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석신



제석신帝釋神은 불교 풍습에서 유래했습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가 인용한 「고기古記」의 ‘환국桓國’이라는 말에 대해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선사一然禪師가 ‘제석을 말한다’고 주를 달았습니다.
이 글자를 근본으로 여기면서 잘못이 잘못을 낳아, 마침내 환국桓國의 신시神市라는 지명地名이 천왕인 제석帝釋으로 탈바꿈한 것입니다.
무당의 부채에 세 부처가 그려져 있는데, 삼불제석三佛帝釋이라고 합니다.
제석신을 받드는 것은 성주신, 터주신을 받드는 것과 그 방법 또한 다릅니다.
쌀을 흰 항아리, 즉 지석단지 혹은 제석항아리에 담아 다락방에 안치했다가, 해마다 가을에 곡식이 익으면 햅쌀로 바꾸고, 헌 쌀로는 백설기를 쪄서 나물 반찬, 술과 함께 제석신에게 바칩니다.
무녀가 노래로 흥을 돋우는데, 이를 제석거리라 합니다.
제석거리는 큰 굿의 한 부분으로 치러지는데, 무녀는 흰 고깔을 쓰고, 장삼과 금란가사를 입으며 염주를 걸고 진행합니다.
제물로 고기류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렇듯 제석거리는 불교의 색채가 강하므로 무속巫俗에서도 제석신이 불교에서 유래한 신임을 인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제석신의 유래를 설명하는 서사무가인 「제석본풀이」가 가창歌唱됩니다.
거리란 노랫가락이란 뜻입니다.
제석을 곡식의 주재 신으로 여기는 것은 불교 민속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불교 사찰에서는 섣달 그믐날 사찰 사람들이 각자 재미를 가지고 모두 곳간으로 와서 제석신의 위패位牌를 만들어 안치安置합니다.
재미齋米에서 재齋란 부처님에 대한 공양, 성대한 불공 등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나, 여기서는 식사를 뜻합니다.
예를 들면 아침식사를 개재開齋, 식당을 재당齋堂이라 하는 것도 같은 용례用例입니다.

위패란 석제환인위釋提桓因位를 말합니다.
승려僧侶들은 여기에 세 번 절하고 쌀을 곡간에 바칩니다.
정월 초하루부터 시작해서 사찰의 별좌別坐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재(쌀을 가져다가 밥을 지을 때)를 할 때면 먼저 석제환인의 위패에 세 번 절을 한 뒤 쌀을 가져다가 밥을 짓습니다.
별좌別坐란 재에 사용하는 쌀을 관장하는 승려, 곧 미두米頭입니다.
불교에서도 제석帝釋을 주곡신主穀神으로 여깁니다.
사찰 주방에서 제석신의 위패를 모시는 것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밥을 먹다가 제석신이 흘린 밥풀 앞에 와서 주워 먹을 때까지 눈물을 흘립니다.
이는 석제환인이란 명칭이 단군의 할아버지와 서로 혼동되어 있고, 단군은 본래 곡식을 주재主宰하는 자였으므로 변하여 제석신이 된 것입니다.

업왕業王이란 재물의 신을 말합니다.
세속에서 업양業樣이라고도 하는데, 양은 곧 왕王이 변한 것입니다.
세속에서 시왕세계十王世界를 십양세계十樣世界라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세속에서 업왕으로 받드는 것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인업人業(속칭 인업은 그 모습이 작은 갓난아기와 같음), 사업蛇業, 유업鼬業(유鼬는 속칭 족제비)입니다.
이 밖에도 두꺼비 업도 있습니다.

『신단실기神檀實記』 「삼신상제三神上帝」에 따르면 집안 내에 땅을 가려 단을 쌓고, 토기에 벼를 담아 단 위에 둔 다음, 짚을 엮어 지붕처럼 덮은 것을 부루단지扶婁壇地 혹은 업주가리業主嘉利라 합니다.
우리 풍속에 쌀을 쌓아둔 것을 노적가리라 합니다.
이는 재산을 관장하는 신입니다.
단군의 아들 부루扶婁가 현명하고 복이 많았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재물의 신으로 받들었습니다.

