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러스킨John Ruskin(1819~1900)


존 스튜어트 밀은 자신의 그룹을 제외하면 존 러스킨이 당시 유일하게 독창적인 영국의 사상가라고 말했다.
영국의 비평가, 미술 이론가 러스킨은 예술가를 영감 받은 예언자와 교사로 보고 예술의 위대함은 신이 만든 인간의 마음을 표현하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고딕 양식의 부활을 주창했지만, 장식에 있어서는 전통을 거부했다.
그는 예술과 건축은 신이 창조한 인간의 경이로움과 기쁨을 반영해야 한다고 보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영감을 받은 자연주의적인 형식이 요구되며 고딕이야말로 진정 적합하다고 했다.
그는 장식을 신의 계시를 받은 경이로움을 관조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으로 보았으며, 자연 형태의 재현에 기초를 두었고 장식의 표현 가치에 대하여 매우 개인적인 기준을 도입했다.
그가 고딕을 극찬한 것은 각 개체의 미묘한 특징을 명확하게 하는 우아하고 풍부한 구성을 지닌 고딕 디자인의 특징 때문이었다.

러스킨의 아름다움 그 자체를 위한 미의 숭배가 예술을 위한 예술의 옹호자들과 관련을 맺었지만, 그의 인생 후반기의 경제적·정치적 문제들에 대한 의문의 증대와 사회 개혁에 관한 강한 관심은 그가 사회적인 도덕성의 문제와 분리된 예술의 자립에 관한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예술을 노동자들의 일상생활과 연결하는 그의 사고는 윌리엄 모리스의 관점과 관련이 있다.
예술을 ‘국민적 미덕의 가시적 신호’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예술의 도덕적 기능을 강조하는 그의 태도는 때로 미학과 비평에서 ‘도덕적 오류’의 명백한 예로 간주되어 왔다.
러스킨은 완강하고 근시안적으로 오래된 장인 정신을 대신하는 산업혁명의 효과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는 인간이 이 세상에서 해야 할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은 무언가를 보는 것이고 또 본 것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라고 하여 예술의 본질적 목적이 진실에 대한 사랑임을 적극적으로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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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노스 문명 
 

미노스인Minoan 문명은 기원전 1600년경에 그리스 본토에 소개되어 기원전 900년까지 지속되었다.
그리스에 상륙한 문화를 미네케인Mycenean의 문화라고 한다.
이 문화는 구전으로 전해오다가 호머Homer의해 문자로 전해졌다.
러셀은 <철학의 역사>에서 그리스어를 말하는 사람들이 북쪽으로부터 내려와 현재의 그리스에 안착했다고 한다.
그리스어를 사용한 사람들은 세 종류로 Ionian, Achaean, Dorian들이었다.
아이오니안들은 크레테의 문화를 받아들였고 이런 그리스 문화를 로마가 또한 받아들였다.
아이오니안 문화를 기원전 14세기에 커다란 왕국을 형성한 아케니안에 의해 파손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리스를 침략했던 도리안에 의해 더욱 더 파손되었다.

크레테 섬의 미노스인의 종교는 정복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졌으며 도리안은 자신들의 고유한 인도-유럽인Indo-European 종교를 유지하고 있었다.
미케네인의 문화는 오늘날의 시리아, 즉 페니키아인Phoenician의 침략으로 파손되었다.
그리스에는 산들이 많아 농경지로는 적합하지 않지만 산과 산 사이에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계곡들이 바다 인근에 있고 사람들은 이런 계곡에서 살았다.

