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를 미학의 주요 과제로 제안한 사람은 조셉 애디슨
 

Taste를 취향이라고 번역했으면 더 나았을 것 같다고 생각되지만 예술철학에서 '취미'로 이미 번역되어 통용되고 있습니다.
각 사람이 갖고 있는 취미에 따라서 작품을 보고 느끼는 감정이 다른데 이 취미를 일반적으로 규정하려고 과거 철학자들은 노력했습니다.
취미는 각 민족의 기질에 따라서 그리고 각 시대의 문화에 따라서 그리고 취미는 유행을 따라 달라지기도 합니다.
여하튼 취미를 예술철학의 주요 과제로 삼은 사람이 있어 소개합니다.

취미를 미학의 주요 과제로 제안한 사람은 조셉 애디슨Joseph Addison(1672-1719)이다.
그는 1712년에 발표한 미적 즐거움에 관한 논문 <관객 Spectator>에서 취미를 "상상력의 즐거움 the pleasures of the imagination"을 일으키는 세 특성들로 보고 그것들을 탁월함(혹은 숭고함), 비범함(혹은 진기함), 그리고 아름다움을 단순히 분별하는 능력으로 간주했다.
"상상력은 그 속에 창조와 비슷한 것을 갖고 있다"고 본 애디슨은 상상력의 즐거움을 일으키는 특성들을 지각하는 것이 매우 특이한 류의 대단한 즐거움에 의해 수반되는 것으로 설명하려고 했으나 충분히 언급하지는 못했다.

취미는 흄의 미학에 있어 주요 과제로 넘어갔다. 그는 <인간본성론>에서 주장했다.
"아름다움은 우리 본질의 근본적 체질에 의해서나 관습에 의해서 혹은 변덕에 의해서 부분들의 정렬이며 구조로서 영혼에 즐거움과 만족을 주기에 적당하다."

흄은 미에서 즉각적 즐거움이 발생한다고 보았으며 또한 연합에 의해 이런 즐거움이 전달된다고 보았다.
흄에 의해서 미의 즐거움이 편의 혹은 공리로부터 제기되었으며, 공리성과 미에 대한 감각 사이의 관계가 관심사로 떠올랐다.
그는 하나의 규칙으로서의 미를 깨달아 미에 대한 감각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대상의 실재 특성들에 의해서 미에 대한 감각이 생기는 관람자의 미적 감각과는 무관한 공리성으로부터 나타난 것으로 보았다.
그에 의하면 오직 공감에 의해서 관람자에게 미에 대한 느낌이 생기는 것이다.

흄은 1757년에 출간한 <네 논술 Four Dissertations>에서 '취미의 표준에 관해 'Of the Standard of Taste'란 에세이에서 이 문제를 다뤘는데 다음과 같다.

미란 대상들 자체 속에 있는 특성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대상들을 심사숙고하는 마음 속에 존재할 뿐이며 각 마음은 상이한 미를 지각한다.
어떤 사람은 또 다른 지각하는 미를 기형으로조차 지각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개인은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규칙적이 되게 가장함이 없이 자신의 감정에 복종해야 만한다.
진정한 미나 기형을 찾는 것은 진정한 유쾌나 진정한 쓰라림을 확인하기를 가장하는 것과 같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조회이다.
기관들의 성질에 의하면 동일한 대상이 유쾌하거나 쓰라린 것일 수 있다.
그 격언은 취미에 관해 논박하는 것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으로 정당하게 결정되었다.
이는 매우 자연스러우며, 이 자명한 이치를 육체적인 취미와 마찬가지로 정신적인 취미에 확대하는 것이 매우 필요하기조차 하다.
.....
그러므로 취미의 원리들이 객관적이고, 모든 인간에게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더라도 또한 거의 동일하더라도 아직은 소수에게 어떠한 미술품이라도 판단할 수 있는 자격이 있거나 혹은 그들 자신들의 감정을 미의 표준으로 달성하는 자격이 있다.
.....
평론가가 미묘함을 갖고 있지 못할 때 그는 어떤 구분도 없이 판단하게 되며 오직 그 대상의 조잡하고 좀더 명백한 특성들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된다.
그 훌륭한 솜씨들은 알려지지 않게 되고 무시된다.
그에게 실습에 의한 도움이 없을 때 그의 판단은 혼돈과 우유부단을 수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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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젠 들라크루아 
 

