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과 레디메이드
김광우의 <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마르셀 뒤샹(1887~1968)은 1916년 봄 레디메이드를 세 점 더 선정했는데, <빗>(뒤샹 123)은 쇠로 만들어진 것으로 개를 훈련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는 빗에 M.D.라는 마르셀 뒤샹의 첫 자를 적고 “높이(혹은 오만함)의 서너 방울 미개한 상태와 무관하다”라고 적었다. 그는 무감각한 상태에서 편견 없이 기성품을 선정한 후 비논리적인 제목을 붙여서 관람자로 하여금 각자의 생각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작품의 제목을 유머스럽게 단 것은 그가 좋아한 시인 줄 라호그의 영향이었다. 27세에 요절한 상징주의 시인 라호그는 뒤샹이 태어나던 해에 타계했다. 라호그의 이름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T. S. 엘리엇과 에즈라 파운드가 그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라호그의 니힐리즘, 아이러니, 그리고 빈정대는 유머는 뒤샹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라호그는 동음이의어를 거의 장난삼아 시어로 사용했으며, 두운법을 사용했고, 운율을 반복했으며, 두 낱말을 하나로 묶어서 사용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요염한’과 ‘결혼식’을 합쳐서 ‘요염한 결혼식’이란 새로운 낱말을 만들었고, ‘영원한’과 ‘무’를 합쳐서 ‘영원한 무’란 낱말을 만들었다. 그는 낭만적인 사랑, 결혼, 가족생활, 종교, 논리, 이성, 아름다움 등 어떤 전통적인 관념이라도 시를 통해 우스꽝스럽게 만들었다. 그는 태양조차 우스꽝스럽게 묘사하여 태양은 병들고 “심장이 없는 별들의 웃음거리”라고 했다. 라호그의 영향을 받은 뒤샹은 작품에 유머스러운 제목을 붙였다.
뒤샹이 다음으로 선정한 레디메이드는 <여행자 소품>(뒤샹 122)이다. 이것과 <빗>의 원래의 것들은 없어졌고 두 번째의 것은 뒤샹의 허락 하에 1963년 스톡홀름에서 율프 린드에 의해 제작되었고, 세 번재의 것들은 이듬해 밀라노에서 슈바르츠에 의해 여덟 개 한정판으로 제작되었다.
1916년에 세 번째로 선정한 것은 <숨은 소리와 함께>(뒤샹 124)였다. 뒤샹이 ‘1916년 부활절’이라고 적은 이 작품은 아렌스버그의 도움을 받아 제작한 것으로 그는 아렌스버그와 함께 집에서 사용하는 노끈뭉치를 청동으로 만들어진 정사각판 사이에 삽입한 후 기다란 나사로 네 가장자리를 단단히 죄었다. 뒤샹이 시키는 대로 아렌스버그는 나사를 푼 후 뒤샹 모르게 볼을 노끈뭉치 중앙 빈 공간에 넣고 다시 나사를 조였으므로 그것을 들고 흔들게 되면 소리가 났다. 그래서 <숨은 소리와 함께>란 제목이 되었다. 청동판 위와 아래에 뒤샹은 영어와 프랑스어를 병행하여 적었는데 더러 글자를 빠뜨리고 적었다. 제목은 그가 즐기는 단어놀이였으며 궤변을 서술할 수 없는 것을 변죽을 울리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했다.
뒤샹은 1917년 옷걸이를 <덫>(뒤샹 122)이란 제목으로 그리고 모자걸이를 <모자걸이>(뒤샹 123)란 제목으로 작품들로 선정했다. 이 두 작품은 그해 4월 부르주아 화랑에서 열린 그룹전을 통해 소개되었다. 카탈로그에는 뒤샹의 레디메이드가 조각으로 분류되었다. 부르주아의 말로는 뒤샹의 <모자걸이>를 화랑 입구에 전시했는데 사람들이 그 위에 모자를 걸면서 작품일 줄 알지 못하더라고 했다. 뒤샹이 원했던 대로 사람들은 레디메이드에서 미학적 감정을 전혀 일으키지 않았다.
뒤샹은 1916년 가을 사폴린 에나멜페인트를 광고하는 포스터를 한 장 얻었다. 어린 소녀가 나무로 제작된 침대를 에나멜페인트로 칠하는 모습이 그려진 포스터였다. 뒤샹은 포스터 상단에 ‘에나멜을 칠한 아폴리네르’라고 친구시인의 이름을 적어넣고 하단에는 ‘from Marcel Duchamp 1916~1917’이라고 적어넣었다. 이것이 <에나멜을 칠한 아폴리네르>(뒤샹 136)로 수정 레디메이드 작품의 첫 번째 사례가 되었다.
뒤샹은 1918년 8월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서양 장기 체스게임에 열중했다. 그가 체스에 전념한 사실은 이원론적 그의 정신세계를 잘 설명해준다. 대부분의 프랑스 지성인이 르네 데카르트와 앙리 베르그송의 영향을 받아 이원론적 세계를 추구한 것처럼 그도 두 세계에 병존하고 있었다. 그의 작품이 수학적 정밀한 방법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아 그가 체스에 심취한 것은 이해가 되는데 이 또한 수학적 정밀함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는 말했다.
