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오클래시시즘Neoclassicism

 
네오클래시시즘Neoclassicism에 대한 이해는 미술사학자에 따라서 다른데 낭만주의와 별개의 양식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낭만주의의 한 관점이나 유형으로 그 이상으로 보지 않는 견해도 있다.
네오클래시시즘은 고대 양식에 대한 새로운 재조명으로서 최소한 처음에는 계몽주의Enlightenment와 관련이 있다.

계몽주의는 18세기 프랑스와 독일에서 일어난 사상운동으로 반종교적(현세적), 반형이상학적(과학적) 사고방식을 자연에 대한 인식뿐 아니라 사회에 대한 인식에까지 확장시키면서 이런 사상을 보급 혹은 계몽시켜서 사회적 부자유, 불평 등을 제거해야 한다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런 사상은 17세기 후반 영국에서 일어났는데 특히 존 로크John Locke의 철학이 두드러졌다.
로크는 형이상학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한 후 과학적 인식론의 창시자가 되었으며, 정치, 윤리, 종교에 관해 자유주의의 입장을 명백히 했다.
영국은 17세기 중엽 이후 이미 시민혁명을 성취했으므로 자유주의는 다소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엄격한 현실비판의 형태를 취하지 않아도 무방했다.

영국과는 달리 프랑스에서는 18세기에 들어서서도 절대주의가 존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크의 사상이 볼테르Voltaire, 몽테스뀨C. L. de Montesquieu에 의해 이식되자 영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급진적 경향을 띠게 되었으며 계몽주의라는 고유한 형태를 갖추기에 이르렀다.
프랑스 계몽주의의 제1기는 볼테르와 몽테스뀨 두 사람으로 대표되지만 18세기 중엽의 제2기에는 데니스 디드로Denis Diderot, 달랑베르J. le R. D'Alembrt, 엘베띠우스C. A. Helvetius, 돌바끄P. H. T. D'Holbach 등이 출현하여 과학적 자연주의의 입장이 확고해졌다.
디드로와 달랑베르는 계몽을 목적으로서 <백과사전> 17권을 편찬한 후 여기에 참여한 사람들을 백과전서가encyclopedistes라 불렀다.
끝으로 튀르고A. R. J. Turgot의 역사철학이 형성되었는데
특히 꽁도르세M. J. A. Condorcet는 진보의 관념을 인류사 전체에 대해서 확증하려고 했다.

이들 계몽 철학자들의 사상을 요약하면 이론으로는 과학적 자연주의(유물론 혹은 실증론)를 취하고, 윤리에 있어서는 다분히 상대주의적인 이성, 도덕 내지는 공리주의를 취하며, 종교에 관하여는 성립 종교에 반대하여 이성 종교 내지는 무신론을 취하여 역사에 있어서의 진보를 확신했다.
독일에서는 그때까지도 근세 국가로서 통일을 이룩하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프랑스 계몽사상이 지닌 사회개혁의 열정이 독일에서는 충분히 나타나지 못했다.
독일의 계몽사상은 이론에 있어 다분히 형이상학적이었으며 라이프니츠G. W. Leibniz의 제자 볼프C. Wolff의 합리론적 체계가 유력했다.

1776년 미국의 독립혁명과 1789년 프랑스 혁명은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근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역사적인 사건들이었다.
인간의 모든 행위가 전통이나 기존의 권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성과 공리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상이 만연되었다.
이런 사상은 경제, 정치, 종교에서 뿐 아니라 예술에도 적용되었다.
귀족주의적 바로크와 로코코가 더이상 존속할 수 없었던 건 이런 민주적 사상이 만연되었기 때문이다.
미술에서는 예술가와 관람자 모두의 취미가 달라졌는데
취미의 척도가 이성의 척도였으며 취미와 이성 모두를 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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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소개하는 작가론은 김주영 씨의 부탁으로 쓴 것입니다.
내가 김주영씨을 처음 만난 것은 6년 전 파리에서였습니다.
그때 그 분의 안내를 받아 오베르로 가서 반 고흐와 테오의 무덤을 본 것은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지난번 광주 비엔날레에서 황토 토굴을 보신 분이 있다면 그것을 소개한 작가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국외로 보내는 자료라 영어로 쓴 것을 우리말로 번역하다보니 어색한 부분도 있을 줄 압니다.) 