외젠 들라크루아(1798-1863)는 어떤 의미에서 '세기병'을 앓았다고 말할 수 있는데 심한 우울증에 괴로워했으며, 공허와 목표 상실의 감정을 가졌고, 생에 대한 권태와 싸웠다.
그는 우울증 환자였으며 늘 불만에 차 있었고 미완성의 사람이었다.
그는 삶의 태도로서의 낭만주의에는 반대했지만 회화 경향으로서의 낭만주의를 받아들인 이유는 낭만주의의 광범위한 모티프 때문이었다.
그는 낭만주의자로 불리워지는 데 달가워하지 않았고 자신이 낭만주의의 대가라는 데 불쾌감을 나타냈다.

들라크루아는 제자를 교육하는 일에 흥미가 없었고 일반인이 참관할 수 있는 아틀리에를 한 번도 연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몇 사람의 조수를 썼을 뿐 제자로는 한 사람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의 영주같은 취향이 그로 하여금 일체의 자아폭로주의나 현학주의를 싫어하게 했으며 대중을 경멸했는데
26살에 이미 유명한 화가가 되었지만 말년에 "금수에 내맡겨져 갈가리 찢겨진 30년이었다"고 회고한 데서 알 수 있다.

그에게는 친구와 숭배자 및 후원자들이 있었고 후원자를 통해 국가로부터 작품 주문을 받았지만 대중의 이해와 사랑을 받지는 못했다.
그는 외톨이였으며 고독했는데 낭만주의자들이 일반적으로 그러했던 것보다 더욱 그러했다.

그를 아무런 유보 없이 인정해주고 사랑한 친구는 당대의 유명한 작곡가 쇼팽이었다.
들라크루아는 음악을 최대의 낭만주의 예술로 보았고 쇼팽을 낭만주의자들 중에서 가장 빼어난 낭만주의자로 칭찬했다.
이는 낭만주의에 대한 그의 사고가 일관성이 없었음을 보여주는데
모차르트를 최대의 경탄을 갖고 평하면서도 베토벤은 지나치게 자의적이며 낭만적이라고 보았다.
음악에 있어서 그는 고전주의적 취향을 갖고 있었으며, 쇼팽의 천편일률적인 감상주의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으면서도 사상적으로 자신과 더욱 가깝다고 할 수 있는 베토벤의 자유분방함에 대해서는 호의적이지 못했다. 

들라크루아는 정치가 샤를 들라크루아와 유명한 가구 제작업자의 딸 빅투아르 외벤 사이에서 네 번재 자식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친아버지가 샤를 가문의 친구 외교관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이라고 주장하는 미술사학자들도 있는데
그들은 샤를 들라크루아가 심한 종량을 앓고 있었으므로 생식이 불가능했음을 그 이유로 꼽는다.
그의 남성 능력을 회복시키려는 수술이 근친들이 보는 가운데 1797년 말에 행해졌고 이 사실은 널리 알려졌다.

들라크루아의 친아버지가 탈레랑이라고 하는 또 다른 근거로는 그의 외모가 탈레랑을 닮았으며 들라크루아가 화가로서 첫 발을 내디딜 때 탈레랑이 은밀히 도운 점이다.

들라크루아에게는 형이 둘, 누이가 하나 있었다.
들라크루아는 7살 때 샤를 들라크루아 아버지를 잃었고 16살 때 어머니를 잃었다. 그는 누나와 매형에 의해 양육되었다. 그는 누나와 함께 큰 재산은 아니지만 이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파산했다.

다비드의 제자로서 당시 평판이 자자한 화가 외사촌 레옹 프랑수아 리즈네르는 들라크루아에게 회화 기법상의 유익한 충고를 해주었으며, 당시 파리의 살롱 가운데 가장 유력한 왕당파 화가 프랑수아 제라르 남작의 살롱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었다.
훗날 들라크루아는 외사촌에게 상당한 액수의 유산과 샹로제에 있는 사유지를 남겨주었다.
들라크루아가 사교계에 기꺼이 받아들여진 것은 외사촌의 후원에 의한 것이지만 늘 단정하고 세련된 의상을 하고 품위있는 거동과 대화술이 나무랄 데 없었던 데 기인하기도 했다.
한편 제라르는 들라크루아에게서 회화에 천재적 재질이 있음을 알았다.

