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종 때 궁중의 무고巫蠱




인조仁祖의 후궁後宮인 조소원趙昭媛(?-1651)은 사돈인 김자점金自點(1588-1651)이 몰락沒落하자 이를 원망하여 무당巫堂, 승려僧侶와 결탁해 효종孝宗을 저주하다가 발각되어 자진한 인물입다.
조소원이 효종과 인조의 계비 장렬대비壯烈大妃(1624-88)를 저주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조소원의 딸 효명옹주孝明翁主는 김자점의 손자 낙성위洛城尉 김세룡金世龍과 혼인했습니다.
김자점은 광해군光海君 때 대북세력에 맞섰고,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참여해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에 녹훈錄勳되었으며, 인조 때에는 영의정領議政에까지 올랐습니다.
그러나 효종孝宗이 즉위하자 송준길, 송시열 등의 탄핵을 받아 조정에서 쫓겨나 광양으로 유배되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김자점 일당은 밖으로는 청淸나라에 새 왕이 옛 대신들을 몰아내고 청나라를 치려한다고 고자질을 했고, 안으로는 아들 김식이 군대를 동원하여 효종을 몰아내려는 역모를 추진했습니다.

이때 조소원趙昭媛과 효명옹주孝明翁主는 무녀와 승려를 동원하여 왕과 대비를 저주했습니다.
그래서 온갖 흉측한 물건들을 모아 왕과 대비의 처소에 묻거나 뿌렸습니다.
이런 사실은 조소원의 여종 영이英伊에 의해 알려졌습니다.
즉 영이는 조소원의 아들 숭선군의 비첩으로 들어갔는데, 숭선군의 부인과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숭선군의 부인은 대비의 여동생의 딸이었으므로, 대비가 영이를 불러 꾸짖자, 영이가 조소원의 저주를 실토했습니다.
그래서 1651년(효종 2년) 11월, 이것이 사건화 되어 조소원의 측근들이 조사를 받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조소원의 사촌 조인필이 김자점과 역모를 꾀한다는 고변告變(반역행위를 고발함)이 있게 되고, 마침내 조사범위는 김자점 일파에게로 확대되었습니다.
그 결과 김자점, 김식, 김세룡 3대가 처형되고, 조소원은 자진하도록 했으며, 효명옹주는 유배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왕과 대비는 저주를 피하기 위해 처소를 옮겼으며, 또 궁중의 흙을 새것으로 바꾸었습니다.

『효종실록孝宗實錄』에 따르면 효종孝宗 3년(1652년) 3월 4일, 이때 역적을 토벌하는 일(김자점의 반역사건)이 일단락되었으나 청淸나라가 의심하는 단서가 될까 염려하여 전후에 걸친 옥사의 상황을 모두 청나라에 보고했는데, 주문奏文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주문奏文은 중국 황제에게 올리는 글을 말합다.