  

김주영의 예술적 정신에 관하여
김주영의 첫 퍼포먼스 <스님의 명상>이 1992년 파리대학 정원에서 행위된 이래 여태까지 해온 설치와 퍼포먼스의 제목들이 시사하듯, 그녀의 예술적 정신 혹은 미학은 다른 이들이나 대상들의 존재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그녀의 행위와 조화를 잘 이룬다.
자신을 유물론자이며 유심론자라고 했듯이 그녀는 자신의 체험만을 믿을 뿐 어떤 류의 개념들도 부정한다.
그녀에게 인생은 오직 환상이며 인간의 본질적 가치를 회복시켜 주는 궁극적 요소는 자각이다.

1995년 뽕뚜아즈에서 그리고 이듬해 베를린에서 보여준 <나비의 꿈>은 퍼포먼스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녀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설치를 하는지 그 방법을 잘 말해준다.
어느날 그녀는 나비 한 마리가 정원의 백일홍 위에 앉아 있는 걸 보았다.
그것은 그대로 그녀의 설치가 되었다.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늦가을 어느 날 귀가하는 길에 죽은 나비를 발견하고는 나비의 혼을 위해 제를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비의 꿈>은 이런 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아틀리에 앞 정원에서 죽은 나비를 불에 태우고 그 재를 광목천으로 만든 길(폭 0.7미터, 길이 20미터)을 따라 시내로 가서 물에 띄워보냈다.

그 무렵 그녀는 박인경 씨와 대화하던 중 작곡가 윤이상 씨를 머리에 떠올렸다.
아리아 <나비의 미망인> 악보를 보고 매우 아름답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윤이상 씨와 교신을 했다. 베를린에 있는 윤이상 씨의 집 근처 연못가에서 그녀는 <나비의 꿈>을 행위했는데 불행하게도 퍼포먼스가 있기 불과 몇 주 전 윤이상 씨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녀와 윤이상 씨 모두가 언급한 나비는 장자가 말한 바로 그 나비였다.
인생에 관한 장자의 철학은 환상이었으며 또한 인간과 나비의 꿈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는 김주영에게 아주 많은 걸 시사했다.
장자를 통해 그녀는 우주의 만물에는 신성한 혼이 있으며 만물이 다시 태어난다고 믿게 되었다.
그리하여 만물을 사랑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먼지와도 같은 무생물까지도 사랑하게 되었다.

김주영은 프랑스 뽕뚜아즈의 자신의 아틀리에 이층에 종이로 커다란 검정 육면체 상자를 설치했다.
그 상자를 그 나비에게 바치고 일년 동안 명상의 장소로 사용하였다.
이것이 <검은 방>의 전부이다.
그녀의 인식의 힘은 대단했는데 상자 안에서 명상하면서 어두운 밤 우주 안에서의 고독을 느낄 수 있었다.
상자는 그녀에게 우주였다. 절대의 자유를 즐길 수 있었다.
그녀는 공간과 시간에서 어떻게 탈출하는지를 배웠다.
그 상자 안에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그 상자 안에서는 자의식이 가능했다.

1996년 어느날 우연히 한 남자를 알게 되었다.
그 남자는 평생 길에서 가면을 쓴 채 춤추며 노래를 부르다 길에서 죽었다.
그가 언제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녀는 제를 통해 그를 위로해주고 싶었다.
이것이 <중광대, 그 삶의 방법>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그녀는 그의 모습이 찍힌 사진을 천 장 복제하여 아틀리에의 벽과 바닥에 붙였다. 그리고 쌀을 여러 군데 쏟아부었는데 그 남자가 평생 굶주린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의 사진을 50센티미터 높이의 나무상자 세 개에 붙여서 위패로 사용하며 관람자들을 초대하여 사진들을 밟고 다니게 했으며 사진과 쌀을 태웠다.
이 퍼포먼스는 지신에게 제를 드리는 그녀의 방식이었다.
중광대란 이름은 그녀가 붙인 것으로 단순히 거리의 삐에로란 뜻일 뿐이다.
그는 자신의 부모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버려진 아이였다.
그는 길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하루밤을 보낼 그날의 안식처를 찾았다.
어느날 그는 길모퉁이에 죽어 있었다.
그녀는 아무도 돌보지 않은 그 남자의 슬픔을 동정했다.
그의 혼의 굶주림을 채워주기 위해 쌀을 태우는 것으로 그에 대한 동정심을 표시했다.

