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구성주의



러시아계 미국 조각가 나움 가보(1890~1977)는 브리안스크 태생으로 앙투안 페브스네르(1886~1962)의 동생이다. 뮌헨 대학에서 의학 및 자연과학, 공과대학에서 공학을 공부했는데, 이때 하인리히 뵐플린의 미술사 강의를 들었다. 1913년과 1914년에 파리를 방문했고, 그곳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던 앙투안을 통해 처음 아방가르드 미술을 접했다. 오슬로에서 가보라는 이름을 사용하면서 입체주의 특성과 후에 유럽 구성주의의 전조가 되는 기하적 추상을 결합하여 첫 번째 구성을 제작했다. 1917년 앙투안과 같이 러시아로 돌아왔고 1920년에 형과 함께 ‘사실주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선언문은 러시아 구성주의의 창시자 블라디미르 타틀린(1885~1953)이 이끄는 이른바 ‘생산주의자’ 그룹에 대립하는 유럽 구성주의의 기초 원리를 제시했다. 한편 앙투안은 절대주의의 창시자 카시미르 말레비치(1878~1935), 칸딘스키와 더불어 모스크바 미술 아카데미 교수로 임명되었다.

말레비치는 인후크Inkhuk 내의 논쟁에서 칸딘스키와 페브스네르 형제에 동조하며 모든 미술은 반드시 실용적이어야 한다는 생산주의 예술가들의 견해에 반대했고, 산업미술은 자율적이고 창조적인 미술에서 나오는 새로운 발상에 좌우된다고 주장했다. 인후크는 1920년 5월 모스크바에서 미술 실험 프로그램을 수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기관으로 러시아어로 미술문화연구소Institut Khudozhestvennoi Kulturi의 약자이다. 미술부 산하의 한 분과로 설립되었으며, 1918년 인민계몽위원회(IZO 나르콤프로스) 밑에 설치되었다. 1921년 말 페트로그라드에서는 타틀린, 비텝스크에서는 말레비치의 책임 아래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칸딘스키가 인후크 프로그램의 정비를 맡았지만, 그의 계획안은 인후크의 대다수 좌파 예술가들에 의해 거부당했다. 칸딘스키는 곧 이곳을 떠났으며 그의 계획안은 후에 그의 바우하우스에서의 교수법에 바탕이 되었다.

1948년 예일 대학에서 행한 트라우브리지 강연에서 소비에트 구성주의에 대한 반대의사를 명학하게 밝혔다.
“구성주의란 단어는 1920년대에 미술을 말살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일단의 예술가들에 의해 사용되어 왔다. 그들은 이젤회화와 조각, 즉 예술가의 이념이나 감정을 전달하고자 하는 예술작품의 가치를 전적으로 부인했다. 그들이 예술가 특히 소위 구성주의 예술가들의 역할이라고 주장한 것은 물질적 가치가 있는 구조물, 즉 편리한 물건, 주택, 의자, 탁자, 스토브 등의 제작에 예술가의 재능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그들은 철학적으로는 물질주의를, 정치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를 추종했다. 구성주의 예술가들은 예술작품을 부패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만 소중히 생각되는 쾌락이며, 새로운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백해무익한 존재로 치부했다. 나와 동료들은 이런 이상한 주장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한다. 미술은 예술가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게임에 불과하다는 견해에 우리는 동의하지 않았으며 현재도 그렇다. 나는 미술이 인간 생활의 정신적, 사회적 구조에서 특별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 믿는다. 미술은 사회 구성원들 간의 가장 즉각적이고 효과적인 의사소통의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미술은 인생 자체와 맞먹는 최고의 역동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인간의 모든 창조물보다 뛰어난 것이다.”

구성주의는 많은 현대 미술용어와 마찬가지로 명확히 규정되어 있지 않으며, 용어의 사용도 일원화되어 있지 않다. 구성주의Constructivism와 구성주의적Constructive이라는 용어는 1900년대와 1910년대에는 충동적이고 즉흥적이지 않으며 치밀하게 구성된 미술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당시 구성주의로 분류되었던 미술이 모두 현재에 구성주의라고 일컬어지는 범주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1920년대에는 목적과 관념이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운동이 동시에 구성주의라는 용어를 채택했다. 하나는 소비에트 러시아에 국한되어 일어났으며, 다른 하나는 유럽의 여러 국가에서 일어났다. 현재는 후자를 국제 구성주의 혹은 유럽 구성주의라고 명명하여 러시아 구성주의와 구별하기도 한다.

러시아 구성주의가 매우 구체적인 명칭인 반면, 유럽 구성주의는 의미가 모호하며 점차 비재현적 혹은 비표현적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광범위한 화파와 양식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동일한 명칭 때문에 두 운동은 근본적으로는 하나인 이론의 두 가지 갈래인 것처럼 논의되었으며, 이론 인해 혼란이 야기되기도 했다. 사실 주요 유럽 구성주의 화파 중 러시아 구성주의의 기본적인 이념을 수용한 화파는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히려 유럽 구성주의의 목적과 작품은 러시아 구성주의자들이 선언문을 통해 순수미술이라고 비판한 종류의 것이었다. 가보와 앙투안, 말레비치, 타틀린, 로트첸코, 포포바, 클리운, 푸니, 로자노바의 1920년 이전 작품들은 일반적으로 국제적 구성주의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으나 러시아 구성주의는 이 모두를 부인했다. 러시아 구성주의자들은 유럽 구성주의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초기 작품을 의도적으로 배격했다. 엘 리시츠키(1890~1941)만이 러시아 구성주의와 유럽 구성주의에 모두 동조했다.

