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뤼케Die Brucke


브뤼케Die Brucke 그룹은 젊은 독일 건축학도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에리히 헤켈, 카를 슈미트-로틀루프, 프리츠 블라일에 의해 1905년 드레스덴에서 결성되었다. 키르히너의 <브뤼케 그룹 연감 Chronik der Kunstlergemeinschaft Brucke>에는 키르히너가 블라일과 헤켈을 만난 1903년이 창립 연도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슈미트-로틀루프가 합류한 1905년에 공식적인 모임이 처음 이루어졌다. 1906년 막스 페히슈타인이 가입하고 1907~08년 에밀 놀데가 참여함으로써 그룹의 규모는 더 커졌다. 그러나 에밀 놀데Emil Nolde(1867~1956)는 1년 동안 그룹에 가담했지만 본질적으로 고독한 기질의 그는 그룹이나 협회에 참여하기를 꺼려했다.

키르히너는 그룹 내에서 처음으로 폴리네시아 미술을 비롯한 여러 원시 미술을 열렬히 찬양한 인물이지만 원시주의 미술품의 영향은 그보다는 그룹의 다른 멤버들의 작품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그들은 후기 고딕 양식의 독일 목판화와 드레스덴에 있는 츠빙거 뮤지엄의 민속 자료실에 소장된 목조조각과 같은 윈시 미술의 영향을 받았으며 야수주의의 영향도 어느 정도 받았다. 표현 기법에 있어서는 일화적인 사실주의와 인상주의를 모두 혐오했고, 고갱과 반 고흐에게서 싹튼 표현주의를 뭉크와 호들러의 영향을 받아 독일식으로 창조하려고 했다. 실제로 표현주의라는 명칭을 주로 현대 독일 미술 경향에 작용하게 된 데는 이들의 영향이 컸다.

브뤼케 그룹의 멤버들은 강한 사명감을 가진 청년들로서 당대의 원대한 사회적 열망에 고취되어 있었던 그들은 회화를 수단으로 인류를 위해 보다 나은 미래를 추구해나가려고 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혁명적인 엘리트로 여겼으며 호라티우스의 ‘세속적인 인간에 대한 증오 Odi profanum vulgus’를 신조로 삼아 도전적인 반부르주아적 태도를 취했다. 브뤼케라는 명칭은 슈미트-로틀루프가 채택한 것으로 그룹을 하나로 묶는 유대를 상징한다. 나중에는 이 명칭에 좀더 심오한 의미가 부여되어 자신들의 작품이 미래의 미술로 이어지는 ‘다리’ 역할을 할 수 있게 되기를 열망하는 그들의 신념을 나타냈다. 놀데를 멤버로 초대하는 편지에 슈미트-로틀루프는 적었다. “모든 혁명적이고 자극적인 요소들을 끌어당기는 것, 이것이 바로 브뤼케라는 명칭에 내포되어 있는 목적이다.” 그러나 미래의 미술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정의는 결코 내려진 적이 없으며 결과적으로 그들의 목적은 계속해서 모호한 상태로 남게 되었다.

1910년경 브뤼케 그룹의 예술가들은 베를린으로 이주했고, 페히슈타인은 그곳에서 놀데와 함께 신분리파Neue Sezession를 결성했다. 이 그룹은 놀데의 <오순절>이 베를린 분리파 전시회에서 거절당하자 그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결성된 것이다. 키르히너, 헤켈, 슈미트-로틀루프도 신분리파에 가담했으며, 거기서 오토 뮐러를 만나 그를 브뤼케 그룹의 마지막 회원으로 가입시켰다. 그러나 그들은 브뤼케 그룹을 독립적이며 완전한 그룹으로 유지시키기 위해 곧바로 신분리파를 탈퇴했고 페히슈타인이 계속 신분리파에 집착하자 그를 브뤼케 그룹에서 축출시켰다. 드레스덴에서 공부하고 1906년에 브뤼케 그룹의 일원이 된 막스 페히슈타인Max Pechstein(1881~1955)는 1908년에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시대에 뒤떨어진 인상주의에 반대하는 현대미술 논쟁에 활발하게 참여하여 신분리파 창설을 주도했다. 1912년에 신분리파를 떠나라는 요구를 페리슈타인이 거부하자 브뤼케 그룹에서 축출 당했다. 그는 프랑스 야수주의, 특히 마티스의 피상적인 특징을 모방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브뤼케 그룹은 1912년 블라우에 라이터(청기사) 그룹의 두 번째 전시회에 함께 참여했지만, 키르히너가 <브뤼케 그룹 연감>에서 밝힌 그룹의 목적과 정책이 1913년 논란을 일으켜 해체되었다.