<어느 기생의 영혼제>는 1993년 서울에서 소개한 것으로 이것 또한 그녀의 동정심의 발로였다.
그때는 이름 모를 기생을 위한 것이었다.
김주영은 불쌍한 인생들을 위로해주기 바란다.
1997년의 <같이 먹읍시다>는 쌀과 감자로 굶주린 모든 혼들을 만족시켜주는 것이었다.
이 퍼포먼스를 프랑스의 그녀 아틀리에에서 소개했다.
설치는 전체 작품의 일부였다.
기다란 테이블(폭 0.7미터 길이 2.13미터) 위에 30kg의 쌀을 붓고 문간에 25kg의 감자를 가져다 놓았다.
누구라도 가져가고 싶은 만큼 가져가게 했다.
동쪽과 북쪽으로 난 창문을 열고 새들로 하여금 자유롭게 와서 먹게 했다.
그녀는 이를 음력 8월 15일에 행위했는데 이 날이 한국에서는 추석이다.

삶의 방법에 대한 관심은 자연히 그녀로 하여금 생태학에까지 관심의 폭을 확장하게 했다.
하루는 죽은 물고기를 한 마리 발견했다.
오염된 물이원인이었다.
그 물고기를 플래스터로 뜨고 가는 광목띠로 싼 후 검정색을 칠했다.
그리고 그것을 유리 위에 올려놓은 후 꽃밭에 설치했다.
그녀는 아이들을 포함한 많은 관람자들과 함께 그 물고기를 위해 촛불의식을 거행하면서 유리 위에 색가루를 뿌리고 그 위에 야생화를 바쳤다.
그리고 그 앞에 가부좌를 하고 새벽 4시 촛불이 다 탈 때까지 명상에 잠겼다.
이것이 <공해로 죽은 물고기를 위하여>였다.
사흘 후 이 오브제를 아틀리에 안으로 들여놓았다.
그녀는 예술품을 만들지 않고 예술을 행위한다.
그녀에게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만들기보다는 하나의 행위인 것이다.

불은 그녀에게 과거와 미래를 화해시키는 하나의 연장이다.
산 자와 죽은 자들을 화해시키는 것이 그녀가 하는 행위의 목적이다.
불행한 삶을 산 혼들을 위로하고 다음의 생에서는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는 것이 그녀의 설치와 퍼포먼스의 주요 목표이다.
그녀는 부적과 환생의 효력을 믿는다.
그녀는 부적을 태우고 불이 불행을 삼킨다.
그녀는 1998년 인도와 네팔을 여행할 때 마을에서 많은 부적을 태웠는데 그 마을들은 오랑가바 마을, 아그라 마을, 제퍼 마을, 제살매르 마을, 포카라 마을, 바라나시 마을 등이었다.
즉흥적으로 그녀는 <부적의 불꽃>을 행위했다.

그녀의 작품 제목들은 우리로 하여금 현대판 무당처럼 행위하는 그녀의 예술 세계를 상상하게 만든다.
만약 그녀의 목적과 그것을 이루는 방법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무당과 같은 그녀의 행위에 동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의 예술적 정신은 매우 단순하다.
그녀는 사람, 동물, 벌레, 사물 등에까지 동정심을 표한다.
그녀는 물질이 주는 만족을 배격한다.
그녀에게 궁극적인 가치는 정신적인 즐거움 혹은 평온한 마음의 상태인 것이다.
그녀의 작품 제목들은 언급할 가치가 있다; <스님의 명상>(1992), <윤회의 논리>(1993), <제 5의 계절>(1994), <지나가는 존재>(1995), <흔적>(1995), <창; 동구 밖>(1995), <하늘로 간 달팽이>(1997), <고슴도치, 안녕>(1999), <어느 말의 아름다운 환생을 위하여>(1999), <만다라>(1999), <이름 없는 깃발들>(1999), <떠도는 무명의 영혼들이여; 등잔불제>(2000), <신목>(2000), <새야, 새야>(2000) 등이 있다.

