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술降神術





강신술降神術을 심령술心靈術, 교령술交靈術이라고도 합니다.
사자死者의 혼령魂靈이나 먼 곳에 있는 사람의 생령生靈을 데려오는 일입니다.
이와 같은 술법術法을 하는 사람을 영매靈媒라 합니다.
『천예록天倪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천예록天倪錄』은 인물의 전기를 중심으로 한 한문설화집이며, 제목 ‘천예天倪’는 『장자莊子』 「제물편齊物篇」에 나오는 말로 ‘시비나 대립, 차별을 초월한 경지’를 뜻합니다.

송상인宋象仁 공公은 매우 강직하고 정직했으며, 평생 무당巫堂들을 미워했다.
그래서 무당들이 귀신鬼神을 핑계로 백성들을 속이고 있으며, 빌거나 축원한다고 하여 오랫동안 음사淫祠를 행하면서 사람들의 재물을 허비한 것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으니, 실로 모두가 허망虛妄한 것이라 했다.
항상 말하기를 ‘어떻게 하면 이 무리들을 모두 없애 세상에 다시는 무당이 없도록 할 수 있을까’라 했다.
남원부사南原府使가 되자 명령하기를 ‘만약 우리 고을에 무당이라 칭하는 자가 발각되면 하나도 남김없이 매를 쳐서 죽일 것이니, 경내에 두루 명하여 모두 다 듣고 알게 하라’고 했다.
무당들이 이 명령을 듣고 두려워하여 일시에 달아나 모두 다른 읍으로 옮겨갔다.
송宋 공公은 우리 고을에는 한 명의 무당도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루는 광한루廣寒樓에 올라가 바라보니 한 미인美人이 말을 타고 흙으로 빚은 장구를 메고 가고 있었는데, 무녀巫女 행색行色이 분명했다.
바로 사령을 보내 붙잡아서 관아의 뜰로 끌고 오게 하여 묻기를 ‘네가 무당이냐?’ 하니 ‘그렇습니다’라고 했다.
또 묻기를 ‘너는 관가에서 내린 명령을 듣지 못하였느냐?’ 하니 ‘들었사옵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말하기를 ‘너는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 어찌하여 우리 고을 안에 남아 있느냐?’ 하니, 무당이 절을 하고 아뢰었다.
소인이 드릴 말씀이 있사오니, 원컨대 굽어 살펴주십시오. 무당에도 진짜와 가짜가 있사옵니다. 가짜 무당이야 죽일 수도 있습니다만, 진짜 무당이야 어찌 죽일 수 있겠습니까? 관가에서 영을 내려 엄금하는 것은 가짜 무당을 얘기하는 것이지, 진짜 무당은 아닐 것이옵니다. 소인은 진짜 무당이옵니다. 관가에서 저를 죽이지 않을 것임을 알고 편안히 있으면서 옮겨 가지 않았사옵니다.

공公이 묻기를 ‘어찌하여 네가 진짜 무당이라고 하느냐’고 하니, 무당이 ‘원컨대 시험해보십시오. 영험靈驗이 없으면 죽음을 청하겠습니다’라고 했다.

공公은 다시 ‘네가 귀신을 부를 줄 아느냐’고 물으니, 무당은 ‘부를 수 있습니다’라 했다.
그 당시 공公에게는 죽은 지 얼마 안 된 평생의 친구가 있었다.
공公은 ‘내게 죽은 친구가 있는데, 서울에서 아무 벼슬을 하던 아무개이다. 네가 그의 혼령魂靈을 부를 수 있겠냐’고 물었다.
무당이 대답하기를 ‘어렵지 않사옵니다. 당연히 나리를 부를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하오나 음식 몇 그릇과 술 한 잔은 꼭 있어야 부를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공公은 사람 죽이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 생각하여, 그의 말을 따라 진위眞僞를 실험하고 나서 처리하기로 하고, 곧 명을 내려 음식과 술을 차려주도록 했다.
무당이 말하기를 ‘나리의 옷을 한 벌을 주시면 그것으로 신령神靈을 청하겠습니다. 옷이 없으면 신이 내리지 않습니다’라고 하니, 공公은 전에 입던 옷 한 벌을 주라고 명했다.

