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은 혼과 몸이 분리된다고 믿었다 

박카스 종교는 오르페우스에게 영향을 주어 플란톤의 철학에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오르페우스가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인물인지 상상의 영웅인지 신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도 바카스처럼 트라키아로부터 왔다고 전해지는데 러셀에 의하면 아마 크레테에서 온 것 같다.
오르페우스는 박카스 종교를 현대화한 사람이다.
그의 종교에는 이집트의 요소가 다분히 많으며 인간의 혼은 몸과 분리된다고 보았고 이승에서의 삶의 성적표에 따라서 저승에서 영원히 안락한 생활을 누리거나 또는 일시적으로 고통을 받게 된다고 믿었다.

그리스인은 혼과 몸이 분리된다고 믿었다.
그들은 인간에게는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하나는 하늘의 요소이고 다른 하나는 땅의 요소이다.
하늘의 요소는 혼이고 땅의 요소는 몸을 말한다.
땅의 여신이 하늘로 먹을 것을 구하러 갔다가 하늘의 신과 섹스를 하게 되었고 그래서 태어난 것이 인간이라고 믿었다.
이런 믿음이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혼이 몸이라는 감옥에 갇힌 상태라고 믿게 했고 따라서 죽는다는 것은 혼이 몸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으로 이해하게 만들었다.

박카스에 관련된 신화 중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래된다.

박카스는 제우스Zeus와 페르세폰Persephone 사이에 태어났다.
그가 소년이었을 때 타이탄들Titans이 그를 갈기갈기 찢어 먹으면서 심장만은 남겨놓았다.
그 심장을 제우스가 가져다 세멜레Semele에게 줬다는 이야기도 있고 제우스가 삼켰다는 이야기도 있다.
여하튼 박카스는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박카스 종교에서 야생동물을 갈기갈기 찢어 먹는 것은 타이탄들이 바카스를 그렇게 먹은 것을 상징한다.
타이탄들은 땅에서 태어났지만 박카스를 잡아먹고 신성을 갖게 되었다.
인간은 반은 신성을 지녔고 반은 땅의 요소를 지녔지만 박카스를 숭배하는 의식을 통해서 신성에 좀더 가까워진다.
철학자 니체는 박카스적 환희의 예술을 찬양하면서 친구 작곡가 바그너의 음악이 남성적이고 영웅적이라고 칭찬했다.
오르페우스 종교는 박카스 종교를 개혁시켜 금욕주의를 추구하면서 포도주에 취하기보다는 포도주를 상징적으로 마셨다.
이런 상징적인 포도주 마시기가 유대인들에게 받아들여져 오늘날 성찬식으로 전해오고 있다.

정신적으로 취하기를 바랬던 것은 신성을 가져보려는 인간의 바램이었다.
오르페우스 종교를 신봉한 사람이 바로 피타고라스Pythagoras이다.
오르페우스 종교를 더욱 더 현대화한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피타고라스의 영향을 받았고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영향을 받아 박카스 종교의 요소가 철학에 들어온 것이다.
박카스에 대한 의식을 호머가 자세히 기록했다.

호메로스가 전한 또 다른 종교는 전혀 종교라고 말할 수 없다.
신들은 사람들이었고 다만 다른 점은 영원하며 초인적일 뿐이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신이라면 농사와 관련이 있어 비를 내려 풍작을 하게 해주는 데 비해 그리스인의 올림푸스 삼에 거주하는 신들은 귀족과 같은 생활을 했다.
그리스 신들은 전쟁을 통해 왕국을 건설했는데 아마 고대 영웅들을 숭배한 데서 이런 종교가 비롯한 것 같다.
이런 신들은 혹은 영웅들은 정부를 세우지도 않았고 농사를 짓지도 않았으며 상업이나 산업에 종사하지도 않았고 오로지 민중에게 달려들어 복종을 강요하면서 놀고 먹었다.
신들이 혹은 영웅들이 하는 일이란 싸움박질을 하거나 음악을 만들었고 술에 취했다.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점은 이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사랑을 할 때와 전쟁을 할 때만 거짓말을 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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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기는 직관으로서만 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야나기는 직관으로서만 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그에게 직관은 주관과 객관의 구별이 없는 절대적인 입장이었다.
이는 신비주의로서만 설명될 수 있는데, 내가 미를 보는 것이 아니라 미가 미를 보는 것으로 기독교적 신비주의로 말하면 신이 나로 하여금 바라보게 하는 혹은 신이 자신을 관조하는 일체를 말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듯이 그 자체를 바라보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찾으려는 의도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거울로 반사하듯이 보는 것이다.
그는 공예를 중생에게 생활의 반려伴侶이며 순례의 동행 이인二人 혹은 한 쌍으로 보았고, 미와 중생, 그 사이에 숨은 언약, “평범한 사람들까지도 미에 관여할 수 있는 길”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말했다.
“공예를 통해 중생은 구원의 세계로 들어간다. 공예의 길은 미의 종교에 있어서 타력도라 할 수 있다.”

