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젠 들라크루아
외젠 들라크루아(1798-1863)는 어떤 의미에서 '세기병'을 앓았다고 말할 수 있는데 심한 우울증에 괴로워했으며, 공허와 목표 상실의 감정을 가졌고, 생에 대한 권태와 싸웠다.
그는 우울증 환자였으며 늘 불만에 차 있었고 미완성의 사람이었다.
그는 삶의 태도로서의 낭만주의에는 반대했지만 회화 경향으로서의 낭만주의를 받아들인 이유는 낭만주의의 광범위한 모티프 때문이었다.
그는 낭만주의자로 불리워지는 데 달가워하지 않았고 자신이 낭만주의의 대가라는 데 불쾌감을 나타냈다.
들라크루아는 제자를 교육하는 일에 흥미가 없었고 일반인이 참관할 수 있는 아틀리에를 한 번도 연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몇 사람의 조수를 썼을 뿐 제자로는 한 사람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의 영주같은 취향이 그로 하여금 일체의 자아폭로주의나 현학주의를 싫어하게 했으며 대중을 경멸했는데
26살에 이미 유명한 화가가 되었지만 말년에 "금수에 내맡겨져 갈가리 찢겨진 30년이었다"고 회고한 데서 알 수 있다.
그에게는 친구와 숭배자 및 후원자들이 있었고 후원자를 통해 국가로부터 작품 주문을 받았지만 대중의 이해와 사랑을 받지는 못했다.
그는 외톨이였으며 고독했는데 낭만주의자들이 일반적으로 그러했던 것보다 더욱 그러했다.
그를 아무런 유보 없이 인정해주고 사랑한 친구는 당대의 유명한 작곡가 쇼팽이었다.
들라크루아는 음악을 최대의 낭만주의 예술로 보았고 쇼팽을 낭만주의자들 중에서 가장 빼어난 낭만주의자로 칭찬했다.
이는 낭만주의에 대한 그의 사고가 일관성이 없었음을 보여주는데
모차르트를 최대의 경탄을 갖고 평하면서도 베토벤은 지나치게 자의적이며 낭만적이라고 보았다.
음악에 있어서 그는 고전주의적 취향을 갖고 있었으며, 쇼팽의 천편일률적인 감상주의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으면서도 사상적으로 자신과 더욱 가깝다고 할 수 있는 베토벤의 자유분방함에 대해서는 호의적이지 못했다.
들라크루아는 정치가 샤를 들라크루아와 유명한 가구 제작업자의 딸 빅투아르 외벤 사이에서 네 번재 자식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친아버지가 샤를 가문의 친구 외교관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이라고 주장하는 미술사학자들도 있는데
그들은 샤를 들라크루아가 심한 종량을 앓고 있었으므로 생식이 불가능했음을 그 이유로 꼽는다.
그의 남성 능력을 회복시키려는 수술이 근친들이 보는 가운데 1797년 말에 행해졌고 이 사실은 널리 알려졌다.
들라크루아의 친아버지가 탈레랑이라고 하는 또 다른 근거로는 그의 외모가 탈레랑을 닮았으며 들라크루아가 화가로서 첫 발을 내디딜 때 탈레랑이 은밀히 도운 점이다.
들라크루아에게는 형이 둘, 누이가 하나 있었다.
들라크루아는 7살 때 샤를 들라크루아 아버지를 잃었고 16살 때 어머니를 잃었다. 그는 누나와 매형에 의해 양육되었다. 그는 누나와 함께 큰 재산은 아니지만 이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파산했다.
다비드의 제자로서 당시 평판이 자자한 화가 외사촌 레옹 프랑수아 리즈네르는 들라크루아에게 회화 기법상의 유익한 충고를 해주었으며, 당시 파리의 살롱 가운데 가장 유력한 왕당파 화가 프랑수아 제라르 남작의 살롱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었다.
훗날 들라크루아는 외사촌에게 상당한 액수의 유산과 샹로제에 있는 사유지를 남겨주었다.
들라크루아가 사교계에 기꺼이 받아들여진 것은 외사촌의 후원에 의한 것이지만 늘 단정하고 세련된 의상을 하고 품위있는 거동과 대화술이 나무랄 데 없었던 데 기인하기도 했다.
한편 제라르는 들라크루아에게서 회화에 천재적 재질이 있음을 알았다.
들라크루아의 문학적 취향은 1820년과 1830년 사이 수많은 책을 읽은 데서 이루어졌다.
그는 생제르맹데프레에 있는 제라르의 살롱에서 메리메와 스탕달을 만났고, 마르스 양의 연회에도 자주 가서 빅토르 쿠쟁, 퀴비에, 티에르 등을 만났으며, 1826년부터 문학 동아리 노디에의 세나클에 나가 빅토르 위고와 친분을 맺었다.
이런 사람들과의 교류에서 그의 문학적 취향은 형성되었고 그의 일기와 편지들에 문학적 내용이 가득차게 되었다.
들라크루아는 로마에 소재한 프랑스 아카데미의 책임자 앵그르가 이끄는 고대와 전통에 맹목적으로 집착하는 아카데미즘의 낡고 진부한 해석에 반발하면서 고대 신화의 근원적인 힘과 영웅들의 위대함을 회복시키려고 했다.
들라크루아는 다비드파의 '이상적 미' 개념에 가장 반항적이었으며, 끊임없이 문학에서 영감을 받아 그림면서 결코 그림을 정치적 수단으로 삼지 않았다.
그의 사진과 자화상을 보면 이성적이면서 명철한 정신을 지닌 당디dandy였음을 알 수 있다.
당디란 세련된 의상과 거동을 통해 정신적 귀족을 자부하는 사람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