1909~14년 다름슈타트에서 공학을 전공하다가 전쟁이 발발하자 러시아로 돌아가 모스크바에서 건축을 공부한 리시츠키는 입체-미래주의 양식과 루보크lubok라 불리는 농민 목판화 전통이 융합된 양식을 사용하면서 샤갈과 함께 유태교 서적의 삽화를 그렸다. 루보크는 밝게 채색된 러시아 민속 판화를 말하며 복수형은 루프키lubki이다. 일반적으로 민속 우화나 이와 유사한 장면들이 묘사되어 있다. 루보크는 17세기 중반부터 최소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이전까지 제작되었다. 루보크란 용어는 교육받은 계층이 평민 미술에 대해 내린 경멸적인 평가를 함축하며 조잡한, 값싼, 단정치 못한, 심미안이 결여된 의미로 사용되었다. 리시츠키는 1919년 비텝스크에서 말레비치와 알게 되었고 러시아 구성주의를 주도하는 예술가의 한 명으로 성장했다. 리시츠키는 상당한 기간 동안 서구에 가장 잘 알려진 러시아 추상 예술가였다. 그의 전성기 작품에는 말레비치의 절대주의와 타틀린과 로트첸코의 구성주의, 그리고 몬드리안의 네덜란드 신조형주의가 성공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1920년경 러시아에서 구성주의의 기본 개념은 1920년대에 순수 미술과 실험실 미술에 반대하고 생산 미술을 지지하던 비대상 예술가의 이념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타틀린은 입체-미래주의자들의 활동기간에 널리 유행한 구성이라는 용어를 자신의 작품과 관련하여 채택했다. 타틀린은 자신의 구성물에서 실제를 흉내내는 대신에 실제 물질을 사용했으며, 회화의 가상적 공간 대신에 실제 공간을 이용했다. 여기에서 중요한 원칙은 환영을 부인하는 것으로 이는 서구의 구체 미술 개념과 여러 측면에서 유사했다. 이는 사회적 유용성과 더불어 소비에트 구성주의의 중심 개념이 되었다. 타틀린의 물질-문화주의는 현대적 물질의 미적이고 실용적인 실제 특징을 조사하고 탐구하는 것으로 이후 구성주의자라고 자처하는 예술가들의 관심사 중 하나가 되었다. 구성주의자라는 용어는 1920년 8월에 간행된 가보와 앙투안의 ‘사실주의 선언’에서 타틀린의 미학적 이념을 가리키는 말로 처음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가보는 ‘사실주의 선언’에서 자신이 주창하는 비대상 미술을 설명하기 위해 구성과 구성주의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렇지만 후에 가보는 구성주의와 구성주의자라는 용어가 지나치게 교조적이라며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가보와 생산주의 화파 사이의 중요한 차이는 미술의 사회적 유용성에 대한 태도에 있다. 가보는 창작 미술로부터 사회적인 이익이 간접적으로 도출될 수도 있지만, 창작 미술은 비사회적이고 비실용적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반면에 생산주의자들은 미술이 사회주의 사회의 생활향상에 직접적으로 기여해야 한다고 열렬히 주장했으며, 이것이 소비에트 구성주의의 중요한 원칙이 되었다. 가보가 서구에 소개한 구성주의는 그 자신의 독자적인 방식에 의한 구성주의였지만 러시아 내에서 구성주의는 사회적으로 유용한 미술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했다.

타틀린이 가보의 신조와는 매우 동떨어진 공리주의 원리를 구체화시킨 <제3 인터내셔널 기념물>을 제작한 이래 구성주의 미술의 이론적 근거는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이 기념물은 1919년 러시아 미술부가 모스크바 중심에 세울 구조물로 타틀린에게 디자인을 의뢰한 것이다. 타틀린이 처음에 계획한 기념물은 유리와 철로 된 것으로, 그 높이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두 배이며, 중앙에 들어 있는 유리로 된 원통이 회전하는 것이었다. 타틀린은 이를 “공리적인 목적을 위하여 회화, 조각, 건축과 같은 순수 조형적 형태들을 결합하는 일”이라고 밝혔다. 1920년 12월 제8회 러시아 의회 전시장에서 기념물의 모형이 전시되었다. 가보는 기념물의 구도가 실현 불가능하다고 비난했으며 사실상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후 러시아 구성주의의 대표적인 상징으로서 인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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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케Die Brucke


브뤼케Die Brucke 그룹은 젊은 독일 건축학도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에리히 헤켈, 카를 슈미트-로틀루프, 프리츠 블라일에 의해 1905년 드레스덴에서 결성되었다. 키르히너의 <브뤼케 그룹 연감 Chronik der Kunstlergemeinschaft Brucke>에는 키르히너가 블라일과 헤켈을 만난 1903년이 창립 연도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슈미트-로틀루프가 합류한 1905년에 공식적인 모임이 처음 이루어졌다. 1906년 막스 페히슈타인이 가입하고 1907~08년 에밀 놀데가 참여함으로써 그룹의 규모는 더 커졌다. 그러나 에밀 놀데Emil Nolde(1867~1956)는 1년 동안 그룹에 가담했지만 본질적으로 고독한 기질의 그는 그룹이나 협회에 참여하기를 꺼려했다.

키르히너는 그룹 내에서 처음으로 폴리네시아 미술을 비롯한 여러 원시 미술을 열렬히 찬양한 인물이지만 원시주의 미술품의 영향은 그보다는 그룹의 다른 멤버들의 작품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그들은 후기 고딕 양식의 독일 목판화와 드레스덴에 있는 츠빙거 뮤지엄의 민속 자료실에 소장된 목조조각과 같은 윈시 미술의 영향을 받았으며 야수주의의 영향도 어느 정도 받았다. 표현 기법에 있어서는 일화적인 사실주의와 인상주의를 모두 혐오했고, 고갱과 반 고흐에게서 싹튼 표현주의를 뭉크와 호들러의 영향을 받아 독일식으로 창조하려고 했다. 실제로 표현주의라는 명칭을 주로 현대 독일 미술 경향에 작용하게 된 데는 이들의 영향이 컸다.

브뤼케 그룹의 멤버들은 강한 사명감을 가진 청년들로서 당대의 원대한 사회적 열망에 고취되어 있었던 그들은 회화를 수단으로 인류를 위해 보다 나은 미래를 추구해나가려고 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혁명적인 엘리트로 여겼으며 호라티우스의 ‘세속적인 인간에 대한 증오 Odi profanum vulgus’를 신조로 삼아 도전적인 반부르주아적 태도를 취했다. 브뤼케라는 명칭은 슈미트-로틀루프가 채택한 것으로 그룹을 하나로 묶는 유대를 상징한다. 나중에는 이 명칭에 좀더 심오한 의미가 부여되어 자신들의 작품이 미래의 미술로 이어지는 ‘다리’ 역할을 할 수 있게 되기를 열망하는 그들의 신념을 나타냈다. 놀데를 멤버로 초대하는 편지에 슈미트-로틀루프는 적었다. “모든 혁명적이고 자극적인 요소들을 끌어당기는 것, 이것이 바로 브뤼케라는 명칭에 내포되어 있는 목적이다.” 그러나 미래의 미술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정의는 결코 내려진 적이 없으며 결과적으로 그들의 목적은 계속해서 모호한 상태로 남게 되었다.

