서술적 형식을 취하지 않으며, 연민과 공포를 환기시키는 사건에 의해 바로 이러한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행한다.

이상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본문에서 언급한 카타르시스입니다.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지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제6장에서 비극을 정의했으며 이는 <시학> 전체의 핵심이 되는데 그 자신 카타르시스에 관해 더이상 설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보통 학자들의 견해는 두 가지로
하나는 카타르시스가 '감정의 정화'를 의미한다는 윤리적인 이론이고,
다른 하나는 카타르시스는 '감정의 배설'을 의미한다는 의학적 이론입니다.

'감정의 정화'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카타르시스의 의미로 나 자신도 이럴 때 이 말을 사용합니다.
이 이론을 옹호하는 사람들로는 바로크의 시인들, 프랑스 고전주의 시인들, 그리고 레싱Lessing이 있습니다.

20세기에 카타르시스에 대한 연구가 있고 의학적 연구도 있어 이선생의 글에서도 이런 점을 보는데 다수의 학자들은 카타르시스에 대한 연구가 비극 그 자체에 대한 연구에 비해 퇴조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중에서 제6장은 A4 용지로 한 장 분량입니다.
앞에 내가 인용한 것과 비극의 구성에 관한 내용이 전부이지요.

따라서 이선생은 고민할 필요 없이 '감정의 정화'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헌데 나의 경우 비극에서 감정의 정화가 일어나지 않고 희비극에서 이런 '감정의 정화'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특히 챨리 채플린의 무성영화를 보면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그런 말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나의 경우 운명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의 비극은 주로 인간의 한계, 즉 운명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운명을 믿지 않는 나는 희비극에서, 채플린의 영화에서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나의 한계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때 '감정의 정화'가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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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일본 화가들


조선에 일본인 화가들이 이주해 오게 된 것은 일본 정부의 제국주의 식민정책이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동북아시아의 군사대국으로 급부상하여 1895년과 1910년에 대만과 조선을 합방하기에 이르렀고,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침략전쟁과 식민지 개척에 박차를 가했다.
일본 정부는 각 식민지에 통치기관인 총독부를 두고 본국으로부터 많은 군인과 민간인을 이주시켜 원활함 식민지 경영을 도모했다.
조선에 거주한 일본인의 수는 1889년 약 5천 명이었던 것이 합방 이후 1916년에는 32만여 명으로 급증한 것을 보면 식민지 경영을 도모했음을 알 수 있다.

합방 전 조선에 온 일본인 화가는 대부분 종군화가들이었다.
이들은 조선의 이국적 풍경과 풍속을 그려 일본으로 가져갔다.
1912년 순종의 초상을 그린 하쿠바카이白馬會의 안도 나카타로를 비롯하여 7명의 서양화가들이 조선 체류 중에 개인전을 열었고, 후지시마 타케지는 일본으로 돌아간 후 조선에서 스케치한 것과 함께 ‘조선 관광 소감’이란 글을 발표했다.
러일전쟁이 끝난 후부터 조선으로 이주하는 일본인 화가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여 1907년에 23명이었다.
이들 가운데는 동경미술학교 조교수를 지낸 아마쿠사 신라이天草神來(?~1917)가 있었고 그는 1902년경부터 수차례나 조선을 방문하여 일본 화단에서 조선통으로 알려졌다.
아마쿠사 신라이는 오카쿠라 덴신 문하의 사람으로 일본 문화원의 동인 가운데서도 요코야마 타이칸에 버금가는 제자였다.
그는 1907년 경성에 정착한 후 꾸준한 활동으로 당시로서는 드물게 조선인의 후원을 받았으며 안중식, 조석진, 김응원을 비롯한 조선인 화가들과 교류했다.

