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논설들은 예술철학의 가장 풍성한 논설들 가운데 포함되었다

 
예술을 정의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현재 미국의 저명한
미학자들 사이에서 뜨거운 쟁점으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 한 사람의 이론이
다른 사람들의 이론들을 잠재울 수 있
을 만큼 두드러지지는 못하고 있는 상황인데
그만큼 이 문제는 반드시 짚고넘어가야 할 중요한 우리가 당면한 난제이면서도
해결책을 마련하지 못하는 혼돈의 상태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예술의 종말이라는 말로
어찌보면 예술에대한 위기의식이 한껏 고조된 가운데
혹은 예술이 종말에 다달아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는 희망의 전환점을 맞은 우리의 시기에 우리가 예술을 정의할 수 없다면
과연 예술의 위치와 그 나아갈 향방은 오리무중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해서 이 문제에 관한 저명한 미학자들의 에세이를 번역해
여기에 옮겨 관심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담론을 갖고자 합니다.

이 글을 읽고 담론에 자신의 진솔한 의견을 제시하는 분이 계신다면
저 역시 성실한 태도로 담론에 응하려고 합니다.

꼭 여기에 올린 글과 관련된 담론이 아니더라도 좋습니다.
예술을 정의할 수 있느냐 없느냐 있다면 어떻게 없다면 왜 그러한지
를 논리적으로 제시하면 됩니다.

우선 <오늘의 예술론 Theories of Art Today>의 편집자이신 노엘
캐롤Noel Carroll의 서문을
몇 차례에 걸쳐 연재함으로써
담론의 주제와 범위를 정하고자 합니다.
캐롤의 논리를 문제로 삼을 분의 의견을 기다리겠습니다.

분석예술철학사의 평가에 의하면,
20세기 미학의 주요 과제는 예술에 대한 정의였다.
예술의 정의와 관련해서 20세기 초 형식주의자와 표현주의자의 이론들이 무성했는데 이들의 이론들 중 가장 두드러졌던 것들로
클라이브 벨Clive Bell과 콜링우드Collingwood의 이론을 꼽을 수 있다.

20세기 중반에 들어서,
특히 비트겐슈타인의 영향 아래
툭히 모리스 바이츠Morris Weitz와 윌리엄 켄닉William Kennick에 의해 진전되었으며 이들은 예술의 정의가 필요충분 조건하에서 불가능함을 증명코자 했다.
그 결과 네오-비트겐슈타이니즘의 고찰들로서의 예술의 정의에 대한 일시적 중단사태가 거의 10년 동안이나 위력을 나타냈으며 그런 영향은 지속되었다.

예를 들면
몬로 비어즐리Monroe Beardsley가 획기적인 에세이 <미학 Aesthetics>을 1958년에 발표했을 때 예술의 정의가 이 에세이에는 내포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네오-비트겐슈타인 학파의 예술은 정의될 수 없다는 주장에 압도되어 그가 예술을 정의하는 데 주저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정도로 예술은 정의될 수 없다고 한 네오-비트겐슈타인 학파의
신념은 애초부터 단호해 보였다.
모든 철학적 논의들이 (앞서 언급한 몬로 비어즐리와 같이) 이런 식
이었지만 반론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아서 단토Arthur Danto는 독창적인 논설 <미술계 The Artworld>에서 예술작품에는 적어도 하나의 조건이 있다는 논의를 제기했다.
그러자 조지 딕키George Dickie가 또 다른 점들을 지적하면서 (단토가 언급한) 미술계에 대한 관념을 진전시켰는데
이는 아트서클 내에서 절정에 이른 선두적 획일적 예술론의 다양
한 해석에 대한 공식으로 귀착되기에 이르렀다.

딕키와 단토의 이론과 맥을 함께 한 리처드 볼하임Richard
Wollheim과 조셉 마골리스Joseph Margolis의 이론들이 예술을 정
의할 수 있는 전망을 개설해주었으며 1970년대와 80년대에 들어 이
와 관련된 많은 논설이 쏟아졌다.
이런 논설들은 예술철학의 가장 풍성한 논설들 가운데 포함되었다.