브뤼케 그룹을 결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1880~1938)는 1901~05년 드레스덴 공과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했으며 그 사이 1903~04년에는 뮌헨에서 회화를 공부했다. 키르히너가 초기 목판화 작품에서 보여준 독일판 아르 누보인 유겐트슈틸Jugendstil의 양식화된 선은 곧 가파른 각진 형태로 바뀌었는데, 이런 특성들은 그가 높이 평가한 독일 후기 고딕의 목판에서 끌어온 것으로 브뤼케 그룹의 양식적 특성이 되었다. 키르히너는 뮌헨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본 후기 인상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고갱과 반 고흐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주로 뭉크의 영향을 받아 단순화된 드로잉과 과감한 대조를 보이는 색채를 사용하면서 야수주의자들의 작품과 유사한 방식을 발전시켰다. 1907~10년까지 ‘야수들의 왕’ 앙리 마티스와 그의 동료들이 1905년에 도달한 양식과 표면적으로는 유사한 회화양식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키르히너는 야수주의보다 더 충동적이고 직접적인 태도로 주제에 접근했으며, 회화적 가치는 그다지 고려하지 않았다. 그는 야수주의보다 더욱 주제에 몰두했는데, 도시 풍경의 인간적 파편들 속에서 섹슈얼리티의 뉘앙스를 가지고 서커스와 뮤직홀의 생활에서 뽑아낸 감성과, 유쾌함, 슬픔을 물감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키르히너는 1911년 베를린으로 이주했고, 1912년과 1913년에는 독일 표현주의의 가장 극단적이고 가장 성숙된 표현으로 여겨지는 거리풍경 연작을 제작했다. 그는 더 격렬해진 양식으로, 속도와 병적인 우울함과 화려함,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직전 베를린의 쿠어퓌르스텐담 거리에서 재현되었던 대도시인들의 자기 노출적 에로티시즘을 시각적으로 표현했다. 이 시기에 그는 정신적으로 위기를 맞았으며, 전쟁에 징집된 직후인 1914년 심각한 육체적 정신적 쇠약 상태를 겪었다. 요양소에서 얼마 동안 머문 후 1917년 스위스의 다보스 근처의 산중에서 고독하게 살면서 그림을 그렸고, 독일의 정치적 사건들과 그 자신의 작품에 가해진 비난으로 인해 정신적 불안을 겪었으며, 1938년 자살하기 전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1928년부터 키르히너의 양식은 변화를 겪는데, 직접적으로 자연을 그리던 과거 작품에 비해 더 추상적으로 변했다. 이는 일종의 그림-문자로서 그의 ‘상형 문자적’ 형상들을 이용하여 그린 것으로, 직접적인 재현이 차지하는 부분이 감소되었다. 그는 말했다. “이 가시 세계의 내적 이미지를 비자연주의적인 형태를 통해 만들어낸 ‘상형 문자’는 시각적 법칙에 따라 형태를 취하게 되고, 그 형태의 경계가 넓어지기도 한다. 이 시각적 법칙은 이제까지의 미술에서는 사용된 적이 없었던 것으로, 예를 들어 반영의 법칙, 간섭과 분극화의 법칙 등이 그것이다.” 이런 생각은 1912년에 칸딘스키에 의해 표명된 이론과 공통점이 있다. 그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의 새로운 방식은 경험의 시각적 표현을 위해 일종의 추상적인 그림문자를 써 넣은 피카소의 실험적 아이디어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904년 드레스덴 기술전문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한 에리히 헤켈Erich Heckel(1883~1970)은 다른 그룹의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화가로서 정식 교육을 받지 않았으며, 그의 재능은 때로 회화보다는 판화에서, 특히 목판화에서 더욱 충분히 드러나는 것으로 여겨졌다. 1906년 그의 회화양식은 독일 표현주의와 반 고흐의 양식에 기초를 두었으며, 풍경화, 누드화, 초상화에 보이는 거칠고 강한 색채의 병치로 유명했다. 그렇지만 헤켈의 작품은 브뤼케 그룹의 다른 멤버들의 작품에 비해 다소 서정적인 편이며 그는 병과 내적 고통을 묘사하는데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또한 풍경화에서는 대부분의 독일 표현주의의 특징이 아닌 장식적인 특징을 나타내곤 했다. 