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449년
기원전 449년 아테네는 페르시아와 평화협정을 맺었지만 연합군 제도는 계속 유지했다.
연합군에 가담해 아테네를 재정적으로 도운 나라들은 아테네에 조공을 바쳤는데
한때는 150개의 나라가 조공을 바쳤다.
아테네 전성기였다.
부유한 나라들은 조공을 바치는 데 문제가 없었지만 가난한 나라들은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어 일부 나라들은 연합군에서 탈퇴할 수밖에 없었다.
아테네가 작은 나라들을 간섭하기 시작하자 그런 나라들 내부에서는 혁명이 일어났고 그들은 아테네를 모델로 자신들의 정치 체제를 민주화했다.
그러나 정작 아테네는 민주주의 정체를 유지하기 어려웠는데 귀족주의 정치를 추구하는 세력이 커지면서 더욱 그러했다.
당시의 민주주의는 오늘날의 민주주의와는 달리 훌륭한 선거제도가 없었고 제비뽑기식으로 보통사람들을 시민의 대변인들로 뽑았다.
그러니까 직업의 귀천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정치에 정자도 모르는 미쟁이 박씨도 대변인이 될 수 있고
죽어라 하고 일만하던 세탁소 영감도 대변인이 될 수 있었다.
역시 정치는 정치를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이거나 대대로 집안이 정치와 관련 있는 사람이 미쟁이나 세탁소 영감보다 정치를 잘 할 수 있다.
귀족주의는 이런 점에서 민주주의보다 진일보한 정체였다.
아테네의 몰락
페르시아는 아타네를 치려고 호심탐탐 기회를 노렸다.
기원전 431년부터 페르시아는 분쟁을 일으키시 시작했고 이런 식의 전쟁은 27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페리클레스는 돈을 빼돌렸다는 모함에 의해 왕위를 빼앗긴 후 기원전 429년에 그만 세상을 떠났다.
아테네가 상업의 중심지로 계속 번성하자 상권을 빼앗길가봐 위협을 느낀 보에티아Boetia와 고린도Corinth는 페르시아와 연합해 아테네의 멸망을 재촉했다.
페리클레스가 사망한 후 아테네는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으며 기원전 421년에 잠시 평화가 찾아왔지만 아테네의 정치적 사회적 혼란이 오히려 전쟁을 가속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