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의 비극작가들 
 

그리스의 비극작가들은 전통에서 후세를 위한 교육이 되는 내용을 주제로 삼아 새로운 시각에서 본 곳으로 소개했으며 기원전 5세기 후반 유리피데스는 비극을 통해 전통에 대해 질의를 일으킬 수 있는 요소들을 가미하여 드라마의 질을 한층 높였다.
이는 당시 매우 진보적 방법이었다.
기원전 5세기에 코메디가 발달했고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의 코메디를 보고 그리스인을 배꼽을 잡고 웃었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종종 정치적 내용을 코메디로 삼았는데 미국 코메디언 Bon Hope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들을 단골 메뉴로 삼아 정치적 농담을 즐긴 것과 같은 수준이었다.
그는 종종 상스럽고 야비한 내용들도 웃음거리로 소개했는데 요즘 우리나라 저질 개그맨들과 같은 수준에서 그렇게 했다.
이렇게 보면 2천 5백년 전의 코메디와 오늘날의 코메디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2천 5백 년이 동시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음모행각과 불륜의 사랑

기원전 400년경에는 노예들의 음모행각과 불륜의 사랑을 주제로 한 드라마도 소개되었다.
그리스 문학은 빠른 속도로 발전했으며 그리스인의 평균 지성도 많이 나아진 편이라서 작가들이 주저리주저리 서술하지 않아도 관객들이 알아서 이해하곤 했다.
그리스 문학은 아테네에서만 성행한 것이 아니라 인근의 나라에까지도 알려져 그리스 문학의 영향이 한층 커졌다.
소위 말하는 대중문화 수출이 이미 발생한 것이다.
아테네는 문화의 도시로 알려졌고 중동 전지역과 지중해 연안의 국가들이 그리스어를 공식언어로 사용했다.

신약성서 저자들이 그리스어로 쓴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당시 그리스어는 오늘날의 영어보다 더욱 더 공용어가 되었다.

여기에는 알렌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기원전 356-323)의 침략과 더불은 그리스 문화 팽창확대 정책에 기인했다.
예수가 십자가 못박혀 처형당했을 때 십자가 위 팻말에는 당시 침략국 로마어 외에도 그리스어가 히부리어와 함께 적혀 있었는데 그만큼 그리스어가 오랫동안 공통어로 통용되었음을 알게 해준다.
알렉산더가 열병으로 33살에 요절하지만 않았더라도 그리스 문화는 더욱 확대되었을 것이며 좀더 오래 지속되었을 것이다.
그리스 비극은 앞서 언급한 대표적인 세 작가의 사망과 함께 더 이상 발전하지 못했지만 그들의 작품은 오랫동안 공연되었으며 오늘날에도 뉴욕에서 런던에서 그리고 서울에서 공연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파르테논 신전
 

그리스인이 힘 센 페르시아와 대적하기 위해서는 인근 나라들과 제휴해 연합군Delian League을 형성해야 했다.
그리스인은 처음으로 페르시아를 이기고 승리를 맛보았다.
아테네에 평화가 찾아온 건 처음 있었던 일로 불과 30년밖에 지속하지 않았지만 이 시기가 그리스 역사를 통털어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다.
아테네에 협력한 나라들은 재정적으로 지원했는데 막상 아테네가 승리하고 페르시아의 위협이 사라지자 전쟁부담금을 내려고 하지 않았다.
이 평화로운 시대가 바로 페리클레스Pericles(기원전 459?-429)가 집권할 때였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네를 위해 많은 일을 했으며 그리스의 황금기를 페리클레스의 시대라고 한다.
그는 도시를 아름답게 꾸미고 많은 건물을 지었다.
현재 파손된 채 남아 있는 신전들은 그가 집권할 당시 건립된 것들이다.
그는 아테네를 수호하는 신들이 거주할 수 있도록 아크로폴리스Acropolis 언덕 위에 파르테논Parthenon 신전을 건립했다.

건축가들 익티누스Ictinus와 칼리크라테스Callicrates가 기원전 448-432년에 재건한 파르테논 신전은 그리스 본토에서는 가장 큰 신정으로 꼽힌다.
페리클레스가 이 신전을 재건하느라 국고와 노동력을 지나치게 사용했으므로 페르시아의 공격이 다시금 기원전 431-404년에 있게 되었다고 한다.
기독교 시대가 개시되면서 처녀신 아테나의 자리를 처녀 마리아가 차지했다.
파르테논 신전은 처음으로 비잔틴Byzantine 교회가 되었으며 나중에는 가톨릭의 대성당으로 변모되었고 이슬람 교도들은 이를 모방하여 자신들의 신전을 건립했다.

파르테논이란 '신들의 집 The House of the Gods'이란 뜻이다.
이것은 아테네의 수호의 여신 아테나Athena에게 헌납한 사원 혹은 신전이다.

현재 파손된 형태로 남아 있지만 당시의 당당하고 우아한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빼어난 건축물이다.

