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은 스파르타를 이상적인 국가로  
 

버리Bury는 저서 <그리스의 역사 History of Greece>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만약 기원전 5세기에 아테네 혹은 마일터스Miletus에서 온 어떤 사람이 스파르타의 어느 고을을 방문했다고 가정한다면,
그는 울타리가 없고 잘난척하는 사람들이 없는 고을에 놀라워하게 될 것이며 스파르타인들이 매우 용감하며 단순하고 지식이나 물질에 의해 부패되지 않았음을 알게 될 것이다.
플라톤은 정치철학과 관련해서 스파르타를 매우 이상적인 국가로 찬양했다.
그리스인들에게 스파르타의 건물들은 아주 단순하며 아름답게 보일 것이다.
도리아인Dorian의 도시에는 도리안식 사원이 있고 건물들이 매우 고상하게 보일 테지만 거주하는 데는 편치 않다."

모든 그리스 도시에서는 혁명이 일어났는데 스파르타에서는 한 세기 동안 별로 달라진 게 없었으며 다만 다섯 명의 민선장관들의 권력이 법에 의해 증가되었을 뿐이다.
스파르타인들은 전쟁에서 곧잘 승리했으며 테르모필애Thermopylae(기원전 480년) 전쟁은 계곡에서 벌어졌는데 그리스인은 스파르타 군대를 그곳에서 몰살시키려고 했으나 스파르타 정예군인들은 정면전쟁을 피하고 언덕으로 올라 양편에서 그리스인들을 공격했다.
결과적으로 모든 스파르타 군인들이 죽고 두 사람이 겨우 병으로 실명에 이르렀고 한 사람은 노예들을 이끌고 계속 싸우다가 죽었으며 나머지 한 사람 아리스토데무스Aristodemus는 자신이 너무 병중이었으므로 싸울 수 없다고 판단하여 스파르타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가 돌아왔을 때 아무도 그와 대화하려고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를 '겁쟁이 아리스토데무스'라고 부르면 놀렸다.
일 년 후 그는 불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플라태아Plataea 전쟁에 출전하여 용감하게 싸우다가 전사했고 그 전쟁은 스파르타에 승리를 안겨다주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스파르타인의 기질을 알 수 있다.
스파르타는 강한 나라였는데 기원전 371년 리욱트라Leuctra 전쟁에서 테반인들Thebans에게 패한 후 더이상 위대한 나라가 못되었다.

스파르트의 정체는 매우 복잡하다.
우선 왕이 둘 있었는데 다른 두 집안 출신이다.
두 왕들 중 한 왕은 전쟁기간 중에 명령권을 갖게 되지만 평화로울 때는 왕들의 권한이 제한되었다.
왕들은 원로원Council of Elders의 멤버가 되고 왕들을 포함해서 원로원은 30명으로 구성되었다.
왕을 제외한 28명의 나이는 60살이 넘어야 하며 귀족 출신으로 시민들에 의해 선출된 종신직이다.
원로원은 형사범들을 재판하고 의회에 제출되는 안건을 먼저 심사한다.
의회Assembly의 구성원들은 시민이고 그들의 역할은 단지 yes 혹은 no라고 투표하는 것이 전부이다.
즉, 동의하느냐 안 하느냐를 결정지을 뿐이다.
하지만 의회에서 제정을 인준했더라도 원로원에서 그 법령을 선포해야만 실행된다.

스파르타에는 두 왕, 원로원, 의회 말고도 한 기구가 더 있는데 다섯 명의 민선장관들ephors이다.
이들 다섯 명은 시민이 선출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선출방법이 매우 어린아이들 같았다고 적고 있다.
버리Bury의 저서에 의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렇게 적은 이유가 스파르타인들이 제비뽑기로 선출했기 때문이다.
여하튼 스파르타는 민주주의 국가라고 말할 수 있었으며 시민들 모두가 지배계급이었고 이들의 권력은 왕의 권력과 평행을 유지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국민 모두가 대통령이라고 하는데 그런 정도의 수준이었다.

왕들은 매달 헌법을 준수할 것을 맹세했으며 다섯 명의 민선장관들은 왕들이 맹세한 대로 헌법을 지키는 한에 있어 그들에게 복종할 것을 맹세했다.
즉, 스파르타는 법치주의 국가였다.
전쟁에 한 왕이 출전할 경우 두 명의 민선장관이 따라가서 왕이 제대로 헌법을 준수하는지 감시했다.
민선장관들은 최고의 민사재판권을 가지지만 왕에 대해서는 형사재판권을 가졌다.

스파르타의 헌법은 기원전 885년에 리쿠르구스Lycurgus가 제정하여 선포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는 신비적인 존재로 본래는 신이었다.
그의 이름의 의미는 '이리를 쫒는 자 Wolf-repeller'이며 아르카디아Arcadia 사람이다.
스파르타가 국제무대에 부상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는데 그러기 전만 해도 스파르타는 여느 도시국가와 마찬가지로 시인과 예술가들을 배출했으며 기원전 7세기 혹은 더 늦게 전쟁에 승리하는 것에 목숨을 걸면서부터는 문화에 등을 돌렸다.
더러 학자들은 현대판 스파르타로 나치를 꼽는다.
나치가 승리했다면 스파르타와 같은 국가가 되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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