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덕과 구복



무속을 중심으로 한 민속의 전통에서는 생사화복이 모두 귀신의 소치라고 인식한 반면 유교의 전통에서는 화복이 인간행위와 의지에서 근원하는 것으로 인식했습니다.
『서경書經』에는 “(하늘은) 인간이 선善하면 온갖 복을 내리고 불선不善하면 온갖 재앙災殃을 내린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는 화복禍福에 대한 유교의 입장이었습니다.
하늘이 화복의 주체로 전제되어 있지만, 인간행위의 선악善惡이 낳은 결과를 반영하는 주체로 제한되고 있습니다.
『성종실록成宗實錄』에 따르면 성종 8년 주계부정 심원深源이 다음과 같이 상소했습니다.
무릇 인간의 화복은 자취自取하는 것이지, 선한 일을 하지도 않으면서 귀신에게 아첨과 기도를 한다고 해서 복을 얻은 자는 아직 있지 않았으며, 악한 일을 하지도 않으면서 정도를 지킨다고 해서 화를 얻는 자도 있지 아니하였습니다.

화복의 근원을 인간의 자취自取로 인식한 유교는 인간의 자율적 행위와 의지에 대해 체계적인 사색을 주도한 엘리트의 전통에 의해 강화된 반면 화복의 근원을 귀신으로 돌리는 민속종교는 인간의 삶을 결정짓는 인간외적인 힘에 의존하는 대중의 숙명론적 전통에 의해 강화되었습니다.
민속종교의 전통에서는 화복의 근원이 되는 귀신을 의례적으로 달래고 위로할 줄 아는 무巫의 의례에 좌우된다고 인식했습니다.
즉 생사화복生死禍福이 무巫에 의해 좌우된다는 사고가 그것입니다.
귀신에게서 비롯된 화복은 귀신과 무巫를 매개하는 무속의례를 통해 구복求福의 효과를 드러냈습니다.
유교는 이런 민속의 전통을 음사로 규정하고 오로지 인간 자신의 도덕적인 자각과 행동 그리고 그에 대한 하늘의 응답을 강조했습니다.
『중종실록中宗實錄』에 따르면 중종 때 홍문관弘文館 부제학 유세린柳世麟의 상소에 다음의 내용이 있습니다.
음사淫祀를 없애는 것입니다. 수복壽福은 하늘에 달려 있으니 부처에게 구한다고 해서 얻을 수 없습니다. 재앙은 나에게 달려 있으니 무巫를 섬긴다고 하여 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유세린은 화복은 기도와 기영의례祈穰儀禮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취自取의 실현實現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유교의 입장에서 자취를 실현하는 구체적인 실천은 수덕修德에 있었습니다.
자취가 화복의 근원에 대한 설명이라면 수덕은 재앙의 극복논리였습니다.
화복에 대한 상반된 이해와 대처가 한국 종교문화에 양면적으로 존재하는 도덕적 경건주의pietism와 의례지상주의ritualism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유교는 자연현상과 윤리의식을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전통을 좇아 자연현상의 이상적인 징후를 왕을 비롯한 유교 엘리트의 결여된 윤리의식의 반영으로 간주했으므로 조선조 유학자들은 재앙에 즈음하여 빈번한 시무상소를 올리면서 단박에 재앙을 해소할 수 있는 묘책보다는 통치자의 실덕失德에 대한 경고와 복덕復德의 권장을 강조했습니다.
사회전체를 위협하는 자연현상 속에 나타나는 천변재이天變災異에 직면한 왕은, 먼저 덕을 닦고(수덕修德), 그런 뒤 정사를 다듬고(수정修政), 그 다음으로 구제책을 강구하는(수구修救) 가치체계를 실현했습니다.
수덕-수정-수구로 이어지는 실천원리는 수기修己-치인治人의 기본이념을 종교의례에 적용한 것입니다.