무당은 뜰 가운데 한자리를 마련하고 술과 안주를 진설한 다음, 몸에는 준 옷을 걸치고 허공을 향해 방울을 흔들면서 괴상한 말을 늘어놓으며, 신神이 내리기를 청했다.
잠시 뒤에 무당이 ‘내가 왔네’라 하고는 공중을 향해 먼저 유명을 달리하며 결별할 때의 슬픔을 말하였다.
그런 뒤 평생 동안 서로 즐거움을 나누며 사귄 정을 이야기하였다.
대나무로 만든 말을 타고 놀던 일부터 책상을 맞대고 공부하던 일, 과거보러 가던 일, 조정에 나아가 벼슬살이를 하던 일, 모든 행동을 함께 하고 벼슬하고 물러남도 같이하며, 속마음을 터놓고 사귀며 아교와 옻처럼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사이로 지낸 사정에 이르기까지 또렷이 말했다.
이는 모두 사실로 털끝만큼의 차이도 없이 맞추었다.
또한 공公과 이 친구만이 알 뿐 남들은 알지 못하는 일도 털어놓았다.
공公은 이를 듣고 자신도 모른 사이에 눈물을 흘렸으며,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말했다.
‘내 친구의 혼령이 과연 왔구나, 의심할 바가 없다.’
공公은 곧 좋은 술과 안주를 차리도록 하여 친구에게 대접하였다.
한참 있다가 인사를 하고 서로 헤어져 갔다.

공公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나는 늘 무당들이란 모두 간사하고 거짓된 것으로 간주했는데, 이제 비로소 무당 중에도 진짜가 있음을 알았도다’ 하고, 무당에게 후한 상을 주고 무당을 금하는 영을 거두어들였다. 이로부터 다시는 무당을 몹시 배척하는 말이나 의견을 내지 않았다.”

송상인宋象仁(1569-1631)은 문신으로 임진왜란 때 부산진성을 사수하다 순사한 송상현의 아우입니다.
그가 남원부사로 재직한 것은 1629년경(인조 7년)입니다.
재임기간 중 살인계殺人契 조직자 10여 명을 처형했고, 이에 앙심을 품은 살인계 잔당들이 그의 조상 묘를 파헤치자 남원부사직을 사임했습니다.
광한루廣寒樓는 전북 남원시에 있는 누정으로 조선 초 황희가 세워 광통루라 했으나, 세종世宗 때 중건重建하면서 정인지가 광한루로 바꾸었습니다.
원래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탔고, 현재 건물은 1635년(인조 13년)에 다시 지은 것입니다.

『천예록天倪錄』에는 이런 내용도 있습니다.
이 설화는 「용산강신사감자龍山江神祀感子」입니다.

옛날에 이름난 재상宰相이 승지承旨로 있을 때 새벽에 장차 입궐하려고 의관을 갖추고 나가려다가 너무 일러서 돌아와, 베개에 기대어 설핏 잠이 들어 꿈을 꾸었다.
말을 타고 대궐을 향해 가다가 파자교把子橋 앞에 이르러 어머니가 혼자서 걸어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재상은 깜짝 놀라 즉시 말에서 내려와 반기면서 절을 하고, ‘어머니께서는 어찌 가마도 타지 않고 혼자 걸어오십니까?’고 물으니, 어머니가 ‘나는 세상을 떠난 사람이다. 살아있을 때와 다르니 걸어서 가는 것이다’ 했다.
재상이 ‘지금 어디로 가시기에 여기를 지나십니까”’ 하니, 어머니는 ‘용산강龍山江 옆에 사는 우리 집 종 아무개 집에서 지금 굿을 차린다기에 음식을 먹으러 가는 길이다’라고 했다.
재상이 말하기를 ‘저희 집에서 기일忌日날 제사, 계절季節마다 제사와 명절이나 초하루, 보름의 차례茶禮를 다 지내는데, 어머니께서는 어찌하여 노비집의 굿에 음식을 드시러 가는 지경이 되셨습니까?’ 하니, 어머니가 말하기를 ‘제사가 있더라도 신도神道에서는 중히 여기지 않고, 오로지 무당의 굿만을 중하게 여길 뿐이다. 굿이 아니면 혼령魂靈들이 어찌 한번 배부르게 먹을 수 있겠느냐?’고 했다.
그리고 말하기를 ‘갈 길이 바빠 오래 머물 수 없다’면서 이별을 고하고 훌쩍 떠났는데,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재상宰相이 바로 꿈에서 깨어났는데, 꿈속의 일이 황홀하면서도 너무나 생생했다.
이에 종 한 사람을 불러 명하기를 ‘너는 용산강에 사는 종 아무개 집에 가서 오늘 저녁에 나를 보러 오라고 해라. 그리고 너는 내가 입궐入闕하기 전에 서둘러 돌아오도록 하라’고 했다.
그러고는 앉아 기다렸다.

