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유학파 일본인은 조선에 귀국한 후

조선의 학교와 선전에서 활동하던 중견급 일본인 화가들은 1930년을 전후하여 다투어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로 유학을 떠났다.
파리로 간 사람이 가장 많았는데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 사이에 이미 300여 명이 파리에서 수학했다.
선전의 창설에 참여했던 타카키 하이스이가 1909~14년 영국과 프랑스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고, 와타나베 코조가 1925년부터 프랑스에서 4년 동안 생활하면서 1928년 살롱전에 입선했다.
미키 히로시三木弘가 1927년 9월부터 1년 동안 파리에서 신고전주의의 대가 피세르로부터 수학하면서 경성일보에 파리의 생활을 연재 기고했다.
그는 1928년 8월에 귀국했으며, 1930년 선전에 <습작>을 출품하여 특선을 수상했고, 일본의 니카텐二科展에도 출품하여 세 차례 입선했다.
그는 조선 거주 일본인들로부터 ‘반도가 낳은 이과계 화가’로 불리었다.
그는 피카소의 신고전주의의 영향을 받았는데 제12회 선전에서 특선을 차지한 <나부>를 보면 피카소의 영향을 알 수 있다.

야마다 신이치는 1928년에 프랑스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
그는 일본인 유학생 야마쿠치 카케오와 프세르, 피카르르도, 자드킨Ossip Zadkine(1890~1967), 로트Andre Lhote(1885~1962), 파브리Ralph Fabri(1894~1975), 키슬링Moise Kisling(1891~1953) 등 자유로운 분위기의 에콜 드 파리 화가들과 교류했다.
그는 후지타 츠쿠지의 소개로 마크 샤갈Marc Chagall(1897~1985)과도 알게 되었다.
그는 온건한 아카데미즘 화풍의 아마장Edmond Aman-Jean(1858~1936)으로부터 수학했는데, 아마장은 여성 인물화를 주로 그린 화가였다.
그는 야수주의 화가 블라맹크Maurice de Vlaminck(1876~1958)와 에콜 드 파리의 한 사람인 위트릴로Maurice de Utriloo(1883~1955)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1930년에 귀국한 후 그는 프랑스에서 제작한 작품으로 전람회를 열고 그 작품들을 제전과 선전에 출품했다.
1929년작 을 보면 에콜 드 파리의 일원이며 야수주의의 특색을 반영하는 키스 반 동겐Kees van Dongen(1877~1968)의 영향이 보여 그가 다양한 양식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일본 추상화의 선구자 야마쿠치 타케오는 1921년에 동경으로 가서 태평양연구소에 입소하고 이듬해에는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1927년 졸업 후 그는 프랑스에서 4년 동안 체류하며 리얼리즘 양식을 버리고 야마다 신이치, 사에키 유조, 오기스 고도쿠, 프랑스 조각가 자드킨과 교류하면서 추상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1931년 조선으로 귀국했다.
그는 1938년에 결성된 구실회九室會에 참가하여 김환기를 비롯한 조선인 화가와도 교류했다.
그는 1946년 일본으로 갈 때까지 경성에 살면서 거의 매년 니카텐에 출품했고 1935년에는 조선 재주자 이과전朝鮮在住者二科展에도 출품했다.

미키 히로시, 야마쿠치 타케오와 더불어 조선 화단에서 이과계 화가로 알려진 아라이 타츠오 역시 프랑스로 가서 1934년 10월부터 1936년 7월가지 체류하면서 야수주의 화가 뒤피Raoul Dufy(1877~1953)와 자드킨의 영향을 직접 받았다.
귀국 후에는 일본의 니카텐에 입선하여 긴자의 키노쿠니야紀伊國屋 화랑에서 개인전을 여는 한편 화단에 이채를 띠며 독자적 화풍을 전개했다.