유교의례는 근본에 보답하고 처음으로 돌아간다는 보본반시報本反始의 표현에서 드러나듯 신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인간의 성실한 의무이행을 목표로 하는 경건주의 태도를 내포해야만 했습니다.
유교의 의례경건주의는 대가를 기대하기보다는 “밖으로는 제물을 다하고, 안으로는 성의를 다하는 것을 의례에 임하는 마음의 자세”로 수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민속의례의 전통에서는 구복求福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초월적 영혼이나 신을 위무慰撫하기도 했으나 때에 따라서는 이들을 위협하고 압박하는 강요의례coercive ritual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조상의 영혼을 효孝의 핵심적인 대상으로 여겼던 유자의 입장에서 조상신을 압박하고 조정하는 무속의례의 세태는 음사 중의 음사였던 것입니다.
『중종실록中宗實錄』에 다음의 내용이 있습니다.
지금 성인의 법을 제쳐두고 야만스런 풍속의 그릇됨을 빌어, 법복法服을 차리고 호위護衛를 삼엄하게 하며, 광대廣大가 돌아다니고 무격巫覡이 희롱戱弄하면서 기은祈恩이라 하니 이는 어떤 제사입니까? 힘차게 북을 치면서 하늘에 있는 선조의 영혼을 잡아다가 제멋대로 희롱하니 실로 효성스런 아들과 인자한 손자가 차마 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조상뿐만 아니라 무巫가 용신龍神을 자극하고 고무시키며 거행한 고무토용鼓舞土龍의 기우의례祈雨儀禮나 신에게 강우降雨를 강요하며 무巫를 햇볕에 폭로시켰던 폭무의례暴巫儀禮는 신을 기만하고 강요하는 신성모독 행위로 간주되었습니다.
그 밖에도 토룡에 채찍을 가하는 편룡기우鞭龍祈雨, 용신을 상징하는 도마뱀에 주문과 소음을 동원하여 압박했던 석척기우蜥蜴祈雨, 화룡을 투기하거나 방치하는 화룡기우畵龍祈雨는 유교의 경건주의 태도에 의해 비윤리적非倫理的인 종교문화로 인식되었습니다.
급기야 조선후기에 이르면 용신을 압박하고 자극하는 기우제룡祈雨祭龍의 강요의례가 국행의례에서 배제되고 소거되기에 이르지만, 대중의 전통에서는 흥분과 열정 속에서 용신을 자극하고 압박하는 용부림이 계속되었으며, 무巫는 그런 용부림을 주도하는 용부림꾼으로 주목받았습니다.
유교 엘리트의 의례경건주의와 대중의 감성적 의례지상주의는 유교와 민속종교의 의례적인 태도와 문화적 지향의 갈림길이었고, 나아가 한국 종교문화의 성격을 좌우하는 두 양면으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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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설화와 선계


도교道敎가 한반도에 전해진 것은 삼국시대였습니다.
초기도교인 태평도太平道는 중국의 민간신앙 요소를 흡수, 융합한 것으로 중국인의 삶과 의식구조 전반에 밀접하게 뿌리박으며 전승되었습니다.
태평도는 중국 후한後漢 말기에 장각張角이 창시한 정치적 색채가 강한 민간종교 혹은 그 결사였습니다. 주문에 의해 병을 다스린다고 하여 수십만의 신자를 모아 황건의 난을 일으켰는데, 중국 후한 말기에 장릉張陵이 창시한 질병의 치료를 중심으로 하는 교법敎法 혹은 그런 교단으로 병을 고치는 대가로 쌀 다섯 말을 받았으므로 칭해진 오두미도五斗米道와 함께 도교의 원류를 이룹니다.
도교가 전래되기 이전에 한반도에는 산악신앙山岳信仰, 중국에 널리 퍼졌던 도교의 기원이 되는 민간신앙으로 신선을 믿고 장생불사하는 곳으로 승천하기를 원해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의 삼신산三神山과 계급 선인의 전설인 신선설神仙說 그리고 각종 방사方士가 행하는 신선의 술법인 방술方術이 있었고, 도교가 전해된 뒤 두 가지가 혼합되었습니다.
도교는 불교, 유교와는 달리 승단이나 유림과 같이 뚜렷한 세력을 형성하지 못했습니다.
고려시대에서 조선 중기에 이르는 동안 도교 제사의식을 담당하는 국가기관이 설치되기도 했으며 은둔적 인사들 사이에 도교적 정체감을 지닌 인물이 다수 배출되었으나 불교와 유교에 비해 사회적 영향력은 미약했습니다.

