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로웨이는 대중미술에사 진지함을 발견했다
 

팝아트란 말을 처음 사용한 영국 평론가 로런스 알로웨이는 팝아트를 고상한 예술로 보았다.
"우리들은 미술, 건축, 디자인 또는 미술비평에서 우리 가운데 누구라도 지닐 수 있는 어떤 특별한 관심이나 재능을 넘어 고집한 자국 문화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점을 발견했다.
접근지역은 대량생산된 도시 문화였다: 영화, 광고, 공상과학, 대중음악. 우리들은 가장 지상적인 것들 중에서 싫어하는 상업문화의 기준이란 없다고 느꼈지만 이를 사실로 기꺼이 받아들여 구체적으로 논했고 열광적으로 수용했다.
우리들의 논의가 도달한 결론은 ‘현실도피’, ‘순수한 여흥’, ‘휴양’ 그런 영역 밖에서 팝문화를 받아들여 이를 미술의 진지함으로 취급하는 것이었다."

알로웨이는 대중미술에사 진지함을 발견했다.
그는 “나는 팝이란 용어를 사용했고 또한 ‘팝문화’, 대중문화를 일으킨 미술품들이 아닌 대중 전달 매체의 생산품들에 주목했다”고 했다.
팝아트가 고상한 미술이 될 수 있었던 건 대중적 표상들을 변용시켰기 때문이다.
변용은 과연 사람들을 경악하게 할 만했다. 워홀이 실크스크린으로 뜬 매릴린 먼로의 초상화는 레오나르도의 초상화 <모나리자>와 견줄 만했다.
먼로가 워홀에 의해서 우상으로 변용된 것이다.
원래 변용은 종교의 숭고한 개념으로 남자가 신으로 변용되는 걸 의미했다.
팝아트는 사회 일반의 문화적 경험의 사물과 도상들을 고상한 미술로 변용시켰다.
팝아트는 근본적·사회적·정치적 변천의 계기를 마련했으며 예술의 개념에서 근본적이고도 철학적인 변천을 꾀한 격변을 초래한 예술이었다.
뒤샹의 레디 메이드는 서양 전통 미학의 권위를 손상시켰고 미술의 울타리를 무너뜨리는 역할을 했다.
이런 전초 작업이 있었기 때문에 워홀이 평범한 것들을 변용을 통해 찬양하는 가운데 기존의 미술사를 더이상 존속할 수 없게 만들었다.
워홀에 의해 곰브리치가 말한 고상한 미술품이란 “예술가의 생각이나 개념이 만들기를 우선으로 그 다음 조화를 얼마나 꾀했는가 하는 데서” 이루어진다는 미적 판단이 잘못되었음이 드러났으며,
그린버그가 주장한 ‘순수성’은 미술품의 필요 충분 조건이 아님이 또한 드러났다.
워홀의 <브릴로 상자>는 예술이 모방이라는 개념을 부정했고,
미술이 만들기와 조화시키기라는 필요 충분 조건을 부정했으며,
‘순수성’은 미술품과 관련이 없음을 시위했다.

팝아트 이후 양식과 기교는 미술품의 우열을 가리는 척도로 인정받을 수 없게 되었다.
모든 양식이 동일하게 취급되었으며 기교는 수단으로만 받아들여졌다.
다원주의가 형성된 것이다.
예술의 울타리가 모두 무너졌으므로 각 민족의 고유한 미학에 바탕을 둔 미술품들이 아무 편견없이 소개되고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예술가들은 아무 데서도 주제를 구할 수 있으며 어떤 양식으로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주제와 양식만으로는 미술품을 평가할 수 없게 되었다.
곰브리치와 그린버그식으로 자신들의 일반적인 미적 판단으로 고상한 작품과 그러하지 않은 작품을 분류해서는 안 되게 되었다.
다원주의에서는 다원주의에 근거하는 평론이 요구된다.
미술품은 그것이 제작된 원인·의미·참조 그리고 물질을 통해 어떻게 구체화되었으며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에 따라 평가되어야 만한다.
이는 오늘날 예술가들의 요구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술사학자와 평론가들을 불신하는 많은 예술가들에 의해 많은 미학 이론들이 쏟아져나왔다.
그들이 주창하는 이론들의 주지하는 바 두 가지를 가장 중요한 점으로 지적한다면 하나는 미술품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들이 지각한 바에 대한 이해의 촉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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