프랑스 유학파 일본인은 조선에 귀국한 후 이전 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일본 화단에 진출했다.
조선 거주 일본인에게 선전은 유일한 발표의 장이었으므로 전람회의 주류를 따르지 않는 진보적·전위적 화풍을 취한 화가들은 더 이상 선전에 출품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은 대만미전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식민지 화단에는 일본의 권위주의적인 제전의 형식만 이식되었을 뿐 일본에서처럼 그에 대항할 만한 재야단체나 전람회가 뿌리를 내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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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고대로부터
 

물고기는 고대로부터 근동에서 '풍요의 상징'이었으나 이와 다른 의미의 물고기 상징도 있다.
인도의 아이요디아 지방에는 물고기의 표시가 건물 문설주 윗부분에 새겨져 있다.
이는 아이요디아의 표시, 즉 '선행의 화신'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인도의 아이요디아 지방은 옛 아유타 국으로서 한국 고대사의 가락국기에 나오는데 바로 김해 김씨의 시조인 김수로 왕의 왕후가 아유타 국의 공주로 적혀 있다.
현재 김해에 있는 김수로 왕릉에도 이 물고기의 표시가 있다.

카타콤에는 곡괭이가 그려져 있는데 창조와 십자가를 상징한다.
곡괭이는 선지자 이사야가 말한 쟁기와 동일하게 취급할 수 있는데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들은 검으로는 쟁기의 보습날을, 창으로는 낫을 벼리리라.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대적하여 칼을 뽑지 않을 것이니,
그들은 전쟁을 잊을 것이다.(이사야 2:4)

삼지창은 십자가를 비밀스럽게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것 같으며 삼위일체를 상징한다.
삼지창을 두 마리의 물고기와 함께 그리기도 했는데 삼지창은 그리스인에게 신 넵투누스Neptunus를 의미하며 크리스천에게는 사람을 낚는 어부인 그리스도를 뜻한다.

여러 형태의 닻anchor은 구원과 소망, 그리고 태초의 물 안에 멈추어 있음을 의미하며 굳셈과 충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유대교 신자와 크리스천 카타콤에서 이것이 발견되는데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리스도 안에 영혼의 닻을 내리는 것만이 영혼의 난파를 막는 일이다"(히브리서 6:19)고 했다.
현세 생활을 비유할 때는 '평탄한 항해, 안전한 정박'을 상징한다.
닻과 Chi(X)를 함께 사용하면 그리스도를 상징하게 된다.

알파와 오메가는 그리스어 알파벳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이므로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호칭을 뜻한다.
알파Alpha와 오메가Omega는 시작과 마침의 뜻으로 '영원하신 하나님'을 상징한다.
이는 다음의 구절과 관련이 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 곧 처음과 마지막이며 시작과 끝이다.(요한계시록 1:8, 21:6, 22:13)

십자가와 알파와 오메가를 함께 사용할 때는 오메가를 소문자로 사용하고 W자와 비슷한 이 소문자는 가운데가 솟아 있다.
올라온 종선 윗부분에 횡선을 하나 긋게 되면 이 부분이 십자 모양이 되면서 전체가 닻 모양이 된다.
따라서 오메가도 되고, 십자가도 되며, 닻도 되는 셈이다.
닻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또 다른 표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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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미술협회

히요시 마모루, 아사카와 노리타카, 토다 카즈오, 이시구로 요시카즈 등은 일본인을 위한 학교에서 도화를 가르쳤지만 조선인 학교에서 조선인 학생을 가르친 일본인 도화교사도 있었다.
경성 제이고등보통학교에서는 야마다 신이치山田新一(1899~1991)와 사토 쿠니오가 도화를 가르쳤으며, 이 학교 교장 타카하시 하마요시는 영국에서 유학한 영문학자로 미술에 관심이 많아 오랫동안 선전에 관여했다.
사토 쿠니오와 야마다 신이치는 동경미술학교 동기이자 바라몬샤의 동인이었다.
사토 쿠니오는 1942년 9월 병으로 쓰러질 때까지 제이고보에 근무하면서 학생들에게 피카소를 비롯한 입체주의, 야수주의 등을 가르쳤다.
그는 학생들의 작품을 모아 제이고보전이란 명칭으로 전람회를 개최하면서 자신의 작품을 비롯하여 히요시 마모루, 이시구로 요시카즈, 마에다 긴시치, 이토 아키우네, 타다 케이조 등 선전 작가들의 찬조 작품을 받아 함께 전시했다.
제이고보 출신으로 조선인 화가 중 사토 쿠니오의 제자는 유영국, 장욱진, 이대원, 권옥연, 김장옥, 임완규(1918~2003), 심형구 등이 있다.
이들은 그의 이름을 따서 구이회九二會를 만들었다.

