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순과 김용준

윤희순과 김용준은 한국미를 발견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구체적으로 전승시키는 방법에 관심이 많았다.
김용준은 1940년 1월 14일자 『동아일보』에 ‘전통에의 재음미’란 제목의 글에서 전통 계승을 가장 가까운 시대에서부터 그 연원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에게 제일 가까운 거리는 역시 조선에 있다.
조선의 예술은 그것이 회화이든, 자기이든, 혹은 목공품이든 어느 것 할 것 없이 모조리 우리의 향토성을 잘 전해주는 전통이요, 가장 믿음성 있는 유산인 것이다.
… 다시 한 번 자기에로 돌아와 우리의 전통을 음미하고 연구하는 것은 신시대의 미술을 창조하는 유일의 소화제일 것이다.”

김용준은 1947년에 출간한 『조선 미술 개요』 서문 ‘한국 미술은 어떠한 것인가’에서 적었다.
“다만 국경이 없는 미술이라 할지라도 그 민족의 미술이 아름답다는 것은 그 민족다운 특이한 민족성이 나타났다는 점에서 아름다운 것이다.
한국 미술이 아름답다는 것도 한국 민족의 특색이 미술작품을 통하여 여실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아름다운 것이니 … 한국 민족도 미술에는 천재적인 소질을 타고난 민족이라 수천 년 동안에 만들어진 미술품들이 우수한 것은 물론, 작은 미술품에 이르기까지 실로 버릴 수 없는 아름다운 맛을 지니고 있다.
선이나 형이나 모두가 부드럽고 구수하다.
그리고 어리석고도 아름답다.
… 구수하고 시원스럽고 어리석고 아담한 구석이 있는 것이어야 우리에게 무한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특색은 어느 나라 미술보다도 한국 민족의 미술에 가장 많이 나타나 있다.”

이여성은 1941년 잡지 『춘추』 7월호에 실릴 조선 미술의 장래에 관해 미술가와 이론가들 이상범, 고희동, 길진섭, 이쾌대, 문학수, 최재덕 등의 의견을 묻는 앙케트에서 조선 미술의 특징은 무엇이며 앞으로 보완해야 할 점이 무엇인지 묻는 항목에 ‘조선 신미술 문화 창정 대평의’란 제목의 글로 응답했다.
그는 이조시대 말엽의 퇴폐된 미술만을 보지 말고 삼국시대에 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각 시대에 나타난 특징을 보고 향토미술이 무엇인지 알고 향토색을 존중할 때 비로소 생명의 예술을 행위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삼국시대의 웅경雄勁함과 통일시대의 화미華美함과 고려시대의 정치精緻함과 이조시대의 소담素淡함이 다 그 시대적 특징들일 것입니다.
이 땅에서 생겨날 미술은 그러한 시대적 특징을 혼일渾一 대성한 것이라야 될 것입니다.
혹은 화려하면 웅경치 못하고, 소담하면 정치치 못하기도 쉬울 듯하나 이 모든 것은 능히 혼일되어 단원을 지울 수 있는 미술의 기본적인 속성들일 것이외다.
… 향토미술에도 참으로 그 향토적 ‘에센샬 캐릭터’를 표현코저 함에는 그 모든 시대적 특징을 꼭 살려나가야 될 것입니다.

이제 내가 말한 것은 극히 추상적이나 조선 미술가 여러분의 노력 여하에 따라 능히 발현할 수 있는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조, 특히 말엽 이조의 퇴폐된 미술만을 보고 이 땅의 미술적 성격을 운운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으로만 자가自家의 예술적 책임인 것처럼 생각한다면 그는 역사적 근안자近眼者일 것입니다.
여기에 이 땅 향토미술이 도리어 때묻은 쉬운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어제보다 지난해의 기억을 더듬기가 물론 어려운 일이겠지만 어제부터 살아온 것이 아니요 지난해부터도 살아왔다면 그 때 일도 더듬어보아야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 미술의 향토적 특징은 쇼윈도에 진열되어 있는 귀여운 진주가 아니라 백길 물 속 진주패 딱지 속에 숨어 있는 진주일 것입니다.
용감하게 뛰어들어 건져보지 않고는 그 광휘를 모를 것입니다.
이것은 조선 미술가 제씨에게 어려운 주문이지만 어려운 일인 만큼 또 흥미로운 일이겠지요.

