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젠 들라크루아와 폴 고갱  

 

김광우의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1888년 11월 16일경 고갱이 아를에서 반 고흐의 노란집에 묵고 있을 때 모호한 구성의 그림을 그렸는데 <건초 안에서, 하루의 열기 속에서>이다. 반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건초와 돼지가 있는 가운데 누드 여인”이라고 언급했다. 해석하고 읽어내기 어려운 작품이다. 상단 끝에 돌로 된 벽이 조금 보이고 여인은 허리까지 알몸을 드러낸 채 등을 돌렸는데, 등과 어깨는 하얀 피부지만 팔꿈치 아래 왼손은 벌겋게 탔다. 화면 아래 왼편에 핑크빛 오렌지색의 돼지 몸통이 보이고 여인 오른편에도 돼지 뒷부분과 꼬리가 보인다. 여인의 허리 아래 갈퀴가 보여 여인이 작업 도중에 낮잠을 자고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여인의 모습이 모호해서 앉아 있는 것인지 서 있는 것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아를로 오기 전 고갱이 브르타뉴에서 드로잉한 여인의 기억을 되새겨 이 작품에 삽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여인의 모습은 프랑스의 낭만주의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에서의 누드를 상기시킨다.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은 들라크루아가 영국을 여행한 후 연극에 대한 이해가 한층 많아진 후 그린 것으로 바이런의 희곡 <사르다나팔루스>(1821)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것이다. 들라크루아는 1828년 살롱전의 소개 책자에 이 작품에 관해 적었다.
“사르다나팔루스는 거대한 화장대 위에 놓인 화려한 침대에 누워 화관들과 궁정의 근위병들에게 그의 처첩들과 시종들 그리고 그가 총애하던 말들과 개들까지 모조리 목을 자르라고 명한다. 그의 쾌락에 봉사했던 그 어떤 것도 그가 죽은 후 살아남아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바이런의 희곡은 수도 니네베가 적군의 수중에 떨어지자 감연히 분신자결을 택한 아시리아의 전설적인 군주 사르다나팔루스를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아시리아 중심으로 왕 옆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미르하는 두 팔을 활짝 펴고 침대에 엎드린 채 자신의 목을 자르려 다가오는 근위병들에게 등을 내보이고 있는 구성이다. 요란한 살육의 장면들이 적색, 오렌지색, 황색, 갈색 등으로 현란하게 묘사된 이 작품은 고전주의에 대한 형식 파괴를 보여주는 낭만주의의 상징적 작품이 되었다. 당시 화가들은 발루아 지방의 역사 혹은 16, 17세기의 영국의 역사에서 비극적인 사실들을 찾아내어 이런 것들을 극적인 장면들로 묘사했다. 살롱전에 출품된 작품들은 살인이나 전투, 학살장면 일색이었다. 그래서 일부 관람자들은 화가들이 대중을 타락시켜서 방탕함에 짓눌리게 한다고 비난했다.

고갱은 1888년 크리스마스에 아를을 떠나 파리로 간 후 그곳에서 두 달 머물다가 퐁타방으로 갔다. 브뤼셀과 볼피니에서의 전시가 경제적으로 실패하자 빚이 늘었고 우울해졌다. 퐁타방은 돈이 적게 들어 그에게는 제2의 고향과도 같은 시골이었다. 그러나 관광지가 되어버린 퐁타방에 계속 머무는 것도 창작에 도움이 되지 않아 1889년 10월 근처의 르 풀뒤로 갔다. 바닷가의 이 작은 마을은 화가들에게 제2의 브르타뉴로 부상되고 있었다.

그는 그곳에 안주하기 전 그곳을 자주 찾았고 1889년 봄에 <파도 속에서>(고흐 425, 426)를 그렸는데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과 <건초 안에서, 하루의 열기 속에서>와 유사한 형식의 작품이다. 여인이 수영하는 장면을 그리면서 파도와 정면으로 마주치게 해서 삶의 즐거움을 맞이하는 의미를 담았다. 고갱은 이원론적 사상을 갖고 있었는데 삶과 죽음,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인 것이다. 그가 르 풀뒤에서 작업한 작품들은 이런 이원론에 근거한다. 등을 관람자에게 돌린 여인의 모습은 <신비롭게 보이는>과 <큄퍼 주전자가 있는 정물>에서도 삽입되었다.
 