임완규는 1943년 9월에 제국미술학교를 졸업했다.
그가 1943년 신미술가협회전에 출품한 작품에 관해 정현웅은 1943년 9월호 『조광』에 기고한 글에서 적었다.
“임완규 씨 <추秋> <토방土房> - 기대할 만한 분이다. 화면 전체를 통한 악센트가 일단 더 필요할 것 같은데 어떨지.”

임완규는 해방 후 국전 추천작가,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을 역임했으며, 1967~89년 홍익대 교수 및 회화과장을 지냈다.
1974년 제6회 대한민국예술대상 심사위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 밖에도 많은 일본인 남녀 미술학교 출신이 조선에서 도화교사로 근무했으며, 정식 교직 외에도 일반인을 위한 특별 강연이나 대학 강사를 맡은 화가들도 있었고, 개인 화숙을 중심으로 소그룹 형태의 미술연구 단체를 결성하여 활발하게 활동했다.
야마모토 바아카이가 1911년에 양화속습회를 결성한 이후 1915년에는 아마쿠사 신라이와 시미즈 토운, 타카키 하이스이가 조선미술협회를 창립하여 전람회를 개최했다.
조선미술협회는 내무장관 우사미 카츠오宇佐美勝夫를 회장으로 쿠도 소헤이, 김곡충을 간부로 두고 운영되었지만 오래 가지 않아 중심 인물의 교체로 해체되었다.
회원들은 다시 선우회仙友會를 조직하고 매월 작품감상과 휘호회揮毫會를 열었지만 이 역시 오래 가지는 못했다.
다양한 미술단체가 결성된 배경에는 선전의 개최로 미술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이 높아진 것과 더불어 조선에 이주한 일본인들의 생활이 안정되어 한층 미술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던 점을 꼽을 수 있다.

선전의 특선 작가들이 운영한 조선미술협회는 1925년 히요시 마모루, 토다 카츠오, 야마다 신이치를 중심으로 결성되었고 고문 겸 후원자로 총독부 학무국장 이진호와 식산은행의 와다 이치로를 두고 그 집의 응접실을 회원들의 아틀리에로 사용했다.
그들의 가장 주된 활동은 일반인 대상의 회화강습이었으며 학습과정은 목탄 사생부, 인체부, 유화부, 수채부로 이루어졌다.
조선미술협회에서 야마다 신이치와 토다 카츠오로부터 지도받은 학생 중에는 선전의 여류화가가 된 마츠자키 키미와 오오츠카 요시가 있다.
학생들 중에는 일본인 외에 조선인과 중국인도 있었고, 조선인 학생 중에는 여류화가 백남순과 후에 동경미술학교로 유학을 가서 후지시마 타케지(1867~43)로부터 수학한 이마동이 있다.
조선미술협회는 세 차례의 전람회를 연 후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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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미술의 온상 카타콤 
 