일본인 화가의 방문과 이주가 잦아지면서 조선 내에서의 그들의 전람회도 빈번하게 열렸다.
아마쿠사 신라이의 알선으로 1905년 동경미술학교의 일본화 관계자들이 연 단청회전丹靑會展은 조선 내 일본인에게 작품을 팔기 위해 마련한 것이지만 예상 외로 많은 작품이 팔리고 조선인들의 관심을 받게 되자 부산 및 대만에까지 순회전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회원 외의 작품도 모아 부산, 경성, 평양, 진남포, 안동현, 대만 등지를 도는 순회전을 열기도 했다.
일본의 『동경미술학교 교우회 월보』에 순회전에 대한 보도가 청나라와 조선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끌어 성황을 이루었다고 전해진 후 더욱 많은 일본인 화가들이 조선을 찾게 되었다.
합방 후 조선에서 열린 일본인 화가들의 전람회는 관의 후원으로 열린 정치적 성격이 짙었다.
조선에 체류하는 일본인에게 작품을 판매하는 목적 외에도 일본의 훌륭한 근대미술을 조선에 알리는 제국주의 문화 지배의 목적도 있었다.
1915년 조선 통치 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총독부가 주최한 시정 5년 공진회도 이런 의도로 개최된 전람회였다.

시정 5년 공진회에는 총독부가 그동안 모은 각 분야의 수집품이 소개되었다.
미술부분에서는 일본 대가들의 작품과 조선 거주 일본인과 조선인의 작품을 소개했는데, 심사위원들은 일본인이었다.
그들은 대정 5년(1916)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시정 5년 기념 조선물산 공진 보고서』에 기고한 심사평에서 “조선 미술계가 피폐하여 내지식內地式(일본식)을 모방하고 있으며 조선 미술의 특징을 잃어버린 지금의 상황을 구제할 방도가 요구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피폐한 미술계를 구제해야 한다는 주장에서 조선 미술이 일본인에게 어떻게 보여졌으며 그들의 식민지 화단에 대한 시각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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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Herodotus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헤로도토스Herodotus에 의하면 플라톤이 본 스파르타의 이상국가는 사뭇 다르다.
당시에 살았던 헤로도토스는 자신은 뇌물을 안 받은 스파르타인을 보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스파르타 여인은 정숙하다고 알려졌지만 여러 차례에 걸쳐 왕손들은 그들의 어머니의 남편 아들들이 아니었다.
스파르타인들은 국가를 위해 헌신했다고 플루타르크는 <영웅전>에서 찬양했지만 플라타애아Plataea 전쟁을 승리로 이끈 왕 파우사니아스Pausanias는 나중에 매국노가 되고 말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파르타가 몰락한 후에 살았던 사람으로 그는 <정치학 Politics>에서 스파르타의 헌법을 조목조목 비판했으며 다섯 명의 민선장관들ephors은 자주 있었던 일은 아니었더라도 아주 가난했고 그래서 뇌물을 잘 받았다고 적었다.
민선장관의 권력이 너무 강했으므로 그들은 두 왕들조차 법정에 세울 수 있었고 헌법은 그래서 민주주의로 바뀌었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선장관들이 부패했다고 적었다.
그가 이런 글을 쓸 때만 해도 스파르트가 부패해질 때였으며 그는 스파르타의 부조리를 일일히 열거했는데 아주 분명했고 부정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전해주는 스파르타보다는 플루타르크Plutarch가 신화적으로 이상화한 스파르타를 더욱 신뢰하는 경향이 있다.
플라톤도 저서 <공화국 Republic>에서 스파르타를 이상국가로 묘사했으므로 더욱 더 사람들은 스파르타를 훌륭한 나라였다고 믿는다.
신화적인 스파르타는 주로 플루타르크에 의해서 주로 알려졌으며 그에게는 스파르타는 매우 낭만적인 국가였다.
그가 전하는 말을 역사학자들은 조심스럽게 다뤄야겠지만 신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플루타르크의 증언은 매우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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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은 스파르타를 이상적인 국가로  
 

버리Bury는 저서 <그리스의 역사 History of Greece>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만약 기원전 5세기에 아테네 혹은 마일터스Miletus에서 온 어떤 사람이 스파르타의 어느 고을을 방문했다고 가정한다면,
그는 울타리가 없고 잘난척하는 사람들이 없는 고을에 놀라워하게 될 것이며 스파르타인들이 매우 용감하며 단순하고 지식이나 물질에 의해 부패되지 않았음을 알게 될 것이다.
플라톤은 정치철학과 관련해서 스파르타를 매우 이상적인 국가로 찬양했다.
그리스인들에게 스파르타의 건물들은 아주 단순하며 아름답게 보일 것이다.
도리아인Dorian의 도시에는 도리안식 사원이 있고 건물들이 매우 고상하게 보일 테지만 거주하는 데는 편치 않다."

