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광기는 천재성이란 의미로
 
플라톤의 광기는 예술가의 천재성을 인정한 것이다

플라톤은 사고에 있어 혼돈이 생겼는데 시인을 얕잡아본 그가 아름다움을 지닌 작품이 영원한 형상을 포착한 것으로 간주한 때문이다.
예술가가 뮤즈로부터 영감을 받아 스스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즉 무당처럼 신지핀 자가 된다면 그 예술가는 오히려 통찰력을 갖게 되어 일반 지식 그 이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보았다.
(플라톤은 처음에는 지식만이 영원한 형상을 포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그가 광기mania를 말한 것으로 플라톤은 신성에 의해 광기를 갖게 된 자는 영감을 받아 신의 인도로 진리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고 보았다.
광기는 그의 철학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박카스교에서 신성을 느끼는 환희에서 영향을 받은 듯하다.

플라톤의 광기는 천재성이란 의미로 칸트에게로까지 전수되었으며 칸트는 1790년에 출간한 <판단력 비판 Kritik der Urteilskraft>에서 미적 경험을 다섯 가지로 분류했는데 다음과 같다.
무관심성,
비개념성,
형식성,
심의 전체의 관여,
필연성과 보편성.
(그에게 있어 필연성은 주관적임을 뜻하고 보편성은 비규칙적인 것을 뜻한다)

미적 경험에 대한 칸트의 이론은 플라톤의 광기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칸트가 자신의 입장에서 미적 판단력에 대한 비판을 통해 정당화했으며 또한 정당화하려고 한 것은 대상의 어떤 인식도 없는 심미적 취미의 주관적 보편성이었고, 순수예술Schone Kunste 영역에서는 모든 규칙 미학Regelasthetik을 넘어서는 천재의 우월성이었다.
칸트는 순수예술을 "천재의 솜씨 Kunst des Genies"로 보았다.
그는 <판단력 비판>에서 예술미에 관해 언급하면서 "그와 같은 대상을 평가하는 경우에 역시 고려되어야 할" 것은 예술미의 가능성,
즉 그 안에 깃들여 있는 천재성이라고 했다.
그는 또 예술뿐 아니라 이를 평가하는 특유의 올바른 취미 역시 천재성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플라톤의 광기가 쇼펜하우어로 하여금 관조론을 펴게 했다

칸트가 <판단력비판>에서 미적 경험을 플라톤의 광기와 연계시켰으므로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1788-1860)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1818)에서 미적 경험을 단순한 관조contemplation(willess perception)로 주장할 수 있었다.

쇼펜하우어는 예술가의 관심이 행위나 이의 가능성에 있기보다는 오히려 관조에 있다고 보았다.
칸트를 좇아 취미Geschmack나 미적 가치의 모든 판단을 무관심한disinterested 것으로 본 그는 자연의 장면이나 미술품이나 혹은 문학작품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그 자체 속에서의 자체를 위한 판단으로 원인이나 결과를 염두에 둔 일반 지각적 판단들과는 다른 것으로 보았다.

쇼펜하우어는 칸트 외에도 피히테와 셀링의 영향도 받았다.
셀링은 "의지가 궁극적인 존재다"라고 했다.
쇼펜하우어의 근원적인 의지는 헤겔의 개념에 상반되는 것으로 궁극적인 실재로서의 이 의지는 지식의 대상으로는 무력한 존재이며 그 자체 안에서는 그런 하나의 대상이 되지 않지만 오직 그것의 구체화 안에서는 하나의 대상이 된다.
구체화란 특정한 존재의 외적인 유형들이 등급들의 체계를 그것들이 의지를 나타내는 것과 더불어 완전함 안에서 형성되는 걸 말한다.
쇼펜하우어는 이를 "플라톤의 개념들 Platonic ideas"이라고 명명했다.
이런 궁극적이며 전형적인 개성들,
즉 과학의 개념들에 상반되는 것들은 오직 예술적 지각, 자아 억제, 묵상적 감각에 대한 만족에 의한 것들로 알려졌다.
그것들은 끊임없는 원인에 의한 법칙 하에서의 관련있는, 정신이 관여될 수 없는 것으로 구성된 그런 관념들과는 완전히 구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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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단토는 예술이 정치적으로 위험하다는 관념이
 

