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일보』와 『매일신보』

일본인 화가들의 조선 이주를 더욱 촉진시킨 것이 조선미술전람회(선전)의 개최와 일본인 도화교사의 채용이었다.
총독부가 조선 거주 인본인 화가들에게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1922년에 개최한 선전은 명성을 얻으려는 일본인 화가들로 북새통을 이루었으며, 많은 신설 학교에서 일본인 도화교사를 채용한 것도 일본 미술학교 졸업자들로 하여금 조선으로 오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총독부뿐만 아니라 그 산하 언론기관도 조선으로 이주해 오는 일본인들에게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
대만총독부 기관지 『대만일일신보』, 만주철도주식회사의 기관지 『만주일일신문』과 더불어 일본 3대 식민 신문으로 조선총독부에 예속되어 식민 통치정책을 선전·정당화하던 『경성일보』는 각 공공기관과 조선 거주 일본인과 일부 지식층의 조선인에게 폭넓게 구독된 신문이었다.

『경성일보』는 본국 및 식민지의 정치·경제 기사 외에도 문화를 상당히 다루었는데, 내용은 주로 일본 화단의 동향과 조선 거주 일본인 화가들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자매지 『매일신보』와 더불어 지면에 야마시타 히토시山下鈞(1882~1958), 츠루다 고로鶴田吾郞(1890~1969), 마에카와 센판前川千帆(1888~1980)과 같은 일본인 화가들과 김인승을 비롯한 일부 조선인 화가의 삽화를 실었다.
필명 다전생多田生으로 알려진 타다 케이조도 경성일보 문화부 기자로 일하면서 문화 관련 좌담회와 미술평론, 삽화를 실었다.
조선에 이주한 일본 화가들이 활동하는 여건이 좋았던 것은 전람회가 경성일보사의 래청각, 삼월백화점, 삼중정, 총독부 도서관 등지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조선에 설립된 대부분의 일본인과 조선인 학교에서는 필수로 도화를 가르쳤으며 상당수의 학교가 도화교사로 일본인을 채용했으므로 많은 미술학교 출신이 조선으로 와서 거주하게 되었다.
특히 동경미술학교 출신이 인맥을 형성하고 선후배를 조선에 오게 했다.
동경미술학교 출신으로 고지마 겐사부로兒島元三郞와 히요시 마모루日吉守가 1906년에 관립 한성사범학교에 와서 도화강습과와 1909년 설립된 경성중학교(현 서울고등학교) 도안과에 각각 교사로 부임했다.
히요시는 경성중학교에서 일제시대 말까지 재직하면서 1923년부터 조선미술심사위원회의 서기도 역임했다.
경성중학교는 조선 거주 일본인과 소수의 조선인 학생이 다니던 학교로 중학교 5년 과정에 일주일에 한 시간씩 도화를 가르쳤다.
히요시로부터 수학한 학생 중에는 일제시대 후기에 조선 화단에서 활동한 와타나베 코조渡邊浩三와 야마쿠치 타케오山口長男(1902~83) 등이 있다.

동경미술학교 출신 토다 카즈오遠田運雄(1891~1955)는 1921년 봄에 서울로 이주하여 1923년 원산중학교 도화교사로 근무했다.
그는 1925년경 용산중학교(현 용산고등학교)로 근무지를 바꾸고 1929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날 때까지 도화를 가르쳤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 1939년 봄부터는 숙명여자전문학교(현 숙명여대)에 강사로 근무했다.
동경미술학교 출신 이시구로 요시카즈石黑義保가 토다 카즈오의 후임으로 1929년 봄 용산중학교에 도화교사로 왔는데 그는 김찬영과 함께 1917년에 졸업한 동기생이었다.
동경미술학교 출신 외에도 많은 화가들이 조선으로 와서 도화교사로 재직했는데, 도자기 연구가이며 화가 겸 조각가 아사카와 노리다카淺川伯敎(1884~1964)가 1913년 5월에 경성 남대문 공립 심상소학교에 부임했다.
그는 이듬해에 신설된 서대문 공립 심상고등소학교로 전근한 동시에 경성중학교 부속소학교 교원양성소에서 교육실습지도를 맡아 그림, 수공예, 조각, 도기제작의 지도를 맡았으며, 동생 아사카와 타쿠미淺川巧(1891~1931), 야나기 무네요시와 함께 조선 공예와 도자기를 연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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