예술가는 그 독성獨性을 존중하는 것같이 그 향토색을 존중해야 거짓 없는 예술, 뼈 있는 예술, 생명의 예술이 탄생할 것입니다.
이것을 살려가야 되느냐 하는 것은 벌써 문제가 아니요, 어떻게 살려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겠지요.
부지런한 탐구의 노력!이 있느냐 없느냐 … 에 달렸을 것입니다.
조선의 미술가는 전람회에 가는 도수만큼 박물관, 미술관, 참고관, 도서관을 찾아야 될 것입니다.
또 그 당국자는 매양 두드리는 자를 반갑게 맞아주어야 될 것입니다.”

조선 미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자연히 한국화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한국화에 대한 논의는 1928년 조선일보의 후원으로 결성된 김주경의 녹향회綠鄕會와 1930년 동아일보의 후원으로 결성된 동미회東美會에 의해 더욱 뜨거워졌다.
녹향회는 동경미술학교 출신들로 구성되었고 설립 취지는 심영섭의 ‘아세아주의 미술론’에 근거하지만 제2회전에 심영섭은 빠지고 오지호가 회원으로 가입하면서 녹향회의 취지가 선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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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가 문화의 요람이 된 것은 
 

아테네가 문화의 요람이 된 것은 페르시아와 두 차례 전쟁을 치룰 때였다.
기원전 490년과 480-79년이었다.
그 이전에는 이탈리아와 시실리 남쪽에 있는 도시 아이오니아Ionia에서 주로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마라톤Marathon 전쟁(기원전 490년)에서 승리하고 그리스의 함대가 페르시아의 다리우스를 뒤를 이은 그의 아들 세르세스Xerxes를 격파한(기원전 480년) 후부터 아테네에는 황금기가 시작되었다.
섬에 거주하던 아이오니아인과 소아시아의 일부 그리스인이 페르시아를 보복하자 페르시아군은 그리스 본토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에 스파르타인은 자신들의 영토를 지키기에 급급했다.

아테네는 페르시아를 칠 때 함정을 제공했으므로 전쟁 후 함정들을 상선으로 사용하면서 교역에 전력했다.
페리클레스Pericles는 지혜가 있는 왕으로 기원전 430년까지 30년 동안 선정을 베풀었으며 부를 아테네 도시 전체를 장식하는 데 사용했다.
이 30년은 그리스 역사상 가장 풍요롭고 평화로운 시대가 되었다.
세르세스가 아테네를 점령했을 때 아크로폴리스Acropolis에 있는 사원들에 불을 질렀는데 페리클레스가 재건했으며 현제 파손된 대로 남아있는 웅장한 파르테논Parthenon 신전과 그 밖의 사원들은 그가 건축한 것들이다.
페리클레스는 조각가 파이디아스Pheidias를 고용하여 남신과 여신들을 만들게 했으며 아테네는 그리스인들이 사는 곳들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중심이 되었다.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헤로도토스Herodotus는 소아시아 사람이지만 아테네에 거주하고 있었고 아테네인의 입장에서 본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기록으로 남겼다.
기원전 430년 당시 아테네의 시민과 노예는 모두 23만 명이었다.