들라크루아의 문학적 취향은 1820년과 1830년 사이 수많은 책을 읽은 데서 이루어졌다.
그는 생제르맹데프레에 있는 제라르의 살롱에서 메리메와 스탕달을 만났고, 마르스 양의 연회에도 자주 가서 빅토르 쿠쟁, 퀴비에, 티에르 등을 만났으며, 1826년부터 문학 동아리 노디에의 세나클에 나가 빅토르 위고와 친분을 맺었다.
이런 사람들과의 교류에서 그의 문학적 취향은 형성되었고 그의 일기와 편지들에 문학적 내용이 가득차게 되었다.

들라크루아는 로마에 소재한 프랑스 아카데미의 책임자 앵그르가 이끄는 고대와 전통에 맹목적으로 집착하는 아카데미즘의 낡고 진부한 해석에 반발하면서 고대 신화의 근원적인 힘과 영웅들의 위대함을 회복시키려고 했다.
들라크루아는 다비드파의 '이상적 미' 개념에 가장 반항적이었으며, 끊임없이 문학에서 영감을 받아 그림면서 결코 그림을 정치적 수단으로 삼지 않았다.
그의 사진과 자화상을 보면 이성적이면서 명철한 정신을 지닌 당디dandy였음을 알 수 있다.
당디란 세련된 의상과 거동을 통해 정신적 귀족을 자부하는 사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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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는 1780년 8월 29일 프랑스 남서쪽 툴루즈에서 약간 북쪽에 위치한 오래된 도시 몽토방에서 초상화가이면서 장식적 조각가 장 마리 조셉 앵그르의 아들로 태어났다.
앵그르는 일찍이 아버지로부터 회화를 배웠고 1791년 11살 때 툴루즈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드로잉, 인물화, 풍경화를 배웠다.
그는 입학하던 해 초상드로잉으로 3등을 했으며 2년 후에는 인물드로잉으로 1등을 수상했다.
그의 바이올린 연주솜씨는 매우 훌륭했으며 13살부터 16살까지 시립오케스트라에서 제2바이올린 연주자로 돈을 벌었다.
그는 평생 바이올린을 즐겨 연주했다.

앵그르는 16살 때인 1797년 여름 늦게 파리로 가서 신고전주의의 선두자 다비드 아틀리에에서 앙투안 장 그로로부터 수학했으며 2년 후 에콜 데 보자르의 회화반에 받아들여졌다.
그는 1800년 2월 토르소 경연대회에서 2등했고 10월에는 로마대상을 2등으로 수상했다.
그는 군대 징집에서 면제받았고 1801년의 로마대상에서 회화부문으로 1등을 수상했다.
당시 프랑스 정부는 나폴레옹의 수없이 많은 전쟁으로 재정이 넉넉지 않아 로마대상 수상자들에게 돈을 지불하지 못하고 아틀리에만 제공해주었다.
그는 1804년에 아버지의 초상과 자화상을 그렸는데
초상을 그릴 때 주로 선을 사용한 후 표현적인 색채를 사용했으며 이는 평생 그의 고유한 회화기법이 되었다.
로마에서 그는 초상화 외에도 일광욕하는 사람들을 그렸는데
이후 여인의 누드는 그가 선호하는 주제가 되었다.

나폴레옹이 프랑스의 첫 황제에 등극한 지 얼마 후 1804년 24살의 앵그르는 로마의 나폴레옹 궁전을 위해 황제로 등극한 나폴레옹의 모습을 그리라는 공식명령을 받았다.
앵그르는 등극할 때의 화려한 복장을 한 나폴레옹의 모습을 그렸으며 국립대의회는 그것을 대의회장에 걸었다.
대의회는 나폴레옹의 위상을 알리기 위해 정치적 목적으로 앵그르에게 초상을 그리도록 한 것이다.
비록 나폴레옹이 황제의 자리를 찬탄했을지라도 앵그르는 그의 위상을 나타내며 또한 사실에 근거한 역사적인 사건을 표현해야 했는데
새로운 신화를 창조하는 일이었다.
그는 자연히 고전에서 아이디어를 구해야 했다.
나폴레옹의 모습은 주피터의 모습을 방불케 했는데 앵그르는 판화를 통해서 주피터의 모습을 보아 알고 있었다.
주피터의 독수리가 나폴레옹 발 아래 양탄자에 디자인된 것만 봐도 주피터를 염두에 두고 그렸음을 알게 한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위상을 로마제국의 영광과 동일한 것으로 여겨기고 있었다.
나폴레옹 자신 샤를막느의 뒤를 이은 황제라고 믿었는데 샤를막느는 9세기 로마 황제이면서 프랑크족의 왕으로 오늘날 독일에 해당하는 중앙 유럽의 전지역을 통치한 사람이었다.
앵그르는 나폴레옹의 초상을 그릴 때 샤를막느를 염두에 두었는데
나폴레옹의 왼손에 있는 상아로 된 손과 검 그리고 칼집은 샤를막느가 사용하던 것들이다. 