잠깐 만에 종이 과연 급히 돌아왔는데, 아직 날이 채 밝기 전이었다.
때가 몹시 추워서 종은 먼저 부엌으로 들어가 숨을 헐떡거리고 떨면서 불을 쬐니, 동료 종이 부엌에 있다가 술이나 한잔 얻어먹고 왔느냐고 물었다.
종이 말하기를 ‘그 집에서 마침 큰 굿을 벌이고 있었는데, 무녀巫女가 하는 말이 우리 집 상전上典 대부인大夫人의 신神이 자기 몸에 내렸다고 하더군.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는 바로 우리 집에서 심부름 온 종이로구나 하며 앞으로 불러서 큰 잔에 술을 따라주고 음식도 한 그릇 주면서 오는 길에 파자교 앞길에서 우리 아들을 만났다고 하더라’고 했다.

재상宰相은 방에 있다가 종들이 하는 말을 듣고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목을 놓아 통곡하고, 종을 불러 상세히 물었다.
그러고는 마음속으로 어머님이 굿에 가서 흠향歆饗한 것을 의심할 바 없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이에 무녀를 불러 성대하게 굿을 벌려서 어머니가 잡수시도록 했으며, 이어서 계절마다 꼬박꼬박 굿을 했다고 한다.

이상은 최유원崔有源 공公의 일로 알려졌는데, 최崔 공公은 효성孝誠으로 세상에 알려진 사람입니다.

파자교把子橋는 좌포청左捕廳이 있던 정선방貞善坊. 현재 종로구 종로3가 단성사 자리입니다.
용산강龍山江은 서울의 용산과 노량진 사이를 흐르는 한강의 일부분입니다.
최유원崔有源(1561-1614)은 대사성大司成, 대사헌大司憲 등을 역임했고, 효행孝行으로 이름이 높아 사후死後 고향에 정문旌門이 세워졌습니다.
정문旌門이란 충신忠臣이나 효자孝子, 열녀烈女 등을 표창表彰하기 위해 그 집 앞이나 마을 앞에 세우던 붉은 문으로 작설綽楔, 홍문紅門, 생정문生旌門이라고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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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의 영혼을 위해 길 귀신鬼神을 내리게 하다




이익李瀷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말했습니다.
『춘관春官』에 ‘사무司巫는 상사喪事 때에 무강巫降의 예를 맡는다’ 했고, 주註에서는 ‘강降은 내린다는 뜻으로 무당이 신을 내리게 하는 의례이다. 지금 세상에서 사람이 죽어 염습殮襲을 한 뒤에 무당巫堂에게 가서 길 귀신鬼神을 내리게 하는 것이 그 예제의 흔적[유례遺禮]이다’라 했다. 그러나 이는 성인의 뜻이 아닐 것이다. 내가 보건대 시골 무당이 노래와 춤으로 혼령을 부르고 망혼亡魂의 말을 흉내 내면서 어리석은 풍속을 속이고 재물을 빼앗으니, 나라에서 마땅히 법으로 금지하여 없애야 하는 것인데, 어찌 도리어 경전에 수록했겠는가. 또 보건대 우리나라 풍속이 귀신 섬기기를 좋아하여, 그중에 만명萬明이라는 것이 있는데, 곧 신라 김유신의 어머니이다. 이것은 반드시 가운데가 볼록한 큰 거울이다. 또 왕신王神이 있다고 하는데, 왕신이란 수로왕首露王을 가리키는 것 같다. 이는 왕王이 가장 영험靈驗하고 신이함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신을 섬기는 자가 반드시 철익의綴翼衣를 입는데, 철익이란 지금 무사들이 입는, 저고리와 바지가 서로 연결된 것으로, 허리춤에 주름이 있는 것은 현단玄端과 같고, 양쪽 겨드랑은 한데 꿰매어져 있는 것이 심의深衣와 같고, 넓은 소매에는 끝동이 없는 것은 난삼爛衫과 같다. 이 거울과 옷은 반드시 당시의 제도로서 지금까지 전해온 것이다.