아테네가 배출한 철학자들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젊은시절을 페리클레스 시대에 보냈고 플라톤은 조금 후의 사람이다.
페리클레스가 아낙사고라스Anaxagoras를 아테네로 불러들였는데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그로부터 배웠다고 했다.
플라톤은 귀족출신이었다.
페리클레스가 사망할 때(기원전 430년)까지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권력을 가진 귀족 중심이었다.
스파르타는 기원전 431년부터 404년까지 아테네를 침공했으며 아테네는 결국 전쟁에서 패했다.
그러나 플라톤이 아테네에 상경한 아리스토텔레스를 제자로 삼으면서 두 사람이 아테네를 철학의 도시로 만들었다.
서양의 사상은 이 두 사람으로부터 거대한 두 줄기 강물로 흐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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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섭이 조선미의 특징으로 꼽은

김임수는 논문 <한국 미술과 미학적 문제영역 - 고유섭을 중심으로>에서 조선 미술의 미적 형식의 특질을 보는 고유섭의 시각은 서구 근대 미학적 시야에 근거했다면서 “‘비정제성’이나 ‘비균제성’이라고 하는 파형적破形的 특질들마저도 그것이 미적일 수 있는 가능성은 ‘상상력과 구성력의 조화’에 있어서 소재와 형식이 그렇게 결합됨으로써 하나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형성적形成的 진실과 현상적現象的 필연에 근거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상상력과 구성력의 조화가 미적 형식성립의 불가결의 두 조건이라는 교유섭의 미학적 시야의 근간을 김임수는 칸트I. Kant의 ‘구상력의 자유로운 유희 freies Spiel der Einbildungskraft’와 그 ‘유희’ 개념에 근거한 쉴러F. Schiller의 ‘유희충동 Spieltrieb’의 개념과 관련지었다.
대상이 현재 없더라도 그 대상을 직관 안에 표상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칸트가 말한 ‘구상력 Einbildungskraft’을 김임수는 고유섭 지적한 상상력과 동일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고유섭이 말한 구성력을 쉴러의 ‘유희충동’, 즉 우리 속에 있는 필연적인 것에 현실성을 부여하고, 우리 밖에 있는 현실적인 것을 필연성의 법칙에 종속시킨다는 이중二重의 과제를 완수하기 위해 우리를 촉구하는 두 개의 대립된 힘과 동일한 것으로 보았다.

고유섭이 조선 미의 특징으로 꼽은 상상력·구성력을 윤희순은 “웅혼한 구상 아래 미를 포용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윤희순은 우리가 전승해야 할 대표적인 것들로 고구려 시대의 벽화, 신라 시대의 화강암 예술, 고려자기, 목기, 나전과 화각 장식, 자수, 초상화, 단원·현제·오원의 회화와 완당의 서를 꼽으면서 이런 것들에 나타난 한국미를 한국의 자연과 연관시켜 1946년에 출간한 『조선 미술사 연구』에 적었다.

“이와 같은 예술을 완성시킨 자연적인 환경으로서 맑은 하늘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반도의 공기는 건조하기 때문에 맑은 하늘일 때는 마음껏 맑고 한 점 구름 없는 가을 하늘은 청정무구함 그 자체이다.
그 하늘에서 받은 미감은 두 가지라 할 수 있는데, 그 하나는 청초함을 좋아하는 것이다.
이것은 의상과 실내에 가장 잘 나타나 있고 아취, 소박 등의 파생적인 미를 부여해준다.
그 두 번째는 극명한 양광 아래에서 얻은 구성적인 미감이다.
… 이상과 같은 반도의 미는 결코 색채 본위의 감각적인 미가 아니다.
또한 대량 본위의 의지적인 미가 아니라 본질적인 형태와 선으로 구성된 예지가 빛나는 미이며 감정이 세련된 미이다.
단순히 달콤한 것이 아니고 요설로 흐르지 않으며 끊임없이 변화와 오묘한 조화로써 웅혼한 구상 아래 미를 포용하는 미의 완성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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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페도클레스 
 
마지막으로 7명의 고대 그리스 현인들 중 엠페도클레스Empedocles가 있다.
그는 철학자, 예언자, 과학자, 그리고 야바이꾼으로 기원전 440년에 활약했다.
그는 시실리 남쪽 아크라가스Acragas의 시민이었다.
그를 야바이꾼이라고 하는 이유는 민주주의 정치가로 자처하면서도 자신을 신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그리스인이 거주하던 도시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시실리에서도 전제주의와 민주주의의 싸움은 잦았으며 싸움의 선두에 선 사람들은 보통 처형되거나 도시 밖으로 쫒겨났다.