이런 논설들 중 많은 양이 비평적이었고
딕키와 단토의 논리들에서 증거도 없이 거론된 결점들을 지적해내
는 것들이었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딕키와 단토의 이론은 일단 네오-비트겐슈타인 학파의 가장 강력한 이론을 잠재운 듯 했으므로 딕키와 단토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술을 정의할 수 있도록 통로를 개설한 셈이 되었다.
예술을 정의할 수 있다는 논리를 전개한 사람들 중 다음 사람들을 주목해야 한다.

Marcia Muelder Eaton, Monroe Beardsley, Terry Diffey, Harold
Osborne, Jerrold Levinson, Jeffrey Weiand, Richard Eldridge,
Lucien Krukowski, Susan Feagin, James Carney, Richard
Lind, William Tolhurst, Robert Stecker.

이들의 논설들 중 많은 부분이 Stephen Davis의 감탄할 만한 저서 <예술의 정의들 Definitions of Art>에 요약되어 있으며 또한 사려 깊게 다루어졌다.

1990년대 초부터 혹은 그 이전부터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관심은 다소 완화되었다.
이런 질문은 더이상 1970년대에서 80년대까지 정기간행물에서 현저하게 다루어지지는 않았다.
이 질문은 다른 논제들, 음악철학과 같은 논제가 라이벌로 부상되자 뒤쳐졌다.
하지만 예술의 정의의 문제가 가장 큰 문제가 되지는 못되었더라도 매우 격렬한 문제로는 남아 있었다.
현존하는 섬세한 고찰과 비평의 접근법이 일정한 간격으로 지속적으로 쏟아졌고, 새 이론들이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고, 보다 나은 이론들이 계속 진전되고 있다.
현재 가장 두드러진 이론은 없으나 문제에 대한 심각함은 잘 알려지져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책이 출간되었다.
나는 이 책에서 예술의 정의와 관련된 논의의 선두자들과 주된 역할을 하는 몇 사람의 원래 논설들을 모아 정리했다.
하지만 이 명문집에서 저자들이 단순히 낡은 이론들을 재탕하고 있는 건 아니다.
받아들여진 견해들의 치밀한 점과 수정 외에도 독자들은 또한 제기되는 새 논제들인 페미니즘의 타당성과 예술의 정의에 대한 특징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Lars Aagaard Mogensen의 <문화와 예술 Culture and Art> 속에 이런 명문들이 수록된 후 예술론에 초점을 맞춘 명문집이 따로 출간되지는 못했다.
이 책은 <문화와 예술>과는 다르다.
<문화와 예술>이 예술의 정의에 대한 논점을 철학적 연구를 위한 압박을 가하는 논제로서의 부활을 예고한 데 비해 이 책은 잘 정리된 논의를 지속시킨다.
20년 이상 지난 후 지금 <문화와 예술>에 의해 극적으로 제출된 논증 속에서의 우열가리기는 점차 관심사가 되고 있다.
변증법의 장이 좀더 복잡해진 것이다.
뒤늦은 지혜의 이점과 더불어서 좀더 명확한 구분들이 생겨났으며 예술의 정의에 대한 연구과제와 관련해서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들도 제기되었다.
좀더 구체화된 논증들은 궤도를 벗어났다.

이 책에서 입증하는 진전이란 불후적이라기보다는 증대적이다.
하지만 이런 점은 그 자체 기대된 바였으며 <오늘의 예술론>은 논증에서 진일보하는 단단한 발판을 제공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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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베일리George W. S. Bailey
 

마시아 뮈엘더 이턴과 마찬가지로 조지 베일리George W. S.
Bailey 역시 예술작품들에 대한 책임론을 언급했다.
그의 논증 <예술: 사후의 삶? Art: Life after Death?>은 예술의 전통
적 사회적 개념들에 속하는 내용이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하나의 예술작품은 사회적 실천들의 정황 속에서 진전되는 특정한
권리와 책임의 집중점이다.