고갱은 르 풀뒤에서의 생활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타히티로 가기로 결심했다. 그가 타히티행을 결정한 것은 1890년 여름이 다할 무렵으로 반 고흐가 자살한 그해 7월 27일이 조금 지난 후였다. 그는 르 풀뒤에서 르동에게 편지를 썼다.
“마다가스카르가 좀더 유럽 가까이 있지만은 타히티로 가려고 하며 그곳에서 여생을 마치려고 합니다. 선생이 좋아하는 저의 예술이 먼 곳에 심어지고 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상태에서 성장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저는 고요와 평화의 상태에서 지내야 만합니다. 사람들이 ‘고갱은 끝났어. 그가 보여줄 것이란 더 이상 없어’라고 말하면서 저의 명예를 훼손하더라도 상관하지 않겠습니다.”(1890.9)

고갱이 타히티로 간 이유 가운데 그의 경제적 어려움이 가장 컸다. 그는 타히티에서는 거의 무일푼으로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1891년 2월 23일 월요일 드루오 호텔에서 작품 서른 점을 경매에 붙여 자금을 마련하기로 하고 한 달반 전부터 언론과 잡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친구들을 동원하여 이 일을 대대적으로 알렸다. 고갱의 친구 모리스가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로 하여금 미술평론가 옥타브 미르보에게 고갱의 작품에 호감을 주는 글을 청탁했다. 미르보의 글이 전시회가 열리기 한 주 전 1891년 2월 16일 <에코 드 파리>에 발표되었고, 사흘 후 일간지 <르 피가로>에 장문의 글이 기고되었으며, 경매 카탈로그에도 기재되었다. 미르보는 고갱을 “화가, 시인, 사도, 악마”라고 적으면서 회화의 그리스도라고 추켜세웠다. 미르보는 잉카의 후예인 고갱의 작품에서 야만적 아름다움과 모호한 상징주의의 요소가 발견되며 절대적인 고립을 위해 마르티니크로 간 적이 있는 고갱은 이제 자신의 꿈의 세계에 좀더 근접한 남태평양의 타히티로 가는 것이라고 하면서 어디를 가든지 그의 여정에 관심을 갖는다고 했다. 고갱은 미르보의 글에 대단히 만족해하며 그에게 직접 감사를 표했다.

시인이며 미술평론가 알베르 오리에도 고갱에 관한 글을 발표했다. 오리에도 고갱을 회화에 있어서 새로운 상징주의를 개척한 “축복받고 영감을 가진 예언자”라고 극찬하면서 회화에서의 상징주의 선구자라고 소개했다. 이렇게 자신의 명성을 쌓은 고갱은 정부 공무원과 사회적으로 지명도가 있는 인사들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을 도와달라고 청했는데, 그가 편지를 보낸 인사들 중에는 공화당 대변인이자 예술부 장관 안토냉 프루스트와 철학자이며 역사가 에르네스트 르낭도 포함되었다. 고갱은 프루스트에게 ‘타히티에 대한 정부 후원 미션’을 신청했으며 정치인으로 훗날 국무총리가 된 조르주 클레망소는 “타히티의 풍경과 풍물을 그리고 연구”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받게 해주었다. 고갱은 예술원으로부터 마르세유에서 타히티행 배표를 얻을 수 있었고, 식민지 책임자에게 보내는 소개장도 갖게 되었다.

고갱은 1891년 4월 1일 마르세유에서 배를 타고 타히티로 향했다. 그가 탄 배가 누메아에서 일주일 정박하고 타히티에 도착한 것은 6월 9일이었다. 타히티는 남태평양 중부,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소시에테 제도 가운데 동쪽 윈드워드 제도에서 가장 큰 섬으로 1767년에 발견되어 프랑스 식민지가 된 후 프랑스 관리와 군인이 통치하던 곳이다. 고갱의 표현으로 하면 “신비스러운 것들이 요염한 조화를 이루는 환희와 적막”을 맛볼 수 있는 타히티에서의 생활에 그는 만족해했다. 그는 그곳에서 <바다 근처>를 그렸는데 등을 돌린 동일한 여인이 삽입되어 있어 그가 실재에 상상의 인물을 삽입했음을 보고 또한 이 이미지에 집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1893~94년에 제작한 판화에서도 이 이미지를 삽입했다.

고갱은 1903년 5월 8일 세상을 떠났다. 4월 30일 갑자기 어지러운 경련을 견딜 수 없어 이웃의 도움을 청한 후 밤낮을 구별하지 못한 채 헛소리만 질렀는데 동맥이 터진 것으로 그의 아버지의 사인과 같았다. 그의 유해는 가톨릭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며 묘비가 세워진 것은 20년 후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