도교교단이 성립되지 못한 관계로 도교 자체의 독자적 형태로 존재하기보다는  민간신앙이나 불교, 유교와 혼합된 형태로 남게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동학東學, 증산 등 신종교에 도교적 요소가 상당 부분 남아있습니다.

도교적 현상의 중요한 요소는 신선神仙을 동경憧憬하고 선계仙界에 살고 싶어 하는 갈망渴望입니다.
신선은 이상적인 인간상입니다.
신선설화의 요소는 고구려 벽화에서 발견되는데, 국내성의 장천長川 1호분에 백라관白羅冠(왕만이 쓰는 흰 비단 볏)에 현포玄袍를 입고 백학을 타고 하늘을 나는 신선이 있습니다.
그 맞은편에는 용龍의 등에 올라타 악기를 연주하는 신선도 보입니다.
이는 중국에서 도교가 전래되기 이전부터 한반도에 신선설화가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그 후 중국에서 체계화된 신선사상이 신라 말 입당유학생들을 통해 전래되어 한반도의 고유한 신선사상과 융합되었습니다.
고려시대의 많은 문인들의 문학작품에서 신선이나 선계에 대한 동경이 발견되어 상당히 보편화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로 접어들어서는 일부 은둔자隱遁者들 사이에 도교의 유파인 단학파丹學派가 형성되어 신선에 이르기 위한 수련에 침잠했고 많은 지식인들도 선인仙人을 예찬禮讚하고 동경했습니다.
단학파의 개조開祖는 김시습金時習입니다.

신선에 관한 설화는 구비문학과 민간설화에도 광범하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조화력을 가진 신선이나 도사들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민간에도 널리 확산되었습니다.
무속신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천상선녀, 신선도사 등의 호칭은 내포되는 의미가 어떠하든 신선설화가 민간신앙 속에 통속화된 예입니다.
중국에서 팔선八仙이 광범하게 신앙되는 것과는 달리 한반도에서는 신선으로 믿어진 국조 단군을 제외하고는 특정한 신선에 대한 믿음이 일반화되지 않았습니다.

신선에 대한 믿음은 선계동경으로 연결됩니다.
이는 도교적 이상사회에 대한 갈망입니다.
이런 동경의식은 조선 후기 성리학의 지배질서가 한계를 나타내면서 널리 유포되었습니다.
후에는 풍수도참風水圖讖과 결합되어 난을 피할 수 있는 곳을 찾는 승지사상勝地思想, 혹은 남조선南朝鮮 사상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조선 중기 이후 민간에 성행했던 국가운명, 생민존망生民存亡에 관한 예언서, 신앙서로 조선 중기 이후 백성들 속에 유포된 나라의 운명과 백성의 앞날에 대한 예언서인 『정감록鄭鑑錄』에서 발견되는 난리에 피하기 좋고 가난과 전염병이 미치지 않는 땅을 예언하는 십승지사상十勝地思想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미래의 일에 대한 주술적 예언을 기록한 책인 참서讖書의 하나인 『정감록』은 여러 비기秘記를 모은 것으로 참위설讖緯說,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 도교 사상 등이 혼합되어 이뤄졌습니다.
참위설의 연원은 예언서로 알려진 하도낙서河圖洛書에 두고 있으며,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에 바탕을 두고 일식, 월식, 지진 등의 천지이변이나 은어隱語에 의해 인간사회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예언합니다.
내용은 조선의 조상이라는 이심李沁과 조선 멸망 후 일어설 정씨鄭氏의 조상이라는 정감鄭鑑이 금강산에서 마주앉아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엮어져 있는데, 조선 이후의 흥망대세興亡大勢를 예언하여 이씨의 한양 도읍 몇 백 년 다음에는 정씨의 계룡산 도읍 몇 백 년이 있고, 다음은 조씨趙氏의 가야산 도읍 몇 백 년, 그 다음은 범씨范氏의 완산 몇 백 년과 왕씨王氏의 재차 송악(개성) 등을 논하고, 그 중간에 언제 무슨 재난과 화변禍變이 있어 세태와 민심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차례로 예언하고 있습니다.
비록 허무맹랑한 도참설, 풍수설에서 비롯된 예언이라 하지만 오랜 왕정에 시달리며 조정에 대해 실망을 느끼고 있던 민중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했습니다.