초기 기독교 미술품이 대부분 현존하지 않으므로 언제, 어디서, 어떻게 기독교 미술이 진전되어 왔는지 알 수 없지만 로마의 지하묘지 카타콤에 많은 벽화가 남아 있다.
지하묘지는 로마시 외곽에 있는데 로마법에는 시신을 시 밖에 안장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묘지는 처음에는 동일한 깊이로 터널식으로 파서 만들어졌지만 면적이 충분하지 않게 되자 아래로 연결해 9m에서 15m까지 깊게 파서 터널을 연결시켰다.
그러니까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터널이 가장 먼저 만들어진 묘지가 되는 것이다.
시신은 상자에 넣어 벽안에 매장하고 석판이나 벽돌로 덮었고 글을 새겨넣기도 했다.
글은 주로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적혀 있는데 크리스천들의 국적이 여러 나라였음을 말해준다.
부자들은 방을 따로 만들어 벽을 그림으로 장식했다.
사람들은 매년 터널을 따라 친분이 있는 묘지를 찾아 가서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로마 시 주위에서 발견된 카타콤은 45개인데 1950년에 새로 발견된 것도 있으며 앞으로 더 발견될 수도 있다.
특히 로마로 통하는 대로 압비아via Appia로 근처에는 무려 15개가 밀집되어 있다.
카타콤은 로마에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지하에 바위를 뚫고 묘실을 만들어 시신을 안치하는 장례법은 고대 여러 나라에서도 행해졌다.
나폴리Naples와 시라큐스Syracuse 그리고 동로마에도 카타콤은 있었으므로 카타콤을 로마인의 특이한 묘지형태라고 말할 수는 없다.
몰타 섬이나 소아시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도 고대 카타콤이 발견된다.
하지만 로마에서처럼 무더기로 발견된 곳은 없다.

19세기 이탈리아의 고고학자 데 로시De Rossi는 평생 카타콤을 연구했고 오늘날까지 그 연구가 이어지고 있다.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로마 외곽에 카타콤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게 된 것은 크리스천이 순교자들을 카타콤에 안장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기독교가 박해를 받게 되자 순교자들의 수가 늘어났고 따라서 카타콤의 규모를 확장할 수밖에 없었다.
성 칼리스토 카타콤의 길이는 무려 20km에 달한다.

카타콤은 크리스천의 전용 묘역은 아니었지만 대부분의 크리스천이 사용했다.
230년과 310년 사이에 로마교회의 주교(교황)들 가운데 두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카타콤에 묻혔다.
이는 카타콤이 로마의 초대 교회 크리스천들의 보편적 장례지였음을 말해준다.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 카타콤은 더욱 더 크리스천의 묘지로 확고해졌으며 규모도 커졌다.
교황은 카타콤 안에 예배당을 만들기도 했는데 300년대 후반에 도미틸라Domitilla 카타콤에 만든 지하 예배당은 길이가 31m에 폭이 17m나 되었다.
이것은 순교자 에리무스와 아키레우스를 기념하기 위한 예배당이었다.
500년 이후로는 카타콤은 거의 매장지로 사용되지 않았고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카타콤이 지하에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게 되었다.
그러다가 16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우연히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로마의 카타콤은 200년경에 만들어졌는데 250년경 이전에는 그곳에 벽화를 그리지 않았던 것 같다.
카타콤에 시신을 묻지 않게 된 것은 5세기 초였으며 교회는 크리스천의 유골을 보관하는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카타콤의 벽화를 보면 예술가의 솜씨가 아님을 알 수 있으며 가난한 사람들이 전통적인 상징을 사용해서 그린 것들이다.
크리스천들의 벽화는 서양미술사에 새 장을 열었지만 시각적인 구성법은 당시 알려진 로마인과 그리스인의 방법들과 다르지 않았다.
기본 주제는 낙원을 꿈 꾸는 구원으로 한결 같았지만 종교가 달랐으므로 이방인과 크리스천의 상징의 의미는 달랐다.
구원이란 주검에서 벗어나 영생하는 걸 의미했다.

카타콤에는 물고기가 장식되어 있는데 물고기는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물고기는 기원전 597년 유대인이 포로가 되어 바빌론으로 끌려갔던 시절부터 이스라엘 민족이 고대해온 메시아(그리스도와 같은 말로 유대어이다)를 상징한다.
크리스천은 물고기를 상형문자처럼 사용했는데 물고기는 그리스어로 이크투스Ichtus로서 '예수Jesus 그리스도Christus, 하나님의Dei Deus 아들Filius 구세주Salvator'의 머리글자들이다.
물고기를 상징물로 사용할 때는 독립적으로 한 마리를 사용하지만 십자가를 곁들여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물고기는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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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일보』와 『매일신보』