모든 그리스 도시에서는 혁명이 일어났는데 스파르타에서는 한 세기 동안 별로 달라진 게 없었으며 다만 다섯 명의 민선장관들의 권력이 법에 의해 증가되었을 뿐이다.
스파르타인들은 전쟁에서 곧잘 승리했으며 테르모필애Thermopylae(기원전 480년) 전쟁은 계곡에서 벌어졌는데 그리스인은 스파르타 군대를 그곳에서 몰살시키려고 했으나 스파르타 정예군인들은 정면전쟁을 피하고 언덕으로 올라 양편에서 그리스인들을 공격했다.
결과적으로 모든 스파르타 군인들이 죽고 두 사람이 겨우 병으로 실명에 이르렀고 한 사람은 노예들을 이끌고 계속 싸우다가 죽었으며 나머지 한 사람 아리스토데무스Aristodemus는 자신이 너무 병중이었으므로 싸울 수 없다고 판단하여 스파르타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가 돌아왔을 때 아무도 그와 대화하려고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를 '겁쟁이 아리스토데무스'라고 부르면 놀렸다.
일 년 후 그는 불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플라태아Plataea 전쟁에 출전하여 용감하게 싸우다가 전사했고 그 전쟁은 스파르타에 승리를 안겨다주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스파르타인의 기질을 알 수 있다.
스파르타는 강한 나라였는데 기원전 371년 리욱트라Leuctra 전쟁에서 테반인들Thebans에게 패한 후 더이상 위대한 나라가 못되었다.

스파르트의 정체는 매우 복잡하다.
우선 왕이 둘 있었는데 다른 두 집안 출신이다.
두 왕들 중 한 왕은 전쟁기간 중에 명령권을 갖게 되지만 평화로울 때는 왕들의 권한이 제한되었다.
왕들은 원로원Council of Elders의 멤버가 되고 왕들을 포함해서 원로원은 30명으로 구성되었다.
왕을 제외한 28명의 나이는 60살이 넘어야 하며 귀족 출신으로 시민들에 의해 선출된 종신직이다.
원로원은 형사범들을 재판하고 의회에 제출되는 안건을 먼저 심사한다.
의회Assembly의 구성원들은 시민이고 그들의 역할은 단지 yes 혹은 no라고 투표하는 것이 전부이다.
즉, 동의하느냐 안 하느냐를 결정지을 뿐이다.
하지만 의회에서 제정을 인준했더라도 원로원에서 그 법령을 선포해야만 실행된다.

스파르타에는 두 왕, 원로원, 의회 말고도 한 기구가 더 있는데 다섯 명의 민선장관들ephors이다.
이들 다섯 명은 시민이 선출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선출방법이 매우 어린아이들 같았다고 적고 있다.
버리Bury의 저서에 의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렇게 적은 이유가 스파르타인들이 제비뽑기로 선출했기 때문이다.
여하튼 스파르타는 민주주의 국가라고 말할 수 있었으며 시민들 모두가 지배계급이었고 이들의 권력은 왕의 권력과 평행을 유지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국민 모두가 대통령이라고 하는데 그런 정도의 수준이었다.

왕들은 매달 헌법을 준수할 것을 맹세했으며 다섯 명의 민선장관들은 왕들이 맹세한 대로 헌법을 지키는 한에 있어 그들에게 복종할 것을 맹세했다.
즉, 스파르타는 법치주의 국가였다.
전쟁에 한 왕이 출전할 경우 두 명의 민선장관이 따라가서 왕이 제대로 헌법을 준수하는지 감시했다.
민선장관들은 최고의 민사재판권을 가지지만 왕에 대해서는 형사재판권을 가졌다.