파르테논 신전 옆에 조그만 사원이 있는데 에레크테움Erechtheum 혹은 에레크테우스Erechtheus라고 부르며 그곳이 전설의 왕들 가운데 한 사람의 주소이다.
사원 안에는 나무로 제작한 작은 여신이 하나 있는데 아테네인들은 신들이 이 여신을 이곳에 넣어둔 것으로 믿었다.
그리스인은 그곳을 파르테논 신전과 마찬가지로 신성히 여겼는데 더러 사람들은 그곳이 파르테논 신전보다 더 신성한 곳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에레크테움의 남쪽 입구에는 아름다운 여인들을 제작한 기둥들이 대들보를 받치고 있으며 그것들을 카리아티드들Caryatids이라고 부른다.
왜 그렇게 부르는지에 대해서는 사학자들도 알지 못하고 있다.

중동에서 이런 식으로 여인을 제작해 건물의 대들보를 떠받치는 건축법을 사용한 적이 있으며 그것들을 카리아티드들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스파르타의 지역 카리애Caryae에 거주하던 튼튼한 몸을 한 여인들을 비유해서 아테네 사람들이 익살맞게 불른 것이 아난가 하고 짐작하는 학자들이 있다.

아테네 사람들은 사실주의 방법으로 제작했는데 이런 방법을 그들이 아시아와 이집트 예술가들에게서 배웠다.
이런 조각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쿠로이Kouroi(청년)로서 청년은 한 발을 앞으로 내딛으면서 보행하는 제스처를 취하고 두 손을 꼭 쥔 채 부자유스럽게 양허벅지에 붙였으며 얼굴에는 미소를 머금었는데 마치 사진기사 앞에서 부자유스러운 제스처를 위한 듯하다.

파르테논 신전은 기원전 480년 아테네와 페르시아가 한창 전쟁할 때 페르시아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기원전 449년 
 

기원전 449년 아테네는 페르시아와 평화협정을 맺었지만 연합군 제도는 계속 유지했다.
연합군에 가담해 아테네를 재정적으로 도운 나라들은 아테네에 조공을 바쳤는데
한때는 150개의 나라가 조공을 바쳤다.
아테네 전성기였다.
부유한 나라들은 조공을 바치는 데 문제가 없었지만 가난한 나라들은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어 일부 나라들은 연합군에서 탈퇴할 수밖에 없었다.
아테네가 작은 나라들을 간섭하기 시작하자 그런 나라들 내부에서는 혁명이 일어났고 그들은 아테네를 모델로 자신들의 정치 체제를 민주화했다.
그러나 정작 아테네는 민주주의 정체를 유지하기 어려웠는데 귀족주의 정치를 추구하는 세력이 커지면서 더욱 그러했다.

당시의 민주주의는 오늘날의 민주주의와는 달리 훌륭한 선거제도가 없었고 제비뽑기식으로 보통사람들을 시민의 대변인들로 뽑았다.
그러니까 직업의 귀천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정치에 정자도 모르는 미쟁이 박씨도 대변인이 될 수 있고
죽어라 하고 일만하던 세탁소 영감도 대변인이 될 수 있었다.
역시 정치는 정치를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이거나 대대로 집안이 정치와 관련 있는 사람이 미쟁이나 세탁소 영감보다 정치를 잘 할 수 있다.
귀족주의는 이런 점에서 민주주의보다 진일보한 정체였다.

아테네의 몰락
페르시아는 아타네를 치려고 호심탐탐 기회를 노렸다.
기원전 431년부터 페르시아는 분쟁을 일으키시 시작했고 이런 식의 전쟁은 27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페리클레스는 돈을 빼돌렸다는 모함에 의해 왕위를 빼앗긴 후 기원전 429년에 그만 세상을 떠났다.
아테네가 상업의 중심지로 계속 번성하자 상권을 빼앗길가봐 위협을 느낀 보에티아Boetia와 고린도Corinth는 페르시아와 연합해 아테네의 멸망을 재촉했다.
페리클레스가 사망한 후 아테네는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으며 기원전 421년에 잠시 평화가 찾아왔지만 아테네의 정치적 사회적 혼란이 오히려 전쟁을 가속시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아테네와 시실리
 

시라큐스Syracuse의 부유한 도시 시실리는 고린도Corinth의 식민지였으며
아테네와 경졍할 만한 상업의 중심지로 주로 곡식을 외국에 수출했다.
그리스가 부유해지면서 조선산업을 일으켜 커다란 선박을 제작해 해상 영역을 넓혔으며 카르타지Carthage의 페니키아인Phoenician들의 도시에까지 영향을 뻗치려고 하자 고린도가 이를 못마땅해 했다.
성경에도 나오는 고린도는 매우 큰 상업도시였다.

시실리안들은 기원전 415-13년에 아테네를 공격했고
이 전쟁에서 아테네는 전함과 병력 절반을 잃었다.
전세가 기울자 자연히 아테네 내부에서 문제가 발생했고 이런 상황은 적들로 하여금 아테네를 치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당시에는 별로 힘을 못쓰던 마케도니아Macedon가 보에티아와 고린도와 함께 페르시아를 협력해 기원전 404년에 아테네를 침략했다.
아테네의 영광은 이때 사라졌다.
페르시아는 10명의 통치자들을 두고 아테네를 다스렸다.
이런 정치체제에 대해 아테네 시민들이 반발하자 페르시아는 1년 후 이런 체제를 버렸다.
여하튼 아테네는 몰락했고 마케도니아가 슬그머니 야심을 갖고 부상하기 시작했으며 얼마 후 알렉산더 대왕이 마케도니아인들에게 영광을 가져다주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