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는 쿠르크세트라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무대로 하고 있다.
하스티나푸라Hastinapura에 자리잡은 쿠루족의 두 형제 가문 카우라바Kaurava 형제와 판다바Pandava 형제가
쿠루크세트라 들판 양쪽에서 군대를 대치시키고
왕권을 차지하기 위해 살육전을 벌이려는 극적인 상황에서
<기타>의 가르침은 시작된다.

바라타 왕국의 후계자였던 유디슈티라Yudhisthira가 카우라바 형제들 중 맏형 두료다나Duryodhana와 도박을 한 결과
그는 왕국을 잃고 형제와 함께 13년 동안 숲속에 유배되었다.
약속한 기간이 지나자 유디슈티라가 두료다나에게 자신의 왕국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그의 요구는 거절되었으며
결국 두 가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다.
<기타>는 전쟁이 막 벌어질려는 찰나에
판다바 가문의 형제 중 셋째인 아르주나Arjuna와 크리슈나Krisna 사이에 오간 대화를 기록한 것이다.

아르주나는 전쟁에 대한 분명한 명분을 갖고 전쟁터에 나갔지만
상대편 군대에 사촌, 아저씨, 할아버지 등 혈족이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고뇌에 빠지게 되었다.
그는 혈족을 사살하고 왕위에 오르느니 차라리 숲속으로 은거해서 절대자에 대한 명상에 몰두하는 고행자의 생을 선택하려고 했다.
이때
크리슈나는 아르주에게 싸워야 한다고 종용했다.
하지만
크리슈나의 가르침의 요지는 전쟁 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르주나의 결심,
곧 싸우지 않겠다는 것이 왜 옳지 않은가를 보여주려는 데 있었다.

아루주나가 싸우지 않겠다는 이유가 단지 싸움의 대상이 혈족이라는 데 있었다.
사랑하는 혈족을 사살하느니 차라리 스스로 죽겠다는 말은 사리에 맞는 것 같지만
이는 영원한 자아의 본질을 망각한 결과이며
냉철한 판단의 결과는 아니라는 것이 크리슈나의 가르침의 요지였다.
아르주나가 자신은 옳고 그름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고 고백했을 때 크리슈나는 그에게 바른 지식을 내려 그의 무지를 제거하도록 했다.
크리슈나의 가르침은 아르주나 혼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고뇌를 다루는 가운데 크리슈나는 인류의 선에 관해 설교했다.

상카라는 크리슈나의 아르주나에게 한 말 "싸우라"에 대한 해석을 전쟁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슬픔과 미혹으로 생겨난 장애를 제거하라는 촉구였다고 주장했다.
자아란 육체적인 생사를 초월한다는 점과 누구나 자기 신분에 부여된 사회적인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설정된 상황이 바로 전쟁이라는 것이다.
<기타>의 가르침은 슬픔과 미혹의 동기들을 제거하는 데 있는 것이지 전쟁을 해야 한다는 데 있지 않다.

함석헌은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기타>는 전쟁 자체보다는 전쟁을 통해 내면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순과 갈등을 다루고 있다.
영혼의 삶은 쿠루크세트라의 전쟁터로 상징되며 카우라바족은 영혼의 진전을 방해하는 적이다.
아르주나는 시험을 물리치고 감정을 제어하여 인간의 왕국을 되찾으려고 시도한다.
전진의 길은 고통과 극기를 통해 가능하다.
내면의 삶에 대한 추구는 '사지가 주저앉고 입은 바싹 타며 전율이 내 몸을 휩싸고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아르주나의 고뇌를 요한다.
이어지는 크리슈나의 가르침 참된 자아에 대한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은 죽음에 대한 아르주나의 철저한 고뇌가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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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로웨이는 대중미술에사 진지함을 발견했다
 

팝아트란 말을 처음 사용한 영국 평론가 로런스 알로웨이는 팝아트를 고상한 예술로 보았다.
"우리들은 미술, 건축, 디자인 또는 미술비평에서 우리 가운데 누구라도 지닐 수 있는 어떤 특별한 관심이나 재능을 넘어 고집한 자국 문화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점을 발견했다.
접근지역은 대량생산된 도시 문화였다: 영화, 광고, 공상과학, 대중음악. 우리들은 가장 지상적인 것들 중에서 싫어하는 상업문화의 기준이란 없다고 느꼈지만 이를 사실로 기꺼이 받아들여 구체적으로 논했고 열광적으로 수용했다.
우리들의 논의가 도달한 결론은 ‘현실도피’, ‘순수한 여흥’, ‘휴양’ 그런 영역 밖에서 팝문화를 받아들여 이를 미술의 진지함으로 취급하는 것이었다."