1910년경 브뤼케 그룹의 예술가들은 베를린으로 이주했고, 페히슈타인은 그곳에서 놀데와 함께 신분리파Neue Sezession를 결성했다. 이 그룹은 놀데의 <오순절>이 베를린 분리파 전시회에서 거절당하자 그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결성된 것이다. 키르히너, 헤켈, 슈미트-로틀루프도 신분리파에 가담했으며, 거기서 오토 뮐러를 만나 그를 브뤼케 그룹의 마지막 회원으로 가입시켰다. 그러나 그들은 브뤼케 그룹을 독립적이며 완전한 그룹으로 유지시키기 위해 곧바로 신분리파를 탈퇴했고 페히슈타인이 계속 신분리파에 집착하자 그를 브뤼케 그룹에서 축출시켰다. 드레스덴에서 공부하고 1906년에 브뤼케 그룹의 일원이 된 막스 페히슈타인Max Pechstein(1881~1955)는 1908년에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시대에 뒤떨어진 인상주의에 반대하는 현대미술 논쟁에 활발하게 참여하여 신분리파 창설을 주도했다. 1912년에 신분리파를 떠나라는 요구를 페리슈타인이 거부하자 브뤼케 그룹에서 축출 당했다. 그는 프랑스 야수주의, 특히 마티스의 피상적인 특징을 모방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브뤼케 그룹은 1912년 블라우에 라이터(청기사) 그룹의 두 번째 전시회에 함께 참여했지만, 키르히너가 <브뤼케 그룹 연감>에서 밝힌 그룹의 목적과 정책이 1913년 논란을 일으켜 해체되었다.

브뤼케 그룹을 결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1880~1938)는 1901~05년 드레스덴 공과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했으며 그 사이 1903~04년에는 뮌헨에서 회화를 공부했다. 키르히너가 초기 목판화 작품에서 보여준 독일판 아르 누보인 유겐트슈틸Jugendstil의 양식화된 선은 곧 가파른 각진 형태로 바뀌었는데, 이런 특성들은 그가 높이 평가한 독일 후기 고딕의 목판에서 끌어온 것으로 브뤼케 그룹의 양식적 특성이 되었다. 키르히너는 뮌헨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본 후기 인상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고갱과 반 고흐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주로 뭉크의 영향을 받아 단순화된 드로잉과 과감한 대조를 보이는 색채를 사용하면서 야수주의자들의 작품과 유사한 방식을 발전시켰다. 1907~10년까지 ‘야수들의 왕’ 앙리 마티스와 그의 동료들이 1905년에 도달한 양식과 표면적으로는 유사한 회화양식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키르히너는 야수주의보다 더 충동적이고 직접적인 태도로 주제에 접근했으며, 회화적 가치는 그다지 고려하지 않았다. 그는 야수주의보다 더욱 주제에 몰두했는데, 도시 풍경의 인간적 파편들 속에서 섹슈얼리티의 뉘앙스를 가지고 서커스와 뮤직홀의 생활에서 뽑아낸 감성과, 유쾌함, 슬픔을 물감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키르히너는 1911년 베를린으로 이주했고, 1912년과 1913년에는 독일 표현주의의 가장 극단적이고 가장 성숙된 표현으로 여겨지는 거리풍경 연작을 제작했다. 그는 더 격렬해진 양식으로, 속도와 병적인 우울함과 화려함,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직전 베를린의 쿠어퓌르스텐담 거리에서 재현되었던 대도시인들의 자기 노출적 에로티시즘을 시각적으로 표현했다. 이 시기에 그는 정신적으로 위기를 맞았으며, 전쟁에 징집된 직후인 1914년 심각한 육체적 정신적 쇠약 상태를 겪었다. 요양소에서 얼마 동안 머문 후 1917년 스위스의 다보스 근처의 산중에서 고독하게 살면서 그림을 그렸고, 독일의 정치적 사건들과 그 자신의 작품에 가해진 비난으로 인해 정신적 불안을 겪었으며, 1938년 자살하기 전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1928년부터 키르히너의 양식은 변화를 겪는데, 직접적으로 자연을 그리던 과거 작품에 비해 더 추상적으로 변했다. 이는 일종의 그림-문자로서 그의 ‘상형 문자적’ 형상들을 이용하여 그린 것으로, 직접적인 재현이 차지하는 부분이 감소되었다. 그는 말했다. “이 가시 세계의 내적 이미지를 비자연주의적인 형태를 통해 만들어낸 ‘상형 문자’는 시각적 법칙에 따라 형태를 취하게 되고, 그 형태의 경계가 넓어지기도 한다. 이 시각적 법칙은 이제까지의 미술에서는 사용된 적이 없었던 것으로, 예를 들어 반영의 법칙, 간섭과 분극화의 법칙 등이 그것이다.” 이런 생각은 1912년에 칸딘스키에 의해 표명된 이론과 공통점이 있다. 그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의 새로운 방식은 경험의 시각적 표현을 위해 일종의 추상적인 그림문자를 써 넣은 피카소의 실험적 아이디어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904년 드레스덴 기술전문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한 에리히 헤켈Erich Heckel(1883~1970)은 다른 그룹의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화가로서 정식 교육을 받지 않았으며, 그의 재능은 때로 회화보다는 판화에서, 특히 목판화에서 더욱 충분히 드러나는 것으로 여겨졌다. 1906년 그의 회화양식은 독일 표현주의와 반 고흐의 양식에 기초를 두었으며, 풍경화, 누드화, 초상화에 보이는 거칠고 강한 색채의 병치로 유명했다. 그렇지만 헤켈의 작품은 브뤼케 그룹의 다른 멤버들의 작품에 비해 다소 서정적인 편이며 그는 병과 내적 고통을 묘사하는데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또한 풍경화에서는 대부분의 독일 표현주의의 특징이 아닌 장식적인 특징을 나타내곤 했다. 그는 다른 멤버들과 함께 1911년에 베를린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파이닝거, 마케, 마르크와 교류하면서 그의 회화의 형태적인 구조가 힘과 짜임새를 갖추었다. 그러나 인간의 이미지는 거칠게 각이져 비틀리고 표정은 고통스러우며, 몸짓은 딱딱하면서도 산만하게 표현되어 한층 비관적이 되었다. 눈에 거슬리는 노란색과 흐린 푸른색을 강렬한 빨간색과 거칠게 대비시킴으로써 이와 같은 분위기를 반영했다. 1914년부터 헤켈은 플랑드르 지방에서 위생병으로 복무했으며, 그곳에서 그에게 영향을 미친 엔소르, 베크만과 만나게 되었다. 풍경화에서 색채는 좀더 어두워졌으며 구성 요소들을 대립시켜 전쟁의 고통을 표현했고, 작품의 음울하고 비극적인 분위기는 더욱 강해졌다. 1920년 이후의 작품은 좀더 보수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본래의 이름이 카를 슈미트인 카를 슈미트-로틀루프Karl Schmidt-Rottluff(1884~1976)는 드레스덴 공과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했다. 브뤼케 그룹의 멤버들에 비해 그의 양식은 더 활력이 넘치면서도 거칠었다. 이런 특징은 특히 목판화의 투박한 표현방식에서 두드러졌으며, 색조의 변화 없이 대조되는 색채의 평면으로 이루어진 회화에도 반영되었다. 1906년 놀데와 함께 알젠 섬에 머물면서 놀데로부터 ‘기념비적인 인상주의’를 이어받았는데, 이것은 1907년 헤켈과 함께 방문한 당가스터에서 그린 풍경화들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1911년 베를린으로 이주한 뒤 그의 기념비적인 회화양식은 더욱 강렬해졌다. 이는 흑인 조각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의 회화는 색조의 변화가 없는 원색들의 강한 대조와 거칠고 단순화된 형태들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후에 슈미트-로틀루프는 원근법과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색채를 사용하여 이런 거칠고 평면적인 형태를 수정해나갔는데, 이는 키르히너의 영향 또는 1924년 파리 여행과 1930년 이탈리아 여행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1896~98년 드레스덴에서 회화를 공부한 오토 뮐러Otto Muller(1874~1930)는 아르놀트 뵈클린Arnold Bocklin(1827~1901)의 영향을 받았으며, 인간과 자연의 합일을 표현하는 회화를 목표로 삼았다. 뮐러는 다작을 하는 화가였지만 1908년 이전에 제작한 대부분의 작품을 나중에 파괴했다. 1908년 베를린으로 이주했고 1910년 베를린 신분리파 가입을 거부당했다. 당시 거부당한 예술가들이 모여 개최한 전시회에서 브뤼케 그룹 화가들을 만나 브뤼케 그룹에 동참했으며, 1911년 키르히너와 함께 보헤미아 지방을 여행했다. 뮐러의 양식은 브뤼케 그룹의 영향으로 더욱 거칠고 딱딱하게 변해갔으며 윤곽선을 강조하게 되었다. 풍경 속의 누드 혹은 순수한 풍경화를 그렸으며 1920년 이후에는 집시도 모티프로 사용했다. 그는 능수능란한 기교를 지녔기 때문에 디스템퍼를 사용해 번들거림이 없는 마무리 효과를 낼 수 있었다.

