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호는 녹향회가 단명한 데


녹향회는 일제의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 되었고 결국 두 차례의 전람회를 연 후 해산되었다.
오지호는 녹향회가 단명한 데 대해 좌절감을 느끼고 1928년부터 매년 출품했던 선전에 1932년부터는 출품하지 않았다.
1935년 개성의 송도고보 교사로 취임한 그는 그곳 자연에 매료되어 의욕을 갖고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해방이 될 때까지 그곳에서 광선과 색채의 유기적인 관계를 그림으로써 김윤수의 말로 ‘한국 인상주의 운동의 정통’을 이루게 되었다.
『오지호·김주경 2인화집』은 이 시기 그의 작품 경향과 이론적 성과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이다.
1938년 그가 김주경과 함께 경비를 부담하여 발간한 이 원색화집은 당시 일본 최고 수준의 석판인쇄술로 제작한 것으로 호화롭고 질적으로 뛰어난 책이다.
이 책에는 오지호, 김주경의 작품이 각각 10점씩 수록되었는데 대부분 1935~37년에 제작한 것들이다.
초기 작품 <시골 소녀>(금성 오지호 6)도 이 책에 수록되었다. 이 책 뒤에 그의 ‘순수회화론’이 게재되어 있는데 빛에 대한 관심을 알 수 있다.

“회화는 빛의 예술이다.
태양에서 생겨난 예술이다.
회화는 태양과 생명과의 관계요, 태양과 생명과의 융합이다.
그것은 빛을 통해서 본 생명이요, 빛에 의해서 약동하는 생명의 자태다.
… 회화는 유동하는 생명의 한 순간에 있어서의 전적全的 상태이다.
활동하는 생명 전부의 동시적 상태이다. 환언하면 순간에 있어서의 생명의 전 상태를 영원화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탄생된 회화는 탄생된 그 때의 상태대로 영원히 존재하고 탄생된 그 상태로 영원히 활동한다.”

정규는 1975년 『한국의 근대미술』에 기고한 ‘한국 양화의 선구자들’에서 오지호에 관해 적었다.
“대부분의 화가들은 어떠한 개념적인 설명을 통해서 우리나라의 자연을 그려보려고 하였다.
… 그러나 오지호의 경우에 있어서는 비로소 우리나라의 자연을 조형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조형의 방법을 인상주의적인 기법으로써 통일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때문에 오지호 그림의 화려한 색채는 단순히 장련의 설명에 그치지 않고 화면을 구성하는 조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는 평론으로 화단에 큰 반향을 자아내기도 했는데, 1939년 5월 『동아일보』를 통해 연재된 <현대 회화의 근본 문제> 중에서 ‘피카소와 현대 회화’는 입체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았다.
피카소의 반회화적 미술 형식은 추종자들에 의해서 순수추상, 즉 장식미술로 발전한 반면 회화예술에 끼친 해악은 실로 심각하고 참혹하다고 비판했다.

그는 해방 후 한때 김주경과 함께 조선미술가동맹에서 활동한 전력이 문제가 되어 투옥되었고, 6·25동란이 발발하자 그는 분단 모순과 반공 이데올로기에 부딪쳤다.
6·25동란이 그에게 안겨 준 또 다른 시련은 전쟁 중 동복 집에 소장했던 초기부터의 모든 작품이 한 점도 남지 않고 소실된 것이다.
현존하는 것들은 친척친지들이 보관했던 소수의 작품이다.
휴전이 되자 여러 사람들의 노력으로 출옥한 그는 1940년부터 시작한 조선대 미술과에 다시 출강했다.