선계仙界에 대한 동경은 근대에 민중의 염원을 안고 출현한 동학사상東學思想 등의 신종교에서 두드러지는데 지상천국, 혹은 지상선경의 도래를 믿고 그 실현을 갈망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것들에서 발견된 이상사회의 성격은 유교적인 도덕적 이상사회나 불교적 미륵세계와도 중첩되지만 계급차별과 모든 한이 소멸되면서 건강, 장수하는 태평세계의 모습은 주로 선계의 이미지가 주류를 이룹니다.

신선과 선계에 대한 동경은 「안빈낙도가安貧樂道歌」, 「유산가遊山歌」, 「태평가太平歌」 등의 민요에도 나타납니다.
물론 이들에 관한 내용만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고 불교 및 무속신앙과 혼합된 형태로 존재합니다.
이 속에는 옥황상제玉皇上帝, 칠성七星, 성황城隍 등의 도교적 신격神格뿐 아니라 신선에 대한 동경, 선계동경 등이 포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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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교의 제신에 대한 신앙



도교道敎의 교단敎團이 형성되지 않은 만큼 도교의 제신諸神이 오히려 무속 등의 민간신앙에 수용되었습니다.
도교의 제신이 한반도에 전승된 것은 고구려 말 중국의 오두미도五斗米道의 전승으로 소급할 수 있습니다.
그때 도교의 최고신인 원시천존元始天尊에 대한 신앙도 함께 전래되었습니다.
원시천존은 천지가 생겨나기 이전에 자연의 기운을 받고 태어났으며 영원불멸의 존재입니다.
그러나 원시천존의 신앙은 일반화되지 못했으며, 당시 도교의식에 따라 산천에 제사를 드렸다는 기록으로 보아 중국 도교에서 형성된 산신山神, 수신水神에 대한 신앙이 함께 전래되었습니다.

도교의 제신에 대한 신앙이 한반도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고려시대로 왕실에서 도교식 제사를 올리면서부터였습니다.
이때 테일太一, 칠성七星, 노인성老人星 등 다양한 신격神格이 소개되었습니다.
조선조에 접어들어서도 소격서昭格署에서 도교식 제초의식齌醮儀式을 다수 거행했으며, 이때 찾아볼 수 있는 신격은 옥황상제玉皇上帝, 태상노군太上老君, 보화천존普化天尊, 칠성七星, 북극성北極星 등입니다.
옥황상제는 도가에서 하느님을 이르는 말입니다.
태상노군은 도가에서 노자老子를 하느님과 동일시한 것입니다.
보화천존은 도가에서 우레인 뇌성雷聲을 하느님과 동일시한 것입니다.
중기 이후 소격서昭格署가 혁파되면서 이들의 신격이 무속 등 민간신앙에 흡수된 것으로 보입니다.
소격서는 조선시대에 하늘과 땅, 별에 지내는 도교의 초제醮祭를 맡아보던 관아로 세조 12년(1466년) 소격전을 고친 것이며, 임진왜란 이후 완전히 폐지되었고, 그 제단은 서울 삼청동에 있었습니다.
도교가 무교에 흡수되었기 때문에 따로 도교가 형성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옥황상제란 호칭은 중국 도교에서 주로 송대宋代 이후 널리 유포流布된 명칭으로 중국 고대의 제帝, 혹은 상제上帝에서 유래했습니다.
옥황상제란 엄밀히 말해 도교의 최고신이라고 말할 수 없으나 인간의 길흉화복을 관장한다는 점에서 대중성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경우 옥황상제를 거의 최고신과 같은 위치로 숭배했습니다.