브뤼케 그룹은 종종 같은 시기 프랑스에서 일어난 야수주의 운동에 상응하는 독일의 미술 운동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야수주의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브뤼케 그룹 화가들도 모티프를 자연에서 직접 취하고 추상에 반대했다. 그러나 프랑스 화가들이 늘 회화적 의도를 가장 주요시했던 것에 비해 독일 화가들은 주제에 임하는 화가의 강렬한 감정을 표현하는 데 더욱 주력했다. 그들은 이런 태도를 삶의 가장 내밀한 본질로 여겼으며 이를 위해 야수주의 화가들보다 더욱 더 왜곡되고 거친 표현을 추구했다. 독일 표현주의는 본능적이고 자발적이며 주관적인 것에 역점을 두었으며,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라틴 민족의 고전적인 절제 감각은 결여되어 있었다. 결국 브뤼케 그룹의 화가들은 야수주의 화가들에 뒤떨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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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젠 들라크루아와 폴 고갱  

 

김광우의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1888년 11월 16일경 고갱이 아를에서 반 고흐의 노란집에 묵고 있을 때 모호한 구성의 그림을 그렸는데 <건초 안에서, 하루의 열기 속에서>이다. 반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건초와 돼지가 있는 가운데 누드 여인”이라고 언급했다. 해석하고 읽어내기 어려운 작품이다. 상단 끝에 돌로 된 벽이 조금 보이고 여인은 허리까지 알몸을 드러낸 채 등을 돌렸는데, 등과 어깨는 하얀 피부지만 팔꿈치 아래 왼손은 벌겋게 탔다. 화면 아래 왼편에 핑크빛 오렌지색의 돼지 몸통이 보이고 여인 오른편에도 돼지 뒷부분과 꼬리가 보인다. 여인의 허리 아래 갈퀴가 보여 여인이 작업 도중에 낮잠을 자고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여인의 모습이 모호해서 앉아 있는 것인지 서 있는 것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아를로 오기 전 고갱이 브르타뉴에서 드로잉한 여인의 기억을 되새겨 이 작품에 삽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여인의 모습은 프랑스의 낭만주의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에서의 누드를 상기시킨다.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은 들라크루아가 영국을 여행한 후 연극에 대한 이해가 한층 많아진 후 그린 것으로 바이런의 희곡 <사르다나팔루스>(1821)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것이다. 들라크루아는 1828년 살롱전의 소개 책자에 이 작품에 관해 적었다.
“사르다나팔루스는 거대한 화장대 위에 놓인 화려한 침대에 누워 화관들과 궁정의 근위병들에게 그의 처첩들과 시종들 그리고 그가 총애하던 말들과 개들까지 모조리 목을 자르라고 명한다. 그의 쾌락에 봉사했던 그 어떤 것도 그가 죽은 후 살아남아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바이런의 희곡은 수도 니네베가 적군의 수중에 떨어지자 감연히 분신자결을 택한 아시리아의 전설적인 군주 사르다나팔루스를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아시리아 중심으로 왕 옆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미르하는 두 팔을 활짝 펴고 침대에 엎드린 채 자신의 목을 자르려 다가오는 근위병들에게 등을 내보이고 있는 구성이다. 요란한 살육의 장면들이 적색, 오렌지색, 황색, 갈색 등으로 현란하게 묘사된 이 작품은 고전주의에 대한 형식 파괴를 보여주는 낭만주의의 상징적 작품이 되었다. 당시 화가들은 발루아 지방의 역사 혹은 16, 17세기의 영국의 역사에서 비극적인 사실들을 찾아내어 이런 것들을 극적인 장면들로 묘사했다. 살롱전에 출품된 작품들은 살인이나 전투, 학살장면 일색이었다. 그래서 일부 관람자들은 화가들이 대중을 타락시켜서 방탕함에 짓눌리게 한다고 비난했다.