1960년대의 그의 그림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는데 밝고 정돈된 화면은 사라지고 대신 색의 대조와 리듬이 강조되었으며 거친 필촉과 재질감이 두드러졌다.
자연을 조형의지로 추상화하여 재구성하려는 강한 의지가 나타났다.
그는 1956년 8월 『조선일보』에 기고한 ‘데포르메론’에서 적었다.
“회화는 물론 자연 이상의 것을 만드는 것이 그것의 목적이요, 또 존재 이유다.
그런데 … 자연보다도 불리한 조건하에서 자연 이상의 것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그러기 위해서는 자연에는 없는, 회화만이 가질 수 있는 어떤 방법에 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유일한 방법이 ‘데포르메’이다. 회화는 ‘데포르메’에 의해서만 우리들의 정신으로 하여금 현실의 자연과는 별개의 자연, 새로운 생명으로서의 자연을 느끼게 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파르메니더스Parmenides의 형이상학은 "저기에 공허가 있다"고 할 때 공허가 무nothing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공허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유물론자들은 이에 대해 설명하지는 않았고 다만 운동을 경험할 수 있으며 운동이 있다면 거기에는 공허가 있는 것이라는 정도로 말했다.
이 문제에 대한 논리적 해결이 있으려면 물질matter과 공간space의 개념에 대한 정의가 먼저 있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리학 Physics>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공허가 존재한다는 이론은 장소가 존재한다는 의미이기도 한데 사람들은 공허를 물질이 빼앗긴 장소인양 정의한다.

뉴턴Newton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수용하면서 '절대공간 absolute space'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운동을 상대적인 것과 절대적인 것으로 구분했다.

그러나
"하늘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회전한다"는 말이나
"지구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돈다"는 주장은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같은 것을 다르게 말하는 것이다.
"영자는 순자의 언니이다"라는 말과
"순자는 영자의 동생이다"라는 말은 같은 사실을 다르게 말한 것 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파르메니더스의 공허에 대한 주장은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데카르트Descartes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견해를 갖고 있었으므로 물질의 본질essence을 확장extension으로 이해했으며 물질이 모든 곳에 있다고 보았다.
그에게 빈 공간smpty space은 행복한 사람이 없는 행복으로 이해되었다.
라이프니츠Leibniz 역시 충만plenum을 믿었지만 공간을 단지 상관관계의 체계system로 인식했다.
이런 문제가 미결로 오래 남아있다가 아인슈타인의 등장으로 해결되었는데 아인슈타인은 라이프니츠의 오른손을 높이 들어주며 그의 승리를 축하했다.

아인슈타인은 어떤 의미에서 물질은 원지이지만 참공간(혹은 절대공간)이 존재한다고는 보지 않았고 물질이 없는 곳에는 어떤 것이 있는데 그것은 광선light-waves이라고 했다.
그에게 물질은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함께 하는 사건의 방법일 뿐이었다.
어떤 사건은 그룹의 물질로 나타나지만 어떤 사건은 광선으로 나타나고 물질로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각 사건은 잠시동안만 일어난다.

최근의 물리학자들은 헤라클리터스Heraclitus의 편에 서면서 파르메니더스의 이론을 부정한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이 출현하기 전까지만 해도, 뉴턴의 물리학이 존재할 때까지만 해도 파르메니더스의 형이상학적 이론이 유효하게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다.

뉴턴은 공간을 물질로 보았지만 오늘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으며
고대 유물론자들 루니푸스Leucippus와 데모크리터스Democritus의 이론도 아니고
데카르트의 견해도 아니며
라이프니츠가 말한 상관관계의 체계일 뿐이다.

아인슈타인은 거리란 사건들의 관계이지 물질들의 관계는 아니라면서 공간과 마찬가지로 시간이 소요된다고 주장했다.
이런 예로 우리가 지금 바라보는 별은 죽은 별일 수도 있다.
우리는 오래 전에 존재한 별을 지금에서야 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별을 보는 데 시간이 소요된다.
최근의 물리학자들은 거리에는 action이 없다고 본다.
이런 견해들은 형이상학 혹은 논리적인 결과가 아니라 오로지 경헙에 의한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오지호가 본격적으로 미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서양화 2세대의 대표적인 화가, 비평가 오지호(1905~82) 는 1905년 12월 24일(음력)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 독상리에서 여덟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사대부적인 교양에 밝은 가정환경에서 유복하게 성장했다.
부친 오재영은 대한제국 말기에 보성군수를 지냈으며 오지호가 15살 때인 1919년에 고종황제의 인산因山과 3·1운동을 서울서 직접 목격하고 내려온 직후 민족의 현실에 울분을 참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오지호가 본격적으로 미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전주고보를 거쳐 1921년 서울 휘문고보로 전학하면서부터였다.
당시 이 학교 도화선생으로 재작한 사람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이었다.
오지호는 1923년 고려 미술원 연구소에 들어갔는데, 그 해에 발족한 고려 미술회는 강진구, 박영래, 나혜석, 백남순 등의 서양화가들로 구성되었고, 나중에 동양화가들이 참가함으로써 고려 미술원으로 개칭되었으며, 전문 화가들을 양성하기 위해 연구소를 두었다.
연구소 서양화 부문의 지도는 이종우, 강진구를 비롯하여 몇몇의 서양화가들이 담당했으며 이 연구소에서 이마동, 구본웅, 길진섭 등이 배출되었다.
오지호는 이종우로부터 소묘와 유화 기법을 배우는 한편, 장래에 절친한 관계를 갖게 되는 친구 김주경과 김용준을 만났다.