엠페도클레스는 쫒겨났고 쫒겨난 후부터는 예언자로 행세했다.
그는 경이로운 일들을 시위했는데 때로는 마술을 부렸고 때로는 과학적 지식에 근거해서 시위했다.
예를 들면 자석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자석을 이용해서 시위를 하면 사람들에게 경이로운 일을 하는 사람, 즉 예언자로 보일 수 있다.
전래되는 이야기로는 그가 바람을 조정했으며 사흘 전에 죽은 여인을 살려냈다.
그는 자신이 신이라는 점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에트나Etna에 있는 화산 분화구crater 속으로 뛰어들었다고 한다.
신이라도 분화구 속에서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몸이 녹아버렸을 것이다.

이런 시가 전래된다.
"위대한 엠페도클레스,
열렬한 혼 에트나에 뛰어들었고
온몸이 구워졌다(roasted)."

이 시를 쓴 시인의 상상력에는 문제가 있는데
분화구 속에서는 구워지는 정도가 아니라 녹아버렸을 것이다.

과학적 그의 발견에는 공기를 나눌 수 있는 물질이라고 말한 것도 포함된다.
그는 양동이를 거꾸로 물 속으로 담그면서 물이 양동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시위하면서 공기를 나눌 수 있음을 증명했다.
그는 양동이를 약간 들어 공기가 빠져나가면서 물이 영동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여주면서 공기가 나뉘어졌다가 사라짐을 설명했다.
그는 또 컵의 물을 막대기로 휘저으면서 물이 밖으로 흐르지 않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는 식물도 섹스를 한다면서 진화를 말했으며 가장 적당한 것이란 현재 잔존하는 것이라고 했다.

엠페도클레스는 달이 빛을 반사한다고 했고 태양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는 빛이 지나가는 데는 시간이 소요되지만 워낙 빨라 우리가 관망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일식이란 달이 가로막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과연 그의 우주에 대한 관찰은 놀라웠다.
그는 이탈리아에 의학 학파를 결성했으며 그의 학파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는 우주의 원소로 먼지, 공기, 불, 물 네 가지를 꼽았다.
불교에서 말하는 水地火風 네 가지를 기본 원소element로 꼽은 것이다.
그는 만물이 이 네 원소들의 적절한 비율로의 구성이라고 했다.
그는 네 원소들이 사랑love에 의해서 혼용되고 다툼strife에 의해서 나눠진다고 했다.
이런 변화는 어떤 목적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필요와 우연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Love와 Strife의 관계에는 주기가 있으며
모든 물질은 일시적으로 존재하고
네 가지 원소들만 love와 strife와 더불어서 영원하다고 했다.

Strife만으로는 헤라클리터스와 유사한 이론이지만 love와 함께 변화의 이론을 정립했다.
그는 물질세계를 구체sphere로 보고
가장 바람직한 때로 strife가 밖에 있고 love가 안방을 차지할 때이며 strife가 안방으로 들어오게 되면 love는 안방에서 밀려나게 된다고 했다.
최악의 경우는 strife가 안방을 차지하는 것으로 love는 구체가 없는 상태가 된다.

엨페도클레스의 종교관은 피타고라스의 것을 따르고 있다.
그는 어떤 때는 신처럼 당당했지만 어떤 때는 자신이 대단한 죄인인양 수그러졌다.
그는 다음과 같은 계명을 말했다.
월계수잎을 먹지 말라.
가련한 사람, 매우 가련한 사람, 콩에는 손도 대지 말라.
그는 세상을 동굴에 비유하면서 우리는 오직 동굴 속에서 그림자만을 볼 뿐이며 동굴 밖에 실재 세계가 있다고 했다.
이런 가르침을 플라톤이 받아들여 저서 <공화국 Republic>에서 동굴의 비유를 들었다.

엠페도클레스의 철학, 즉 사상은 파르메니데스,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보다 오히려 진보적이고 과학적이었다.