스파르타의 헌법은 기원전 885년에 리쿠르구스Lycurgus가 제정하여 선포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는 신비적인 존재로 본래는 신이었다.
그의 이름의 의미는 '이리를 쫒는 자 Wolf-repeller'이며 아르카디아Arcadia 사람이다.
스파르타가 국제무대에 부상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는데 그러기 전만 해도 스파르타는 여느 도시국가와 마찬가지로 시인과 예술가들을 배출했으며 기원전 7세기 혹은 더 늦게 전쟁에 승리하는 것에 목숨을 걸면서부터는 문화에 등을 돌렸다.
더러 학자들은 현대판 스파르타로 나치를 꼽는다.
나치가 승리했다면 스파르타와 같은 국가가 되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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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준이 화단에서 멀어지기 시작한 것은 


김용준(1904~67)은 경상북도 선산 태생으로 경성 중앙보통고등학교를 1925년에 졸업하고 동경으로 가 동경미술학교 서양학과에 재학(1926~31)하면서 김주경, 길진섭, 이마동(1906~81) 등과 친분을 쌓았다.
그는 1927년에 『화단개조』, 『무산계급 회화론』, 『프로레타리아 미술비판』, 『백만양화회를 만들고』 등의 에세이를 발표하며 평론가로 데뷔했다.
향토적 예술론을 주장한 그는 1931년에 『미술에 나타난 곡선의 표징』, 1933년에 『화단 1년의 회고』, 1936년에 『회화로 나타나는 향토색의 의미』와 『서울사람, 시골사람』, 1939년에 『이조시대의 인물화』, 1940년에 『전통에의 음미』 등을 발표했다.
1934년에는 선전 참가를 거부하던 이종우, 이병규, 임용련, 백남순, 이마동, 장발, 길진섭, 구본웅 등과 자주적 서양화운동을 의도한 목일회의 조직에 가담하고 회원작품전에 참가했다.
목일회는 회칭으로 일제의 탄압을 받았는데, 회칭이 ‘(해방의) 날을 기른다’는 뜻이 아니냐며 바꾸라고 강요하여 1937년에 목시회牧時會로 개칭하고 재기를 시도했지만 역시 탄압으로 와해되었다.

김용준이 화단에서 멀어지기 시작한 것은 1938년경부터였다.
해방 후 1945년에 조선미술건설부가 결성될 때 그는 수묵화가 입장에서 동양화부 위원이 되었고, 이듬해 서울대 예술대학이 창설될 때 장발의 추천으로 미술학부 교수진에 들어 한때 동양화론과 한국 미술사 강의를 맡았다.
그는 동양화과에 장우성, 서양화과 책임자로 동문이면서 친구인 길진섭을 내세웠다.
김용준은 일본화풍에 찌들거나 조선 말기 수묵화를 답습하거나 남화풍에 함몰된 전통 회화세계에 전환점을 마련하고자 노력했으며 그런 효과가 그가 초빙한 장우성을 통해 나타났다.
그는 1947년에 『조선 미술 대요』, 이듬해에 『근원수필』을 발표했다.
『조선 미술 대요』는 한국인이 쓴 최초의 한국 미술사였다.
그동안 좌익계열의 미술단체에 가담한 적은 없었지만 1950년 북한 공산군의 남침 상황에서 서울대가 접수될 때는 미술대학장으로 임명될 정도로 급진적으로 변신했으며 몇 달 만에 전세 역전에 당면하자 월북했다.
그는 평양미술대학 교수로 활동했다.
그의 영향력은 1955년 이여성이 저술한 북한 최초의 미술사에서 비판받으면서 꺾였는데, 지적이 된 대목은 복고적인 성격과 전시대 귀족 문화를 정통으로 해석하는 태도가 비판의 표적이 되었다.
이여성은 이미 일제 말기에 김용준을 강도 높게 비판한 적이 있었다.
김용준이 조선 말기의 중국적인 것과 문인주의에 정통성을 부여한 것은 보편성을 잃은 것이라고 이여성이 지적했다.
그는 미술사학자로 활동하다가 1967년에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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