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격巫覡의 술법術法: 공창空唱과 신탁神托




『성종실록成宗實錄』에 따르면 성종成宗 21년(1490년) 8월 5일 병조판서兵曹判書 이극돈李克墩이 와서 아뢰기를 “지금 번상番床이 되어 서울에 올라와 있는 충청도 보은군의 정병正兵 김영산金永山이 요사스러운 말로 사람들을 홀리자, 도성 안의 사대부집 아녀자들이 다투어 점을 치러가기 때문에 그가 이르는 곳마다 무리를 이룹니다”고 했습니다.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요사妖邪한 말은 어떤 것이냐?” 하니, 이극돈이 대답하기를 “귀신鬼神이 공중에 있으면서 능히 지나간 일을 말할 수 있다고 핑계하니, 사대부집 여자들이 믿고 혹하지 않음이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극돈李克墩은 성종成宗 때 정계에 진출한 사림파와 반목이 심한 훈구파의 거목이었습니다.

『세종실록世宗實錄』에 따르면 세종世宗 25년(1443년) 8월 25일 의정부議政府에서 음사淫祀를 금지하는 법을 조목별로 진술했습니다.
하나, 무녀들이 혹은 고금古今에 없는 신이라 일컫거나, 혹은 당대에 사망한 장수將帥나 재상宰相의 신이라 칭하면서 특별히 신의 이름을 만들어내고, 제 스스로 이르기를 ‘신이 내 몸에 내렸다’고 하며, 요망한 말로 여러 사람을 혹하게 하는 자는 ‘요망한 말이나 요망한 글을 조작한 데 대한 처벌규정’에 의하여 참형慘刑에 처하도록 하소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거울을 걸어둠 그리고 부적符籍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에 따르면 연산군燕山君 9년(1503년) 4월 29일 지평持平 권헌權憲이 아뢰었습니다.
국무國巫 돌비乭非는 술법이 많아 거울을 방안에 걸어놓고 말하기를 ‘신이 그 안에 있는데 사람들은 보지 못한다’고 합니다.
거울은 원형圓形의 청동제 무구巫具인 명두明斗 혹은 명도明圖를 말합니다.
앞면은 배가 부르고 뒷면에는 일日, 월月, 칠성七星 등의 글자를 새기거나 그 모양을 판 것입니다.
명두明斗는 보통 무신도巫神圖 상단의 중앙에 걸어 두는데, 굿당에 청배된 신이 머무는 곳으로 여겨집니다.
큰 무당인 신어머니가 제자인 신딸에게 대를 물릴 경우 그 상징물로 명두를 줍니다.

『연산군일기』에 따르면 이익李瀷이 『성호사설星湖僿說』에 적었습니다.
시골 무당이 만명신萬明神을 숭상하고 받들어, 백성들에게 질병疾病이 있으면 곧 만명신에게 기도했다. 누가 말하기를 ‘만명萬明은 곧 신라 김유신金庾信의 어머니인데, 야합野合해서 서현舒玄에게로 달아난 사람’이라 했다. 이를 받드는 자는 반드시 큰 거울을 걸어놓았으며 거울은 반드시 활처럼 휜 모양인데, 이것은 아마 신라 풍속風俗일 것이다. 그러나 그 달아난 여자 귀신鬼神 주제에 어찌 천 년 동안 힘이 없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명신萬明神은 ‘말명’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말명은 좁게는 죽은 여자의 영혼, 넓게는 죽은 영혼 모두를 가리킵니다.
말명과 혈연관계血緣關係에 있을 경우 말명은 조상신의 일종이 되기도 합니다.
만명부인萬明婦人은 갈문왕葛文王 입종立宗의 손녀이며, 진흥왕振興王의 아우인 숙흘종肅訖宗의 딸입니다.
가야 왕족 출신인 서현과 중매도 없이 야합野合했고, 서현이 지금의 충북 진천군인 만노군萬弩郡 태수太守로 가게 되자 함께 떠나려 했습니다.
그러나 숙흘종肅訖宗은 두 사람의 결합結合을 반대하여 만명萬明을 집에 가두고 사람을 시켜 지키게 했으나, 갑자기 벼락이 떨어져 지키는 사람들이 흩어진 틈에 서현과 함께 도망하여 만노군으로 갔습니다.
이 만명부인을 간혹 무조巫祖라 하고, 또 ‘말명’으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양자를 동일시할 수 있을지는 미상입니다.