옥황상제 외에 민간신앙에서 흔히 찾을 수 있는 도교의 신격은 성황城隍, 칠성七星, 조왕竈王 세 가지입니다.
사자死者의 혼령은 그의 판결에 따라 신에게 자신의 선행과 악행을 보고해야 한다고 알려졌기 때문에 믿음이 깊은 사람들은 성황묘城隍廟에 제물을 바치면 후히 보답을 받는다고 믿었습니다.
성황숭배 의식이 중국 북제北齊 때로부터 시작되어 송대宋代 이후 널리 퍼진 까닭은 중국의 조정에서 그것을 장려했기 때문이며 1382년에 조정은 성황묘의 관리를 맡으면서 수호신에게 제물을 바치라고 명령했습니다.
성황은 선사시대에 요堯 임금이 제사지냈다는 팔사八蛇 가운데 일곱 번째 신神인 수용水庸과 동일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지난 날 선정을 편 지방관이 죽으면 그를 신격화하여 성황으로 삼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한국인도 성황을 모셨는데 서낭이라고도 했습니다.
한반도의 서낭은 본래의 마을 수호신 신격이 여타의 신격과 결합되어 복합적인 신앙대상으로 변화된 신격입니다.
서낭은 마을 수호신, 풍요신, 조상숭배신앙을 함께 다루는 데 있어 중요한 신앙형태입니다.
성황신앙이 한반도에 들어온 것은 고려 문종文宗 때입니다.

칠성七星은 최고신을 대신해 기우祈雨의 대상신 혹은 인간의 장수와 재물을 관장하는 신으로 다양하게 신앙됩니다.
최고신은 침묵하는데 북두칠성이 구체적인 명령을 실천하여 상서로움과 재앙을 담당한다는 믿음, 즉 사명신司命神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으로 믿어져왔습니다.
도교에서 천체天體를 신앙하는 것이 많으며, 특히 북두칠성을 신앙하는 칠성신앙이 한반도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고려시대 조정에서 태일太一을 지낼 때 칠성신을 제사지냈고 무속에서도 칠성신을 모셨습니다.
기우에서 칠성신을 모신 것은 고려, 조선을 통해서 오랫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이런 궁중의례宮中儀禮는 민간에게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민간신앙뿐 아니라 불교신앙과도 융화되어 불교 사찰 가운데는 많은 칠성각七星閣이 남아있어 신앙적 기능을 합니다.
칠성은 명命을 길게 이어준다는 장수신長壽神으로 신앙되어 무속에서도 굿할 때 칠성굿이 굿석席으로 들어가고 한반도 어디서나 민간民間에서 기자祈子와 육아育兒를 위한 치성致誠에도 칠성신에게 제를 올립니다.

조왕竈王은 부엌을 관장하는 가신家神입니다.
화신火神으로서 조왕각시, 조왕대신, 부뚜막신이라고도 합니다.
부인네들이 부엌을 늘 청결하게 유지하고 아궁이에서 불을 다룰 때 부정한 말을 하지 않으며 부뚜막에 걸터앉거나 다리를 올려놓지 않는 등의 풍습은 조왕신앙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한국인은 불씨를 신성하게 여겨 불씨를 꺼뜨리지 않으려고 각별히 치성을 드렸으며 부뚜막 벽에 대臺를 만들어 그 위에 물을 담은 조왕보시기를 두어 조왕신을 모시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조왕신앙은 불교에서도 적극적으로 수용되었습니다.
불교에서 조왕은 호법선신護法善神 중 하나로 인사人事를 관할하여 사람이 지은 업業의 선악을 가려 화복禍福을 주는 신으로 사찰의 조왕단에 모셔졌습니다.