예를 들면 한 예술가의 작품은 진진한 주장처럼 특정한 권리인데 베
일리에게 있어 이런 권리는 역사적으로 이해된 많은 부분 속에서의
진전이다.
베일리에게 있어서 예술작품의 고유한 기능은 타당한 '동기'를 위
한 '동의'가 생기게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동기'란 역사적 이론들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그 동기가
역사적으로 적절한 것인지 또는 단순히 표면상으로만 그러한지를
결정한다.
여기서 '동의'란 예술의 지위에 대한, 즉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도록
주장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역사적 이론들의 실행 가능성과 그것들이 제출하는 동기들에
대한 실험은 궁극적으로 그것들이 생존할 수 있는 예술이 될 수 있
는지의 여부에 대한 것이다.
베일리의 견해에 의하면
예술의 기능은 지탱되어지는 것으로 보이며 이를 보증하는 이론들
은 보는 사람, 듣는 사람, 독자들에 대한 예술의 주장을 알리는 타당
한 동기들을 추적하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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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아 뮈엘더 이턴

 
아서 단토와 조지 딕키와 마찬가지로
마시아 뮈엘더 이턴Marcia Muelder Eaton도 1983년 저서 <예술
과 비예술: 오렌지 나무상자와 매춘부 유혹의 반영 Art and
Nonart: Reflections on an Orange Crate and a Moose Call>에

어떤 것이 예술작품이 되려면 오로지 유일하게only if
그것은 인공물이어야 하고 그리고and 관람자로 하여금 관심을 기
울일 만한 가치 있는 속성을 지닌 그 생산품의 역사에 관한 자료를
밝히는 식의 논의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후 이턴은 자신의 논리를 몇 가지 방법으로 수정하기를 바라고 있
는데,
그녀는 논의의 대상이 된 예술작품의 본질적 특징과 관련해서 자신
의 입장이 유럽인 중심의 편향으로 기운 점을 정정하기를 바란다.

미학적 속성과 관련해서
이턴은 오로지 유일하게only if 한 오브제의 본질적 특징이며 또한
문화적으로 관심을 기울일 만한 가치가 있는 속성으로 증면된 것이
라면 그 오브제의 미학적 속성이라고 말할 수 있음을 제시한다.
이런 점에서 이턴은 자신의 논리를 수정했는데 수정된 그녀의 예술
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X가 하나의 예술작품이 되려면 오로지 유일하게only if
(1) X가 인공물이어야 하고
(2) X는 미학적으로 관련된 방법들, 즉 한 문화 속에서 유창하게 말
하는 사람으로 인해 관심을 기울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간주
된 X의 본질적 속성들에 직접 관심(지각 그리고/혹은and/or 반영)
을 갖게 하는 그런 식으로 취급되어야 하며
또한 (3) 어떤 사람이 X에 대해서 미학적 경험을 할 때 그 사람이 경
험의 원인이 그 문화권 내에서 관심을 기울일 만한 가치가 있는 것
으로 간주된 X의 본질적 속성임을 알아야 한다.

이턴의 견해에 의할 것 같으면
예술작품의 어떤 류의 특징이 관심을 기울일 만한 가치가 있는지 결
정하는 사회 밖에서는 (혹은 다른 문화권 내에서는) 예술이 존재할
수 없으므로 그녀의 예술의 정의는 사회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술작품이 사회적 역할과 책임의 틀 속에 있는 한 어떤 것이 예술
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한 후보자를 지정하는 것은 우리로부터 특정한 류의 적절한 반응을
이끌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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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중반 이후 예술론의 진화에 생산적이었다 
 