『연산군일기』에 따르면 연산군燕山君 9년(1503년) 4월 29일 경연에 납시었습니다.
지평持平 권헌權憲이 아뢰기를 “이 무녀는 술법이 많습니다. 놋그릇이 있는데, 이것을 부처님께 공양하는 그릇이라 하고, 또 부적을 가지고 민중들을 미혹시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무녀”란 국무國巫 돌비乭非를 가리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운명을 점침卜命과 쌀점米卜




『용재총화慵齋叢話』에 따르면 태종太宗 때 이숙번李叔蕃과 칠원부원군 윤자당은 같은 배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기 달랐습니다.
윤자당의 어머니 남씨南氏는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되어 함양咸陽에서 살았습니다.
『용재총화慵齋叢話』는 조선 전기 성현成俔(1439-1504)의 수필집으로 전 10권입니다.
이숙번李叔蕃(1373-1440)은 제1차 왕자난과 제2차 왕자난 때 태종太宗을 도와 공을 세웠지만, 자기의 공만 믿고 안하무인眼下無人으로 행동行動하다가, 여러 차례 대간臺諫의 탄핵彈劾을 받아 결국 1417년 관직이 삭탈되고 함양에 유배되었습니다.

윤자당은 일곱 살 때 어머니를 따라 무당집에 가서 운명을 물어보았더니, 무당이 말하기를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아이는 귀한 상입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반드시 동생의 힘 때문에 귀함을 얻을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남씨가 말하기를 “과부의 아들이 어찌 동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했습니다.
그 뒤에 남씨는 이씨李氏 집으로 시집을 가서 아들을 낳았는데, 이 사람이 바로 재상 이숙번李叔蕃입니다.
윤자당은 이숙번의 힘으로 봉작封爵을 얻고 군君에 봉해졌습니다.
윤자당은 태종太宗 원년 좌명공신佐命功臣에 봉해졌고, 세종世宗 4년 칠원부원군漆原府院君에 봉해졌습니다.

이덕무李德懋는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무녀척미조巫女擲米條」에서 말했습니다.
우리나라 무녀들은 흰 쌀을 소반에 쌓아놓고 그 쌀을 조금 집어서 던진 다음, 입으로 주문을 외우면서 손가락 끝으로 던진 쌀을 헤아려서 스스로 길흉吉凶을 안다고 말한다. 이 풍속風俗도 유래가 있으니 『요사遼史』에 ‘정월 초하룻날이면 창문으로 올라가 쌀 덩어리米團(미단)을 던져 홀수가 되면 불리하다고 여겼다’ 했으니, 이 쌀 덩어리란 것은 경단粉團(분단)의 일종이 아닌가 한다.

이덕무李德懋(1741-93)는 서얼庶孼 출신出身이기 때문에 크게 등용되지 못했으나 1778년(정조正祖 2년) 북경北京을 다녀와서 북학北學을 제창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는 이덕무의 시문 전집으로 71권 25책이며, 청장관靑莊館은 이덕무의 호입니다.
「무녀척미조巫女擲米條」는 무녀巫女가 쌀을 뿌려 점米卜을 치는 것에 대해 언급한 조목입니다.
『요사遼史』는 중국 요遼나라의 역사歷史를 기록한 기전체紀傳體 사서로 전 116권입니다.
경단粉團(분단)은 찹쌀가루 따위를 반죽하여 밤톨만한 크기로 빚은 떡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무당의 점복(무복巫卜)과 고리짝(고노拷栳) 긁기