그는 다른 멤버들과 함께 1911년에 베를린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파이닝거, 마케, 마르크와 교류하면서 그의 회화의 형태적인 구조가 힘과 짜임새를 갖추었다. 그러나 인간의 이미지는 거칠게 각이져 비틀리고 표정은 고통스러우며, 몸짓은 딱딱하면서도 산만하게 표현되어 한층 비관적이 되었다. 눈에 거슬리는 노란색과 흐린 푸른색을 강렬한 빨간색과 거칠게 대비시킴으로써 이와 같은 분위기를 반영했다. 1914년부터 헤켈은 플랑드르 지방에서 위생병으로 복무했으며, 그곳에서 그에게 영향을 미친 엔소르, 베크만과 만나게 되었다. 풍경화에서 색채는 좀더 어두워졌으며 구성 요소들을 대립시켜 전쟁의 고통을 표현했고, 작품의 음울하고 비극적인 분위기는 더욱 강해졌다. 1920년 이후의 작품은 좀더 보수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본래의 이름이 카를 슈미트인 카를 슈미트-로틀루프Karl Schmidt-Rottluff(1884~1976)는 드레스덴 공과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했다. 브뤼케 그룹의 멤버들에 비해 그의 양식은 더 활력이 넘치면서도 거칠었다. 이런 특징은 특히 목판화의 투박한 표현방식에서 두드러졌으며, 색조의 변화 없이 대조되는 색채의 평면으로 이루어진 회화에도 반영되었다. 1906년 놀데와 함께 알젠 섬에 머물면서 놀데로부터 ‘기념비적인 인상주의’를 이어받았는데, 이것은 1907년 헤켈과 함께 방문한 당가스터에서 그린 풍경화들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1911년 베를린으로 이주한 뒤 그의 기념비적인 회화양식은 더욱 강렬해졌다. 이는 흑인 조각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의 회화는 색조의 변화가 없는 원색들의 강한 대조와 거칠고 단순화된 형태들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후에 슈미트-로틀루프는 원근법과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색채를 사용하여 이런 거칠고 평면적인 형태를 수정해나갔는데, 이는 키르히너의 영향 또는 1924년 파리 여행과 1930년 이탈리아 여행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1896~98년 드레스덴에서 회화를 공부한 오토 뮐러Otto Muller(1874~1930)는 아르놀트 뵈클린Arnold Bocklin(1827~1901)의 영향을 받았으며, 인간과 자연의 합일을 표현하는 회화를 목표로 삼았다. 뮐러는 다작을 하는 화가였지만 1908년 이전에 제작한 대부분의 작품을 나중에 파괴했다. 1908년 베를린으로 이주했고 1910년 베를린 신분리파 가입을 거부당했다. 당시 거부당한 예술가들이 모여 개최한 전시회에서 브뤼케 그룹 화가들을 만나 브뤼케 그룹에 동참했으며, 1911년 키르히너와 함께 보헤미아 지방을 여행했다. 뮐러의 양식은 브뤼케 그룹의 영향으로 더욱 거칠고 딱딱하게 변해갔으며 윤곽선을 강조하게 되었다. 풍경 속의 누드 혹은 순수한 풍경화를 그렸으며 1920년 이후에는 집시도 모티프로 사용했다. 그는 능수능란한 기교를 지녔기 때문에 디스템퍼를 사용해 번들거림이 없는 마무리 효과를 낼 수 있었다.

브뤼케 그룹은 종종 같은 시기 프랑스에서 일어난 야수주의 운동에 상응하는 독일의 미술 운동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야수주의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브뤼케 그룹 화가들도 모티프를 자연에서 직접 취하고 추상에 반대했다. 그러나 프랑스 화가들이 늘 회화적 의도를 가장 주요시했던 것에 비해 독일 화가들은 주제에 임하는 화가의 강렬한 감정을 표현하는 데 더욱 주력했다. 그들은 이런 태도를 삶의 가장 내밀한 본질로 여겼으며 이를 위해 야수주의 화가들보다 더욱 더 왜곡되고 거친 표현을 추구했다. 독일 표현주의는 본능적이고 자발적이며 주관적인 것에 역점을 두었으며,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라틴 민족의 고전적인 절제 감각은 결여되어 있었다. 결국 브뤼케 그룹의 화가들은 야수주의 화가들에 뒤떨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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