알로웨이는 대중미술에사 진지함을 발견했다.
그는 “나는 팝이란 용어를 사용했고 또한 ‘팝문화’, 대중문화를 일으킨 미술품들이 아닌 대중 전달 매체의 생산품들에 주목했다”고 했다.
팝아트가 고상한 미술이 될 수 있었던 건 대중적 표상들을 변용시켰기 때문이다.
변용은 과연 사람들을 경악하게 할 만했다. 워홀이 실크스크린으로 뜬 매릴린 먼로의 초상화는 레오나르도의 초상화 <모나리자>와 견줄 만했다.
먼로가 워홀에 의해서 우상으로 변용된 것이다.
원래 변용은 종교의 숭고한 개념으로 남자가 신으로 변용되는 걸 의미했다.
팝아트는 사회 일반의 문화적 경험의 사물과 도상들을 고상한 미술로 변용시켰다.
팝아트는 근본적·사회적·정치적 변천의 계기를 마련했으며 예술의 개념에서 근본적이고도 철학적인 변천을 꾀한 격변을 초래한 예술이었다.
뒤샹의 레디 메이드는 서양 전통 미학의 권위를 손상시켰고 미술의 울타리를 무너뜨리는 역할을 했다.
이런 전초 작업이 있었기 때문에 워홀이 평범한 것들을 변용을 통해 찬양하는 가운데 기존의 미술사를 더이상 존속할 수 없게 만들었다.
워홀에 의해 곰브리치가 말한 고상한 미술품이란 “예술가의 생각이나 개념이 만들기를 우선으로 그 다음 조화를 얼마나 꾀했는가 하는 데서” 이루어진다는 미적 판단이 잘못되었음이 드러났으며,
그린버그가 주장한 ‘순수성’은 미술품의 필요 충분 조건이 아님이 또한 드러났다.
워홀의 <브릴로 상자>는 예술이 모방이라는 개념을 부정했고,
미술이 만들기와 조화시키기라는 필요 충분 조건을 부정했으며,
‘순수성’은 미술품과 관련이 없음을 시위했다.

팝아트 이후 양식과 기교는 미술품의 우열을 가리는 척도로 인정받을 수 없게 되었다.
모든 양식이 동일하게 취급되었으며 기교는 수단으로만 받아들여졌다.
다원주의가 형성된 것이다.
예술의 울타리가 모두 무너졌으므로 각 민족의 고유한 미학에 바탕을 둔 미술품들이 아무 편견없이 소개되고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예술가들은 아무 데서도 주제를 구할 수 있으며 어떤 양식으로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주제와 양식만으로는 미술품을 평가할 수 없게 되었다.
곰브리치와 그린버그식으로 자신들의 일반적인 미적 판단으로 고상한 작품과 그러하지 않은 작품을 분류해서는 안 되게 되었다.
다원주의에서는 다원주의에 근거하는 평론이 요구된다.
미술품은 그것이 제작된 원인·의미·참조 그리고 물질을 통해 어떻게 구체화되었으며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에 따라 평가되어야 만한다.
이는 오늘날 예술가들의 요구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술사학자와 평론가들을 불신하는 많은 예술가들에 의해 많은 미학 이론들이 쏟아져나왔다.
그들이 주창하는 이론들의 주지하는 바 두 가지를 가장 중요한 점으로 지적한다면 하나는 미술품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들이 지각한 바에 대한 이해의 촉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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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브리치는 예술가의 사고나 개념을 지식의 성장으로 보고
 

미술품은 자연을 모델로 할 필요도 없고 자연인 것처럼 보여질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 데서
미술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 하게 되었다.
이런 주장은 엄청난 것이어서 미술사의 한 장을 닫고 미술사의 새 장을 여는 것이며 달리 말하면 패러다임이 붕괴되고 새로운 패러다임의 필요성을 절실히 요구하는 것이다.
자연인 것처럼 보이지 않아도 미술품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면 이천수백 년 동안 유효했던 패러다임이 이제 그 기능에 한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요구는 과거의 패러다임이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때 자연히 발생되는 것이다.