『춘관春官』은 『주례周禮』의 편명으로 국가의 예제禮制를 담당하는 관직들에 대해 설명한 부분입니다.
사무司巫는 무관巫官의 장長으로 무사巫事를 총괄했습니다.
주註는 후한後漢의 경학자 정현鄭玄(127-200)의 주석을 말합니다.
염습殮襲은 사자死者의 몸을 씻긴 뒤에 옷을 입히고 염포로 묶는 일을 말합니다.
왕신신앙王神信仰은 충남지역에서 주로 확인되는 것으로 왕신王神은 일종의 가신家神입니다.
그러나 모든 가정에서 모시는 것은 아니고, 모시는 가정이 따로 있습니다.
왕신은 집안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관장하기 때문에 집안의 대소사大小事를 반드시 먼저 왕신에게 고해야 합니다.
왕신의 신체는 주로 곡식이나 옷감을 넣은 항아리나 단지입니다.
수로왕首露王(42-199)은 금관가야의 시조입니다.
철익의綴翼衣는 철릭綴翼 혹은 천익天翼이라고 합니다.
조선시대 무신들이 입던 공복公服이며, 전시에 왕을 호종扈從할 때는 문신들도 입었습니다.
저고리와 치마가 붙은 형태의 겉옷으로 길이가 길고 허리에는 주름을 잡았습니다.
소매는 두리소매이고 고름을 달았으며, 곧은 옷깃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교차시켜 앞을 여미었습니다.
당상관堂上官은 남색을, 당하관堂下官은 홍색을 입었습니다.

현단玄端은 검은색 상의로 소매가 정직단방正直端方하다는 데서 유래한 명칭名稱입니다.
심의深衣는 상의上衣와 하의下衣가 연결된 웃옷으로 흰 천으로 만들고 옷 가장자리에 검정 비단으로 선을 둘러댔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유학자들이 선호했으며, 심의를 착용한 초상화가 많이 남아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난삼爛衫은 남색이나 옥색 비단으로 만든 웃옷으로 깃이나 소매 끝에 청흑견靑黑絹으로 단을 둘러댔습니다.
유생儒生, 진사進士, 생원生員들이 주로 입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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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고巫蠱[저주詛呪]




우리말에 무고巫蠱나 저주詛呪하는 일을 ‘방자方子’라고 하는데, 저주로 번역되는 것이 이른바 무고입니다.
이능화李能和는 『조선무속고朝鮮巫俗考』에서 무고의 뜻이 『한서석의漢書釋義』에 보이는데, “여자로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섬기고 춤을 추어서 신을 내리게 하는 자를 무巫라 하고, 그릇된 도로서 정사를 어지럽게 하고 사람들을 미혹케 하는 것을 고蠱라 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무고巫蠱는 다른 사람에게 위해를 주는 데 사용하는 흑주술black magic의 일종이며, 고蠱란 그릇 속에 벌레가 여러 마리 들어있는 형상으로 인공 배양된 벌레를 의미합니다.
즉 그릇 속에 여러 마리의 벌레를 넣어두었을 때 서로 잡아먹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벌레가 고蠱입니다.
그리고 고蠱가 되면 사람이나 동식물을 해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게 되므로, 이를 이용하면 다른 사람이나 동식물을 해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여기서 의미가 확대되어 흑주술 일반을 무고巫蠱라 일컫게 되었습니다.
『한서석의漢書釋義』는 『한서漢書』에 대한 주석서로 보입니다.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 궁중에 무고巫蠱의 변이 있었고, 우리나라에서도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어떤 사람이 무고의 일을 원元나라 공주公主에게 몰래 고했기 때문에 대관大官 김방경金方慶이 억울하게 잡혀 심문을 당했으나, 그런 사실이 없다고 하여 마침 내 무죄無罪로 밝혀진 적이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여러 임금 때도 궁중宮中에 또한 무고巫蠱의 변괴變怪가 많았고, 그때마다 당쟁黨爭에 이용되었습니다.
또 일반 백성들 사이에도 늘 저주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는 모두 여자 무당巫堂들의 짓이었습니다.