오지호는 1925년 휘문고보를 졸업한 후 곧바로 일본으로 가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응시했다.
그러나 이 학교의 치열한 입시 경쟁으로 낙방하고 가와바타화 학교에 들어가 일 년 동안 노력한 끝에 이듬ㄶㅐ인 1926년에 대망의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이 학교 서양화과 교수로 후지시마 다케지, 오카다 사부로스케, 와타 에이사쿠 등이 있었고 이들은 일본 서양화화단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외광파外光派 계열의 관학파들이었다.
오지호가 입학할 당시 일본 화단에는 야수주의와 입체주의가 활발하게 도입되고 있었지만 동경미술학교는 이런 사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지호는 가와바타화 학교 시절 직접 지도를 받았던 후지시마의 교실에 들어가 공부했는데, 후지시마는 외광파의 선구적 화가 구로다 세이키의 영향을 받아 처음에는 낭만주의적인 문학성, 도는 장식성이 강한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지에서 수학한 후 뛰어난 직관과 데생력을 토대로 대상을 단순화시킴과 더불어 거친 붓질로 순도 높은 원색을 대담하게 사용하는 그림을 그림으로써 외광파 화풍에 싫증을 느낀 관람자들로부터 인기를 얻었다.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한 해인 1926년에 그린 <잔설 殘雪>은 습작에 불과하지만 활달한 붓질과 대담한 묘사가 그의 조형감각을 보여준 뛰어난 작품이다.
그가 일기의 한 순간을 신속한 붓질로 포착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그의 최초의 유화인 이 작품 오른쪽 아래 붉은 물감으로 ‘1926년 점수화占壽畵’라고 세로로 표기한 사인이 적혀 있다. 동경 근교 이케부쿠르의 동네 장면을 그린 것으로 잔설이 쌓인 골목길을 너무 넓게 설정하여 구도상 짜임새가 부족하지만 색을 개성적으로 사용했다.
그는 1968년 『현대 회화의 근본 문제』에 기고한 ‘자연과 예술’에서 일본의 자연 형상에 관해 적었다.
“태양 광선의 광채는 수증기에 흡수되어 자연의 색채의 미묘한 색조와 섬세한 광택은 거의 소실되고, 색과 색은 뽀얀 베일로 덮인 듯 확연한 구별이 없고, 윤곽은 애매하여져서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이후 오지호는 일본 자연 환경에서 영향받은 정조情調를 불식시키고 명징한 태양광선 아래 자연의 생명력이 한껏 발현되는 우리나라 환경에 적당한 풍경화를 그리기 위해 광학적 효과를 연구하게 되었으며 이는 결국 인상주의 회화에 경도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5년 동안의 유학을 마치고 1931년 봄 졸업과 함께 귀국한 그는 서양화가들의 단체 녹향회를 통해 화가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28년 12월에 발족한 이 단체에는 김주경, 박광진, 심영섭, 장석표 등 야심을 가진 화가들이 있었다.
녹향회는 순수한 서양화가들로 구성된 최초의 동인단체라는 의의와 함께 서양화 도입 이래 지속적으로 영향을 받아 온 일본의 화풍을 지양하고 조선 민족 미술을 위한 새로운 화풍을 전개하려는 진취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1931년 4월에 개최된 녹향회 공모전은 선전에 대항하려는 이들의 야심찬 계획의 일환으로 당시 언론의 호응으로 성황을 이루었다.
김주경이 1931년 4월 5일자 『동아일보』에 기고한 ‘녹향회를 앞두고’에서 공모전의 성격이 드러난다.

