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는 1780년 8월 29일 프랑스 남서쪽 툴루즈에서 약간 북쪽에 위치한 오래된 도시 몽토방에서 초상화가이면서 장식적 조각가 장 마리 조셉 앵그르의 아들로 태어났다.
앵그르는 일찍이 아버지로부터 회화를 배웠고 1791년 11살 때 툴루즈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드로잉, 인물화, 풍경화를 배웠다.
그는 입학하던 해 초상드로잉으로 3등을 했으며 2년 후에는 인물드로잉으로 1등을 수상했다.
그의 바이올린 연주솜씨는 매우 훌륭했으며 13살부터 16살까지 시립오케스트라에서 제2바이올린 연주자로 돈을 벌었다.
그는 평생 바이올린을 즐겨 연주했다.
앵그르는 16살 때인 1797년 여름 늦게 파리로 가서 신고전주의의 선두자 다비드 아틀리에에서 앙투안 장 그로로부터 수학했으며 2년 후 에콜 데 보자르의 회화반에 받아들여졌다.
그는 1800년 2월 토르소 경연대회에서 2등했고 10월에는 로마대상을 2등으로 수상했다.
그는 군대 징집에서 면제받았고 1801년의 로마대상에서 회화부문으로 1등을 수상했다.
당시 프랑스 정부는 나폴레옹의 수없이 많은 전쟁으로 재정이 넉넉지 않아 로마대상 수상자들에게 돈을 지불하지 못하고 아틀리에만 제공해주었다.
그는 1804년에 아버지의 초상과 자화상을 그렸는데
초상을 그릴 때 주로 선을 사용한 후 표현적인 색채를 사용했으며 이는 평생 그의 고유한 회화기법이 되었다.
로마에서 그는 초상화 외에도 일광욕하는 사람들을 그렸는데
이후 여인의 누드는 그가 선호하는 주제가 되었다.
나폴레옹이 프랑스의 첫 황제에 등극한 지 얼마 후 1804년 24살의 앵그르는 로마의 나폴레옹 궁전을 위해 황제로 등극한 나폴레옹의 모습을 그리라는 공식명령을 받았다.
앵그르는 등극할 때의 화려한 복장을 한 나폴레옹의 모습을 그렸으며 국립대의회는 그것을 대의회장에 걸었다.
대의회는 나폴레옹의 위상을 알리기 위해 정치적 목적으로 앵그르에게 초상을 그리도록 한 것이다.
비록 나폴레옹이 황제의 자리를 찬탄했을지라도 앵그르는 그의 위상을 나타내며 또한 사실에 근거한 역사적인 사건을 표현해야 했는데
새로운 신화를 창조하는 일이었다.
그는 자연히 고전에서 아이디어를 구해야 했다.
나폴레옹의 모습은 주피터의 모습을 방불케 했는데 앵그르는 판화를 통해서 주피터의 모습을 보아 알고 있었다.
주피터의 독수리가 나폴레옹 발 아래 양탄자에 디자인된 것만 봐도 주피터를 염두에 두고 그렸음을 알게 한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위상을 로마제국의 영광과 동일한 것으로 여겨기고 있었다.
나폴레옹 자신 샤를막느의 뒤를 이은 황제라고 믿었는데 샤를막느는 9세기 로마 황제이면서 프랑크족의 왕으로 오늘날 독일에 해당하는 중앙 유럽의 전지역을 통치한 사람이었다.
앵그르는 나폴레옹의 초상을 그릴 때 샤를막느를 염두에 두었는데
나폴레옹의 왼손에 있는 상아로 된 손과 검 그리고 칼집은 샤를막느가 사용하던 것들이다.
앵그르는 판사의 딸 앤 마리 줄리 포레스티에르와 약혼했는데 그녀도 다비드의 아틀리에에서 수학하고 있었다.
4년 동안 로마에서 정부 지원 유학생활을 마친 후 앵그르는 프랑스로 돌아가는 대신 로마에 더 머물기로 하고 아틀리에에를 얻었다.
그는 줄리와 1807년에 파혼했는데 줄리의 아버지가 당장 파리로 돌아오라는 명령에 그가 불복종했기 때문이다.