이수광李晬光은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말했습니다.
이상二相 이장권李長坤은 연산군燕山君 때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로 있다가 도망쳤다. 처음에는 몇 달마다 한 번씩 그의 집에 가서 부인을 보고 갔다. 하루는 집에 도착하니 날이 밝으려 하여, 감히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집 뒤 대나무 숲에 숨어 있었다. 부인은 올 날짜가 지났는데도 오지 않으므로, 죽은 것이 아닌가 의심하여 무당巫堂을 불러 점占을 쳤다. 무당이 답하기를 ‘죽지 않았습니다. 그림자가 뜰 가운데에 있습니다’ 했다. 공公이 그 말을 듣고 이후 감히 두 번 다시 집에 가까이 가지 않았다. 만년에 그는 늘 말하기를 ‘무당의 말도 헛된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이수광李晬光(1563-1628)은 문신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전후前後해서 몇 차례 사신使臣으로 명明나라를 왕래하면서 서양 문물과 천주교天主敎를 소개함으로 실학實學 발전의 선구자先驅者가 되었습니다.
『지봉유설芝峯類說』은 이수광이 지은 『기사일문집奇事逸聞集』입니다.
이상二相은 좌우정左右晶의 별칭입니다.
교리校理는 정5품 벼슬입니다.
이장권李長坤(1474-1519)은 1504년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거제도로 유배되었습니다.
그러나 연산군燕山君은 이장곤이 문文에다 무武까지 겸했기 때문에 변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처형하려고 하자, 이를 눈치 채고 함흥으로 달아나 양수척의 무리 속에 숨어 살았습니다.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 다시 등용되어 내외의 요직을 두루 거쳤습니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말했습니다.
지금 여자 무당들이 신에게 기도할 때 젓가락으로 고리짝을 긁으면서 노래의 반주로 삼는데, 이것은 여진女眞의 풍속에서 유래한 것이다. 청淸나라 고종高宗 건륭시대乾隆時代에 편찬한 『예기도식禮器圖式』에서 말하기를 ‘연향경륭무악절宴饗慶隆舞樂節이라는 악기는 본조本朝(청나라)에서 대궐 뜰에서 연주하는 절節로 지정했으며, 대나무를 엮어 만드는데, 그 형태는 키와 흡사하다. 춤출 때 이를 긁으면서 음악의 장단을 맞춘다’고 했다. 이것은 여진족이 우리 북관北關과 서로 접해 있기 때문에 그 풍속에 물들어 그렇게 된 것이다.

고리짝이란 대나무나 버드나무로 만든 물건을 담는 그릇을 말합니다.
서울, 경기 지역의 망자천도굿에서 사자死者의 넋을 달래기 위해 합니다.
청淸나라 고종高宗(1735-96)이란 청나라 제4대 황제皇帝를 말합니다.
『예기도식禮器圖式』은 청대淸代 국가의식國家儀式에 사용되는 각종 기물의 그림과 해설을 묶은 책으로 전 28권이며, 건륭乾隆 24년(1759년) 장친왕莊親王 윤록允祿 등이 칙명을 받들어 편찬했습니다.
‘연향경륭무악절宴饗慶隆舞樂節은 청淸나라 궁중연회宮中宴會에서 연주되는 악기로 겉에 호랑이 얼굴이 그려져 있습니다.
절節은 키처럼 생긴 타악기의 일종입니다.
북관北關은 함경북도 지역을 말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접살법接煞法과 칼날 위를 뛰면서 추는 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말했습니다.
『이견지夷堅志』에는 ‘동성이랑董城二郞이라는 사람이 죽어서 염습殮襲을 마친 다음, 집안 식구들이 당시의 풍습에 따라 부엌 앞에 재를 가늘게 채쳐두고 그 위에 시루를 덮어두었다. 그것은 사자死者가 간 곳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아침 일찍 시루를 들어보니 재위에는 거위 발자국 두 개가 분명하게 찍혀 있었다’는 설화가 실려 있다. 이것이 지금 접살법接煞法이라 하는 것이고, 우리나라 풍속風俗에서는 반혼返魂이라 일컫는 것이다. 접살接煞이란 비록 억지로 해석하기가 어렵지만, 저영儲泳의 『거의설袪疑說』에는 다음과 같은 언급이 있다. ‘사람이 죽으면 죽은 날의 살기煞氣를 받는다. 음양가陰痒家의 기록한 바에 의하면 자살雌煞과 웅살雄煞이 있고, 또 살기가 나가는 것도 있고 나가지 않는 것도 있다고 한다. 이러한 설은 믿을 수 없지만, 자살刺殺이 나가지 않으면 죽은 이의 오른쪽 발이 뒤틀려 왼쪽을 향하고, 웅살雄殺이 나가지 않으면 사자死者의 왼쪽 발이 뒤틀려 오른쪽을 향한다. 그리고 자살과 웅살이 모두 나가지 않으면 두 발이 모두 바깥을 향하고 뒤틀리지 않는다고 하니, 어찌 이상한 일이 아닌가’라 했다.