우리나라가 불행하여 변란이 근친들 사이에서 일어났으므로 그 전말을 두루 진술하겠습니다. 다음은 의정부議政府에서 장계狀啓한 내용입니다. 신들이 조소원趙昭媛의 여종인 겸선兼先의 고발장을 접수했는데, 거기에 말하기를 소원 조씨가 안으로는 여자 종들과 결탁하고 밖으로는 승니僧尼들과 교통하며 왕의 처소에 저주를 하여 왕의 몸을 해치려 꾀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에 근거하여 사건의 진상을 조사해본 결과 역모의 진상이 모두 드러났으므로 조소원을 별소別所에 안치시킴과 동시에 안팎의 흉한 무리들을 잡아들여 그 정황을 추궁하였습니다. 그 결과 조씨의 시비 영이英伊는 공초하기를 ‘하루는 조소원이 소비小婢 및 반비班婢인 가음춘加音春, 덕향德香 등을 불러 술과 음식을 대접하고는 등을 두드리면서 말하기를 나에게 한 계책이 있다. 장차 국왕 부자를 모해하고 낙성위洛城尉 김세룡金世龍을 임금으로 추대하려 하는데, 너희들 말고 누구와 일을 이루겠는가. 다행히 성사가 되면 나에게 큰 이익이 있을 뿐만 아니라 너희들도 장차 안락한 생활을 누릴 것이며, 족당族黨에 이르기까지 부귀를 누리지 않는 자가 없게 될 것이다. 너희들은 기꺼이 따르겠는가 했습니다. 여종들이 목숨을 걸고 명을 따르겠다고 대답하자 귀에 입을 대고 말하기를 힘들이지 않고 성공하는 방법으로는 저주만한 것이 없다. 여자 무당 가운데에 반드시 이 술법에 능한 자가 있을 것이니, 네가 그녀와 깊이 관계를 맺어두는 것이 좋겠다고 하면서 백금白金과 무늬 있는 비단 등의 물건을 내주었습니다. 이에 따라 여종들은 요망한 무당인 앵무鸚鵡에게 후하게 선물을 주고 그와 함께 조소원의 모녀를 보러 갔더니, 소원이 술잔을 받들어 축수祝壽하고는 같이 일을 해나가기로 약조하였습니다. 그 뒤로 그 무당이 늘 후문으로 몰래몰래 드나들면서 방술方術을 가르쳐주었는데,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에 조소원은 친히 믿는 하인배들을 시켜 죽은 사람의 두개골, 수족, 이빨, 손톱, 발톱, 머리카락 및 벼락 맞은 나무, 무덤 위에 있는 나무 등의 물건을 몰래 구해오게 하고, 또 다른 사람의 무덤을 파헤쳐 시체의 살점을 떼어 오고 관목棺木의 조각을 찾아오게 했으며, 시체에서 흘러나온 즙을 작신 솜, 마른 뼈다귀를 갈아 만든 가루, 심지어는 햇빛에 바짝 말린 닭, 개, 고양이, 쥐 등 저주하고 기도하는 용도에 필요한 물건이라면 모아들이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고는 늘 덕향 등을 시켜 이것들을 상자 속에 숨겨 가지고 왕의 처소에 들어가 야음을 틈타 왕대비 및 국왕께서 거처하는 방과 다니시는 길에 두루 파묻게 했습니다. 또 그의 딸 효명옹주로 하여금 죽은 사람의 이빨을 속옷 띠에 매달거나 뼛가루를 화장품 상자에 넣어두었다가, 왕의 처소에 드나들 때 방과 뜰에 몰래 묻거나 몰래 뿌리게 하여 거의 빠진 곳이 없었습니다. 또 승니僧尼들로 하여금 절을 창건하고 불상을 만들게 하여 자신의 복을 기원하게 하고 국가에 화를 끼치려고 했는데, 흉악한 행동을 자행하면서 못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 여자 무당 앵무와 늙은 비구니比丘尼 설명雪明, 승려 법행法幸, 보상普祥, 자운慈運 등은 법에 따라 분명하고 바르게 처리하도록 하였습니다.

김세룡金世龍은 조소원의 딸인 효명옹주의 남편이며 김자점의 손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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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때 궁중의 저주詛呪