아서 단토Arthur Danto는 예술이 정치적으로 위험하다는 관념이 역사적 지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로지 플라톤에 의한 철학적 믿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플라톤은 예술을 정치적으로 무력화시키는 행위로 보고 이에 대응할 만한 모방론을 만들어 유포시켰기 때문에 서양미술사를 단토는 "예술을 고립시키려고 한 플라톤의 예술론에 의한 미술의 억압사"로 본다.
그는 칸트가 미술품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무관심성 Interesselosigkeit'이란 말로 특징지운 것을 미술품은 자연처럼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한다는 플라톤의 말과 관련지워서 두 사람 모두에게 비판을 가한다.

미술품은 어떤 것을 위해 유용해보이더라도 철학적 진실에서 보면 그렇지 못하며 논리적 무목적성은 그것을 사용하는 어떤 것도 오용이나 왜곡될 것이므로 그것을 바라보는 관람자의 무관심과 관련있으므로 예술이 체계적으로 중립을 지켰던 것이다.
칸트는 예술이 분명 즐거움을 제공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으며 이는 무관심한 즐거움이었다.
단토는 이를 실재 요구들의 만족이나 실재 목적들의 달성과 연고가 없는 이래 미온적인 만족감으로 보고 일종의 발작적인 즐거움, 즉 고통이 없는 가운데 존재하는 즐거움으로 본다.
칸트의 미학은 어느 특정한 본질이라도 가지지 않는 채 한 본질을 가진 것인양 보였으므로 바로 여기에 헤겔의 예술철학이 자리매김되었다는 것이 단토의 주요 견해이다.

역사 그 자체 스스로 자각되는 변증적 계시로 본 헤겔은 정신이 스스로 자신의 정체가 정신임을 깨닫게되었을 때 역사의 종말이 온다고 주장했다.
이는 말하자면 칸트의 말로 특정한 본질에 대한 무지로 인해 그 자체에 소원하게 되었을 때가 아니라 그 자체를 통해 자체에 일치한 때 오는 것을 의미한다.
헤겔은 예술과 철학이 각각 상이한 단계로 존재한다고 보고 철학을 자유롭게하는 것을 예술의 역사적 사명으로 간주했다.
철학이 자유롭게되면 예술은 그 역사적 사명을 다 하는 것이다.
역사에 대한 엄청난 철학적 비젼을 갖고 있던 헤겔은 예술의 그 완연한 형태 자체가 이미 철학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확증을 갖고 예술의 철학적 본질을 드러냄으로써 정신적 사명에서 해방된 것으로 보았다.
예술에 대한 철학적 특권박탈은 플라톤으로부터 시작되어 칸트로까지 이어졌지만 헤겔에 이르러 그 숙명적 특권박탈이 비로소 예술철학을 통해 예술과 철학 모두가 자유로운 모습으로 구현된 것이다.
이같은 내용이 스스로를 가리켜서 "거듭 태어난 헤겔리안"이라 칭한 단토의 요지이다.
이는 플라톤의 모방론을 종식시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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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에는 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도라는 것은 매우 몽롱하기 때문에 포착하기 어렵다.
포착을 못할 만큼 몽롱하지만 그 몽롱한 가운데 형상이 있고 그 몽롱한 가운데 사물이 있다.
그림자처럼 어두컴컴하지만 그 가운데 정력이 있다. 그 정력은 매우 순수하며 그 자체 속에 확신이 있다.

이 글에서 보듯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보이고, 귀에 들리지 않으나 들리는 무에서 형상이나 사물이 절로 나타나는 것이 도이다.
확실함은 순수함이나 진실과 같으며 진실하고 변함없는 형상이나 사물이 무로부터 형체를 취하여 나타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신비주의는 하나라고 생각되는데
상카라의 다음과 같은 말이 노자의 사상과 같음을 알 수 있다.

진정한 존재는 스스로 있고,
스스로 존재하며,
영원한 브라만이고,
변하지 않으며 변한 적이 없으며,
분리되지 않고 나눠지지 않으며,
유일하게 비이원적이다.