“양화의 토대 건설과 미술의 민중화를 위한 계몽이 필요하다.
무능의 자아를 벗어나 유능, 희망, 활약의 자아를 발견하고 또 그렇게 진전하는 신기력의 소유자가 늘어가야 할 것이다.
… 전람회장에서 어떤 격렬한 색채나 또는 필치가 있는 작품을 대할 때에는 그것이 홍수나 폭풍우와 싸워나가는 민족으로서 의당히 가져야 할 예술인 것을 자각하여야 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최초의 유물론자 
 
유물론Atomism을 창안해낸 사람은 우리에게 한쌍을 기억되는 루시퍼스Leucippus와 데모크리터스Democritus이다.
데모크리터스가 부분적으로 루시퍼스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루시퍼스가 활약할 때 기원전 440년으로 그는 마일터스Miletus 사람이다. 따라서 과학적 이성주의의 사고를 갖고 있었다.
그는 주로 파르메니데스와 제노Zeno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에 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고 데모크리터스의 제자 에피큐러스Epicurus는 아예 그의 존재조차 부인했다.

이에 비하면 데모크리터스는 확실히 존재한 인물이다.
그는 트라세Thrace에 있는 압데라Abdera에서 태어났고 그가 자신은 아낙사고라스가 늙었을 때 젊은이였다고 말했으므로 그때가 기원전 432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지식을 얻기 위해 남쪽과 동쪽으로 여행했으며 이집트에 한동안 머물렀고 페르시아를 방문하면서 견문을 넓혔던 것 같다. 그는 압데라로 돌아와 그것에서 여생을 보냈다.

더러 학자들은 그의 시대에 그만큼 지식이 많고 가장 논리적으로 정확하게 사고한 사람이 없었다고 말한다.
나이로 보면 그는 소크라테스의 아들뻘이 된다.
그를 소크라테스보다 먼저 소개하는 이유는 그가 같은 고향 사람 프로타고라스Protagoras의 이론에 응답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자로 프로타고라스는 소피스트Sophist로 다뤄야하므로 데모크리터스를 먼저 소개하는 것이다.

프로타고라스가 아테네를 방문했을 때 대단한 환영을 받았는데 데모크리터스는 자신이 아테네에 갔을 때는 아무도 자기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그의 철학은 한동안 아테네 사람들에게 무시당했다.

버넷Burnet은 저서 <탈레스로부터 플라톤까지 Thales to Plato>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플라톤이 데모크리터스에 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었는지 확실치 않지만 ...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에 관해 잘알고 있었는데 그 자신 북쪽으로부터 온 아이오니아인이기 때문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플라톤은 데모크리터스를 싫어해서 그의 모든 저서를 불에 태웠다.
데모크리터스는 만물은 원자들atoms로 구성되었으며 원자는 더이상 쪼개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원자들 사이에는 공간이 있으며
늘 존재해 왔고
미래에도 계속해서 운동을 하며
원자들의 수는 무한하고
그것들에는 종류가 있으며
크기와 형태는 각각 다르다고 했다.
이상과 같은 그의 사고는 현대 물리학에서도 어느 정도는 인정할 만큼 과학적이었다.

젤러Zeller는 원자들은 항상 낙하falling하며 무거울수록 신속하게 낙하하고 당구공처럼 부딪히면 서로 튕겨나간다고 했다. 이는 에피큐러스의 논리인데 거의 데모크리터스의 이론을 따르고 있다.
데모크리터스는 원자가 처음에는 마구잡이randomly 운동을 했다고 했는데 근래 '개스운동 이론 kinetic theory of gases'과 같다.
그는 혼 속의 원자를 설명하는 가운데 바람이 없을 때의 태양의 빛으로 예를 들었다.
원자들이 충돌하면 일련의 원자들이 소용돌이를 일으키게 되는데 이런 현상은 기계적이며 정신mind의 작용은 아니라고 했다.

루시퍼스와 데모크리터스 모두 자연의 법칙이 있다고 믿었다.
원자들의 운동도 법칙을 따라 운동한다고 보았다.
루시퍼스가 역사적으로 존재했는지 안 했는지는 알 수 없더라도 다음과 같은 그의 말이 전해온다.

무의미하게 발생하는 현상이란 없다.
Naught happens for nothing.
모든 것은 근거와 필요에 의해서 발생된다.