앵그르는 판사의 딸 앤 마리 줄리 포레스티에르와 약혼했는데 그녀도 다비드의 아틀리에에서 수학하고 있었다.
4년 동안 로마에서 정부 지원 유학생활을 마친 후 앵그르는 프랑스로 돌아가는 대신 로마에 더 머물기로 하고 아틀리에에를 얻었다.
그는 줄리와 1807년에 파혼했는데 줄리의 아버지가 당장 파리로 돌아오라는 명령에 그가 불복종했기 때문이다.

앵그르는 평소 알고 지내던 관리를 통해 정부가 의뢰하는 작품을 제작했고 또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초상화를 의뢰했으므로 경제적으로 불편하지 않았다.
18세기와 19세기 화가들이 초상화를 많이 그린 이유는 초상화가 그들의 주요 수입원이었기 때문이다.

앵그르는 1813년 세레에서 여성 모자를 생산하는 사람의 딸 마들린 샤펠레와 결혼했는데 이탈리아에서 만난 여인이었다.
앵그르와 우정을 나누던 그녀의 사촌 마담 드 로레알이 그녀로 하여금 로마로 오게 해서 앵그르에게 소개한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첫 아이가 사망했고 그후 두 사람 사이에 자식이 없었다.

앵그르는 1820년 로마에서 피렌체로 갔고 그곳에서 1824년까지 머물렀다.
그는 역사화를 주로 그렸으며 자신의 고향 몽토방 대성당의 의뢰를 받아 <루이 13세의 서약>을 라파엘로의 기법으로 그린 후 둘둘 말아 소지하고 헌신적인 아내를 피렌체에 남겨둔 채 파리로 갔다.
이 그림이 1824년 살롱(국전)에서 소개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를 아카데미에 반대하고 새로운 낭만주의를 옹호하는 선두자라고 갈채를 보냈다.
살롱전 폐막식 때 샤를 10세는 앵그르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1825년 6월 앵그르는 보자르 아카데미의 멤버에 선출되었으며 아내와 함께 살 수 있는 아파트가 주어졌는데
아카데미 멤버에게는 가족이 함께 거주할 수 있는 아파트가 제공되었다.
그는 그해 말 아틀리에를 얻고 제자들을 받아들였는데 곧 백 명 이상의 제자들이 그에게 몰려왔다.
앵그르는 1829년 에콜 데 보자르의 교수에 선임되었으며, 1833년에는 부원장으로 승진했고, 이듬해 원장에 취임했다.
그는 1834년 살롱전에 <성 심포리엥의 순교>를 출품했는데 평론가들이 냉담하게 반응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그는 로마의 프랑스 아카데미 책임자로 발령해줄 것을 요청했고 그의 청은 받아들여졌다.
그는 파리에서의 10년 동안의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1835년 1월 로마 아카데미에 부임했다.
그는 1841년까지 책임자로 재직하면서 빌라를 개축 확장했으며 도서관의 소장 책의 양을 늘렸고 교과과목에 고고학을 추가했다.
그는 많은 컨서트에 출연하여 바이올린을 연주하기도 했다.

앵그르가 파리로 돌아온 것은 1841년이었다. 그를 위한 축하연이 연일 있었고 그는 매우 환대받았다.
많은 유명 인사들이 그에게 초상화를 의뢰했으므로 경제적으로도 넉넉했다.
1849년 7월 아내가 지병으로 타계했고 슬픔에 빠진 그는 한동안 그림을 그리지 못했으며 초상화를 의뢰한 사람이 계약을 무효로 해주고 그로 하여금 쉬게 했다.