상카라는 브라만이 변경이나 변천을 거부하는 유일한 존재라고 말했는데
노자의 말로 바꾸어 말하면 무 또는 도는 변경이나 변천을 거부하는 유일한 존재인 것이다.
노자의 무 또는 도에 대한 사상을 상카라에게서도 발견되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변화란 단지 말뿐이다. 그것은 단지 명칭에 지나지 않는다.

상카라와 엑카르트의 영원한 존재는 노자에게 무 혹은 도에 해당하는데
<도덕경>에는 무 혹은 도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형체는 일정하지 않으나 뭔지 커다란 혼돈이 천지에 앞서서 생성하고 있었다.
그것은 소리가 나지 않고 텅빈 것 같으나 독립하고 변함이 없으며, 보편적이고, 쇠퇴하지 않음으로 만물의 어머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이름을 모르기 때문에 가령 도라고 부르기도 하고 혹은 대(크다)라고 부르기도 한다.

모든 것이 하나로 합일되어서 천지에 선행하는 무 또는 도의 상태는 말로 표현할 수 없고 감각으로 포착할 수 없다.
무 또는 도는 영원히 만물이 존재하는 원인이다.
<도덕경>은 무 또는 도는 "아무리 사용해도 바닥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무 또는 도는 하도 담담하기 때문에 우리의 감관으로 포착할 수 있는 특색은 없지만 그 작용은 무진장이다.
무에서 생기는 유가 무진장이란 말이다.
엑카르트에게서 노자와 유사한 사고를 발견하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의 단순한 본질은 형상들과 비형상들, 존재와 비존재, 생성과 비생성, 사물과 비사물을 주시하기 때문에 신은 생성되는 사물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모든 사물에는 최후가 있다.

노자, 상카라, 엑카르트 모두 사물을 부인하는 방법으로 이론을 설명했는데
그와 같은 부정은 부정을 부정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노자의 무 또는 도가 상카라에게는 브라만으로, 엑카르트에게는 신이란 말로 사용된 것을 제외한다면 세 사람 모두 동일한 개념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신비주의에서는 동양과 서양이 이미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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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토는 <구름>과 <국가>를 예술과 철학 사이 전쟁으로

플라톤은 회화와 생물을 본질미가 아닌 비교적 아름다운 것들로 취급했고 비극과 희극을 순수하지 않은 것들로 취급했다.
회화와 문학에 대한 그의 배척은 아름다움을 지나치게 '형상'으로 파악하려는 사변적 정립에도 원인이 있지만 정치적으로 불순한 동기가 작용한 때문이다.
<미술의 종말 이후 After the End of Art>로 유명한 단토Danto는 1986년에 발표한 저서 <예술의 철학적 특권박탈 The Philosophical Disenfranchisement of Art>에서 플라톤의 불순한 동기를 예술에 대한 철학적 특권박탈이었다는 말로 신랄하게 비판했다.
플라톤의 <국가 The Republic> 제10권에 나타난 예술가의 모습을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기원전 450년경-385년)의 희극 <구름 The Clouds>(기원전 423년)에 나타난 소크라테스를 빗대어 시대에 뒤진 자로 오명을 씌운 그 철학자의 모습과 연관해서 이해해야 한다고 단토는 주장한다.
아리스토파네스는 <구름>에서 플라톤이 숭배하는 소크라테스를 현실감각이 전혀 없는 현실과는 무관한 이상주의자로 조소했다.
<구름>이 철학에 대한 공격으로 나타나자 소크라테스는 제자이면서 서사시 시인인 이온에게 아리스토파네스가 지식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소크라테스는 아리스토파네스가 지성보다 낮은 수준에서 관객을 궁지에 빠뜨리게 하는 것은 이성이 아닌 암울하고 혼돈된 기백에 의존한 것이라고 이온에게 설명했다.
단토는 이를 가리켜 "오직 자체의 자아-평가에서 예술을 다루는 것"으로 비판한다.