절대적 입장에서 일체를 이루는 신비주의 사상에서 그는 공예의 미를 규정했다.
"준엄하다든지, 숭고함이라든지, 멀리 우러르는 세계가 아니라 보다 밀접하고 친숙한 영역이다.
따라서 공예는 정취의 세계, 즉 윤택함이라든지, 정취라든지, 촉촉함이라든지, 훈훈함이라든지, 부드러움이라든지 등의 말이 기물의 아름다움에 관해 되풀이되는 세계이다."

야나기는 민예의 기능을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의 방법 타력본원他力本願, 즉 아미타불阿彌陀佛의 본원에 따라 염불하면 정토에 왕생한다는 범부성불의 방법론에 의탁하는 정토종의 종지宗旨로 보았다.

야나기가 조선 예술에 깊은 관심을 가진 것은 조선 예술에는 타민족에게서 발견할 수 없는 민예적 특성이 두드러지기 때문이었다.
그는 조선 공예품에서 친근감, 온화함, 안으로 숨은 경이로운 아름다움, 깊은 맛, 조용함, 적막함 등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점을 들어 그는 중국 도자기와 조선 도자기를 비교할 경우 조선 도자기가 “더 조용하고 소박하다.
마음에도 급한 데가 없다. 같은 분명함이라도 한결 온화하고 조용하다”면서 “중국 것은 우리가 기다리든 기다리지 않든 언제나 저편에서 다가온다.
조선 것은 이쪽에서 찾든 찾지 않든 언제나 우리를 기다린다”고 했다.
조선의 민예적 특성을 그는 중국과 일본에서는 도자기를 애완하는 풍습이 있지만 이런 풍습이 조선에는 없어 미를 위한 미를 추구하지 않고 모두 실용품으로 제작되었음을 꼽았다.
그는 조선의 도자기는 작위의 폐를 벗어났으며 “만듦새는 자연스러우며 소박하며 약한 데가 없고 신경질적인 데가 없다”고 말함으로써 중국과 일본에 비해 가장 민예적임을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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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문화의 가장 오래되고 상징적인 문헌은  

그리스 문화의 가장 오래되고 상징적인 문헌은 호메로스Homer의 <일리아드 Illiad>와 <오디세이 Odysey>인데 이는 호메로스 한 사람의 작품이 아니다.
이 두 작품의 완성에는 약 200년, 즉 기원전 750년부터 550년까지 소요되었으므로 호메로스 한 사람이 아닌 여러 시인들에 의해서 쓰여진 것으로 추측된다.
기원전 560년부터 527년까지 집권한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us가 호메로스의 시를 그리스 본토로 가져왔다.
그때부터 아테네의 젊은이들은 호메로스의 시를 암송했으며 교육에 이바지했다.

호메로스의 시에는 올림퍼스 신들이 등장하는데 그리스인은 그들만을 섬겼던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는 대중적이며 야만적인 종교도 있었다.
미신이 성행할 때였다.
그리스인이 섬긴 신들 가운데 특기할 만한 신은 디오니소스Dionysus이다.
그를 박카스Bacchus라고도 한다.
디오니소스 혹은 박카스 신은 본래 트라키아인Thracian의 신인데 그들은 그리스인에 비해 덜 문명화된 사람들로 그리스인은 그들을 야만인으로 취급했다.

트라키아인은 여느 농경사회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바카스가 풍년을 주관한다고 믿었다.
박카스는 농경사회의 신이었다.
박카스의 모습이 사람이었는지 황소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들은 맥주를 제조한 후 맥주를 마시고 생기는 취기에 신성이 있다고 믿고 이런 영광을 박카스에게 돌렸던 것이다.
박카스는 특히 포도농사와 관련이 있고 따라서 포도주와 고나련이 있다.
그리스인의 도기에 포도를 들고 있는 박카스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박카스를 섬기는 의식이 트라키아에서 언제 그리스로 운반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선사시대 이전이었던 것 같다.
박카스 문화에는 야만적인 요소가 있었는데 야생동물을 갈기갈기 찢어 날것으로 먹는 것도 포함되었다.
그들은 술에 취하면서 신성을 느꼈고 술에 취함에서 육체적 정신적 평안을 찾았다.
박카스 의식은 열광enthusiasm을 제공하면서 신성이 의식을 베푸는 사람에게 들어와 사람이 신이 된다고 믿었다.