이능화는 『조선무속고』에서 업주가리業主嘉利는 그 뜻이 보통 때 보던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서 곡물을 쌓은 곳에 뱀이 서려 있거나 족제비가 사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으므로, 사람들이 이를 곡식 지키는 신으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세상에서는 부유하면서도 인색한 사람 수전노守錢奴를 일컬어 “이 사람이 죽으면 꼭 뱀이 되어 재물 창고나 지킬 것이다”라 하는데, 이는 전설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한국에서 신을 섬기는 풍속에 세 가지 계통이 있는데, 고대로부터 전해진 무풍巫風, 도교道敎의 잡귀를 물리치고 재앙을 쫓는 부적符籍과 술법을 부리거나 귀신을 쫓는 주문呪文, 불교의 인과교리因果敎理입니다.
이것들이 혼합되어 풍속을 이루었으므로 오늘날에는 어떤 것이 도교의 설이고, 어떤 것이 불교의 설이며, 어떤 것이 무속의 설인지를 분간하기 심히 어려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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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제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에 걸친 종교의 연구는 종교의 발전단계를 재구성하는 데 초점이 모아졌습니다.
영국의 인류학자 타일러Edward Burnett Tylor(1832-1917)는 애니미즘Animism을 종교의 원초형태로 보고 애니미즘으로부터 사령死靈, 악령惡靈, 정령精靈의 신앙信仰으로 발전하여 다음으로 신의 관념이 생겨 다신교多神敎가 되고 나아가 일신교一神敎로 진화進化했다고 주장합니다.
라틴어 아니마(영혼靈魂)에서 온 애니미즘이란 말은 물신숭배物神崇拜, 영혼신앙靈魂信仰 혹은 만유정령설萬有精靈說이라고도 번역됩니다.
타일러가 『원시문화原始文化』(1871)에서 이 말을 처음 사용했는데, 애니미즘 사고방식은 ‘야만인의 철학’으로서 종교의 기원을 설명하는 동시에 종교의 근본원리가 되었다고 주장한 데서 비롯됩니다.
타일러에 의하면 애니미즘적 사고방식은 꿈과 죽음의 경험에서 추리되어 성립되었습니다.
꿈과 죽음의 경험을 통해 육체와 유리遊離되어 활동하는 원리, 즉 영혼을 상정하게 되었습니다.

지역성이 강한 민속종교民俗宗敎에는 종교처럼 교의敎義를 창제한 특정한 교조敎祖가 없는데, 서낭당(성황당城隍堂)을 예로 들면 고대로부터 그 지역사회가 독자적으로 지켜온 신앙으로 명칭은 지역에 따라 다양합니다.
할아버지당, 할머니당, 혹은 골멕이당, 당제堂祭, 당산제堂山祭, 동제洞祭 등 고유한 명칭名稱이 있습니다.
동제洞祭를 당산제堂山祭, 동신제洞神祭, 대동치성大同致誠, 산제山祭라고도 하며, 마을의 조상신祖上神, 수호신守護神에게 마을사람들의 연중무병年中無病과 평온무사平穩無事를 비는 제사祭祀로 대개 마을 입구에 제단祭壇이나 별도로 사당祠堂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제단은 미리 청결하게 닦고 주변에 황토를 깔아놓으며, 솔가지를 끼운 금줄을 쳐 잡인雜人의 출입出入을 막습니다.
제주祭主는 마을사람 중에서 연로年老하고 상기喪期에 있지 않은 사람으로 합니다.
제주는 일주일 전부터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육류肉類를 먹지 않으며 상인喪人이나 병자病者를 만나지 않습니다.
제삿날은 지방마다 다른데, 보통 제주의 운수運數가 길吉한 날을 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물은 전날 차려놓으며 제삿날 자시子時(밤 11시부터 오전 1시까지)에 동신제문洞神祭文을 읽으면서 제사를 지냅니다.
제사가 끝나면 굿을 하며 제사 음식과 술을 나눠 먹는데, 당산제는 제사와 굿의 이중성격을 띠는 것이 특징입니다.
다른 동네 사람의 참여를 막고 마을사람 전체가 참여해 음복陰伏하는 신인합일적神人合一的인 향연饗宴이라는 데 의의意義가 있습니다.
마을사람 중에서 뽑힌 제관祭官이 주관자主管者 노릇을 하지만 모든 진행을 무당에게 맡기는 경우를 별신굿, 당굿, 도당굿이라고 합니다.