한편 스파르타Sparta에는 귀족들이 농노들을 부리며 농사를 지으면서 교역과 산업을 발전시켰는데 남자들에게는 탄광일을 하게 했고 여자들에게는 직물을 짜게 했다.
인력을 충당하는 방법으로는 이웃나라를 쳐들어가서 사람들을 잡아와 노예로 부렸다.
그들에게 전쟁은 일종의 산업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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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기는 미가 실용에서

야나기는 미가 실용에서 유리된 까닭에 찬미되었다면서 미의 진실성을 찾으려면 실용적인 공예품에 눈을 돌려야 함을 『공예의 도』에서 역설했다.
“미는 하나이지만 미의 핵심에 이르는 길은 둘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미술fine art이라 부르고, 하나는 공예craft라고 부른다.
하지만 오늘날까지 미의 표준은 사실 미술에서만 논해져 왔다.
따라서 공예는 낮은 위치로 전락하고 그 의의는 무관심 속에 버림을 받았다.
미학 책들을 보라. 그것은 완전히 미술 위에 세워진 미학이 아닌가.
공예는 야나기는 unfreie Kunst라는 이름이 붙여지고 또한 practical art로도 applied art로도 불렸다.
여기에서 부자유라든가, 실제라든가, 응용이라든가 하는 형용은 몇 단계나 격하된 의미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와 같이 미는 실용에서 유리되어 있는 것인 까닭에 찬미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그러한 미학이 과연 미를 진실되게 본 것이었을까.”

야나기는 공들인 상등품上手物보다는 하치물건下手物 혹은 잡구에 오히려 보편적인 미가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런 점을 『일본 민예미술관 설립취의서』에서 밝혔다.
“우리들은 이러한 미가 미술품이라고 간주되는 것에는 오히려 적고, 반대로 잡구雜具라고 생각되는 소위 하치물건에 많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원래부터 미는 도처의 세계에 숨어 있다.
그렇지만 이미 상등품은 섬약에 흐르고 기교에 빠지고 병마에 괴로워한다.
그에 반해 무명의 공인에 의해 만들어진 하치물건에서는 추한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
거기엔 작위의 상처가 거의 없다. 자연스럽고 무심하며 건강하며 자유롭다.”

야나기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영국과 프랑스에서 일어난 공예운동Art and Craft과 아르 누보Art Nouveau의 이론적 배경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공예의 미술화를 추구한 존 러스킨에 대해서 “세계를 미술의 천국으로 높이기 위해 지상의 공예를 포기했다”고 비판했으며, 윌리엄 모리스의 작업은 “공예로 되지 못한 채 끝난 미술”이라고 평가절하했다.
이런 비판에서 공예에 대한 그의 궁극적인 시각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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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문명의 성취 
 
그리스 문명의 성취는 과학과 철학에 있다.
과학과 철학의 할아버지뻘 되는 사람이 탈레스Thales이다.
그는 일식을 예언한 것으로 유명한데 천체학자들은 그가 예언한 일식이 기원전 585년에 일어난 것으로 말하고 있다.
탈레스는 시대로 보면 공자의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뻘이 된다.

과학과 철학이 그리스인에 의해 성취되기 이전, 즉 탈레스 이전 그리스인의 문화를 보면 그들이 지구상의 최초 문명인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인이 한 나라를 이룩한 것은 나중이었고 그리스인이라고 통칭할 만한 종족들은 흩어져 살고 있었는데 지중해 가운데 있는 크레테Crete 섬은 상업이 발달한 곳이었다.
섬에서 상업이 발달했다는 건 배를 제조하는 기술이 있었다는 말이며 또한 배를 안전하게 운행하기 위해 천체를 관측했을 것이므로 일기를 알아내고 달과 별의 운행을 알아내는 과학이 발달했을 것이다.
기원전 2500년과 1400년 사이 약 11세기 동안 크레테의 미노스Minos 문화는 매우 우수했다.
현존하는 이집트 상형문자를 보면 크레테 사람들이 배를 타고 이집트로 와서 교역했음을 알 수 있다.
이집트와의 교역이 가장 성했을 때가 기원전 1500년경이었다.