고갱은 1888년 크리스마스에 아를을 떠나 파리로 간 후 그곳에서 두 달 머물다가 퐁타방으로 갔다. 브뤼셀과 볼피니에서의 전시가 경제적으로 실패하자 빚이 늘었고 우울해졌다. 퐁타방은 돈이 적게 들어 그에게는 제2의 고향과도 같은 시골이었다. 그러나 관광지가 되어버린 퐁타방에 계속 머무는 것도 창작에 도움이 되지 않아 1889년 10월 근처의 르 풀뒤로 갔다. 바닷가의 이 작은 마을은 화가들에게 제2의 브르타뉴로 부상되고 있었다.

그는 그곳에 안주하기 전 그곳을 자주 찾았고 1889년 봄에 <파도 속에서>(고흐 425, 426)를 그렸는데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과 <건초 안에서, 하루의 열기 속에서>와 유사한 형식의 작품이다. 여인이 수영하는 장면을 그리면서 파도와 정면으로 마주치게 해서 삶의 즐거움을 맞이하는 의미를 담았다. 고갱은 이원론적 사상을 갖고 있었는데 삶과 죽음,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인 것이다. 그가 르 풀뒤에서 작업한 작품들은 이런 이원론에 근거한다. 등을 관람자에게 돌린 여인의 모습은 <신비롭게 보이는>과 <큄퍼 주전자가 있는 정물>에서도 삽입되었다.
 

고갱은 르 풀뒤에서의 생활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타히티로 가기로 결심했다. 그가 타히티행을 결정한 것은 1890년 여름이 다할 무렵으로 반 고흐가 자살한 그해 7월 27일이 조금 지난 후였다. 그는 르 풀뒤에서 르동에게 편지를 썼다.
“마다가스카르가 좀더 유럽 가까이 있지만은 타히티로 가려고 하며 그곳에서 여생을 마치려고 합니다. 선생이 좋아하는 저의 예술이 먼 곳에 심어지고 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상태에서 성장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저는 고요와 평화의 상태에서 지내야 만합니다. 사람들이 ‘고갱은 끝났어. 그가 보여줄 것이란 더 이상 없어’라고 말하면서 저의 명예를 훼손하더라도 상관하지 않겠습니다.”(1890.9)

고갱이 타히티로 간 이유 가운데 그의 경제적 어려움이 가장 컸다. 그는 타히티에서는 거의 무일푼으로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1891년 2월 23일 월요일 드루오 호텔에서 작품 서른 점을 경매에 붙여 자금을 마련하기로 하고 한 달반 전부터 언론과 잡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친구들을 동원하여 이 일을 대대적으로 알렸다. 고갱의 친구 모리스가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로 하여금 미술평론가 옥타브 미르보에게 고갱의 작품에 호감을 주는 글을 청탁했다. 미르보의 글이 전시회가 열리기 한 주 전 1891년 2월 16일 <에코 드 파리>에 발표되었고, 사흘 후 일간지 <르 피가로>에 장문의 글이 기고되었으며, 경매 카탈로그에도 기재되었다. 미르보는 고갱을 “화가, 시인, 사도, 악마”라고 적으면서 회화의 그리스도라고 추켜세웠다. 미르보는 잉카의 후예인 고갱의 작품에서 야만적 아름다움과 모호한 상징주의의 요소가 발견되며 절대적인 고립을 위해 마르티니크로 간 적이 있는 고갱은 이제 자신의 꿈의 세계에 좀더 근접한 남태평양의 타히티로 가는 것이라고 하면서 어디를 가든지 그의 여정에 관심을 갖는다고 했다. 고갱은 미르보의 글에 대단히 만족해하며 그에게 직접 감사를 표했다.

시인이며 미술평론가 알베르 오리에도 고갱에 관한 글을 발표했다. 오리에도 고갱을 회화에 있어서 새로운 상징주의를 개척한 “축복받고 영감을 가진 예언자”라고 극찬하면서 회화에서의 상징주의 선구자라고 소개했다. 이렇게 자신의 명성을 쌓은 고갱은 정부 공무원과 사회적으로 지명도가 있는 인사들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을 도와달라고 청했는데, 그가 편지를 보낸 인사들 중에는 공화당 대변인이자 예술부 장관 안토냉 프루스트와 철학자이며 역사가 에르네스트 르낭도 포함되었다. 고갱은 프루스트에게 ‘타히티에 대한 정부 후원 미션’을 신청했으며 정치인으로 훗날 국무총리가 된 조르주 클레망소는 “타히티의 풍경과 풍물을 그리고 연구”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받게 해주었다. 고갱은 예술원으로부터 마르세유에서 타히티행 배표를 얻을 수 있었고, 식민지 책임자에게 보내는 소개장도 갖게 되었다.

고갱은 1891년 4월 1일 마르세유에서 배를 타고 타히티로 향했다. 그가 탄 배가 누메아에서 일주일 정박하고 타히티에 도착한 것은 6월 9일이었다. 타히티는 남태평양 중부,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소시에테 제도 가운데 동쪽 윈드워드 제도에서 가장 큰 섬으로 1767년에 발견되어 프랑스 식민지가 된 후 프랑스 관리와 군인이 통치하던 곳이다. 고갱의 표현으로 하면 “신비스러운 것들이 요염한 조화를 이루는 환희와 적막”을 맛볼 수 있는 타히티에서의 생활에 그는 만족해했다. 그는 그곳에서 <바다 근처>를 그렸는데 등을 돌린 동일한 여인이 삽입되어 있어 그가 실재에 상상의 인물을 삽입했음을 보고 또한 이 이미지에 집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1893~94년에 제작한 판화에서도 이 이미지를 삽입했다.