지난 해 그녀는 <고려인; 그 슬픈 족적의 순례>를 소개했다.
기차를 타고 강압에 의해 유랑을 떠난 사람들의 통로 블라디보스톡, 카바로브스크, 노보스브리스크를 경유하여 알마 아타에까지 갔다.
그녀는 충청북도 청원군 중말에서 출발하여 알마 아타의 우츠 토베까지 장장 7천 킬로미터를 다녀왔는데 9월 22일에 떠나 10월 2일에 돌아왔다.
그 순례에서 수집한 자료를 편집하여 금년 광주 비엔날레에서 소개했다.
그녀는 황토 굴집을 설치했는데 당시 고려인이 살던 집을 재현한 것이다.

이제 그녀는 일본 히로시마에서 <히로시마 조센징>을 소개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조센징은 일본인이 한국인을 비하해서 부른 말이다.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을 때 약 7천 명의 조센징이 죽었다.
김주영은 그들의 혼을 위로하려고 한다.
나는 그녀가 이 퍼포먼스를 성공적으로 이끌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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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에 얼마나 의존했는가를 입증해준다  

김광우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바자리는 "미켈란젤로는 인체의 형상을 만드는 데 있어 자연이 제공해 줄 수 없는 전체로서의 조화로움, 우아함이 깃든 조화로움만을 추구한 결과 9등신, 10등신, 심지어는 12등신까지의 비례법을 적용하곤 한다"고 했다.
이는 미켈란젤로가 나중에 가서 미의 어떤 일정한 기준에 무조건 따르기보다는 상상력과 개별적인 영감에 얼마나 의존했는가를 입증해준다.
건축에 관한 미켈란젤로의 사고 또한 이와 같았는데
바자리는 <미술가 열전>에 적었다.

비트루비우스와 고대인들이 해놓은 일에 따라, 그리고 내려오는 관례에 따라 사람들이 그동안 완성시켰던 적도, 규칙이 좌우하는 일로부터 여하튼 그는 박차고 나왔다.
그러므로 장인들은 그에게 무한히 감사함을 느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미켈란젤로가 장인들이 일할 때 늘 밟아야만 했던 상도의 굴레와 속박을 내팽겨쳐주었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의 생애에 있어 마지막 15년 내지 20년 동안은 그의 예술과 사상면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그것은 여러 점에서 볼 때 1530년대 후반부와 1540년대 초에 보여준 예술과 사상의 특징들이 좀더 강화된 양상으로 나타난 것 뿐이다.

1545년경 이후 교황권의 위상에 변화가 생겼다.
프로테스탄트와의 분열이 극에 달해 라티스본 회의Diet of Ratisbon 이후부터는 타협이란 것은 말조차 꺼낼 수도 없는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다.
그렇게 됨으로써 미켈란젤로가 속해 있던 온건파는 점차 그 힘이 약해지게 되었다.
온건파의 신비주의는 날로 내성적인 성격을 더해 가게 되었다.
이런 격동기에 나온 미켈란젤로의 대표작으로 그가 마지막으로 조각한 군상조각이자 죽는 순간까지 완성하지 못한 <론다니니 피에타 Pieta Rondanini>가 있다.
그는 이 조각을 통해 모든 육체적인 특성을 나타내주는 인체의 상징요소들을 박탈하여 끝내 순수한 정신적인 관념을 직접적으로 전하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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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는 예술을 예술가가 하늘로부터 받은 선물로 보았다  

 김광우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미켈란젤로는 예술의 종교적 기능에 대해 무엇보다도 명백히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그는 종교적인 화가는 예술에 있어서도 능숙할 뿐더러 매우 경건한 인생을 살아감에 틀림없다고 생각하면서 그 종교적인 화가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힌 바 있는데,
홀란다는 그가 말한 내용을 적었다.

하나님의 장엄한 모습을 어느 정도 묘사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화가인 것만으로는 불충분하고 위대하고 능숙한 거장이어야 한다.
생각컨대 그 사람의 인생은 더 나아가서 성령으로 그의 이해력이 높아질 수 있도록 성인까지는 되지 않더라도 흠이 없어야 한다.
왜냐하면 잘못 그려진 하나님의 모습은 신자의 마음을 분산시키며 가뜩이나 신앙심이 없는 사람들의 신앙심마저 잃게 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반면 하나님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그림들은 신앙심이 거의 없는 사람들조차 움직여 신앙심을 일게 하여 명상에 잠기게 하고 눈물을 흘리게 한다.
그 모습에서 나오는 참된 아름다움으로 인해 신에 대한 외경심과 존경심이 절로 우러나게 되는 것이다.

