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에 얼마나 의존했는가를 입증해준다  

김광우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바자리는 "미켈란젤로는 인체의 형상을 만드는 데 있어 자연이 제공해 줄 수 없는 전체로서의 조화로움, 우아함이 깃든 조화로움만을 추구한 결과 9등신, 10등신, 심지어는 12등신까지의 비례법을 적용하곤 한다"고 했다.
이는 미켈란젤로가 나중에 가서 미의 어떤 일정한 기준에 무조건 따르기보다는 상상력과 개별적인 영감에 얼마나 의존했는가를 입증해준다.
건축에 관한 미켈란젤로의 사고 또한 이와 같았는데
바자리는 <미술가 열전>에 적었다.

비트루비우스와 고대인들이 해놓은 일에 따라, 그리고 내려오는 관례에 따라 사람들이 그동안 완성시켰던 적도, 규칙이 좌우하는 일로부터 여하튼 그는 박차고 나왔다.
그러므로 장인들은 그에게 무한히 감사함을 느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미켈란젤로가 장인들이 일할 때 늘 밟아야만 했던 상도의 굴레와 속박을 내팽겨쳐주었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의 생애에 있어 마지막 15년 내지 20년 동안은 그의 예술과 사상면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그것은 여러 점에서 볼 때 1530년대 후반부와 1540년대 초에 보여준 예술과 사상의 특징들이 좀더 강화된 양상으로 나타난 것 뿐이다.

1545년경 이후 교황권의 위상에 변화가 생겼다.
프로테스탄트와의 분열이 극에 달해 라티스본 회의Diet of Ratisbon 이후부터는 타협이란 것은 말조차 꺼낼 수도 없는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다.
그렇게 됨으로써 미켈란젤로가 속해 있던 온건파는 점차 그 힘이 약해지게 되었다.
온건파의 신비주의는 날로 내성적인 성격을 더해 가게 되었다.
이런 격동기에 나온 미켈란젤로의 대표작으로 그가 마지막으로 조각한 군상조각이자 죽는 순간까지 완성하지 못한 <론다니니 피에타 Pieta Rondanini>가 있다.
그는 이 조각을 통해 모든 육체적인 특성을 나타내주는 인체의 상징요소들을 박탈하여 끝내 순수한 정신적인 관념을 직접적으로 전하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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