두 사람 모두 만물의 최초의 운동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았는데 아마 최초에는 우연에 의해 운동이 시작된 것으로 믿었던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자는 최초의 운동the First Mover에 관심이 많았지만 서양 최초의 유물론자인 데모크리터스는 관심이 없었다.
이는 또한 근래 물리학자들의 사고와도 같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논쟁에 데모크리터스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증으로 말하면 달걀이 스스로 병아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유물론자의 사고는 어느 누구의 철학보다도 과학적이었다.
칼 막스Karl Marx가 출현하기 전까지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아낙사고라스는 아이오니아의 클라조메내Clazomenae에서  


아낙사고라스Anaxagoras는 아이오니아 사람으로 그에게는 아이오니아의 전통적 과학 지식과 이성적 정신이 있었다.
그는 아테네에 철학을 운반한 최초의 사람으로 알려졌다.
그는 정신mind이 물리적인 변화에 원천적으로 작용the primary cause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이오니아의 클라조메내Clazomenae에서 기원전 역 500년경에 태어났고 아테네에서 30년 동안 생활했는데 그 기간은 기원전 462년부터 432년까지였다.
그는 페리클레스의 부름으로 아테네에 왔는데 페리클레스는 이 현인을 통해 아테네 시민들의 문화적 의식을 높이려고 했다.
플라톤에 의하면 마일터스(밀레토스라고도 발음한다)에서 온 아스파시아Aspasia가 그를 페리클레스에게 소개했다.

페리클레스는 말년에 정적들의 공격을 받았다.
그의 정적들은 그가 파이디아스Pheidias에서 금을 횡령했다고 기소했다.
그들은 신에 불경하거나 신에 대해 이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을 탄핵하는 법을 제정했다.
신성불경죄 이는 나중에 소크라테스에게도 적용된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법이 낡은 것이라고 항변한다.
이런 법에 의해 아낙사고라스도 고소되었다.
그 이유는 그가 태양은 붉은 색의 뜨거운 돌이며 달은 대지와 같은 것이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아낙사고라스는 결국 아테네를 떠났는데 감옥에 갇힌 그를 페리클레스가 몰래 떠나게 한 것 같다.

아낙사고라스는 아이오니아로 돌아와 학교를 설립했다.
그는 유언으로 자기가 죽은 날을 학생들의 공휴일로 하라고 했다.
아낙사고라스는 우주의 가장 작은 물질은 쪼개지며 최소한 몇 가지의 원소들로 구성되었다고 했다.
그는 모든 물질이 정도의 차이일 뿐 불의 요소를 함유하고 있다고 했다.
죽음과 삶의 차이는 이 불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린 것으로 보았다.

정신은 모든 것들 위에 군림하며 영원하고 스스로 운동하며 아무것도 함유하지 않은 상태이다.
정신을 제외한 모든 물질은 작더라도 상대적인 것을 함유하고 있는데 hot and cold, white and black 등이다.
그는 눈snow은 부분적으로 검다고 주장했다.
정신은 모든 운동의 근원으로 정신이 회전을 야기시켜서 궁극적으로 세상 전체에 운동이 일어나게 만든다고 했다.
정신은 사람에게서와 마찬가지로 동물에게도 좋은 것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를 통해 아낙사고라스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는데 두 사람 모두 아낙사고라스가 정신을 소개한 후 그것에 관해 별로 많은 설명을 가하지 않았다고 불평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가 정신을 원인이라고 한 것은 정신에 관해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았다.
아낙사고라스는 모든 것의 생성이 필요에 의해서이거나 우연에 의해서라는 이론을 배격했지만 이에 견줄 만한 자신의 이론은 제시하지 못했다.
그는 윤리와 종교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었으며 그 자신 무신론자였다.
그는 피타고라스를 제외한 6명의 그리스 현인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파르메니데스가 달이 빛을 반사한다고 말했지만 설명을 하지 못했는데 아낙사고라스가 설명을 가했다.
그는 일식을 제대로 설명했는데 달이 태양 바로 아래 있을 때 일식이 생긴다고 했다.
그는 별들도 태양과 마찬가지로 화염의 돌들인데 우리가 열기를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아주 멀리에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태양의 크기가 그리스 남쪽의 반도 펠로폰네소스Peloponnesus보다 크다고 했고 달은 산이라고 했는데 아마 그는 달에 사람이 산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는 아낙시메네스의 학교에 수학한 적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