콘디비에 의하면 미켈란젤로는 "대단한 상상력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마음 속에 품은 관념들을 손이 제대로 전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그가 제작해놓은 작품에 대해 늘 만족해 하지 않고 낮게 평가했다"는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하나님을 모든 미의 근원으로 보았다.

그러나 하늘에 살고 있는 이 신적 존재는
다른 존재들을 아름답게 해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그 자신이 더욱 더 아름다워진다.

미켈란젤로는 예술을 예술가가 하늘로부터 받은 선물로 보았다.

... 만약 예술을 하늘로부터 부여받을 수만 있다면
예술은 자연을 능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선물을 통해 예술가는 조각상을 새기기 위한 돌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게 된다.

어떤 이가 얼굴과 행동거지에
예술가로서의 신적인 기운이 서려 있다면
비록 하찮고 보잘것 없는 모델을 놓고서라도
그는 정신과 손으로 돌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다.

그에게는 물질의 부분인 돌 자체는 상상력이 거기에 작용하지 않는 한 쓸모없는 죽은 상태이다.

펜과 잉크에서
숭고한 양식, 하찮은 양식, 평범한 양식이 나오듯
대리석에서도 조각가의 재능 여하에 따라
훌륭한 형태와 보잘것 없는 형태가 생겨난다.

이상과 같이 미켈란젤로의 예술론은 그의 시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의 조각이론은 다음의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아무리 위대한 예술가라 하더라도
대리석 덩어리 안에 어떤 관념이 잠재해 있어야
손의 힘으로 정신에 따라
그 관념을 돌로부터 끄집어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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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에게 있어 예술가란 

김광우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미켈란젤로는 말했다.

내 영혼이 눈을 통해 처음으로 접한 아름다움에 다가가는 동안
정신적인 영상은 커지지만 물질적인 영상은 움츠러든다.
마치 천하고 별 가치없는 사물인양.

미켈란젤로에게 있어 예술가란 자연에 의해 직접적으로 영감을 받기는 하지만 자연 안에서 보는 것을 그 자신의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이상적인 기준에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리적 세계의 가시적 미를 직접적으로 표상해내지 않은 대표적인 작품이 그가 1534년과 1541년 사이에 클레멘트 7세와 바오로 3세를 위해 그린 시스티나 예배당 제단 위에 있는 프레스코 <최후의 심판 The Last Judgment>이다.
그가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아담의 형상을 그릴 때만 해도 그는 실재보다 훨씬 이상화시켰지만 실재생활에서 아름다운 인체라고 생각할 수 있는 형상을 묘사하려고 했다.
하지만 <최후의 만찬>에서 그의 목적이 달라졌다.
여기서의 인체는 무겁고 무기력해보이며 사지는 두껍고 우아함이 결여된 양상으로 나타났다.
사람들이 종종 말하는 것처럼 미켈란젤로가 손을 떨기 시작해서 그렇게밖에는 그릴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가 더이상 물질적인 미를 그 자체로 추구하기를 중단한 때문이다.
그는 관념을 전달하는 수단으로서 또는 정신적인 상태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서 물질적인 미를 이용한 것이다.
<최후의 만찬>에서 실재 세계의 공간이나 원근법, 전형적인 비례조차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봐서 성기 르네상스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가 무시된 듯하다.
그가 물질적인 것에서 멀어지고 정신적인 것으로 향한 경향은 그가 늙어가고 있었기 때문인 것도 부분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당시 종교개혁으로 교회가 분열되었고 교황의 위치는 매우 약화되었다.
게다가 경제적 혼란까지 가중되었으며 1527년에는 로마가 약탈당하는 일이 벌어져 클레멘트 7세는 더욱 무력해졌다.
가톨릭뿐 아니라 이탈리아 사회 전체의 존폐가 위협당하는 사건들로 사람들이 동요되었다.
미켈란젤로의 신비주의 사상은 이렇듯 이탈리아가 무너져내리는 것을 확인하기가 두려운나머지 선택한 하나의 강구책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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