단토는 <구름>과 <국가>를 예술과 철학 사이 전쟁으로 표출된 것으로 본다.
이온이 플라톤에 의해 <국가>의 심리상태의 확인, 즉 예술이 교활한 표리부동 안에서 예술에 반해 사용되고 있음을 극적으로 조작하기 위해 묘사된 것으로 보았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는 예술가 아리스토파네스와 같은 자는 철학자가 통치하는 <국가>에서 추방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단토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파네스에 의해 철학과 예술 사이의 전쟁을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본다.
플라톤의 철학이 모방의 모방이 된 이래,
즉 철학이 플라톤적 유언에 자리매김되는 부록에 있었던 이래
철학 자체가 곧 예술에 대한 특권박탈이었다는 것이 단토의 주장이다.
헤겔리안으로서 그는 헤겔이 바로 예술을 철학에서 구분하여 미학을 예술철학으로 탈바꿈하게 했다고 본다.
그렇다면 예술이 빠져나간 철학의 꼴은 과연 무엇일까 하는 것이 그에게 생긴 다음의 의문이었다.
그의 답은 매우 간명하다.
예술의 특권을 박탈하면서 형성된 철학은 예술과 마찬가지로 그동안 가깝할 수밖에 없었는데
예술이 자유롭게 되자 예술을 압제해 온 철학 또한 자연히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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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미술문화)에서  
 
로코코는 네오클래시시즘의 새날이 밝아오기 전까지 존속했는데

 
바로크Baroque를 르네상스Renaissance의 마지막 국면으로 그리고 로코코Rococo는 바로크의 끝으로 보는 것이 대부분의 미술사학자들의 견해이다.
로코코를 한 마디로 말하면 환상적 혹은 공상적 이야기라 할 수 있고 꿈만 같은 세계라고도 말할 수 있다.
바로크가 커다란 스케일로 극적인 장면들을 주제로 삼았다면
로코코의 무대는 좀더 작은 규모에 개인적이며 친밀한 세계를 연출했다.
로코코는 좀더 낙천적이며 심약하게 나타났으며, 기발한 사고와 과거에 대한 동경, 그리고 현세계를 잠시 떠나 황홀감을 맛보게 하는 세계를 환기시켰다.
무엇보다도 로코코는 사랑의 세계를 구상하면서 예술에 있어서 인간의 감정을 폭넓게 다뤘으며 처음으로 가족을 중요한 주제로 다룬 점이 특기할만 하다.

로코코는 네오클래시시즘의 새날이 밝아오기 전까지 존속했는데
보통 루이 15세의 재위기간인 1715-74년을 로코코의 시기로 본다.
시기적으로 르네상스의 최후가 된다.
고대와 중세를 지나 르네상스에 이른 서양 미술은 로코코를 마지막으로 르네상스를 닫고 새로운 역사적 국면을 맞았다.
근대가 시작된 것이다.

무엇이 역사에 근대의 국면을 맞이하게 했는가?
증기기관차의 발명으로 상징되는 산업혁명과 민주주의 슬로건 아래서의 정치적 혁명이 새 역사의 아침을 밝혔는데
근대는 바로 '혁명의 시대 the Age of Revolution'였다.
이런 혁명으로 역사의 행보는 더욱 빨라졌으며 1880년대와 90년대에는 과학, 수학, 공학, 사회학, 심리학 등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올려 '기계문명의 시대 the Machine Age'의 발판을 마련했다.
디젤, 터빈기관차, 전기모터, 타이어, 자동차, 전구, 축음기, 라디오, 상자카메라 이런 모든 것들이 1900년 이전에 발명되었고 비행기는 그후 얼마 안 되어 발명되었다.
20세기에 들어서 근대화가 가속되었으므로 사람들은 근대라는 넓은 의미의 시대적 개념보다는 '동시대 contemporary'라는 시기적으로 좀더 구체적인 역사의식을 갖게 되었다.

근대modern의 의미는 중세 초기 모데르누스modernus란 말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현존하는 것 that which is present' 혹은 '우리 시대의 of our time'라는 뜻이며
좀더 넓은 의미에서 보면 '새로운 new or novel'이란 뜻이다.
어원적으로 근대는 라틴어 모도modo에서 왔고 이는 '바로 지금 just now'이란 의미이다.
모더니즘이란 말로 근대성modernity에 대한 개념이 명료하게 확립된 건 19세기에 들어서였으며 과학과 물질의 발달과 더불어 계몽주의에서 비롯했는데
계몽주의의 바탕에는 이성과 자유에 대한 중산층의 신념이 깔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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