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구성주의
러시아계 미국 조각가 나움 가보(1890~1977)는 브리안스크 태생으로 앙투안 페브스네르(1886~1962)의 동생이다. 뮌헨 대학에서 의학 및 자연과학, 공과대학에서 공학을 공부했는데, 이때 하인리히 뵐플린의 미술사 강의를 들었다. 1913년과 1914년에 파리를 방문했고, 그곳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던 앙투안을 통해 처음 아방가르드 미술을 접했다. 오슬로에서 가보라는 이름을 사용하면서 입체주의 특성과 후에 유럽 구성주의의 전조가 되는 기하적 추상을 결합하여 첫 번째 구성을 제작했다. 1917년 앙투안과 같이 러시아로 돌아왔고 1920년에 형과 함께 ‘사실주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선언문은 러시아 구성주의의 창시자 블라디미르 타틀린(1885~1953)이 이끄는 이른바 ‘생산주의자’ 그룹에 대립하는 유럽 구성주의의 기초 원리를 제시했다. 한편 앙투안은 절대주의의 창시자 카시미르 말레비치(1878~1935), 칸딘스키와 더불어 모스크바 미술 아카데미 교수로 임명되었다.
말레비치는 인후크Inkhuk 내의 논쟁에서 칸딘스키와 페브스네르 형제에 동조하며 모든 미술은 반드시 실용적이어야 한다는 생산주의 예술가들의 견해에 반대했고, 산업미술은 자율적이고 창조적인 미술에서 나오는 새로운 발상에 좌우된다고 주장했다. 인후크는 1920년 5월 모스크바에서 미술 실험 프로그램을 수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기관으로 러시아어로 미술문화연구소Institut Khudozhestvennoi Kulturi의 약자이다. 미술부 산하의 한 분과로 설립되었으며, 1918년 인민계몽위원회(IZO 나르콤프로스) 밑에 설치되었다. 1921년 말 페트로그라드에서는 타틀린, 비텝스크에서는 말레비치의 책임 아래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칸딘스키가 인후크 프로그램의 정비를 맡았지만, 그의 계획안은 인후크의 대다수 좌파 예술가들에 의해 거부당했다. 칸딘스키는 곧 이곳을 떠났으며 그의 계획안은 후에 그의 바우하우스에서의 교수법에 바탕이 되었다.
1948년 예일 대학에서 행한 트라우브리지 강연에서 소비에트 구성주의에 대한 반대의사를 명학하게 밝혔다.
“구성주의란 단어는 1920년대에 미술을 말살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일단의 예술가들에 의해 사용되어 왔다. 그들은 이젤회화와 조각, 즉 예술가의 이념이나 감정을 전달하고자 하는 예술작품의 가치를 전적으로 부인했다. 그들이 예술가 특히 소위 구성주의 예술가들의 역할이라고 주장한 것은 물질적 가치가 있는 구조물, 즉 편리한 물건, 주택, 의자, 탁자, 스토브 등의 제작에 예술가의 재능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그들은 철학적으로는 물질주의를, 정치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를 추종했다. 구성주의 예술가들은 예술작품을 부패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만 소중히 생각되는 쾌락이며, 새로운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백해무익한 존재로 치부했다. 나와 동료들은 이런 이상한 주장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한다. 미술은 예술가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게임에 불과하다는 견해에 우리는 동의하지 않았으며 현재도 그렇다. 나는 미술이 인간 생활의 정신적, 사회적 구조에서 특별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 믿는다. 미술은 사회 구성원들 간의 가장 즉각적이고 효과적인 의사소통의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미술은 인생 자체와 맞먹는 최고의 역동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인간의 모든 창조물보다 뛰어난 것이다.”
구성주의는 많은 현대 미술용어와 마찬가지로 명확히 규정되어 있지 않으며, 용어의 사용도 일원화되어 있지 않다. 구성주의Constructivism와 구성주의적Constructive이라는 용어는 1900년대와 1910년대에는 충동적이고 즉흥적이지 않으며 치밀하게 구성된 미술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당시 구성주의로 분류되었던 미술이 모두 현재에 구성주의라고 일컬어지는 범주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1920년대에는 목적과 관념이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운동이 동시에 구성주의라는 용어를 채택했다. 하나는 소비에트 러시아에 국한되어 일어났으며, 다른 하나는 유럽의 여러 국가에서 일어났다. 현재는 후자를 국제 구성주의 혹은 유럽 구성주의라고 명명하여 러시아 구성주의와 구별하기도 한다.