조지 딕키와 조셉 마골리스의 논증들과 더불어 단토의 논증은 20세
기 중반 이후 예술론의 진화에 생산적이었다.
단토는 '일련의 유사논증'을 반박하면서 동시에
두 필요조건을 내포하는 예술론을 분간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전개
했다.
단토는
오로지 유일하게Only if
(1) X가 어떤 것에 고나한 것이며
또한 (2) X가 의미를 구현할 경우
X는 하나의 예술작품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논증에서 '구현 embodiment'은 문제의 작품이 (그것이 무엇
에 관한 것이든) 자체의 의미에 대한 적절한 형상 속에서 무엇에 관
한 것이든 제시함을 뜻한다.
에세이 <예술과 의미 Art and Meaning>에서 단토는 이런 식의 예
술론을 되풀이하면서 최근의 반론들에 대항하는 자신의 입장을 옹
호하고 있다.

첫째 반론은
어떤 것이라도에 관한 것이 아닌 비구상 회화와 같은 예술작품의 명
백한 사례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유사함 aboutness'은 예술의 필
요조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단토는 응답하기를,
소위 말하는 비구상 회화의 사례들에 주목할 경우 사람들은 무에 관
한 회화의 진정한 사례를 발견할 수 없다고 한다.
단토는 어떤 실재 역사적 사례에서도 자신이 항상 그것이 어떤 것
에 관한 것임을 보여줄 수 있다고 장담한다.

둘째 반론은
그가 늘 주장한 것을 그의 두 필요조건이 성공시키지 못하는 것은
예술철학이 풀어야 할 과제라는 비난과 관련이 있다.
예술작품과 실재 사물을 구분하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단토의 논증이 그가 선호하는 두 사례, 즉 워홀의 <
브릴로 상자>와 실재 브릴로 상자를 구분하지 못한다고 주장되는
데 있다.
상이하기는 하지만 두 상자 모두 어떤 것에 관한 것이며
둘 모두 자체의 의미를 적절하게 구현하기 때문에
단토의 논리에 의하면
둘 모두 예술이 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단토는
이 한쌍의 사례가 자신이 희망한 것만큼 전형적인 것들이 아닐 수
있음을 시인하면서
브릴로 상자들의 상이한 류의 상대적 구분을 밝히는 방법은 워홀의
상자와 프록터와 갬블의 상자들(이것들은 예술작품들이 아니다)에
각각 어울리는 비평의 유형을 정밀하게 바라보는 것이 되어야 할 것
임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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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설명적 풍습과 관련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딕키가 제시하는 바
예술에 대한 이론적 접근법들이 문화주의자에 반하는 자연주의자
로 분류될 수 있다면,
조셉 마골리스의 프로그램은
문화주의의 극단적인 형태를 상징하는 것이 된다.
마골리스는 에세이 <예술작품들의 정상이 아닌 존재론 The
Deviant Ontology of Artworks>에서 자신을 유명하게 만든 견해,
즉 예술작품들은 우리의 진행중인 해석이 가능한 행위들의 역사화
되는 동향의 추이 속에서 증명되며 개별화되는 문화적으로 출현하
는 실재물들임을 옹호했다.
마골리스 견해의 요점은
예술작품들을 물리적 오브제들의 모델에 환원시키게 취급하는 시도
가 오류라는 것이다.
그보다 예술작품들은 문화화된 오브제들이다.
그것들의 속성과 정체성은 우리의 합의적 언어 풍습을 통해 그것들
에 분배된 것이다.
우리는 예술작품들의 본질이 우리의 풍습,
특히 우리의 설명적 풍습과 관련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런 풍습은 연산방식algorithmin은 아니지만 마골리스가 합의적
용인으로 명명한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그는 우리가 예술의 개념을 우리의 설명적 풍습에 민감하거
나 어울리는 방법으로 모형을 만들 경우
우리의 설명적 풍습처럼 예술의 본체론이 우리를 상대론의 개념들
로 인도할 것으로 보았다.

마골리스의 논증의 특징은 예술의 본질, 즉 사회적 본질이 상대론이
나 확고한 상대론조차 수반한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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