앵그르는 1852년 봄 친구의 소개로 43살의 델피느 라멜과 결혼했다.
첫 번째의 결혼과 마찬가지로 재혼도 그에게 행복한 가정을 허락해주었다.
그가 그녀를 얼마나 만족해 했는지는 그가 1852년에 그녀의 장인과 장모의 초상을 각각 그렸고 1855년 아내의 초상을 3점 드로잉했으며 1859년에는 유화로 그린 데서 알 수 있다.
그는 1840년대와 50년대 많은 초상화를 그렸고 자화상을 그리기도 했다.

앵그르는 1862년 원로원에 선출되었으며 3년 후에는 왕립예술원의 멤버에 선출되었다.
1867년 1월 14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대가들을 연구했는데 그의 아틀리에에는 조토의 작품에 관한 드로잉도 남아 있었다.
초기에 그린 누드 습작, 1807년 로마에서 그린 둥근 형태의 캔버스에 그린 풍경화, 그가 수집해온 작품들, 수첩, 그리고 그의 유명한 바이올린이 아틀리에에 남아 있었는데
이것들은 현재 앵그르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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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미적 경험의 심리적인 효과는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자발적으로 느끼는 어떤 대상이기 때문에 아름다움이란 대상 자체에서는 아무런 특질을 지니는 것이 아니다.
아름다움이란 대상을 관조하는 정신 속에 존재하며 각각의 정신은 서로 다른 아름다움을 지각한다."

이것은 데비드 흄David Hume(1711-76)이 저서 <인간본성론 A Treatise of Human Nature>(1739-40)에 기술한 내용이다.
흄은 수많은 인간적 산물들의 아름다움은 그것들이 기여하는 목적에 대한 유용성과 적절성으로부터 비롯하는 것으로 보았다.

예술과 미적 경험의 심리적인 효과는 두 방향으로 진전되었다.

하나는
아름다운 것, 고상한 것에 대한 어떤 기본 미적 특성들에 대한 설명과 분석에 대한 탐구였으며,
다른 하나는
취미의 문제인 비판적 판단의 본질과 타당성에 관한 탐구였다.

이 둘은 종종 엇갈리는 방향으로 나아갔는데 18세기 초 취미 혹은 비판적 판단에 관한 문제는 철학자들의 관심사였다.
네오플라톤주의를 받아들인 철학자들은 미에 대한 우리 인상의 직접성을 취미로 간주하며 조화를 미와 장점으로 보았고, 우리 마음의 눈이 미적 그리고 윤리적 형태를 모두에서 조화를 포착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18세기에 와서야 취미가 미적 태도로서 고상한 것에 대한 개념을 미와 구별되는 미적 특성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는 처음으로 미학이 자주적으로 철학적 훈련을 쌓아가는 것을 의미했다.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Hans Georg Gadamer(b. 1900)는 <진리와 방법 I Wahrheit und Methode>(1960)에서 취미 개념을 진전시킨 최초의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발타사르 그라시안Baltasar Gracian(1601-58)을 꼽았다.
가다머는 "그라시안이 인간의 감각들 중 가장 동물적이고 내면적 감각, 즉 감각적 취미der sinnliche Geschmack라도 이미 사물에 대한 정신적인 평가에서 수행되는 식별의 싹을 갖고 있다는 데서 출발한 것으로 보았다.

가장 직접적인 방식으로 즐기면서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것인, 취미의 감각적 식별은 단순한 본능이 아니라 이미 감각적 본능과 정신적 자유의 중간에 있으며, 감각적 취미 자체는 삶의 가장 긴급한 필요에 속하는 것에 대해서도 선택과 평가의 거리를 갖는데 그 특징이 있으므로, 가다머는 "그라시안이 취미에서 이미 '동물성의 정신화'를 보며 정신만이 아니라 취미의 경우에도 형성이 가능하다고 암시한 것은 당연하다"고 보았다.

가다머는 취미를 일종의 인식방식으로 보고 본질에서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중요한 사회적 현상으로 보았다.
취미가 단순히 개인적인 특성이 아닌 이유는 취미가 늘 좋은 취미 혹은 확실한 취미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는 말했다.