기원전 91년 한漢무제가 늙어 병들자 강충江充이라는 자가 병의 원인을 무고巫蠱 때문이라 하면서 범인 수색에 나섰습니다.
그래서 호무胡巫를 앞세워 궁중 이곳저곳을 파헤치고 다니다, 결국 태자太子를 범인犯人으로 지목했습니다.
이에 태자는 군대를 일으켜 강충을 죽이고, 호무를 화형에 처했지만, 황제皇帝의 허락 없이 군대를 동원한 죄로 태자 역시 죽었습니다.
이 사건은 태자와 불화하던 강충이 한 무제 사후 태자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조작한 것이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풍속이 대단히 성행했는데, 남의 집의 종이나 첩들이 조금이라도 원한怨恨이 있으면 곧 새나 짐승, 썩은 뼈나 허수아비 등의 물건을 사용하여 온갖 술법術法을 꾸며서 담 밑이나 부엌과 굴뚝에 묻어서 다른 사람에게 병이 전염되도록 합니다.
이를 급히 치료하지 않으면 가끔 죽게 되며, 혹은 다른 사람에게 전염되어서 시주병尸疰病 같은 것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사실이 발각되어 사형을 당하는 자가 잇달아 오히려 줄거나 없어지지 않습니다.
무격巫覡 가운데 저주詛呪를 잘 다스리는 자는 남의 집에 들어가면 바로 흉물凶物이 있는 곳을 알아 끄집어내서 없애버리며, 또 범인의 이름을 말하기도 하는데, 혹은 맞기도 하고 혹은 맞지 않기도 합니다.

시주병尸疰病은 사자死者의 혼魂이 딴 사람의 몸에 붙어서 생기는 병病입니다.
흉물凶物은 저주詛呪에 사용된 물건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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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中宗 때 궁중宮中의 무고巫蠱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중종조고사본말中宗朝故事本末」 가운데 ‘박경빈朴敬嬪과 복성군福成君의 옥사獄事’조에 관한 내용이 있습니다.
박경빈朴敬嬪(?-1533)은 경상도 상주 출신으로 미색美色이 있어 1505년(연산군 11년) 채홍사採紅使에 의해 뽑혔으나, 이듬해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났기 때문에 중종中宗의 후궁後宮이 되었습니다.
복성군福成君(?-1533)은 중종中宗의 아들입니다.

『당적보黨籍補』에 따르면 중종中宗 22년(1527년)에 경빈敬嬪 박씨朴氏와 그의 아들 복성군福成君 미嵋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함께 상주尙州 고향으로 귀양歸養을 보냈습니다.
중종 22년 2월 26일, 동궁의 해방亥方(북서)에 불태운 쥐 한 마리가 매달려 있었고, 물통 조각으로 만든 방서榜書도 함께 걸려 있었습니다.
이때 인종仁宗이 동궁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세자로 있었다는 의미) 인종은 해亥년에 태어났고,(인종은 1515년(중종 10) 을해생) 2월 26일이 생일이며, 해亥는 돼지에 해당하고 쥐는 (생김새가) 돼지와 비슷하므로, 당시 동궁을 저주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궁중宮中에서는 경빈의 소행이라 지목하는 바람에 경빈의 시녀와 당성위唐城尉 홍려洪礪의 종들이 많이 매 맞아 죽었고, 또 그중에는 거짓 자백한 사람도 있었던 까닭에 자진하라는 명령이 내려지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방서榜書는 글씨를 적기 위한 목패木牌를 말합니다.
홍려洪礪(?-1533)는 경빈敬嬪 박씨朴氏의 소생인 당성옹주 혜정의 남편으로 작서灼鼠의 변이 있은 지 6년 뒤인 1533년 5월에 발생한 동궁 저주사건(후술)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신문을 받던 중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인종仁宗은 효성孝誠을 타고 난 분이었으나 문정왕후文定王后에게는 조금도 보호해주려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중종의 계비이며,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文定王后(1501-65)는 1517년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1545년 인종仁宗이 재위 8개월 만에 죽고 명종明宗이 12세의 나이로 왕위王位에 오르자 8년 동안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했습니다.
이때 남동생 윤원형이 권력을 쥐게 되자, 대윤大尹이라고 하는 윤임尹任 일파를 몰아내는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켰습니다.
문정왕후는 숭유배불崇儒拜佛을 무시하고 불교 중흥中興을 도모했습니다.
인종仁宗을 보호해주려는 마음이 없었던 것은 문정왕후의 자식이 아니라, 전비前妃인 장경왕후의 소생이었기 때문입니다.