성황城隍, 칠성七星, 조왕竈王 세 가지 신神의 신앙이 한반도 어디를 가나 흔히 발견되어 도교가 한국인의 정신적 기층基層 속에 얼마나 깊이 자리 잡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성황당(서낭당)은 어디를 가나 마을 입구 혹은 고개 마루 길옆에 자리 잡고 있는 보편적인 신당신앙神堂信仰이며, 칠성七星 역시 민간에서 누구나 수명장수신壽命長壽神으로 신앙하는 신이고, 조왕 또한 어디를 가나 민가의 부엌 부뚜막 뒤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주부들의 소망을 성취시켜주는 신이라고 믿어, 주부들이 매일 아침 정화수井華水(첫새벽에 길은 맑고 정한 우물물)를 바치며 소망을 빌었습니다.

도교적 신앙의 특징은 일신一神과 다신多神이 복합된 가운데 최고신보다는 많은 신들이 신앙된 점입니다.
오히려 최고신은 논리적 전제로 요청된 느낌이 강합니다.
다만 옥황상제의 신앙이 널리 유포된 것은 전통적 경천敬天 신앙의 영향으로 보입니다.
인간 가운데 뛰어난 인물들이 죽어서 신으로 받들어지는 과정 또한 도교적 신론의 체계와 유사합니다.
도교적 신론에서는 수련과정을 거쳐 도달한 신선과 높은 위계의 신들 사이의 간격이 모호하며 서로 동일시하는 경향도 보이기 때문입니다.
관운장과 같이 역사적으로 뛰어난 인물이 도교적 신에 포함되는 것도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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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도교의 적덕사상



민간 도교의 흐름 가운데 조선 중엽부터 민간의 도덕관념에 영향을 미친 것은 권선서勸善書를 중심으로 한 소박한 적덕신앙積德信仰이었습니다.
권선서(혹은 선서라고 약칭됨)란 악행을 금하고 선행을 권장하는 내용을 담은 고교 경전을 말합니다.
권선서류의 도교 경전이 한반도에 전래된 것은 조선 초기 태종太宗(1417년경)입니다.
조야朝野에 널리 유통된 『명심보감明心寶鑑』도 유교적 윤리가 포함되어 있지만 도교적 성격이 강하게 함축된 도교 선서의 일종입니다.
『명심보감』은 조선시대에 어린이들의 인격수양을 위한 한문 교양서로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에 명신名臣 추적秋適이 중국 고전에서 보배로운 글이나 말 163항목을 가려서 계선繼善, 천명天命, 권학勸學, 치가治家 따위의 부문으로 나누어 배열 편집한 책입니다.
그 후 여러 종류의 권선서를 종합한 『경신록敬信錄』의 언해본이 1796년 경기도 양주군에 있는 불엄사佛嚴寺에서 간행되었습니다.
언해본이 간행되었음은 그 이전에 한문원전이 이미 유통된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18세기 말에는 상당한 정도로 유포되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이어 19세기에 많은 종류의 언해본이 발간되었습니다.

선서류가 중국에서 언제 성립되었는가는 분명히 알기 어려우나 남송南宋 중엽 무렵에 『태상감응편太上感應編』이 성립된 것이 효시로 보입니다.
이 책은 태상노군太上老君(노자老子)이 선악행위에 따른 복과 화의 보응에 관해 밝히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감응편이라 부르는 것은 인간의 행위에 대한 보응이 몸에 그림자가 비치듯 감응이 엄밀하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태상감응편』에서는 그런 전제하에 적극적으로는 선행의 종류가 충, 효, 신 등의 유교적 덕목뿐만 아니라 자비, 보시 등 불교적 덕목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선행 혹은 악행이 하나하나 각 개인의 수명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는 데서 도교적 특징이 드러납니다.
천지에는 인간의 행위를 주관하는 신이 있어 죄의 대소에 따라 인간의 수명을 감소시키는데, 그 신에는 삼태三台, 북두칠성北斗七星 등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큰 죄에는 300일의 수명, 작은 죄에는 3일의 수명을 감소시킨다는 것입니다.
이어『태상감응편』에서는 천선天仙이 되려면 1300선이, 지선地仙이 되려면 300선이 필요하다고 말함으로써 선행의 축적이 신선에 이르는 필요조건임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어떤 선행이 1선에 해당하는가가 문제입니다.