이상으로 7명의 고대 그리스 현인들의 이야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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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섭은 감각적·심리적·정서적으로

고유섭은 조선 건축물이 수학적으로 산술되게 지어지지 않고 멋을 부렸다면서 멋이란 “행동을 통해 나타나는 다양성의 발휘” 혹은 “다양성·다채성多彩性으로의 기교적奇巧的 발작”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그 멋은 “무중심성, 무통일성, 허랑성虛浪性, 부허성浮虛性이 많은 것이어서 일종의 농조弄調는 있을지언정 진실된 맛이 적은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얄상궂고 천박하고 교혜로운 점”이 없는 소박성을 전통의 특성을 꼽으면서 이조 백자에서는 구수한 맛이 풍겨난다면서 ‘조선 미술 문화의 몇 낱 성격’에서 야나기의 ‘비애의 미’와는 전혀 다른 주장을 폈다.

구수하다는 것은 순박, 순후한 데서 오는 큰 맛으로 예리, 규각, 표열 등에서는 오지 않는 맛이다.
그것은 심도에 있어 입체적으로 온 축 있는 맛이며 속도에 있어 질속과 반대되는 완만한 데서 오는 맛이다.
따라서 얄상궂고 천박하고 교혜로운 점은 없다. 이러한 맛은 신라의 모든 미술품에서 현저히 느낄 수 있는 맛이나 그러나 조선 미술 전반에서 느끼는 맛이다.
이것이 미술적 승화를 못 얻었을 때 그것은 텁텁하고, 무디고, 어리석고, 지더리고, 경계 흐리고, 심하면 체면 없고 뱃심 검을 꼴이 된다.
이와 대칭되는 개념으로 고수하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적은 것으로의 응결된 감정이니 예컨대 이조 백자의 색채 같은 데서 그 구체적 예를 볼 수 있다.
외면적으로 일견 단순한 백일색에 불과하지만 여러 가지 요소의 안으로의 응집 빙결된 특색이니 저 구수한 맛이란 것이 내외 없이 혼연한 풍미를 이루고 있는 것임에 대하여 이것은 안으로 응집된 풍미이다.

고유섭은 온아하고 단아한 점이 한국 미술품이 지니는 특성으로 꼽으며 같은 글에서 적었다.
“온아, 단아는 다시 색채적 일면에 있어 다채적이어서는 아니 된다.
즉 멋쟁이여서는 아니 된다.
그것은 질박, 담소, 무기교의 기교라야 한다.
… 색채적으로 조선은 다른 모든 나라에 비하여 매우 단색적이다.
그 곳에 순박성이 보이지만 이것이 일전하여 적조미의 일면으로 나온다.
감각적으로 단채적이나 또한 명랑한 것은 담소한 것인데 그것은 정서적으로 적료에 치우치기 쉬운 것이다.
적료의 예술화된 것을 필자는 일찍부터 적조미 또는 적미라는 술어로서 형용하였는데 이것은 순전히 감각적이요 심리적이요 정서적인 것으로서 조선 미술의 커다란 성격의 하나이다.”

고유섭은 감각적·심리적·정서적으로 절로 우러나는 은은한 맛이 조선 고유의 미라고 주장했다.
고유섭은 서른아홉 살에 타계했고 그의 사상을 물려받은 제자 최순우(1916~84)는 간소미簡素美를 고유의 미로 꼽았다.
그는 1963년에 발표한 글 <우리의 미술>에서 조선 백자를 예로 들어 간소미를 기술했다.
“의젓하기도 하고 어리숭하기도 하면서 있는 대로의 양심을 털어놓은 것, 선의와 치기와 소박한 천정天定의 아름다움, 그리고 못생기게 둥글고 솔직하고 정다운, 또 따뜻하고도 희기만한 빛, 여기에는 흰 옷 입은 한국 백성들의 핏줄이 면면이 이어져 있다.
말하자면 방순芳醇한 진국 약주 맛일 수도 있고, 털털한 막걸리 맛일 수도 있는 것, 이것이 조선 자기의 세계이며, 조선 항아리의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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