『동각잡기東閣雜記』에 따르면 1527년(중종 22년) 불태운 쥐로 말미암아 옥사獄事가 일어났습니다.
이정형(1549-1607)의 저술 『동각잡기東閣雜記』는 조선 태조太祖의 창업創業에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까지 국가의 정치와 명신名臣의 행적을 다룬 야사野史입니다.
불태운 쥐가 궁중에서 두 차례에 걸쳐 발견되었습니다.
첫 번째는 2월 26일 세자궁 북쪽 동산의 한 나무에 꼬리가 잘리고 눈, 입, 귀 등을 불로 지진 쥐가 삼끈에 매달려 있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3월 1일 임금이 거처하는 강녕전康寧殿 근처에서 네 발이 끊어지고 꼬리와 주둥이를 불로 지진 쥐가 중종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처음에는 왕실에서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려 했으나, 대신들이 조사를 요구했고, 마침내 사건의 성격을 세자 저주를 위한 무고巫蠱로 규정함에 따라 사건이 확대되었습니다.
그래서 중종中宗의 후궁後宮인 경빈敬嬪 박씨朴氏와 경빈의 소생 복성군福城君에게 혐의가 돌아가, 결국 이들을 경빈의 고향인 경상도 상주로 귀양을 보내는 사건으로 일단락 지었습니다.
그러나 6년 뒤인 1533년(중종 28년) 5월 17일 동궁의 빈청賓廳 울타리 위에서 왕, 동궁, 문정왕후를 저주하는 글이 쓰인 인형이 발견되어, 다시 옥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주범主犯으로 몰린 경빈의 사위 당성위唐城尉 홍려洪礪는 범행을 부인하며 고문을 버티다 죽었고, 경빈과 복성군 역시 배후세력背後勢力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경빈의 소생 두 옹주 혜정옹주와 혜순옹주는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았습니다.
당성위 홍려는 곤장을 맞다 죽었고, 광천위光川尉 김인경金仁慶은 외지로 귀양 보냈으며, 좌의정 심정沈貞은 박빈과 결탁했다 하여 죽음을 내렸습니다.
이 밖에도 연루連累되어 죄를 받은 바가 아주 많았습니다.

빈청賓廳은 3정승과 정2품 이상 고위관직자가 모여 국사에 관한 중요한 안건을 협의한 곳입니다.
심정沈貞(1471-1531은 중종반정에 참여한 정국공신으로 공신을 위협하는 조광조 일파를 몰아내기 위해 기묘사화를 주동했습니다.
그는 경빈 박씨의 동궁 저주사건에 관련했다 하여 강서로 유배되었다가 결국 사사되었습니다.

무고巫蠱 사건의 경우 과연 그것이 피고들에 의해 저질러졌는지 불확실할 때가 많지만, 쥐를 태워 세자를 저주한 작서사건灼鼠事件의 경우도 미심쩍은 면이 있습니다.
피고들이 무고한 사실을 부정한 점도 그렇지만, 처음 작서사건의 진상조사를 강력히 요구했던 심정沈貞이 마침내 경빈의 일당으로 몰려 죽는다는 점도 일종의 역설이기 때문입다.
『동각잡기東閣雜記』에는 박숙의朴淑儀(경빈 박씨를 말한다)와 그 아들에게 죄를 씌워 마침내는 죽게까지 만들었으니 사람들이 모두 이를 원통해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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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때 궁중의 무고巫蠱





1613년(광해군 5년) 광해군光海君과 대북측大北側이 영창대군永昌大君과 김제남金悌男을 몰아낼 때 구실의 하나가 된 것은 영창대군의 생모 인목대비仁穆大妃의 광해군 저주사건이었습니다.
김제남金悌男(1562-1613)은 선조의 장인이며 인목대비의 아버지로 인목대비의 소생인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한다는 혐의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광해군은 후궁後宮 소생이었지만 부왕父王 선조宣祖에게 적자가 없었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공을 세워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선조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그러나 서출庶出의 광해군에게 상당한 심리적 위협이 된 것은 선조가 만년에 김제남의 딸 인목왕후를 계비繼妃로 맞이하여 낳은 영창대군이었습니다.
따라서 광해군과 광해군의 집권 기반인 대북측은 영창대군 세력의 제거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차에 박응서, 서양갑 등 양반의 서출들이 무륜당을 조직하고 강도짓을 하다가 1613년 4월 체포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이이첨 등 대북측은 이 사건을 김제남의 사주에 의한 영창대군 추대 모의로 조작하여, 많은 사람들을 이 사건에 연루시켰으며, 결국 그해 6월 1일 김제남을 사사했습니다.
다음으로 영창대군 제거를 위해 인목대비측이 각종 무고巫蠱를 한다는 혐의를 씌웠습니다.