고갱은 1903년 5월 8일 세상을 떠났다. 4월 30일 갑자기 어지러운 경련을 견딜 수 없어 이웃의 도움을 청한 후 밤낮을 구별하지 못한 채 헛소리만 질렀는데 동맥이 터진 것으로 그의 아버지의 사인과 같았다. 그의 유해는 가톨릭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며 묘비가 세워진 것은 20년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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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레디메이드  

 

김광우의 <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마르셀 뒤샹(1887~1968)은 1916년 봄 레디메이드를 세 점 더 선정했는데, <빗>(뒤샹 123)은 쇠로 만들어진 것으로 개를 훈련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는 빗에 M.D.라는 마르셀 뒤샹의 첫 자를 적고 “높이(혹은 오만함)의 서너 방울 미개한 상태와 무관하다”라고 적었다. 그는 무감각한 상태에서 편견 없이 기성품을 선정한 후 비논리적인 제목을 붙여서 관람자로 하여금 각자의 생각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작품의 제목을 유머스럽게 단 것은 그가 좋아한 시인 줄 라호그의 영향이었다. 27세에 요절한 상징주의 시인 라호그는 뒤샹이 태어나던 해에 타계했다. 라호그의 이름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T. S. 엘리엇과 에즈라 파운드가 그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라호그의 니힐리즘, 아이러니, 그리고 빈정대는 유머는 뒤샹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라호그는 동음이의어를 거의 장난삼아 시어로 사용했으며, 두운법을 사용했고, 운율을 반복했으며, 두 낱말을 하나로 묶어서 사용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요염한’과 ‘결혼식’을 합쳐서 ‘요염한 결혼식’이란 새로운 낱말을 만들었고, ‘영원한’과 ‘무’를 합쳐서 ‘영원한 무’란 낱말을 만들었다. 그는 낭만적인 사랑, 결혼, 가족생활, 종교, 논리, 이성, 아름다움 등 어떤 전통적인 관념이라도 시를 통해 우스꽝스럽게 만들었다. 그는 태양조차 우스꽝스럽게 묘사하여 태양은 병들고 “심장이 없는 별들의 웃음거리”라고 했다. 라호그의 영향을 받은 뒤샹은 작품에 유머스러운 제목을 붙였다.

뒤샹이 다음으로 선정한 레디메이드는 <여행자 소품>(뒤샹 122)이다. 이것과 <빗>의 원래의 것들은 없어졌고 두 번째의 것은 뒤샹의 허락 하에 1963년 스톡홀름에서 율프 린드에 의해 제작되었고, 세 번재의 것들은 이듬해 밀라노에서 슈바르츠에 의해 여덟 개 한정판으로 제작되었다.

1916년에 세 번째로 선정한 것은 <숨은 소리와 함께>(뒤샹 124)였다. 뒤샹이 ‘1916년 부활절’이라고 적은 이 작품은 아렌스버그의 도움을 받아 제작한 것으로 그는 아렌스버그와 함께 집에서 사용하는 노끈뭉치를 청동으로 만들어진 정사각판 사이에 삽입한 후 기다란 나사로 네 가장자리를 단단히 죄었다. 뒤샹이 시키는 대로 아렌스버그는 나사를 푼 후 뒤샹 모르게 볼을 노끈뭉치 중앙 빈 공간에 넣고 다시 나사를 조였으므로 그것을 들고 흔들게 되면 소리가 났다. 그래서 <숨은 소리와 함께>란 제목이 되었다. 청동판 위와 아래에 뒤샹은 영어와 프랑스어를 병행하여 적었는데 더러 글자를 빠뜨리고 적었다. 제목은 그가 즐기는 단어놀이였으며 궤변을 서술할 수 없는 것을 변죽을 울리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했다.

뒤샹은 1917년 옷걸이를 <덫>(뒤샹 122)이란 제목으로 그리고 모자걸이를 <모자걸이>(뒤샹 123)란 제목으로 작품들로 선정했다. 이 두 작품은 그해 4월 부르주아 화랑에서 열린 그룹전을 통해 소개되었다. 카탈로그에는 뒤샹의 레디메이드가 조각으로 분류되었다. 부르주아의 말로는 뒤샹의 <모자걸이>를 화랑 입구에 전시했는데 사람들이 그 위에 모자를 걸면서 작품일 줄 알지 못하더라고 했다. 뒤샹이 원했던 대로 사람들은 레디메이드에서 미학적 감정을 전혀 일으키지 않았다.

뒤샹은 1916년 가을 사폴린 에나멜페인트를 광고하는 포스터를 한 장 얻었다. 어린 소녀가 나무로 제작된 침대를 에나멜페인트로 칠하는 모습이 그려진 포스터였다. 뒤샹은 포스터 상단에 ‘에나멜을 칠한 아폴리네르’라고 친구시인의 이름을 적어넣고 하단에는 ‘from Marcel Duchamp 1916~1917’이라고 적어넣었다. 이것이 <에나멜을 칠한 아폴리네르>(뒤샹 136)로 수정 레디메이드 작품의 첫 번째 사례가 되었다.

뒤샹은 1918년 8월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서양 장기 체스게임에 열중했다. 그가 체스에 전념한 사실은 이원론적 그의 정신세계를 잘 설명해준다. 대부분의 프랑스 지성인이 르네 데카르트와 앙리 베르그송의 영향을 받아 이원론적 세계를 추구한 것처럼 그도 두 세계에 병존하고 있었다. 그의 작품이 수학적 정밀한 방법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아 그가 체스에 심취한 것은 이해가 되는데 이 또한 수학적 정밀함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는 말했다.
“체스는 놀라울 정도로 데카르트적이다. ... 체스두는 사람은 아름다운 조화를 창조하는데, 그것이 어디로부터 오는지를 볼 수 없겠지만 결국에는 신비한 것이 아닌 줄을 알게 된다. 체스는 순수논리의 결과이다. 미술은 이와는 전혀 상이한 방법으로 이뤄진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뒤샹이 선정한 레디메이드는 여동생 수잔과 장 크로티의 결혼선물이었다. 두 사람은 1919년 4월 14일에 결혼했는데 뒤샹은 결혼선물로 그들에게 기하에 관한 책 한 권을 끈에 달아 발코니에 매달도록 주문하면서 “바람으로 하여금 책장을 넘기며 절로 문제를 선택하게 한 후 페이지를 찢게 하라”고 지시했다. 뒤샹은 이것을 “불행한 레디메이드”라고 했다. 결혼선물로는 달갑지 않았지만 수잔과 크로티는 뒤샹의 지시대로 책을 매달고 바람이 책장을 절로 넘기는 장면을 사진을 찍었다. 수잔은 후에 사진을 그림으로 그린 후 <마르셀의 레디메이드 불행>(뒤샹 168)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뒤샹은 훗날 말했다. “행복과 불행의 개념을 레디메이드에 부여하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재미있었다. 비와 바람이 페이지를 넘기는 것은 흥미 있는 개념이라고 생각했다.”