“체스는 놀라울 정도로 데카르트적이다. ... 체스두는 사람은 아름다운 조화를 창조하는데, 그것이 어디로부터 오는지를 볼 수 없겠지만 결국에는 신비한 것이 아닌 줄을 알게 된다. 체스는 순수논리의 결과이다. 미술은 이와는 전혀 상이한 방법으로 이뤄진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뒤샹이 선정한 레디메이드는 여동생 수잔과 장 크로티의 결혼선물이었다. 두 사람은 1919년 4월 14일에 결혼했는데 뒤샹은 결혼선물로 그들에게 기하에 관한 책 한 권을 끈에 달아 발코니에 매달도록 주문하면서 “바람으로 하여금 책장을 넘기며 절로 문제를 선택하게 한 후 페이지를 찢게 하라”고 지시했다. 뒤샹은 이것을 “불행한 레디메이드”라고 했다. 결혼선물로는 달갑지 않았지만 수잔과 크로티는 뒤샹의 지시대로 책을 매달고 바람이 책장을 절로 넘기는 장면을 사진을 찍었다. 수잔은 후에 사진을 그림으로 그린 후 <마르셀의 레디메이드 불행>(뒤샹 168)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뒤샹은 훗날 말했다. “행복과 불행의 개념을 레디메이드에 부여하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재미있었다. 비와 바람이 페이지를 넘기는 것은 흥미 있는 개념이라고 생각했다.”
1919년 가을 뒤샹은 파리를 방문 중이었다. 그는 뉴욕으로 돌아가기 전 어느 날 리볼리 거리를 걷다가 <모나리자>를 프린트한 싸구려 엽서를 한 장 샀다. 그는 모나리자의 얼굴에 검정색 연필로 수염을 그려넣고 아래에 대문자로 L.H.O.O.Q.라고 적었다. 그 글자를 볼 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지만 프랑스어로 발음하게 되면 elle a chud au cul이 되어 '그 여자는 뜨거운 엉덩이를 가졌다‘란 뜻이 된다. 르네상스의 대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대작에 감히 수염을 그려넣고 지독한 농담을 보탠 것은 그야말로 극도의 다다주의 방법이었다. 1919년은 레오나르도가 타계한 지 400주면이 되는 해라서 파리 시민들은 새삼 그를 상기하면서 그가 서양미술에 끼친 영향을 높이 받들고 있었는데 뒤샹이 이 대가를 우스꽝스럽게 만든 것이다. <모나리자>는 이후 예술가들의 선호하는 주제가 되었다. 살바도르 달리는 1954년에 자신의 모습을 모나리자로 분장하여 사진으로 기록을 남기면서 수염을 눈가장자리로 올려 익살을 나타냈다. 재스퍼 존스와 앤디 워홀의 작품에서도 모나리자를 발견할 수 있는데 두 사람의 모나리자는 레어나르도의 모나리자가 아니라 뒤샹의 모나리자라고 말할 수 있다. 두 사람 모두 뒤샹의 영향을 직접 받았기 때문이다.
뒤샹은 루엥에서 가족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이틀 후인 12월 27일 르 아브르에서 뉴욕으로 가는 배에 승선했다. 그는 승선하기 전에 브로메 거리에 있는 약국으로 가서 종처럼 생긴 1회분 주사약이 든 병을 샀다. 그는 약사더러 병 끝을 잘라달라고 주문하여 병에 든 약을 버리고 병을 봉했다. 그는 그것을 자신의 후원자 아렌스버그 부부에게 줄 선물로 가방에 넣었고, 그것에 <파리의 공기 50cc>(뒤샹 177)란 제목을 붙여 파리에서 선정한 작품이 되게 했다. 아렌스버그 부부는 돈이 많아 모든 걸 갖춘 상태였으므로 그들에게 그가 줄 선물이라고는 <파리의 공기 50cc>밖에 없었다.
1923년 새해를 맞은 뒤샹은 뉴욕을 떠나 프랑스로 완전히 귀국하려고 했다. 이것은 결국 일시적인 생각으로 끝났지만 당시에는 뉴욕을 완전히 벗어나려고 했고, 뉴욕을 떠나기 전 마지막 레디메이드를 제작하려고 했다. 그는 레스토랑에 갔다가 ‘현상수배’란 포스터를 봤는데 사람들을 웃기려고 누군가가 붙여놓은 것이었다. 포스터에는 사진과 함께 글이 적혀 있었다.
“조지 웰츠를 체포하는 데 협조하시는 분께는 보상금 2천 달러를 드립니다. 웰츠는 뉴욕에서 훅, 리옹, 그리고 씬꾸에르란 이름으로 양동이 상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뒤샹은 인쇄업자에게 포스터를 만들도록 한 후 하단 아랫줄에 ‘로즈 셀라비란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란 문구를 보탰다. 로즈 셀라비는 1920년 늦여름 여자로 분장한 자신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적어넣은 자신의 여성 이름이었다. 그는 자신의 여권사진 두 장을 포스터에 부착했다. 뉴욕을 떠나는 그가 제작한 레디메이드로는 어째 유감스러운 점이 없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