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준이 화단에서 멀어지기 시작한 것은 


김용준(1904~67)은 경상북도 선산 태생으로 경성 중앙보통고등학교를 1925년에 졸업하고 동경으로 가 동경미술학교 서양학과에 재학(1926~31)하면서 김주경, 길진섭, 이마동(1906~81) 등과 친분을 쌓았다.
그는 1927년에 『화단개조』, 『무산계급 회화론』, 『프로레타리아 미술비판』, 『백만양화회를 만들고』 등의 에세이를 발표하며 평론가로 데뷔했다.
향토적 예술론을 주장한 그는 1931년에 『미술에 나타난 곡선의 표징』, 1933년에 『화단 1년의 회고』, 1936년에 『회화로 나타나는 향토색의 의미』와 『서울사람, 시골사람』, 1939년에 『이조시대의 인물화』, 1940년에 『전통에의 음미』 등을 발표했다.
1934년에는 선전 참가를 거부하던 이종우, 이병규, 임용련, 백남순, 이마동, 장발, 길진섭, 구본웅 등과 자주적 서양화운동을 의도한 목일회의 조직에 가담하고 회원작품전에 참가했다.
목일회는 회칭으로 일제의 탄압을 받았는데, 회칭이 ‘(해방의) 날을 기른다’는 뜻이 아니냐며 바꾸라고 강요하여 1937년에 목시회牧時會로 개칭하고 재기를 시도했지만 역시 탄압으로 와해되었다.

김용준이 화단에서 멀어지기 시작한 것은 1938년경부터였다.
해방 후 1945년에 조선미술건설부가 결성될 때 그는 수묵화가 입장에서 동양화부 위원이 되었고, 이듬해 서울대 예술대학이 창설될 때 장발의 추천으로 미술학부 교수진에 들어 한때 동양화론과 한국 미술사 강의를 맡았다.
그는 동양화과에 장우성, 서양화과 책임자로 동문이면서 친구인 길진섭을 내세웠다.
김용준은 일본화풍에 찌들거나 조선 말기 수묵화를 답습하거나 남화풍에 함몰된 전통 회화세계에 전환점을 마련하고자 노력했으며 그런 효과가 그가 초빙한 장우성을 통해 나타났다.
그는 1947년에 『조선 미술 대요』, 이듬해에 『근원수필』을 발표했다.
『조선 미술 대요』는 한국인이 쓴 최초의 한국 미술사였다.
그동안 좌익계열의 미술단체에 가담한 적은 없었지만 1950년 북한 공산군의 남침 상황에서 서울대가 접수될 때는 미술대학장으로 임명될 정도로 급진적으로 변신했으며 몇 달 만에 전세 역전에 당면하자 월북했다.
그는 평양미술대학 교수로 활동했다.
그의 영향력은 1955년 이여성이 저술한 북한 최초의 미술사에서 비판받으면서 꺾였는데, 지적이 된 대목은 복고적인 성격과 전시대 귀족 문화를 정통으로 해석하는 태도가 비판의 표적이 되었다.
이여성은 이미 일제 말기에 김용준을 강도 높게 비판한 적이 있었다.
김용준이 조선 말기의 중국적인 것과 문인주의에 정통성을 부여한 것은 보편성을 잃은 것이라고 이여성이 지적했다.
그는 미술사학자로 활동하다가 1967년에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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