뒤샹의 레디 메이드와 팝아트 아티스트들의 대중적 평범한 재료와 이미지의 변용은 미술품이 자연을 좇아 만들어지는 인공물이라는 정의를 정면으로 부정했다.
많은 미술사학자들은 미술품으로 인정받으려면 필요 충분 조건이 우선적으로 충족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필요 충분 조건이란 미학 이론에 근거한 것으로 곰브리치의 경우를 예로 들면 만들기와 조화시키기로서
실재에 대한 예술가의 사고나 개념이 만들기를 우선으로 그 다음 조화를 얼마나 꾀하느냐 하는 데 따라서 미적 순위를 매기는 것을 말한다.
곰브리치는 예술가의 사고나 개념을 지식의 성장으로 보고 여기에 미술사의 의의를 둔다.
곰브리치의 미적 판단에 따르면 뒤샹의 행위는 뻔뻔스러운 행위로서 만들기와 조화시키기의 범주 밖의 유치한 해프닝에 지나지 않았다.

모더니즘 이론을 정립한 미국 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에게도 뒤샹의 행위는 자신의 순수미술 이론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그는 미술품을 예술가의 미적 감각을 뽐내는 인공물로 보았다.
그 역시 뒤샹과 팝아트를 무시했다. 팝아트에 대한 다음과 같은 그린버그의 말은 곰브리치가 했을 법한 말로도 들린다.
“팝아트는 취향의 역사에서 새로운 에피소드에는 해당되더라도 동시대 미술의 진화에서 볼 때는 정녕 새로운 에피소드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린버그는 팝아트를 옵아트와 미니멀리즘과 함께 진기한 미술의 범주로 격하시켰다.
그가 말한 진기하다는 말은 상점에서 매매되는 신제품들의 유행에 쳐진 것으로 단순히 진기함을 뜻한다.
곰브리치와 그린버그 모두 미술품은 미술품을 제작하려는 고상한 의도로 제작된 것이어야 한다고 보았으므로
두 사람에게 상업미술로부터 이미지와 재료를 끌어오는 팝아트란 곰브리치가 말한 대로 “단순히 어떤 취향이나 유행의 표본으로서만 흥미가 있는 작품”만을 산출하는 예술에 지나지 않아
미술의 역사적 진화의 의미에서 볼 때 전혀 새로운 것이 못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시대를 거스리는 퇴행하는 운동으로 보였다.
그래서 그린버그는 1992년 여름 역사의 유례가 없을 정도로 미술이 “매우 천천히 진행되었다”면서
지난 30년 동안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았다고까지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팝아트와 옵아트 그리고 미니멀리즘을 미술사에서 퇴행한 통탄할 만한 미술로 간주했다.
그린버그에게 미래에 대한 전망을 묻자 그는 “데카당스!”라고 대답하며 서양미술이 매우 절망적임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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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칙은 이차적인 구성요소이다

 
예술은 감관의 감각을 규칙으로 삼는 기술이라는 것이 칸트의 정의이다.
예술이 규칙 내에서의 기술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보면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칸트에 이르기까지 약 2150년 동안
예술의 정의는 달라지지 않았다.
이는 어떤 생산물이 미술품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규칙을 기초로 기술에 의해 가능하게 표상되어야 한다.
그러나 규칙은 이차적인 구성요소이다.
예를 들면 베토벤이나 슈베르트의 곡을 한 군데도 틀림없이 피아노로 연주하는 사람은 많을 것이고 우리는 그런 사람들의 연주를 듣게 되면 탄복하게 된다.
하지만 연주자가 베토벤이나 슈베르트의 창작 의도를 전하지 못하고 단지 기교로서 악보상의 규칙을 지켰다면 우리의 탄복은 그 사람의 기술에 대한 탄복이지 베토벤이나 슈베르트의 작품에 대한 탄복도 아니고 작품에 대한 연주자의 해석에 대한 탄복도 아니다.
그저 놀라움일 뿐일 것이다.