1919년 가을 뒤샹은 파리를 방문 중이었다. 그는 뉴욕으로 돌아가기 전 어느 날 리볼리 거리를 걷다가 <모나리자>를 프린트한 싸구려 엽서를 한 장 샀다. 그는 모나리자의 얼굴에 검정색 연필로 수염을 그려넣고 아래에 대문자로 L.H.O.O.Q.라고 적었다. 그 글자를 볼 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지만 프랑스어로 발음하게 되면 elle a chud au cul이 되어 '그 여자는 뜨거운 엉덩이를 가졌다‘란 뜻이 된다. 르네상스의 대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대작에 감히 수염을 그려넣고 지독한 농담을 보탠 것은 그야말로 극도의 다다주의 방법이었다. 1919년은 레오나르도가 타계한 지 400주면이 되는 해라서 파리 시민들은 새삼 그를 상기하면서 그가 서양미술에 끼친 영향을 높이 받들고 있었는데 뒤샹이 이 대가를 우스꽝스럽게 만든 것이다. <모나리자>는 이후 예술가들의 선호하는 주제가 되었다. 살바도르 달리는 1954년에 자신의 모습을 모나리자로 분장하여 사진으로 기록을 남기면서 수염을 눈가장자리로 올려 익살을 나타냈다. 재스퍼 존스와 앤디 워홀의 작품에서도 모나리자를 발견할 수 있는데 두 사람의 모나리자는 레어나르도의 모나리자가 아니라 뒤샹의 모나리자라고 말할 수 있다. 두 사람 모두 뒤샹의 영향을 직접 받았기 때문이다.

뒤샹은 루엥에서 가족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이틀 후인 12월 27일 르 아브르에서 뉴욕으로 가는 배에 승선했다. 그는 승선하기 전에 브로메 거리에 있는 약국으로 가서 종처럼 생긴 1회분 주사약이 든 병을 샀다. 그는 약사더러 병 끝을 잘라달라고 주문하여 병에 든 약을 버리고 병을 봉했다. 그는 그것을 자신의 후원자 아렌스버그 부부에게 줄 선물로 가방에 넣었고, 그것에 <파리의 공기 50cc>(뒤샹 177)란 제목을 붙여 파리에서 선정한 작품이 되게 했다. 아렌스버그 부부는 돈이 많아 모든 걸 갖춘 상태였으므로 그들에게 그가 줄 선물이라고는 <파리의 공기 50cc>밖에 없었다.

1923년 새해를 맞은 뒤샹은 뉴욕을 떠나 프랑스로 완전히 귀국하려고 했다. 이것은 결국 일시적인 생각으로 끝났지만 당시에는 뉴욕을 완전히 벗어나려고 했고, 뉴욕을 떠나기 전 마지막 레디메이드를 제작하려고 했다. 그는 레스토랑에 갔다가 ‘현상수배’란 포스터를 봤는데 사람들을 웃기려고 누군가가 붙여놓은 것이었다. 포스터에는 사진과 함께 글이 적혀 있었다.
“조지 웰츠를 체포하는 데 협조하시는 분께는 보상금 2천 달러를 드립니다. 웰츠는 뉴욕에서 훅, 리옹, 그리고 씬꾸에르란 이름으로 양동이 상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뒤샹은 인쇄업자에게 포스터를 만들도록 한 후 하단 아랫줄에 ‘로즈 셀라비란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란 문구를 보탰다. 로즈 셀라비는 1920년 늦여름 여자로 분장한 자신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적어넣은 자신의 여성 이름이었다. 그는 자신의 여권사진 두 장을 포스터에 부착했다. 뉴욕을 떠나는 그가 제작한 레디메이드로는 어째 유감스러운 점이 없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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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주의


들로네는 1912~13년에 <원반>과 <우주의 원형> 연작을 발표했는데, 이것들은 <동시적 창>에서 시작한 색채의 동시적인 상호작용에 대한 실험을 더욱 심화시킨 것들로 구체적인 시각 인상에 근거를 두지 않은 순수 추상이었다. 그는 자율적인 색채 구조를 구축하고 있는 순수 색면들이 서로 침투하고 회전하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는 말했다.
“오로지 색채만이 형태이자 주제이다. 회화가 대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는 한 묘사적이고 문학적일 수밖에 없으며, 불완전한 표현수단으로 인해 점차 타락하여 노예 상태나 모방물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예술가가 빛을 강조한다 할지라도 사물에 비친 빛이나 여러 사물 사이의 관계에 의해 파생되는 빛을 그리는 데 급급하여 빛에 회화적 독립성을 부여하지 않는다면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들로네의 작품들은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가 오르피즘Orphism이라고 명명한 ‘색채 입체주의’ 운동을 불러일으켰다. 아폴리네르는 1912년 섹시옹 도르Section d'Or 전시회와 1913년 베를린의 슈투름 화랑에 전시된 들로네의 작품을 설명하기 위해 오르피즘이란 명칭을 만들어냈다. 섹시옹 도르는 프랑스어로 ‘황금 분할’을 의미한다. 아폴리네르는 오르피즘을 비재현적 색채 추상으로 이해했고, 자신의 저서 <입체주의 화가들>(1913)에서 이를 가시적인 영역으로부터 빌려온 요소가 아닌 전적으로 예술가 자신이 창조한 요소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구조를 그리는 회화라고 설명했다. 그는 오르피즘을 입체주의의 범주에 속하는 운동으로 보고 여기에 들로네 외에 들로네의 아내 소니아 들로네-테르크, 프랑시스 피카비아, 마르셀 뒤샹, 페르낭 레제, 쿠프카 등을 포함시켰다.