이를 보충하기 위해 각 선행과 악행에 점수를 배당하여 제시한 것이『공과격功過格』입니다.
이 기준에 의해 매일매일 선행과 악행의 점수를 계산함으로써 공과를 측정하자는 것입니다.
한편 『음즐문』은 인간의 모든 운명이 문창제군文昌帝君의 보이지 않는 관장 아래 있으므로 꾸준히 선행을 쌓으면 복록을 받는다는 내용을 싣고 있습니다.
그러나 『음즐문』에서는 선행실천과 신선사상을 직결시키지는 않습니다.
문창제군은 황제의 아들 휘揮로 주周나라 때부터 원元나라 때까지(BC1100-1368) 97차례나 세상에 태어났으며 학문에 뜻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많은 도움을 주었다. 명明나라 시대(1368-1644)에 대부분의 교육기관에서 문창제군을 모시는 사당을 건립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 여러 종류의 선서에도 『태상감응편』, 『공과격』,  『음즐문』 등 삼대선서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관성제군신앙 계통의 선서류도 적지 않습니다.
19세기 말에 이르면 중국에서 간행된 선서의 보급에 그치지 않고 독자적인 선서가 형성되는데, 『각세신편입감覺世新編入鑑』, 『공과신격功過神格』이 그것입니다.
선서류의 내용을 보면 일상생활에 관한 구체적 조목을 도덕적으로 평가하면서 덕의 실천을 권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인의충효仁義忠孝 등의 덕목을 비롯해 함부로 나뭇가지를 꺾지 말라는 등 생명에 대한 사랑이라든지 북쪽을 향해 소리 지르거나 함부로 소변을 보지 말라는 등 민간신앙에 관련된 금기도 포함하고 있으며, 『공과신격』에서는 우물을 헐거나 더럽히지 말 것, 거름이나 쓰레기를 버리지 말 것, 오물을 우물에 던지지 말 것 등 구체적인 실천요목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내용은 『명심보감』과 함께 공을 쌓아야 건강장수하고 복 받는다는 믿음을 형성하여 민간의 도덕관념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난해하지 않은 내용의 이런 현세적이고도 실천가능한 권선서는 대중의 환영을 받아 조선 후기 민간도교의 새로운 국면을 열었습니다.

다양한 도교 현상의 공통된 테마는 신선에 이르러 선계에서 소요자재逍遙自在하는 것입니다.
이런 신선과 선계에 대한 동경은 중국에서 도교가 전래되기 이전부터 한국인의 마음속에 깃들어 있다가 중국에서 신선사상이 전래된 뒤 융합되었습니다.
신선설화는 지식층의 문학작품뿐 아니라 민간의 설화에 중요한 소재로 등장했고, 불로장생하고 조화력을 갖춘 신선이나 도사 그리고 모든 차별과 원한이 해소된 평등한 선계는 민중이 지향하는 이상사회의 모델로 작용했습니다.
도교는 생명력이 충일한 신선에 이르기 위해 다양한 양생법을 개발해왔습니다.
도교적 양생법은 한의학과 표리를 이루며 건강을 지키기 위한 지혜의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이는 일상적 기거진퇴의 요법과, 섭생, 성생활, 각종 도인법 등이 구체적 내용을 이루며 각종 민간요법도 직접, 간접으로 도교적 양생법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도교가 민간의 삶에 영향을 끼친 분야로서 도교적 방술도 중요합니다.
이는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의 유기적 관련성을 전제로 한 사유방식에 바탕을 둔 것으로 천문, 풍수, 명리 등이 그 중요한 내용을 이룹니다.
이들은 도교적 술수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무속과 더불어 민간신앙의 큰 줄기를 형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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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과 신주