좀더 부언해서 예를 든다면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에 비할 수 있다.
자동차를 안전하게 운전하기 위해서 운전하는 기술을 반드시 익혀야 만한다.
그러나 일단 기술을 익힌 후에는 그 기술이 안전운전을 보장한다 해도 운전자는 기술로부터 자유로워져서 기술을 의식하지 않고 다만 올바른 동기로 목적지를 정하고 자신이 원하는 길로 그곳으로 달릴 수 있어야 한다.
관람자들은 그 사람의 운전기술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무슨 동기로 어디를 어떻게 갔느냐 하는 데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규칙 이전에 의도가 나타나야만 하는데
칸트는 <판단력비판>에서 이 점을 지적했다.
"규칙이 눈앞에 아른거려 (예술가의) 심의력을 속박했다는 흔적을 보이는 일이 없이 그것이 자연인 것처럼 보이는 한에 있어 예술이다."

미술품에 대한 이런 정의는 불변하는 것인양 서양사람들에게 오랫동안 받아들여졌으며 많은 철학자와 미학자들이 자연미를 운운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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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은 인공물을 자연물의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했다

 
“미술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직접적인 방법보다는 “미술품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예술가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간접적으로 찾아야 한다.

미술품에 대한 서양사람들의 이천수백 년 묵은 관념은 고대 그리스인의 사고에서 비롯된 것으로 예술가의 인공물이었다.
인공물artifact이란 말에는 예술art이란 뜻이 이미 내포되어 있다.
그리스인에게 예술은 테크네techne였고 이 용어가 라틴어 아르스ars, 영어 아트art로 번역되었다.
기술craft이란 뜻의 테크네에는 경험을 통해 익힌 솜씨, 배우거나 관찰로 익힌 기교, 일종의 배우는 방법, 그리고 인문학의 일부도 포함되는데
나무를 깍는 기술로부터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에까지 폭넓은 의미로 사용된 말이다.
그러므로 예술가는 고도의 기술을 가진 사람 즉 숙련공을 의미했다.
숙련공의 생산품이 미술품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가 자연히 제기되는 것이다.
미술품은 단순히 고도의 기술에 의한 생산품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가 내포되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리스인은 인공물을 자연물의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했다.
저절로 타고난 것에 반해 테크네 혹은 예술을 가진 사람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그 제작과정이 자연을 좇아서 혹은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스승과 제자 두 사람에 의해서 정의된 것이다.
예술가는 자연을 모델로 무엇인가를 생산해내는 사람으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정해진 규칙 내에서 이성적으로 익히거나 연마해서 제작물을 만드는” 사람이다(<니코마코스 윤리학>, 1139b 참조).
여기서 자연nature이란 말은 그리스어 퓌시스physis의 라틴어 번역 나투라natura의 영어 번역으로 “낳다” “생산하다”라는 뜻이다.
그리스인은 미술품도 자연처럼 생산되는 것으로 믿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성적으로”란 말은 “올바른 동기” 혹은 “자연의 보편성에 따라서”라는 뜻으로 마찬가지로 자연을 모델로 생산한다는 뜻이다.

예술 혹은 기술은 수공handwerke과는 구별이 되는데
칸트에 의하면 예술은 자유로운,
즉 쾌적한 기술인 반면 수공은 노임 기술lohnkunst로서의 노동,
즉 쾌적하지 못한 기술이다.
칸트는 <판단력비판 Kritik der Urteilskraft>(1790)에 기술했다.

"예술이 어떤 가능적 대상의 인식에 적합하도록 단지 그 대상을 실현화하기 위해 필요한 행위만을 수행하는 경우
그것은 “기계적 기술 mechanische kunst”이다.
하지만 쾌의 감정을 직접적인 의도로 삼고 있을 경우
그것은 “미적 기술 asthetische kunst”이라 일컬어진다.
이 미적 기술은 “쾌적한 기술 angenehme kunst“이거나 예술인데,
쾌가 한갓된 “감각”으로서의 표상에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미적 기술의 목적인 경우
그것은 쾌적한 기술이고,
또 쾌가 인식방식으로서의 표상에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이 목적인 경우 그것은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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