숙종肅宗 27년(1701년) 8월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승하하자, 이를 장희빈張嬉嬪의 저주詛呪 탓이라 하여 장희빈을 자진케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한 내용이 『숙종실록肅宗實錄』과 『인현왕후전仁顯王后傳』에 있으며, 양자가 장희빈이 궁중 내 신당까지 설치하여 인현왕후를 저주했음을 사실로 기록한 점에서는 같지만 구체적인 부분에서는 상당한 차이를 드러냅니다.
『인현왕후전』에서는 9월 7일 숙종肅宗이 꿈을 통해 장희빈의 저주를 알아차리고, 장희빈의 처소로 찾아가 저주를 위해 마련한 신당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장희빈의 측근을 심문하여 저주 사실을 확인하고 이들을 처형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숙종실록』에서는 9월 23일 처음 장희빈의 저주에 대한 언급이 보이고, 27일부터 관련자들에 대한 심문이 시작되어 10월 3일 장희빈의 저주했다는 쪽으로 사건을 종결합니다.
이처럼 관련 자료 사이에 다른 점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장희빈의 측근들은 궁중 내 신당 설치는 장희빈 소생의 세자의 건강을 기원하기 위한 것이라 하면서 인현왕후를 저주했음을 부인한 점 등으로 미루어, 이 사건은 조작된 것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숙종肅宗 27년(1701년) 9월 25일 비망기備忘記를 내리시기를 “내사內司에 갇혀 있는 죄인 축생丑生, 설향雪香, 시영時英, 숙영淑英, 철생鐵生 등 모두를 의금부義禁府로 하여금 도사都事를 보내 잡아오도록 하라. 내일 인정문仁政門 밖에서 내가 친히 국문鞠問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축생 등은 모두 궁녀입니다.

비망기備忘記는 왕의 명령을 적어 승지에게 전하는 문서입니다.
내사內司(혹은 내수사)는 궁중에서 사용하는 쌀, 베, 잡물, 노비 등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는 관청입니다.
의금부義禁府는 왕명을 받들어 죄인을 추국推鞫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官衙입니다.
도사都事는 종5품 벼슬입니다.
인정문仁政門은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문의 문을 말합니다.
국문鞠問은 죄인을 심문하는 일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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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하만수於羅睱萬壽와 강남조선江南朝鮮





무가巫歌를 시작할 때 ‘어라만수’를 하는데, 그 발음을 한자로 옮기면어라하만수於羅睱萬壽’이며, 이는 백제 때의 풍속이 전래되어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백제의 고유어에 왕을 어라하於羅睱라 하고, 왕후를 어륙하於陸何라 하는데, 당시 무격巫覡이 왕과 왕후의 장수를 노래로 ‘어라하만수, 어륙하만수’라 했으며, 이는 “우리 임금님 만세, 우리 왕비님 만세”란 뜻입니다.
조선시대 광해군光海君 때 문인 유몽인柳夢仁이 『어우야담於于野談』을 지었는데, 여기서 이르기를 “지금 무격들이 반드시 ‘아왕만수’를 부르는 것은 요양遼陽, 심양瀋陽 지방으로 이주한 고려 유민들이 옛날의 왕을 축수祝壽하는 풍속”이라 했으니, 대개 왕을 어라하라 한 것과 그 뜻이 서로 부합됩니다.

무가巫歌는 무당巫堂이 부르는 노래라는 뜻으로 신의 행적, 인간과의 대화, 신의 찬양, 인간의 바람 등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무가巫歌에 강남조선江南朝鮮이란 말이 있습니다.
대개 무당들은 무가에서 강남이라는 말을 많이 습니다.
예를 들면 천연두의 신을 ‘강남호구별성마마江南戶口別星媽媽’라 하는 것으로 무당들의 용어에서 유래했습니다.
중국의 강남 일대는 옛날의 여묘黎苗의 유족遺族들이 많아, 풍속은 무격巫覡을 숭상하고 귀신鬼神 섬기기를 좋아했습니다.
또 구려九黎의 왕 치우씨蚩尤氏는 탁록涿鹿에 도읍하고, 옛날 구이九夷의 땅과 연접해 있었습니다.
따라서 한국의 무속巫俗은 치우蚩尤의 유풍遺風이 전해진 것으로 보이며, 무당이 강남이라는 말을 부르는 것도 유풍으로 보입니다.

