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中宗 때 궁중宮中의 무고巫蠱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중종조고사본말中宗朝故事本末」 가운데 ‘박경빈朴敬嬪과 복성군福成君의 옥사獄事’조에 관한 내용이 있습니다.
박경빈朴敬嬪(?-1533)은 경상도 상주 출신으로 미색美色이 있어 1505년(연산군 11년) 채홍사採紅使에 의해 뽑혔으나, 이듬해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났기 때문에 중종中宗의 후궁後宮이 되었습니다.
복성군福成君(?-1533)은 중종中宗의 아들입니다.
『당적보黨籍補』에 따르면 중종中宗 22년(1527년)에 경빈敬嬪 박씨朴氏와 그의 아들 복성군福成君 미嵋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함께 상주尙州 고향으로 귀양歸養을 보냈습니다.
중종 22년 2월 26일, 동궁의 해방亥方(북서)에 불태운 쥐 한 마리가 매달려 있었고, 물통 조각으로 만든 방서榜書도 함께 걸려 있었습니다.
이때 인종仁宗이 동궁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세자로 있었다는 의미) 인종은 해亥년에 태어났고,(인종은 1515년(중종 10) 을해생) 2월 26일이 생일이며, 해亥는 돼지에 해당하고 쥐는 (생김새가) 돼지와 비슷하므로, 당시 동궁을 저주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궁중宮中에서는 경빈의 소행이라 지목하는 바람에 경빈의 시녀와 당성위唐城尉 홍려洪礪의 종들이 많이 매 맞아 죽었고, 또 그중에는 거짓 자백한 사람도 있었던 까닭에 자진하라는 명령이 내려지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방서榜書는 글씨를 적기 위한 목패木牌를 말합니다.
홍려洪礪(?-1533)는 경빈敬嬪 박씨朴氏의 소생인 당성옹주 혜정의 남편으로 작서灼鼠의 변이 있은 지 6년 뒤인 1533년 5월에 발생한 동궁 저주사건(후술)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신문을 받던 중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인종仁宗은 효성孝誠을 타고 난 분이었으나 문정왕후文定王后에게는 조금도 보호해주려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중종의 계비이며,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文定王后(1501-65)는 1517년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1545년 인종仁宗이 재위 8개월 만에 죽고 명종明宗이 12세의 나이로 왕위王位에 오르자 8년 동안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했습니다.
이때 남동생 윤원형이 권력을 쥐게 되자, 대윤大尹이라고 하는 윤임尹任 일파를 몰아내는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켰습니다.
문정왕후는 숭유배불崇儒拜佛을 무시하고 불교 중흥中興을 도모했습니다.
인종仁宗을 보호해주려는 마음이 없었던 것은 문정왕후의 자식이 아니라, 전비前妃인 장경왕후의 소생이었기 때문입니다.
『동각잡기東閣雜記』에 따르면 1527년(중종 22년) 불태운 쥐로 말미암아 옥사獄事가 일어났습니다.
이정형(1549-1607)의 저술 『동각잡기東閣雜記』는 조선 태조太祖의 창업創業에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까지 국가의 정치와 명신名臣의 행적을 다룬 야사野史입니다.
불태운 쥐가 궁중에서 두 차례에 걸쳐 발견되었습니다.
첫 번째는 2월 26일 세자궁 북쪽 동산의 한 나무에 꼬리가 잘리고 눈, 입, 귀 등을 불로 지진 쥐가 삼끈에 매달려 있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3월 1일 임금이 거처하는 강녕전康寧殿 근처에서 네 발이 끊어지고 꼬리와 주둥이를 불로 지진 쥐가 중종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처음에는 왕실에서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려 했으나, 대신들이 조사를 요구했고, 마침내 사건의 성격을 세자 저주를 위한 무고巫蠱로 규정함에 따라 사건이 확대되었습니다.
그래서 중종中宗의 후궁後宮인 경빈敬嬪 박씨朴氏와 경빈의 소생 복성군福城君에게 혐의가 돌아가, 결국 이들을 경빈의 고향인 경상도 상주로 귀양을 보내는 사건으로 일단락 지었습니다.
그러나 6년 뒤인 1533년(중종 28년) 5월 17일 동궁의 빈청賓廳 울타리 위에서 왕, 동궁, 문정왕후를 저주하는 글이 쓰인 인형이 발견되어, 다시 옥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주범主犯으로 몰린 경빈의 사위 당성위唐城尉 홍려洪礪는 범행을 부인하며 고문을 버티다 죽었고, 경빈과 복성군 역시 배후세력背後勢力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경빈의 소생 두 옹주 혜정옹주와 혜순옹주는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았습니다.
당성위 홍려는 곤장을 맞다 죽었고, 광천위光川尉 김인경金仁慶은 외지로 귀양 보냈으며, 좌의정 심정沈貞은 박빈과 결탁했다 하여 죽음을 내렸습니다.
이 밖에도 연루連累되어 죄를 받은 바가 아주 많았습니다.
빈청賓廳은 3정승과 정2품 이상 고위관직자가 모여 국사에 관한 중요한 안건을 협의한 곳입니다.
심정沈貞(1471-1531은 중종반정에 참여한 정국공신으로 공신을 위협하는 조광조 일파를 몰아내기 위해 기묘사화를 주동했습니다.
그는 경빈 박씨의 동궁 저주사건에 관련했다 하여 강서로 유배되었다가 결국 사사되었습니다.
무고巫蠱 사건의 경우 과연 그것이 피고들에 의해 저질러졌는지 불확실할 때가 많지만, 쥐를 태워 세자를 저주한 작서사건灼鼠事件의 경우도 미심쩍은 면이 있습니다.
피고들이 무고한 사실을 부정한 점도 그렇지만, 처음 작서사건의 진상조사를 강력히 요구했던 심정沈貞이 마침내 경빈의 일당으로 몰려 죽는다는 점도 일종의 역설이기 때문입다.
『동각잡기東閣雜記』에는 박숙의朴淑儀(경빈 박씨를 말한다)와 그 아들에게 죄를 씌워 마침내는 죽게까지 만들었으니 사람들이 모두 이를 원통해했다고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