동제洞祭는 특별히 선정된 소수의 제관들이 한밤중에 마을수호신을 모신 당에 가서 음악이나 놀이가 없이 경건하게 지냅니다.
신에게 제물을 바친 뒤 축문祝文을 읽거나 소지所志를 올려 소원을 고한 뒤 잡귀를 풀어먹이고 음복陰伏하는 것으로 제사를 마칩니다.
다음날 낮 시간에 마을주민들이 모두 모인 중에 다시 음복하고 놀이판을 벌이며 마을회의를 엽니다.
그러고는 농악農樂에 맞춰 마을굿을 합니다.
이때 제관祭官과 농악대農樂隊가 함께 움직입니다.
당堂으로 가서 제물祭物을 진설陳設하고 절하며 소원을 비는 것이 동제와 같습니다.
그러나 농악대가 서낭기를 앞세우고 당으로 가는 것이 다르며, 경우에 따라서는 기를 내려 서낭기에 신을 받기도 합니다.
농악대의 상쇠는 제의를 진행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제물을 진설한 뒤 제관들이 절 할 때도 농악장단農樂長短에 맞춰 하게 되며 여러 당堂을 돌아다닐 경우에도 농악대의 음악이 따릅니다.
농악대 마을굿은 떠들썩한 음악과 놀이가 수반되며 참가하는 인원도 동제보다는 많습니다.
굿이 끝나면 한바탕 농악으로 놀이판이 벌이는데, 이때 탈꾼들이 따르기도 합니다.

무당은 대개 외부에서 초빙하나 비용이 만만치 않아 해마다 하지 못합니다.
평소에 동제를 지내다가 몇 년에 한 번 정해진 해에 굿을 하기 때문에 무당굿은 특별한 축제가 됩니다.
무당은 전승되어 내려온 절차를 좇아 여러 신을 모시고 굿을 합니다.
동해안 지역의 서낭굿은 부정굿, 골매기청좌굿, 하회동참굿, 성주굿, 조상굿, 제석굿, 군웅굿, 심청굿, 천왕굿, 손님굿, 제면굿, 꽃놀이굿, 등노래굿, 뱃놀이굿, 거리굿 등으로 진행되며, 이것들 가운데 주민들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끄는 것은 골매기청좌굿 중에 있는 대내림입니다.
부정不淨굿은 본本굿을 하기에 앞서 굿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모든 부정한 일이나 제당祭堂의 불결한 것을 가셔내어 신이 좌정坐定할 수 있는 깨끗하고 신성한 공간으로 정화시키는 의례로 먼저 무당이 부정을 물리는 무가巫歌를 부릅니다.
무가의 내용은 외부에서 들어온 부정과 인간생활에 관계된 부정不淨, 제물祭物에 묻은 부정 등을 물린 뒤 무속巫俗이 신앙하는 신들을 청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어 무당은 바가지에 잿물, 고춧가루나 소금물, 생수를 담아 제당에 골고루 뿌려 물로 깨끗이 씻긴 후 짚단이나 종이에 불을 붙여 불로써 부정을 가셔냅니다.
마지막으로 신칼을 던져 칼끝이 밖으로 나갔는지를 보아 부정을 물린 것을 확인합니다.