취미는 오히려 감각과 동일한 것이다.
취미는 근거로부터 나온 지식을 우선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만약 취미가 어떤 것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더라도 취미는 그 이유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취미는 가장 큰 확실성을 갖고 그것을 경험한다.
따라서 취미의 확실성은 무취미를 방지하기 위한 안전핀이다.
취미의 판별적 선택에서 우리가 이러한 부정적 현상(무취미)에 특히 민감하다는 것은 매우 주목할만 하다.
부정적 현상에 대응되는 긍정적 현상은 취미가 풍부한 것이 아니라 취미에 거슬리지 않는 것이다.
취미가 평가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취미에 거슬리지 않는 것이다.

취미의 정의는, 취미가 취미를 거스르는 것에 의해 손상되며, 손상을 줄 위험성이 있는 모든 것을 피하듯이, 취미에 거스르는 것을 피한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나쁜 취미'라는 개념은 결코 '좋은 취미'에 근본적으로 반대되는 현상이 아니다.
좋은 취미의 반대는 오히려 '취미가 없는 것'이다.
좋은 취미는 이상하게 눈에 띄는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피하는 감수성이어서 취미가 없는 사람에게는 그 반응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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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회화는 제쳐놓고 시만 상상력의 영역에 넣은 이유는
 

관람자의 입장에서 예술의 창조적 과정과 효과에서의 예술의 심리적 요소 상상력을 알아보도록 하자.

상상이나 공상은 불가사의할 때 예술적 창조성 안에서 중점적인 역할을 해왔다.
이성주의자들에게 상상력은 이미지를 기록하는 기능, 혹은 이미지를 결합시키는 기능으로 인식되었으며
지식에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거나 조금밖에 하지 못했다.
하지만 예술에 순수감각과 순수오성 사이의 특유한 지위를 부여한 경험론자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1561-1626)은 <배움의 진보 Advancement of Learning>(1605)에서 상상력이 기억 그리고 이성과 함께 하나의 기능으로 작용한다면서 시를 이같은 기능으로 보고 역사와 도덕철학 그리고 자연철학 모두를 상이한 기능으로 간주하였다.

음악과 회화는 제쳐놓고 시만 상상력의 영역에 넣은 이유는 시에서만 인간적 환상의 창조물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적 예술과 언어적 예술의 이원론은 18세기에 가서 순수예술과 순수문학의 대립으로 나타났다.
괴테는 시각예술과 언어예술 사이에는 '거대한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고 보았다.
<배움의 진보>에서 베이컨은 음악은 귀를, 회화는 눈을 즐겁게 해주는 예술로 간주하여 실천적 기술로 취급하면서 의술 및 화장술과 마찬가지의 부류로 취급했다.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1588-1679)는 1651년에 출간한 <리바이어던 Leviathan>의 첫장에서 상상력을 분석하여 "부패하는 감각 decaying sense"으로 정의했으며 감각의 심리적 운동이 중단될 때 환상들이나 이미지들이 남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소극적인 단순한 상상력 외에도 복합의 상상력이란 것이 있는데 이것이 낡은 것들을 재배열해서 색다른 이미지들을 창조한다.
홉스는 정신에 있는 사고의 '열차들 trains'은 일반 연합의 원리에 의해서 인도된다고 기술했지만 이에 관해 그는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

존 로크John Locke(1632-1704)도 1690년에 출간한 <인간의 이해력에 관한 에세이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의 네 번째 개정판에서 "개념들의 연합에 관하여 Of the Association of Ideas"(1700)라는 제목으로 상상력에 관해 언급했지만 설명이 충분하지 못햇다.
로크는 <이해의 행위 Conduct of Understanding>에서 개념들의 경향은 상호 동반하며 이해를 같이 하고 서로 정신 속으로 잡아당긴다면서 이런 경향을 이해의 병적인 특징으로 보았다.
시적 언어의 경향이 비유적인 데서 공상의 작품이 가장 잘 나타난다고 보았다.
우리가 즐거움에 관심이 있는 한 그런 양식의 장식들로 인한 문제가 우리에게 생기지는 않지만, 우리가 진실에 관심이 있을 때는 은유와 직유들은 "완전한 속임수들 perfect cheats"이다.
그의 말에서 우리는 17세기 후반의 사람들이 상상력에 대한 불신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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