여묘黎苗는 구려九黎와 삼묘三苗. 상고시대 중국 남방에 거주하던 종족명입니다.
구려가 삼묘가 되었고, 삼묘가 다시 서융西戎이 되었습니다.
치우씨蚩尤氏는 다섯 가지 병기兵器를 발명한 전쟁의 신이며, 구려의 군장이고 삼묘의 조상입니다.
치우씨蚩尤氏는 황제皇帝와 패권覇權을 다투다 패배하여 죽임을 당했습니다.
탁록涿鹿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탁록현 동남부로, 치우가 황제에게 죽임을 당한 곳입니다.
구이九夷는 하, 상, 주 시대 동방에 있던 아홉 이민족으로 견이, 우이, 방이, 황이, 백이, 적이, 원이, 풍이, 양이를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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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출세계, 월출세계, 사해세계 그리고 만신




무가巫歌에 “일출세계日出世界, 월출세계月出世界, 사해세계四海世界, 조선朝鮮의 한양漢陽은 무학無學과 나옹懶翁 혜근慧勤이 터를 점쳐서 정하고 5부五部를 두었으며, 종묘를 건립하고 사직을 세웠으며, 궁궐을 건축하고 관서를 설립했다”고 전합니다.
고려 말, 조선 초의 자초自超(1327-1405)의 호가 무학無學입니다.
무학無學은 고승高僧으로 중국 당唐나라의 선승 임제선사臨濟禪師(?-867)의 선풍禪風을 도입하여 고려 불교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나옹懶翁 혜근慧勤(1320-76)의 제자이며, 왕사王師로 봉해지는 등 태조太祖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래서 태조의 꿈풀이를 통해 왕이 될 것을 예언했다든지, 한양 정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설화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양 정도 과정에서 무학無學은 물론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이 크게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입니다.

서울지역에서 채록된 「진오귀 무가」에는 다음의 구절이 있습니다.
해 뜬 세계 달 뜬 세계 사해 세계 한양 조선국 내 설입設立 배판配判 하옵실제 터 잡으시기는 무웅 나웅이 지으신 나라로 한성부 오부장내五部掌內 경덕궁 창덕궁 경의궁 종묘사직 위툭을 받아 왔으니” 등의 말이 있습니다.
대개 조선의 태조太祖가 도읍都邑을 정할 때 왕사王師인 무학無學이 이를 점쳐서 한양에 도읍함에 따라 부서가 정비되고 사해가 한집 같고 일월이 명랑하다는 말은 태평의 기상을 형용한 것으로, 이로부터 무녀가 노래하고 송축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일출세계, 월출세계 등의 말은 신라시대에 일월신日月神을 숭배하던 옛 풍속風俗이 무가巫歌에 전해진 것입니다.
신라에서는 정월 원단元旦(설날 아침)에 일월신日月神을 제사했습니다.

무가巫歌에 만신萬神이란 말이 있으며, 대개 우리 풍속에서는 무당을 일컬어 만신이라 합니다.
만신이란 명칭의 유래는 오래되었으니, 신선에 관한 책의 제목 『포박자』에서 “황제黃帝가 동쪽으로 청구靑丘에 이르러 풍산風山을 지날 때 자부紫府 선생先生을 뵙고 「삼황내문三皇內門」(도교서적)을 받아 만신萬神을 소집하여 검열했다”고 했습니다.
이는 선가仙家의 말인데, 일이 막연漠然하여 믿기에 충분치 않지만 연구할 가치는 있으니, 만신이라는 동이東夷 민족民族의 고대 신사神事의 기록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자부紫府 선생先生이라는 것도 신들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는 무당으로 추정되는데, 이익李瀷은 『성호사설』에서 “이른바 신선神仙이란 신을 잘 섬기는 자이다”라고 했으며, 청구靑丘를 조선朝鮮이라고 했습니다.
이로 미루어 조선의 단군檀君은 자부 선생의 계통으로 보입니다.
단군檀君이란 제단을 설치하고 천신에게 제사했으므로 생긴 명칭입니다.
중국인이 동방을 가리켜 신선神仙이 사는 신선의 소굴, 신들의 집(선굴신택仙窟神宅)이라 했는데, 그 근거가 있습니다.
따라서 만신萬神이란 명칭이 무축巫祝에 전해진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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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신과 시왕





무가巫歌에 삼신제석三神帝釋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삼성三聖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삼성이란 삼대인 환인桓因(제석帝釋으로 와전됨), 환웅桓雄, 왕검王儉을 말하며, 황해도 구월산九月山에 있는 삼성사三聖祠가 이것입니다.
삼성이란 고조선 신권시대神權時代 때의 단유壇壝의 임금으로, 하늘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사람입니다.