부정굿이 끝나면 무당은 당 앞에 서낭대를 세워놓고 너름을 받습니다.
서낭대는 마을수호신의 신체인 것입니다.
주민住民 중에 한 사람이 대를 잡고 있으면 무당이 축원祝願하여 신神을 강림降臨시킵니다.
대가 떨리면 신이 내린 것으로 믿고 주민들은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관해 신의 뜻을 묻습니다.
대잡이는 질문에 대하여 대를 상하, 좌우로 흔들어 신의 뜻을 전합니다.
주민들이 수호신과 직접 대화를 하는 것은 신들린 무당이 굿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당은 스스로 대를 잡거나 신격화되어 공수를 주는 것이 아니라 세습무世襲巫처럼 대를 내리는 역할만 맡으며, 무당은 순수하게 신을 강림시키는 일만 합니다.
이 과정은 농악대 마을굿에서 서낭을 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본격적인 무당굿은 대를 내려 수호신을 모신 후에 시작되며, 여기서부터 무당은 무속이 신앙하는 여러 신들을 모시면서 굿을 하게 됩니다.
세습무世襲巫는 점치고 예언하는 강신무降神巫에 비해 순수한 사제로서 무속의례를 집행합니다.
세습무는 일정한 지역을 자신의 당골판으로 가지고 있어 당골판 내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종교적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의무를 지니며, 대가로 봄, 가을에 곡식과 돈을 받습니다.
이런 사제권은 부계로 세습됩니다.
세습무권에서는 여자만 무당으로 굿을 하고 양중, 화랭이, 사니 등으로 불리는 남자는 악사로서 무악巫樂을 담당하고 진행을 돕습니다.
동해안에서는 남자들이 촌극寸劇과 염불念佛을 하기도 합니다.

농악대굿과 무당굿에서 공통되는 상징은 신기神氣입니다.
농악대의 농기, 동제에 사용되는 대기(혹은 서낭기) 그리고 무당굿의 신대가 같은 성격을 지닙니다.
걸립패의 농기도 걸립을 나가기에 앞서 서낭기에 제사를 올리는 ‘낭’을 받고 걸립하는 내내 조석으로 기 앞에 밥상을 차리는 점과 두레패의 농기 또한 들에 나가 일할 때 반드시 세워두고 음식을 먹기 전에 농기 앞에 술을 붓는 점에서 신기의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을신앙의례는 이처럼 민속적 의례와 무속적 의례가 공통되는 구조를 가진 채 병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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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신제




별신제別神祭라고도 하는 별신굿은 마을 공동으로 마을의 수호신守護神을 제사하는 점에서는 동제洞祭와 유사하지만, 동제는 동민 중에서 제사를 주관하는 데 비해 별신제는 무당巫堂이 주재하는 점에서 다릅니다.
별신제는 동해안 지역 일부와 충남 은산恩山에 한해 전승되고 있습니다.
중요무형문화제 9 은산별신제恩山別神祭는 3년마다 한 번씩 정월이나 2월에 거행합니다.
전설에 따르면 옛날 은산 지방에 전염병이 한창일 때, 마을 노인의 꿈에 장군이 현몽하여 “나는 백제를 지키다 부하와 함께 억울하게 죽은 장군인데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어 비바람에 시달리고 있으니 잘 매장해주면 마을의 병마病魔를 없애주겠다”고 하며 장소를 가리켜주고 사라졌습니다.
노인은 마을사람들과 함께 가리켜준 장소에 가보니 수많은 병사들의 백골白骨이 산재散在했었습니다.
마을사람들은 백골을 잘 매장埋葬하고 원혼冤魂을 위로하기 위해 제사를 지냈더니 전염병이 없어졌으며, 그 은공恩功을 갚기 위해 별신제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은산 마을 뒷산(당산)에는 옛날 백제의 토성을 쌓은 흔적이 남아있으며, 고목이 울창한 숲속에 당집이 있어 그곳에서 은사별신제를 거행합니다.
장군을 제사지내기 때문에 축문祝文에는 중국과 한국의 역대 명장名將들의 이름이 나열羅列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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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