크레테의 종교는 여러 면에서 시리아Syria와 소아시아Asia Minor의 것들과 유사하지만 예술에 있어서는 매우 독특했다.
이집트에서 발견된 크레테의 예술품들이 이를 말해준다.
종교에서는 이집트와 유사한 점이 많은데 교역을 통해 자연스럽게 영향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크레테의 궁전은 아름다웠다고 하는데 기원전 14세기에 전란으로 파괴되었다.

크레테인들은 여신들을 섬기는 종교를 갖고 있었다.
여신들 가운데 고고학적 발견으로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여신은 '동물들의 여왕 Mistress of Animals'으로 사냥의 여신이다.
이 여신이 소아시아의 위대한 여신 아르테미스Artemis의 기원이 된다.
투우bull-fight는 종교적 행사였으며 현존하는 그림에서 이런 장면을 볼 수 있다.
아마 투우사들은 귀족출신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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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미술의 특질


이경성은 『미술입문』(1961)에서 한국 미술의 특질로 감성적·선적·서정적·소시민적 네 요소를 꼽았다.
그에 의하면,
첫째, 한국인은 역사적으로 비애에 충만되어 있어 감상적이며 그런 예를 인생의 허무함과 애처로운 인간심정을 노래한 시가에서 발견할 수 있다면서 감성성을 지양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둘째, 선은 정서의 직접적인 표현으로 고구려 벽화의 웅건한 선, 석굴암 불상의 우아한 선, 고려자기의 세련된 선, 이조자기의 소박하고 우직한 선, 그리고 이조 목공품의 힘찬 선이 우리의 전통이며 도한 한국미의 약점으로 꼽는다.
셋째, 공예품에서 많은 걸작이 발견되는데 삼국시대 이전 도자기, 가구, 금공품 등에서 수준 높은 솜씨를 보여준 한국인이 그 후 좋은 솜씨를 보여주지 못한 이유를 통일신라 이후 정착생활의 안이와 평안을 주조로 하는 무사주의 그리고 대륙의 압력에서 오는 비애 속에 형성된 서정적 감성 때문으로 꼽았다.
마지막으로 역사적으로 비극을 많이 겪다보니 한국인은 이상과 영원을 약탈당했고 늘 오늘의 문제에 골몰해야 하는 소시민이 되어버렸으며 강한 인간형人間型을 창조하지 못하고 영탄적詠嘆的인 인간형이 되어 자연히 미술이 소시민적이 된 것이라고 했다.

한국미에 대한 가장 중요한 이론은 야나기의 ‘비애의 미’와 고유섭의 ‘적조미寂照美·무기교無技巧의 미’이다.
고유섭은 1940년 10월 23일~27일 『조선일보』에 발표한 ‘조선 미술문화의 몇 낱 성격’에서 시도한 학설을 토대로 한국 미술의 특징으로 무기교의 기교·무계획의 계획, 즉 민예적 미로 꼽으면서 한국 미학은 비정제성·비균제성·무관심성·구수한 맛 등으로 추리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민예적 특징으로서 이를 먼저 주장한 사람은 야나기이다.

야나기는 민예民藝에서 미를 발견하면서 생활과 미가 결합된 공예의 미적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참다운 아름다움이란 우리의 생활과 긴밀히 결합”되었기 때문에 “미술은 공예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민예의 의미』(1931)에서 민예를 규정했다.
“민民은 원래 민중의 민이고 예藝는 우리의 의미로는 공예工藝의 예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민중적 공예’의 약칭으로서 민예 두 글자를 골랐던 것이다.
민중예술이라는 의미라 해도 좋으나 예술이라고 하면 자칫 개인적인 고급 미술 등을 연상시키므로 좀더 이름도 없는 공인工人들이 만든 실용 공예품이라는 의미를 시사하고 싶어 ‘민중적 고예’의 의미를 취해 민예라 부르게 되었다.
그래서 이것을 영역할 경우에도 Folk Art라는 어휘를 피해 Folk Craft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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