『이견지夷堅志』는 남송南宋의 홍매洪邁(1123-1202)가 편찬한 괴기소설집으로 전 206권입니다.
염습殮襲은 시신을 씻긴 뒤 옷을 입히고 염포로 묶는 일을 말합니다.
반혼返魂이란 불교佛敎에서 사자死者를 화장하고 그 혼魂을 집으로 돌로 불러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이능화李能和는 『조선무속고朝鮮巫俗考』에서 반혼返魂을 속칭俗稱 ‘넋두리’(굿에서 무당이 사자死者의 넋이 실려 하는 말)라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우리 맹속氓俗(풍속이란 뜻)에 무당巫堂으로 하여금 신사神事를 하여 사자死者의 혼魂을 부르는 일이 있다. 무당이 망인亡人의 말로 생전의 소위사所爲事를 일일이 든다. 간혹 제이인第二人도 모르는 은밀한 관계를 집어내어 가인家人으로 하여금 놀라게 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것을 중국의 접살接煞과 동일시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참고로 요즈음은 반혼이라면 장사 후 신주神主를 집으로 모시고 오는 일을 말합니다.
저영儲泳은 송대宋代 사람. 정확한 생몰년生沒年을 알 수 없다. 시명詩名이 있었고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에 정통했습니다.
『거의설袪疑說』은 각종 무술巫術의 신빙성信憑性을 논파하고자 한 저술입니다.

이규경李圭景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말했습니다.
무당이란 비록 천한 기예技藝이지만, 옛날과 지금을 따져서 그 우열優劣을 논한다면 형초荊楚, 오월吳越 지방의 큰 무당巫堂이다. 물동이를 입술에 붙인다든지 맨발로 예리한 칼날을 밟는 것 따위에 이르러서는 혹시 요사한 귀신을 끼고서 그 기술의 신기하고 이상함을 자랑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또 이것은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낚싯밥인데, 사람들로 하여금 그 술법에 빠져서 현혹되어 맹종하도록 하는 것이다.

형초荊楚는 중국 호북성, 호남성 일대를 말합니다.
오월吳越은 중국 절강성, 강소성 일대를 말합니다.
중국 삼국시대三國時代 오吳나라의 책사 장굉張紘(?-?)이 중국 삼국시대 위魏나라의 문학자진림陳琳(?-217)에게 준 편지에 대해 진림의 답장에서 ‘작은 무당이 큰 무당巫堂을 보면 신기神氣가 소진消盡해버린다’고 했습니다.
맨발로 예리한 칼날을 밟는 것 따위”란 요망한 무당이 술법術法을 행行할 때 물동이를 들어 입술에 붙이는데 떨어지지 않으며, 또 물동이 위에 칼날을 세워놓고 맨발로 칼 날 위에서 춤을 추어도 발이 끊어지지 않고 물동이도 깨어지지 않습니다.
요사妖邪한 귀신鬼神을 끼고 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