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속



무속巫俗의 역사에 대해서는 고조선의 관할 경계 내에 있던 예맥濊貊에서 농사를 마치고 음력 시월에 행하던 제천의식인 무천舞天이나 부여夫餘에서 추수가 끝난 12월에 행하던 제천의식인 영고迎鼓같은 부족국가시대의 제천의례祭天儀禮에서 유래했다는 견해가 있고, 전라도의 무당巫堂인 당골이 바로 단군檀君의 전통을 이은 무왕巫王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무천舞天은 고려시대에 하늘에 풍년豊年을 빌고 추수秋收를 감사하는 일종의 종교의식으로 동시에 부족의 친목도 꾀했습니다.
춤과 노래로 의식을 행했으며, 부여의 영고迎鼓(12월), 고구려의 동맹東盟(10월)과 그 성격이 유사합니다.
신라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의 경우 차차웅이 곧 무巫를 지칭한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능화李能和(1869-1943, 호는 간정侃亭, 상현尙玄, 무능거사無能居士) 이후 한국의 무속 연구자들은 대부분 불교, 유교 등의 외래 종교가 수입되기 이전의 고대 한국 종교를 오늘날 무속의 원형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역사학자, 민속학자인 이능화는 1922년 이후 15년 동안 『조선사朝鮮史』 편찬사업에 종사하고, 1930년에는 일본인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청구학회靑丘學會에 참여했으며, 1931년에 박승빈, 오세창 등과 함께 계명구락부啓明俱樂部를 조직, 민족계몽 활동을 했습니다.
그는 친일단체 국민총력조선연맹 위원이었습니다.
저서著書로 『조선불교통사』, 『조선신화고』, 『조선상제예속사』, 『조선도교가』, 『조선무속고』 등이 있습니다.
어려서 한학漢學을 배운 이능화는 1887년 이후 서울의 여러 학교에서 영어, 중국어, 프랑스어, 일본어를 익혀 능통能通하게 구사驅使했습니다.
1895년에 농상공부의 주사로 채용되었다가 관립 외국어학교, 관립한성법어학교官立漢城法語學校 등에 재직했습니다.

고구려 제17대 왕 소수림왕小獸林王(?-384, 해미유왕解味留王이라고도 함)이 불교와 도교를 중국으로부터 수입하면서 무속은 지배계층의 지지를 잃기 시작하고 피지배계층, 즉 민중의 신앙으로 일관했습니다.
무속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이규보李奎報(1168-1241)의 『노무편老巫篇』은 12세기에 쓴 것으로 현재까지 전승되는 경기북부 무속신앙의 현장을 가장 충실히 보여줍니다.
이규보는 늙은 무당이 굿하고 공수주의 장면을 생생히 묘사하면서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무당을 경계하려는 의도를 나타냈습니다.
공수주는 강신무降神巫들이 사설私說과 춤으로 신을 받아 스스로 신격화神格化되어 인간에게 내리는 말입니다.
신의 성격에 따라 공수의 내용이 다양하지만 먼저 강림降臨한 신이 누구인지 밝히고 정성이 부족한 인간들에게 섭섭함을 표시한 다음, 이 굿을 받고 모두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으로 마칩니다.
사람들은 두 손을 비비면서 용서를 빌고 복을 청합니다.
무속은 고려시대에 지배계층의 이념과는 상치되는 민중의 신앙이었습니다.
무당이 천민賤民으로 떨어진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그 거리는 더욱 멀어지게 됩니다.

무당을 비롯한 무속신도들 대부분 농민과 어민처럼 노동에 종사한 사람들로 피지배계층이었으며, 그중에서도 사제인 무당은 천민이었으니 가장 낮은 신분이었던 것입니다.
무당은 글을 몰랐으므로 굿에서 노래하는 무가巫歌는 문자文字로 기록된 바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무가는 오늘날까지 중요한 구비문학口碑文學 자료資料입니다.
같은 전승집단을 갖는 무속과 민속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맺으면서 존속되어 왔습니다.
민속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형성된 관습적 생활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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