사당祠堂은 신주神主가 모셔져 있는 곳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3년 동안 상청喪廳에서 아침, 저녁 상식上食을 받지만, 대상(3년상)이 지나면 상청을 없애고 신주를 사당으로 모시게 됩니다.
신주는 4대 동안 모시게 되며, 5대째가 되면 혼잭魂帛을 무덤 앞에 묻는 매혼埋魂한다 하여 묘소 옆에 묻습니다.
따라서 사당은 조상신의 봉안처이며, 자손들은 가정의 사소한 일이라도 반드시 사당에 고했으며, 출입 때에도 사당에 고했습니다.
전통사회에서는 관례와 혼례 때 사당에 고했고, 자손이 과거에 급제하면 사당에서 조상의 음덕을 기리며 고사를 지냈습니다.

사당은 가묘家廟라고도 하며, 왕실의 것은 종묘宗廟라고 합니다.
한반도의 사당제도는 삼국시대부터 왕실에서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 남아있는 개인의 사당은 주자가례를 시행한 조선시대부터 일반화되기 시작한 것을 보입니다.
조선 초기부터 사대부는 가묘를 세우고 선대를 제사지내도록 하고 있으나,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다고 실록에 적혀 있습니다.
태종 6년(1406) 대사헌大司憲 허응이 올린 시무 7조 가운데 가묘문제에 관한 내용에도 잘 나타납니다.
... 그 여섯째는, 『경제육전經濟六典』(한국 최초의 법전)의 한 조목에, ‘공경대부公卿大夫에서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가묘家廟를 세워 때때로 제사지낸다. 어기는 자는 불효不孝로 논죄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가묘를 세운 자가 백 사람에 한두 사람도 안 되고, 나라의 법령을 따르지 아니하고도 예사로이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 조금도 사람의 자식 된 뜻이 없습니다. 원하건대 중외中外에 가묘를 세워야 할 자들로 하여금 금년을 기한으로 독촉하여 세우게 하고, 만일 따르지 아니하는 자가 있거든 경중京中(서울 안)에서는 본부本府에서 외방에서는 감사監司가 자세히 살펴 논죄하게 하소서. ...

임금이 의정부에 내려 의논하여 아뢰게 하니 의정부에서 의결했습니다.
... 제6조에 가묘를 논한 일은 만약 금년으로 기한하면, 범법자犯法者가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빌건대 오는 정해년 12월로 기한할 것입니다. 그중에 3품 이하로서 집이 가난하고 터가 좁아서 가묘를 세울 수 없는 자에게는, 『육전六典』에 좇아 정결한 방 한 칸을 골라 때때로 제사지내도록 허락하소서. ...

하니 그대로 따랐습니다. 또 세종실록 9년 2월의 기록에는 다음의 것이 있습니다.

예조에서 계했습니다.
대소인원大小人員이 가묘제도는 여러 번 교지敎旨를 받아 법을 마련했으나, 근년 이래로 고찰이 없으므로 인해 서울과 지방에서 가묘를 세우지 않고 신주를 만들지 않는 사람이 자못 많이 있습니다. 청하건대 거듭 밝혀서 2품 이상은 오는 누신년으로, 6품 이상은 오는 경술년으로, 9품 이상은 오는 계축년으로 기한을 삼아 모두 가묘를 세우게 하고, 그 주묘主廟의 가사家舍는 주제主祭하는 자손에게 전하고 다른 사람에게 주지 말도록 할 것이며, 전과 같이 가묘를 세우지 않고 신주를 만들지 않는 사람은, 서울에서는 사헌부가, 외방外方에서는 감사가 일정한 때가 없이 고찰하여 풍속을 바로잡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습니다.

조선 초기 조정에서 강제적으로 가묘의 설립과 신주의 봉안을 권장했으며, 중기 이후에야 비로소 4대 봉사奉祀를 위한 사당제도가 정착되었습니다.
사당의 건립도 품관品官 이상만이 별도로 설치할 수 있고, 서인은 침실에 마련해야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양반계층을 중심으로 보편화되었을 뿐 서민들은 시행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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