인목대비가 무고를 한다는 소문은 이전부터 있었습니다.
1607년(선조 40년) 선조宣祖가 병들자 그 원인이 죽은 의인왕후에 있다 하여 의인왕후懿仁王后의 무덤인 유릉裕陵에 대해 저주를 했다든지, 1612년(광해군 4년) 강아지와 쥐를 불로 지져 광해군光海君을 저주했다든지, 이이첨의 사위 박자홍에게 베개를 선사하면서 사람의 뼈나 관 조각을 넣었다든지 하는 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사건화 되지 않고 있다가, 이때 의인왕후의 조카인 박동량朴東亮이 인목대비 측의 유릉 저주를 문제로 제기했고, 김제남의 측근으로부터 인목대비측이 고성이라는 소경 점쟁이와 교통한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고성을 집중 추궁하고, 또 많은 무녀巫女와 궁녀宮女들을 조사해 인목대비측이 광해군을 저주했다는 자백을 얻어냈습니다.
그래서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유배하는 한편,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했습니다.

의인왕후懿仁王后는 선조宣祖의 왕비로 1569년(선조 2년)에 왕비王妃로 책봉冊封되었으나 1600년(선조 33년) 46세로 승하했습니다.
유릉裕陵에 대해 저주”란 선조宣祖가 병중이었을 때 인목대비가 그 원인을 의인왕후의 귀신 탓으로 여겨 유릉에 허수아비를 묻고 의인왕후의 이름을 쓰고 활을 쏘아 의인왕후를 저주한 것을 말합다.
그러나 이는 박동량이 인목대비 집안과 원수임을 주장하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일 가능성도 있는데, 박동량은 선조로부터 인목대비의 소생 영창대군 보호를 부탁받았기 때문에 당시 영창대군 일파로 몰려 처형될 위기에 있었기 때문입다.
박동량朴東亮(1569-1635)은 선조로부터 영창대군을 잘 보호하라는 유교 7신의 한 사람이기 때문에 광해군 당시의 실세인 대북파의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기축옥사 때도 모반 혐의로 심문을 받았는데, 이 과정에서 인목대비가 의인왕후의 유릉을 저주했다고 함으로써 많은 무당들이 잡혀가 고초를 겪게 되었습니다.
인조반정 후 인목대비를 모함했다는 죄목으로 유배되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 인목대비측은 날조라 주장했습니다.
예컨대 『계축일기癸丑日記』 권 1에서는 결정적 증인인 고성부터가 광해군의 장인 유자신의 사주를 받아 자백한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고성이 끝내 처형되고 만 것을 보면 인목대비 측의 주장이 그대로 사실이라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많은 무당들이 고문에도 저주 사실을 부인했던 점을 미루어 미심쩍은 점이 있는 것도 사실입다.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에 따르면 광해군光海君 5년(1613년) 6월 16일 궁궐 내의 저주사건으로 해서 수련개水連介의 원정元情을 받았습니다.
수련개가 공초供招하기를 “저는 박본궁朴本宮(의인왕후 박씨의 친정)의 무비巫婢로 의인왕후懿仁王后의 3년상을 입었습니다. 박동량은 그 전에 신이 유릉裕陵(의인왕후의 능)을 저주한 것으로 의심하고 체포하여 관청에 가두었으나, 그러한 사실이 없었으므로 방면되었습니다. 궁궐의 저주에 대한 일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했습니다.

국무녀國巫女 수련개水連介는 70세였는데, 다른 무녀의 소개로 임금의 장인인 김제남의 집에 드나들었습니다.
원정元情은 사정을 아뢰는 글을 말합다.
공초供招는 죄인이 범죄 사실을 진술하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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