삼신제석三神帝釋은 불교佛敎의 천신天神으로 원래의 명칭名稱은 사카라 데바남 인드라Sakara-devanam Indra, 즉 석제환인타라釋提桓因陀羅의 약칭입니다.
삼신제석은 산스크리트어 수메루Sumeru의 음사인 수미산須彌山 꼭대기 도리천忉利天 중앙에 있는 선견성善見城의 주인으로 4천왕과 32천을 거느립니다.
구월산九月山은 황해도 은율군과 안악군의 경계에 있는 산입니다.
삼성사三聖祠는 환인桓因, 환웅桓雄, 단군檀君을 모신 사당祠堂으로 고려시대까지 구월산의 대증산 동남쪽에 있었으나 조선 초에 소증산으로 옮겨졌습니다.
1412년(태종太宗 12년) 평양에 단군사가 건립되면서 한때 국가제사가 폐지되었으나, 1472년(성종成宗 3년)부터 다시 국가제사가 거행되었습니다.
단유壇壝의 단壇은 제단, 유壝는 제단을 둘러싼 담을 말합니다.
따라서 단유壇壝란 제사의 장소를 말합니다.

무가巫歌에 시왕세계十王世界란 말이 나오며, 또 신위神位를 배설하는데도 시왕十王이 있으니, 망자의 천도를 위한 진오귀굿이나 새남굿 무가에 흔히 등장합니다.
이는 무속이 도교화 혹은 불교화한 것입니다.
시왕十王과 관련해서 불교서적에 염마라천자閻魔羅天子가 있어 명계冥界를 주관한다는 설이 있습니다.
지금은 아홉 대왕을 덧붙여 함께 명부의 10대왕이라 하는데, 대개 후세에 덧붙인 것입니다.
10대왕의 칭호는 『범음집梵音集』에 보입니다.
제1 진광대왕秦廣大王, 제2 초강대왕初江大王, 제3 송제대왕宋帝大王, 제4 오관대왕五官大王, 제5 염라대왕閻羅大王, 제6 변성대왕變成大王, 제7 태산대왕泰山大王, 제8 평등대왕平等大王, 제9 도시대왕都市大王, 제10 오도전륜대왕五道轉輪大王

저승에서 인간의 생전의 선악을 심판하는 심판관審判官 열 명으로 시왕十王이라 읽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각왕 앞에서 한 번씩 모두 열 차례 심판을 받는데, 처음 진광대왕秦廣大王에서 일곱째 태산대왕泰山大王까지는 7일에 한 번씩, 나머지 평등대왕平等大王, 도시대왕都市大王, 오도전륜대왕五道轉輪大王에게는 각각 1백일, 1년, 3년 뒤에 심판을 받으며, 그 결과에 따라 가운데 한곳에 다시 태어난다고 합니다.
시왕十王 신앙信仰은 중국에서 성립된 것으로 당唐나라 말기 불교도들 사이에서 처음 등장했으며, 이후 도교에서도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단 도교에서는 10왕의 이름, 탄일, 역할 등이 추가되었습니다.
불교에서 49재(칠칠재)를 지내는 것도 이와 같은 10왕 신앙에 근거한 것입니다.
즉 재판이 진행되는 49일 동안 후손들이 재를 올리면 저승의 심판에 좋은 영향을 미쳐 조상이 극락왕생極樂往生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염마라천자閻魔羅天子는 염마왕, 염라왕이라고도 하는데, 야마 라자yama raja의 음역이다.
야마夜摩는 원래 인도의 천신이며, 남녀 쌍둥이 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인도에서는 인간이 죽으면 하늘로 올라간다는 믿음이 있었고, 이에 따라 야마가 사후세계死後世界의 지배자支配者란 관념이 생기게 되고, 또 남신으로 단일화되었습니다.
중국에서 10왕 신앙이 등장하면서 10왕 중 다섯째 왕이 되었지만, 그래도 명계冥界의 심판자를 대표하는 것은 역시 염라대왕閻羅大王입니다.
불교의례佛敎儀禮의 절차와 방법을 규정한 책인 『범음집梵音集』은 조선 사찰의 불사의식에서 반드시 사용됩니다.