러시아 구성주의가 매우 구체적인 명칭인 반면, 유럽 구성주의는 의미가 모호하며 점차 비재현적 혹은 비표현적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광범위한 화파와 양식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동일한 명칭 때문에 두 운동은 근본적으로는 하나인 이론의 두 가지 갈래인 것처럼 논의되었으며, 이론 인해 혼란이 야기되기도 했다. 사실 주요 유럽 구성주의 화파 중 러시아 구성주의의 기본적인 이념을 수용한 화파는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히려 유럽 구성주의의 목적과 작품은 러시아 구성주의자들이 선언문을 통해 순수미술이라고 비판한 종류의 것이었다. 가보와 앙투안, 말레비치, 타틀린, 로트첸코, 포포바, 클리운, 푸니, 로자노바의 1920년 이전 작품들은 일반적으로 국제적 구성주의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으나 러시아 구성주의는 이 모두를 부인했다. 러시아 구성주의자들은 유럽 구성주의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초기 작품을 의도적으로 배격했다. 엘 리시츠키(1890~1941)만이 러시아 구성주의와 유럽 구성주의에 모두 동조했다.
1909~14년 다름슈타트에서 공학을 전공하다가 전쟁이 발발하자 러시아로 돌아가 모스크바에서 건축을 공부한 리시츠키는 입체-미래주의 양식과 루보크lubok라 불리는 농민 목판화 전통이 융합된 양식을 사용하면서 샤갈과 함께 유태교 서적의 삽화를 그렸다. 루보크는 밝게 채색된 러시아 민속 판화를 말하며 복수형은 루프키lubki이다. 일반적으로 민속 우화나 이와 유사한 장면들이 묘사되어 있다. 루보크는 17세기 중반부터 최소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이전까지 제작되었다. 루보크란 용어는 교육받은 계층이 평민 미술에 대해 내린 경멸적인 평가를 함축하며 조잡한, 값싼, 단정치 못한, 심미안이 결여된 의미로 사용되었다. 리시츠키는 1919년 비텝스크에서 말레비치와 알게 되었고 러시아 구성주의를 주도하는 예술가의 한 명으로 성장했다. 리시츠키는 상당한 기간 동안 서구에 가장 잘 알려진 러시아 추상 예술가였다. 그의 전성기 작품에는 말레비치의 절대주의와 타틀린과 로트첸코의 구성주의, 그리고 몬드리안의 네덜란드 신조형주의가 성공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1920년경 러시아에서 구성주의의 기본 개념은 1920년대에 순수 미술과 실험실 미술에 반대하고 생산 미술을 지지하던 비대상 예술가의 이념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타틀린은 입체-미래주의자들의 활동기간에 널리 유행한 구성이라는 용어를 자신의 작품과 관련하여 채택했다. 타틀린은 자신의 구성물에서 실제를 흉내내는 대신에 실제 물질을 사용했으며, 회화의 가상적 공간 대신에 실제 공간을 이용했다. 여기에서 중요한 원칙은 환영을 부인하는 것으로 이는 서구의 구체 미술 개념과 여러 측면에서 유사했다. 이는 사회적 유용성과 더불어 소비에트 구성주의의 중심 개념이 되었다. 타틀린의 물질-문화주의는 현대적 물질의 미적이고 실용적인 실제 특징을 조사하고 탐구하는 것으로 이후 구성주의자라고 자처하는 예술가들의 관심사 중 하나가 되었다. 구성주의자라는 용어는 1920년 8월에 간행된 가보와 앙투안의 ‘사실주의 선언’에서 타틀린의 미학적 이념을 가리키는 말로 처음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가보는 ‘사실주의 선언’에서 자신이 주창하는 비대상 미술을 설명하기 위해 구성과 구성주의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렇지만 후에 가보는 구성주의와 구성주의자라는 용어가 지나치게 교조적이라며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가보와 생산주의 화파 사이의 중요한 차이는 미술의 사회적 유용성에 대한 태도에 있다. 가보는 창작 미술로부터 사회적인 이익이 간접적으로 도출될 수도 있지만, 창작 미술은 비사회적이고 비실용적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반면에 생산주의자들은 미술이 사회주의 사회의 생활향상에 직접적으로 기여해야 한다고 열렬히 주장했으며, 이것이 소비에트 구성주의의 중요한 원칙이 되었다. 가보가 서구에 소개한 구성주의는 그 자신의 독자적인 방식에 의한 구성주의였지만 러시아 내에서 구성주의는 사회적으로 유용한 미술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했다.
타틀린이 가보의 신조와는 매우 동떨어진 공리주의 원리를 구체화시킨 <제3 인터내셔널 기념물>을 제작한 이래 구성주의 미술의 이론적 근거는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이 기념물은 1919년 러시아 미술부가 모스크바 중심에 세울 구조물로 타틀린에게 디자인을 의뢰한 것이다. 타틀린이 처음에 계획한 기념물은 유리와 철로 된 것으로, 그 높이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두 배이며, 중앙에 들어 있는 유리로 된 원통이 회전하는 것이었다. 타틀린은 이를 “공리적인 목적을 위하여 회화, 조각, 건축과 같은 순수 조형적 형태들을 결합하는 일”이라고 밝혔다. 1920년 12월 제8회 러시아 의회 전시장에서 기념물의 모형이 전시되었다. 가보는 기념물의 구도가 실현 불가능하다고 비난했으며 사실상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후 러시아 구성주의의 대표적인 상징으로서 인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