이런 박카스 종교는 플란톤에게까지 전수된다.
기독교가 플라톤 철학의 뒷문으로 들어왔다가 앞문으로 나갔다는 말을 보통 하는데 박카스 종교의 요소는 기독교에까지 남아있다.
러셀은 기독교의 성찬식에 사용하는 포도주가 박카스 종교에서 온 것이라고 저서 <서양철학의 역사>에서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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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1834~96)


영국 시인, 예술가, 공예가, 장식가, 사회운동가 윌리엄 모리스는 옥스포드 대학에서 공부했고 그곳에서 번 존스Sir Edward Coley Bume-Jones(1833~98)와 평생의 친구가 되었다.
번 존스는 모리스를 만나 미술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고 이탈리아계 영국 화가, 시인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Dante Gabriel Rossetti(1828~82)와의 만남이 그로 하여금 화가로 전향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또한 러스킨과 영국의 건축가 퓨진Augustus Welby Northmore Pugin(1812~52)의 저작을 읽으면서 시를 Tm고, 중세 건축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모리스는 1861년에 장식 공예 회사인 모리스 마셜 포크너 회사를 설립했으며, 로제티와 번 존스, 매독스 브라운, 피립 웨브 등이 구성원으로 참여했다.
모리스는 이 회사를 통해 19세기 후반의 영국 산업 디자인과 실내장식 디자인 부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대중의 취향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모리스의 벽지 디자인은 아주 유명해졌는데, 디자인계에 끼친 그의 영향은 가구, 태피스트리, 스테인드 글라스, 가구에 사용하는 직물, 카펫 등 많은 분야에 걸쳐 있었다.
태피스트리는 그의 공장에서 자신이 직접 만들었다.
1891년에는 인쇄와 책 디자인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켈름스콧 인쇄소Kelmscott Press를 창립하여 개인 인쇄소의 선구자가 되었다.
모리스가 1871년부터 살던 옥스포드 근교의 마을 이름을 딴 켈름스콧 인쇄소에서는 1891년부터 모리스가 죽은 지 2년 후인 1898년까지 55권 총 65책을 발행했다.
모리스는 책을 폈을 때 보이는 양페이지를 기본 단위로 해서 화자체, 테두리, 장식 그리고 속표지의 대부분을 스스로 디자인했다.
그는 활자 서체를 다지안하고 특히 중세의 고딕 활자를 부활시켰다.

모리스는 예술을 노동에 대한 즐거움의 표현으로 정의하고 미술의 개념을 사치의 한 속성으로 보고 거부했다.
또한 미적 활동은 생활 전체를 감싸안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특히 보편적인 수공예라는 이상에 몰두했다.
그는 중세 시대는 유럽 역사의 다른 어느 시대보다도 예술과 생활이 하나로 융화되고 보편적인 수공예가 살아 숨 쉬던 시대라는 신념으로 중세주의 사상을 주창하고, 그와 같은 시대에서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구제도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의 중세주의에는 낭만주의적인 요소도 있었다. 이는 그와 공동으로 일했던 라파엘 전파의 예술가들에게 좀 더 현저한 특징으로 그들이 디자인 분야에서 한 작업도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그가 주창한 보편적인 수공예라는 이상과 수작업에 대한 찬미는 근대적인 기계 생산과 맞닥뜨리면서 점차 조화를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일상생활 속에서의 좋은 디자인과 숙련된 장인 정신의 사회적 중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영국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오랫동안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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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정치Monarchy 
 

1인정치Monarchy가 귀족정치Aristocracy로 진전되었고 전제정치Tyranny가 민주정치Democracy로 진전되었다.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에서처럼 그리스의 왕은 절대권력을 가지지 않고 시위원들Council of Elders의 자문을 받았으며 전통을 무시하지 않았다.
정치에는 모든 사람이 참여했지만 노예와 여자는 제외되었다.
그리스 언어는 필기문자script였다.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에서는 상형문자가 수천 년 동안 사용되었지만 그리스인은 기원전 10세기경부터 필기문자를 사용했다.
이집트의 상형문자는 음절syllables로 되었고 나중에 문자화 되었는데 이집트인 스스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고대 시리아인의 알파벳의 도움으로 세련되어졌다.
그리스인도 고대 시리아인의 알파벳을 받아들여 자음만을 사용하지 않고 모음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고대 히부르인의 언어에는 모음이 없어 자음만을 구사하는 언어가 발달하지 못한 언어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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