『후한서後漢書』에 따르면 “중국에서 사자死者는 혼령魂靈이 대산垈山으로 돌아간다”라 했고, 이에 대한 주석에서는 『박물지博物志』를 인용하여 말하기를 ‘태산은 천제天帝의 손자로 사람의 혼백魂魄(넋)을 부르는 일을 주관합니다.
동방은 만물이 시작하는 곳이기 때문에 사람의 수명을 주관한다’고 했습니다.
중국에서는 태산泰山의 산신山神, 즉 동악대제東岳大帝, 동악부군東岳府君을 사후세계死後世界의 심판자로 여겼으며, 또 태산泰山 아래에 명부冥府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태산대왕泰山大王은 근거가 있는 바이지만, 나머지 8대왕은 출처를 알지 못하며, 이는 도가道家에서 만든 칭호稱號로 보입니다.
시왕十王 신앙信仰은 불교佛敎에서 시작하여 도교道敎에까지 영향을 주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후한서後漢書』는 남조 송의 범엽范曄(398-445)이 편찬한 후한시대後漢時代(25-220) 196년 동안의 역사를 기록한 기전체紀傳體 사서史書입니다.
대산垈山은 태산泰山을 말합니다.
『박물지博物志』는 중국 서진시대의 장화張華(232-300)가 저술한 기문奇聞, 전설집이다.
명부冥府는 사람이 죽은 뒤에 심판을 받는 곳을 말합니다.

그리고 제3 송제대왕宋帝大王이라는 것은 송宋나라 휘종황제徽宗皇帝가 도교를 좋아했으며 자칭 도군황제道君皇帝라 했으므로 혹자는 이 황제를 지목하여 죽은 뒤에 명부대왕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명부冥府 10대왕의 명칭은 조송趙宋 때 처음 등장했습니다.
대개 음사淫祠의 신神을 대왕大王이라 칭하는데, 예를 들면 고려 왕조 때 송도松都에 국사당國師堂 신사神祠가 있었는데, 그 신을 국사대왕國師大王이라 칭했다는 것이 백운거사 이규보李奎報 문집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보입니다.
따라서 송제대왕宋帝大王이라는 것도 국사대왕國師大王과 같은 종류입니다.

휘종황제徽宗皇帝(1100-25년 재위)는 송宋나라 제8대 황제皇帝로 1125년 장자 흠종欽宗에게 양위讓位하고 태상황太上皇으로 있다가 1127년 금金나라의 포로가 되고, 1135년 금金나라에서 죽었습니다.
자칭 도군황제道君皇帝”란 말은 도사 임영소林靈素가 휘종을 상제의 장남 장생대제군長生大帝君으로 인간세상을 구하기 위해 하강下降했다는 말 등에 현혹眩惑되어 1117년 스스로를 교주도군황제敎主道君皇帝라 칭한 것을 말합니다.
조송趙宋은 조광윤趙匡胤에 의해 건국된 송宋나라(960-1279)로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의 유송劉宋과 구분하기 위해 조송趙宋이라 합니다.
개성 송악산松嶽山에 있었던 송악산사松嶽山祠는 다섯 개의 신당으로 구성되었는데, 그중 세 번째가 국사신國師神을 모신 신당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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