비재현적 추상의 발전에 선구적인 역할을 한 프란티셰크 쿠프카(1871~1957)는 유럽에서 최초로 추상적 색채와 형태 속에 내재된 정신적 상징주의를 탐구한 후 이를 과감히 작품에 사용한 화가 중 한 사람이며 음악에서 유추한 시각예술 작품을 제작하는 데 성공한 최초의 화가 중 하나이다. 그가 수년 동안 습작을 통해 연마하고 발전시킨 아이디어들은 <무정형: 두 가지 색의 푸가>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되었으며, 이 작품은 1912년 살롱 도톤에 그의 다른 작품 <따뜻한 색채 이론>과 함께 전시되어 일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유럽 미술사에서 의도적으로 제작된 최초의 비재현적 추상화로 일컬어지는 이 작품들은 아폴리네르가 오르피즘이라는 명칭을 창안해낼 때 오르피즘의 예로서 들로네, 피카비아 회화와 더불어 인용되었다. 그의 1912년작 <누턴-원반>은 여러 개의 원이 서로 겹쳐지고 스펙트럼같이 다양한 색상으로 분할된 추상 구성 작품으로 서로 대비되는 색상들을 이용하여 색채의 추상성을 실험한 들로네의 시도와 일치했다.

오르피크orphique라는 단어는 이전에 상징주의자들이 사용한 적이 있는데, 아폴리네르는 여기에 낭만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엄격한 입체주의에 서정적 색채를 가미하려는 시도나, 쿠프카처럼 순수 색채 추상과 음악의 유사성에 관심을 갖는 경우를 지칭하는 데 사용했다. 마케와 같은 독일 표현주의자들이 오르피즘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낭만적인 연상 때문이었다.

들로네는 동시주의라는 용어를 미셀-외젠 슈브뢸의 저서 <색채의 동시 대비와 채색된 대상의 배열에 관한 법칙>(1839)에서 따왔으며, 이 책은 쇠라와 신인상주의 화가들의 색채 이론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들로네는 말했다. “1912~13년경 나는 오직 색채와, 색채의 대비로만 이루어지면서도 어느 순간에 갑자기 동시에 지각되는 회화 형태를 생각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슈브뢸의 과학 용어인 ‘동시 대비’를 사용했다.” 그러나 슈브뢸에게 있어 이 용어는 인접한 두 색채가 대비를 이루면서 각각의 특성을 상호 고취시키는 시각적인 효과를 설명한 것으로 순전히 과학적인 성격의 용어였다. 반면 들로네는 이 용어를 부정확하고 다소 모호하게 사용했다. 즉 색채는 추상화 내에서 회화적 형태는 물론 움직임의 환영까지도 만들어낼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며, 거의 유일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자신의 이론을 이 용어를 통해 나타내고자 했다. 들로네의 이론과 작품은 색채가 단순히 드로잉을 보조하는 장식적인 종속물이 아니라 형태를 만드는 데 있어서 중요한 구성요소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1900년경부터 유럽 회화에 널리 펴져 있던 이런 경향은 들로네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추상 색채 형태들 사이의 리드미컬한 상호작용을 미적으로 적용한 들로네의 작품은 추상의 발전, 특히 1930년대 막스 빌이 주창한 구체 미술의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조화를 이룬 색채는 느린 움직임을, 조화되지 않는 색채는 급격한 움직임을 암시하는 것을 비롯해 색채 대조를 통한 움직임의 표현에 대한 그의 생각은 또한 이후 키네틱 아트의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동시주의는 아폴리네르가 채택하여 일반화시켰다. 그는 이것을 통해 시어를 배열하여 일정한 형태를 만들어낸 자신의 ‘칼리그람 Calligramme’의 토대와 당시 유행하던 예술의 원리를 설명했다. 이 원리에 의하면 서로 무관하거나 대비되는 부분들이 임의적이고 부적절하게 병치되었을 때 구성의 각 요소들은 논리적 혹은 관습적 방식보다는 오히려 충돌과 대비를 통해 상호작용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동시성’의 개념은 제1차 세계대전 진적엔 문학, 음악, 조형 예술에서 가장 논란이 많았던 개념 중 하나였다. 그것은 다양한 인식의 표현, 여러 장소에서 동시에 일어난 일들에 대한 즉각적인 직관, 혹은 시간 속에서 펼쳐지는 연속된 사건들에 대한 순간적이며 집중된 직관을 의미했다. 그것은 ‘계속되는 현재’라는 심리적인 개념을 미술과 문학에까지 확대시킨 것이다.

동시성은 아폴리네르의 칼리그람의 토대를 형성한 것 외에도 상드라르, 르베르디, 거트루드 스타인의 글과 사티의 음악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동시주의에 대해 가장 예리하게 설명한 사람 중 하나인 로저 섀턱은 <연회 시대>에 “후안 그리스의 정물화, 아폴리네르의 시, 프루스트의 시구나 심지어 다음조 음악 등 어떤 경우에도 예술작품은 다양한 시대와 장소 및 다양한 의식의 상태를 대등하게 통합하기 시작했다”고 적었다. 1976년 3월 ‘시간과 공간은 어제 죽었다’ 전시회가 케임브리지의 케틀스 야드에서 열렸는데, 이는 제1차 세계대전 전 문인들과 예술가들이 이해했던 방식 그대로의 동시주의 개념을 포괄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색채를 사용하여 형태를 만들고 공간을 암시하는 양식을 동시주의Simultanisme(Simultanism)라 하는데, 로베르 들로네(1885~1941)가 창안한 용어이다. 파리 태생으로 장식적 상업회화를 공부한 뒤 1904년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들로네는 1906년에 신인상주의와 외젠 슈브뢸의 색채 이론에 관심을 가지며 모티프가 될 색채 이론의 미적 응용에 대한 연구에 전념했다. 인상주의보다 더욱 합리적으로 빛과 색채를 과학적으로 접근한 신인상주의는 평론가 펠릭스 페네옹(1861~1944)이 1886년에 만든 명칭이다. 조르주 쇠라(1859~91)는 신인상주의 운동의 제창자로 대표적인 화가였고 친구 폴 시냐크는 이 운동의 대표적인 이론가였다. 신인상주의의 이론적 토대는 점묘법을 사용한 분할주의로서 순색의 색점으로 그리는 것인데 작품의 규모와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점의 크기를 조절한다. 쇠라 작품에서 이런 접근 방식은 강렬한 빛의 효과를 주는 동시에 형태를 견고하고 명확하게 한다. 쇠라의 분할주의는 20세기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고 앙리 마티스가 주로 영향을 받았다. 들로네는 쇠라의 분할주의 기법을 채택하는 대신 대조되는 인접한 색채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탐구했으며, 특히 색채 공간의 분할을 위한 빛의 효과, 색채와 움직임의 상호 연결에 관심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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