무속巫俗의 역사에 대해서는 고조선의 관할 경계 내에 있던 예맥濊貊에서 농사를 마치고 음력 시월에 행하던 제천의식인 무천舞天이나 부여夫餘에서 추수가 끝난 12월에 행하던 제천의식인 영고迎鼓같은 부족국가시대의 제천의례祭天儀禮에서 유래했다는 견해가 있고, 전라도의 무당巫堂인 당골이 바로 단군檀君의 전통을 이은 무왕巫王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무천舞天은 고려시대에 하늘에 풍년豊年을 빌고 추수秋收를 감사하는 일종의 종교의식으로 동시에 부족의 친목도 꾀했습니다.
춤과 노래로 의식을 행했으며, 부여의 영고迎鼓(12월), 고구려의 동맹東盟(10월)과 그 성격이 유사합니다.
신라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의 경우 차차웅이 곧 무巫를 지칭한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능화李能和(1869-1943, 호는 간정侃亭, 상현尙玄, 무능거사無能居士) 이후 한국의 무속 연구자들은 대부분 불교, 유교 등의 외래 종교가 수입되기 이전의 고대 한국 종교를 오늘날 무속의 원형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역사학자, 민속학자인 이능화는 1922년 이후 15년 동안 『조선사朝鮮史』 편찬사업에 종사하고, 1930년에는 일본인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청구학회靑丘學會에 참여했으며, 1931년에 박승빈, 오세창 등과 함께 계명구락부啓明俱樂部를 조직, 민족계몽 활동을 했습니다.
그는 친일단체 국민총력조선연맹 위원이었습니다.
저서著書로 『조선불교통사』, 『조선신화고』, 『조선상제예속사』, 『조선도교가』, 『조선무속고』 등이 있습니다.
어려서 한학漢學을 배운 이능화는 1887년 이후 서울의 여러 학교에서 영어, 중국어, 프랑스어, 일본어를 익혀 능통能通하게 구사驅使했습니다.
1895년에 농상공부의 주사로 채용되었다가 관립 외국어학교, 관립한성법어학교官立漢城法語學校 등에 재직했습니다.

고구려 제17대 왕 소수림왕小獸林王(?-384, 해미유왕解味留王이라고도 함)이 불교와 도교를 중국으로부터 수입하면서 무속은 지배계층의 지지를 잃기 시작하고 피지배계층, 즉 민중의 신앙으로 일관했습니다.
무속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이규보李奎報(1168-1241)의 『노무편老巫篇』은 12세기에 쓴 것으로 현재까지 전승되는 경기북부 무속신앙의 현장을 가장 충실히 보여줍니다.
이규보는 늙은 무당이 굿하고 공수주의 장면을 생생히 묘사하면서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무당을 경계하려는 의도를 나타냈습니다.
공수주는 강신무降神巫들이 사설私說과 춤으로 신을 받아 스스로 신격화神格化되어 인간에게 내리는 말입니다.
신의 성격에 따라 공수의 내용이 다양하지만 먼저 강림降臨한 신이 누구인지 밝히고 정성이 부족한 인간들에게 섭섭함을 표시한 다음, 이 굿을 받고 모두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으로 마칩니다.
사람들은 두 손을 비비면서 용서를 빌고 복을 청합니다.
무속은 고려시대에 지배계층의 이념과는 상치되는 민중의 신앙이었습니다.
무당이 천민賤民으로 떨어진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그 거리는 더욱 멀어지게 됩니다.

무당을 비롯한 무속신도들 대부분 농민과 어민처럼 노동에 종사한 사람들로 피지배계층이었으며, 그중에서도 사제인 무당은 천민이었으니 가장 낮은 신분이었던 것입니다.
무당은 글을 몰랐으므로 굿에서 노래하는 무가巫歌는 문자文字로 기록된 바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무가는 오늘날까지 중요한 구비문학口碑文學 자료資料입니다.
같은 전승집단을 갖는 무속과 민속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맺으면서 존속되어 왔습니다.
민속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형성된 관습적 생활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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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신앙과 무속