일본인 화가들의 조선 이주를 더욱 촉진시킨 것이 조선미술전람회(선전)의 개최와 일본인 도화교사의 채용이었다.
총독부가 조선 거주 인본인 화가들에게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1922년에 개최한 선전은 명성을 얻으려는 일본인 화가들로 북새통을 이루었으며, 많은 신설 학교에서 일본인 도화교사를 채용한 것도 일본 미술학교 졸업자들로 하여금 조선으로 오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총독부뿐만 아니라 그 산하 언론기관도 조선으로 이주해 오는 일본인들에게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
대만총독부 기관지 『대만일일신보』, 만주철도주식회사의 기관지 『만주일일신문』과 더불어 일본 3대 식민 신문으로 조선총독부에 예속되어 식민 통치정책을 선전·정당화하던 『경성일보』는 각 공공기관과 조선 거주 일본인과 일부 지식층의 조선인에게 폭넓게 구독된 신문이었다.

『경성일보』는 본국 및 식민지의 정치·경제 기사 외에도 문화를 상당히 다루었는데, 내용은 주로 일본 화단의 동향과 조선 거주 일본인 화가들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자매지 『매일신보』와 더불어 지면에 야마시타 히토시山下鈞(1882~1958), 츠루다 고로鶴田吾郞(1890~1969), 마에카와 센판前川千帆(1888~1980)과 같은 일본인 화가들과 김인승을 비롯한 일부 조선인 화가의 삽화를 실었다.
필명 다전생多田生으로 알려진 타다 케이조도 경성일보 문화부 기자로 일하면서 문화 관련 좌담회와 미술평론, 삽화를 실었다.
조선에 이주한 일본 화가들이 활동하는 여건이 좋았던 것은 전람회가 경성일보사의 래청각, 삼월백화점, 삼중정, 총독부 도서관 등지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조선에 설립된 대부분의 일본인과 조선인 학교에서는 필수로 도화를 가르쳤으며 상당수의 학교가 도화교사로 일본인을 채용했으므로 많은 미술학교 출신이 조선으로 와서 거주하게 되었다.
특히 동경미술학교 출신이 인맥을 형성하고 선후배를 조선에 오게 했다.
동경미술학교 출신으로 고지마 겐사부로兒島元三郞와 히요시 마모루日吉守가 1906년에 관립 한성사범학교에 와서 도화강습과와 1909년 설립된 경성중학교(현 서울고등학교) 도안과에 각각 교사로 부임했다.
히요시는 경성중학교에서 일제시대 말까지 재직하면서 1923년부터 조선미술심사위원회의 서기도 역임했다.
경성중학교는 조선 거주 일본인과 소수의 조선인 학생이 다니던 학교로 중학교 5년 과정에 일주일에 한 시간씩 도화를 가르쳤다.
히요시로부터 수학한 학생 중에는 일제시대 후기에 조선 화단에서 활동한 와타나베 코조渡邊浩三와 야마쿠치 타케오山口長男(1902~83) 등이 있다.

동경미술학교 출신 토다 카즈오遠田運雄(1891~1955)는 1921년 봄에 서울로 이주하여 1923년 원산중학교 도화교사로 근무했다.
그는 1925년경 용산중학교(현 용산고등학교)로 근무지를 바꾸고 1929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날 때까지 도화를 가르쳤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 1939년 봄부터는 숙명여자전문학교(현 숙명여대)에 강사로 근무했다.
동경미술학교 출신 이시구로 요시카즈石黑義保가 토다 카즈오의 후임으로 1929년 봄 용산중학교에 도화교사로 왔는데 그는 김찬영과 함께 1917년에 졸업한 동기생이었다.
동경미술학교 출신 외에도 많은 화가들이 조선으로 와서 도화교사로 재직했는데, 도자기 연구가이며 화가 겸 조각가 아사카와 노리다카淺川伯敎(1884~1964)가 1913년 5월에 경성 남대문 공립 심상소학교에 부임했다.
그는 이듬해에 신설된 서대문 공립 심상고등소학교로 전근한 동시에 경성중학교 부속소학교 교원양성소에서 교육실습지도를 맡아 그림, 수공예, 조각, 도기제작의 지도를 맡았으며, 동생 아사카와 타쿠미淺川巧(1891~1931), 야나기 무네요시와 함께 조선 공예와 도자기를 연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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