앵그르는 평소 알고 지내던 관리를 통해 정부가 의뢰하는 작품을 제작했고 또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초상화를 의뢰했으므로 경제적으로 불편하지 않았다.
18세기와 19세기 화가들이 초상화를 많이 그린 이유는 초상화가 그들의 주요 수입원이었기 때문이다.
앵그르는 1813년 세레에서 여성 모자를 생산하는 사람의 딸 마들린 샤펠레와 결혼했는데 이탈리아에서 만난 여인이었다.
앵그르와 우정을 나누던 그녀의 사촌 마담 드 로레알이 그녀로 하여금 로마로 오게 해서 앵그르에게 소개한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첫 아이가 사망했고 그후 두 사람 사이에 자식이 없었다.
앵그르는 1820년 로마에서 피렌체로 갔고 그곳에서 1824년까지 머물렀다.
그는 역사화를 주로 그렸으며 자신의 고향 몽토방 대성당의 의뢰를 받아 <루이 13세의 서약>을 라파엘로의 기법으로 그린 후 둘둘 말아 소지하고 헌신적인 아내를 피렌체에 남겨둔 채 파리로 갔다.
이 그림이 1824년 살롱(국전)에서 소개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를 아카데미에 반대하고 새로운 낭만주의를 옹호하는 선두자라고 갈채를 보냈다.
살롱전 폐막식 때 샤를 10세는 앵그르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1825년 6월 앵그르는 보자르 아카데미의 멤버에 선출되었으며 아내와 함께 살 수 있는 아파트가 주어졌는데
아카데미 멤버에게는 가족이 함께 거주할 수 있는 아파트가 제공되었다.
그는 그해 말 아틀리에를 얻고 제자들을 받아들였는데 곧 백 명 이상의 제자들이 그에게 몰려왔다.
앵그르는 1829년 에콜 데 보자르의 교수에 선임되었으며, 1833년에는 부원장으로 승진했고, 이듬해 원장에 취임했다.
그는 1834년 살롱전에 <성 심포리엥의 순교>를 출품했는데 평론가들이 냉담하게 반응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그는 로마의 프랑스 아카데미 책임자로 발령해줄 것을 요청했고 그의 청은 받아들여졌다.
그는 파리에서의 10년 동안의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1835년 1월 로마 아카데미에 부임했다.
그는 1841년까지 책임자로 재직하면서 빌라를 개축 확장했으며 도서관의 소장 책의 양을 늘렸고 교과과목에 고고학을 추가했다.
그는 많은 컨서트에 출연하여 바이올린을 연주하기도 했다.
앵그르가 파리로 돌아온 것은 1841년이었다. 그를 위한 축하연이 연일 있었고 그는 매우 환대받았다.
많은 유명 인사들이 그에게 초상화를 의뢰했으므로 경제적으로도 넉넉했다.
1849년 7월 아내가 지병으로 타계했고 슬픔에 빠진 그는 한동안 그림을 그리지 못했으며 초상화를 의뢰한 사람이 계약을 무효로 해주고 그로 하여금 쉬게 했다.
앵그르는 1852년 봄 친구의 소개로 43살의 델피느 라멜과 결혼했다.
첫 번째의 결혼과 마찬가지로 재혼도 그에게 행복한 가정을 허락해주었다.
그가 그녀를 얼마나 만족해 했는지는 그가 1852년에 그녀의 장인과 장모의 초상을 각각 그렸고 1855년 아내의 초상을 3점 드로잉했으며 1859년에는 유화로 그린 데서 알 수 있다.
그는 1840년대와 50년대 많은 초상화를 그렸고 자화상을 그리기도 했다.
앵그르는 1862년 원로원에 선출되었으며 3년 후에는 왕립예술원의 멤버에 선출되었다.
1867년 1월 14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대가들을 연구했는데 그의 아틀리에에는 조토의 작품에 관한 드로잉도 남아 있었다.
초기에 그린 누드 습작, 1807년 로마에서 그린 둥근 형태의 캔버스에 그린 풍경화, 그가 수집해온 작품들, 수첩, 그리고 그의 유명한 바이올린이 아틀리에에 남아 있었는데
이것들은 현재 앵그르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