가신신앙家神信仰은 건물인 가옥과 그 안에 살고 있는 가족을 보호하고 신성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을 갖습니다.
가신신앙의 의례儀禮는 정기의례와 비정기의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정기의례는 안택安宅 혹은 고사告祀라 하여 집안의 안安과 태평太平을 기원祈願하기 위해 정초나 봄, 가을에 합니다.
안택은 무당이나 점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소경인 판수를 불러 조왕竈王, 성주城主, 삼신三神 등 가신家神을 모셔놓고 1년 동안 집안의 평안, 무병장수, 자손의 번창 등을 기원합니다.
안택은 지방에 따라 방식, 시기 등이 다르지만 대개 한 해의 모든 일이 끝난 동짓달이나 추수가 끝난 다음 10월에 하며, 해마다 하는 집안도 있으며, 3년에 한 번 하는 집안도 있습니다.
안택을 하는 집에서는 사흘 전부터 대문大門에 금줄을 치고 황토黃土를 뿌리고 문에는 솔가지를 걸어서 부정不淨을 막습니다.
대청마루 중앙에 신단을 만들고 떡, 밥, 술, 육류, 어류, 과일 등의 제수祭需를 차려 무녀巫女나 복술卜術에게 제사祭祀를 진행시킵니다.
제사가 끝나면 새벽이 되는데 음복陰伏을 하고 제물은 무녀 등에게 보수로 주며 이웃을 초대해서 음식을 대접합니다.

비정기의례는 새로 집을 지었을 때 하는 성주받이(혹은 성주굿)와 초상이 났을 때 집안을 정화하기 위해 항하는 자리걷이가 있습니다.
성주받이는 집의 수호신으로 성주를 새로 모시는 굿입니다.
집을 새로 짓거나 이사한 뒤 남자 주인인 대주大主의 나이가 17세, 27세, 37세 따위와 같이 7자가 되는 해의 10월에 날을 가려 합니다.
이를 성주받이굿이라고도 합니다.
자리걷이는 경기 지방에서 사람이 죽었을 때 사자死者의 영혼靈魂을 저승, 즉 극락세계極樂世界에 보내기 위해 하는 굿입니다.
같은 경기 지방의 지노귀굿, 서울 지방의 길가름, 전남 지방의 고풀이, 씻김 등과 같은 성격을 지닌 사령제死靈祭입니다.
사령제란 죽음의 사예邪穢(사악하고 더러움)를 벗기고 방황彷徨하는 무령巫靈을 달래어 저승으로 보내는 행사입니다.
이런 민간신앙民間信仰은 불교의 영향에서 온 것으로 죽은 혼을 극락세계極樂世界로 인도함으로써 자손의 번영繁榮, 가족의 융창隆昌을 불러온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가신신앙의 의례는 무속으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안택이나 성주받이는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이 의례를 담당하기도 하지만 무당이나 독경무讀經巫가 주제하는 지역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독경무란 서서 춤추며 굿하는 무당을 ‘선굿하는 무당’이라고 부른 반면 앉아서 북과 징을 치며 경문을 외우는 방법으로 굿을 하므로 ‘앉은 무당’이라고도 합니다. 전국적으로 분포하고 경장이, 경객, 판수, 법사, 복사, 경사, 독경자, 신장, 신객, 술객 등 지역에 따라 다양한 명칭으로 불립니다.
안택이나 성주받이를 주부나 대주가 할 경우 비용을 줄일 수 있지만 무당을 청해서 하는 것을 신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한 죽음으로 인해 발생한 부정을 가시고 가족의 마음을 안정시키려는 자리걷이는 반드시 무당이 담당하는 것으로 무속의례에 속합니다.

성주城主와 조왕竈王은 가신家神이자 독립된 굿을 받는 무속의 신神이기도 합니다.
성주는 성조成造 혹은 상량신上樑神이라고도 합니다.
조왕은 부뚜막, 부엌을 맡은 신으로 모든 길흉을 판단합니다.
전라도의 경우 조왕반으로 부엌에서 씻김굿을 시작합니다.
조왕은 부엌의 신이자 불과 관련이 있어 조왕반은 부정을 가시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성주굿은 전국적으로 무속의례에 들어있는데, 특히 집안재수굿이나 마을굿에서 뺄 수 없는 중요한 굿거리입니다.
집안재수굿은 집안에 재수財數가 형통하기를 바라는 굿입니다.
성주신城主神에 관한 서사무가도 있고 제주도나 동해안 지역에서는 무당이 집짓는 과정을 연극적으로 모의하기도 하는 등 중요한 신격으로 대접을 받습니다.
이런 점에서 성주신앙은 무속과 민간신앙의 습합習合이 철저하게 이루어진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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