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당의 점복(무복巫卜)과 고리짝(고노拷栳) 긁기





이수광李晬光은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말했습니다.
이상二相 이장권李長坤은 연산군燕山君 때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로 있다가 도망쳤다. 처음에는 몇 달마다 한 번씩 그의 집에 가서 부인을 보고 갔다. 하루는 집에 도착하니 날이 밝으려 하여, 감히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집 뒤 대나무 숲에 숨어 있었다. 부인은 올 날짜가 지났는데도 오지 않으므로, 죽은 것이 아닌가 의심하여 무당巫堂을 불러 점占을 쳤다. 무당이 답하기를 ‘죽지 않았습니다. 그림자가 뜰 가운데에 있습니다’ 했다. 공公이 그 말을 듣고 이후 감히 두 번 다시 집에 가까이 가지 않았다. 만년에 그는 늘 말하기를 ‘무당의 말도 헛된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이수광李晬光(1563-1628)은 문신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전후前後해서 몇 차례 사신使臣으로 명明나라를 왕래하면서 서양 문물과 천주교天主敎를 소개함으로 실학實學 발전의 선구자先驅者가 되었습니다.
『지봉유설芝峯類說』은 이수광이 지은 『기사일문집奇事逸聞集』입니다.
이상二相은 좌우정左右晶의 별칭입니다.
교리校理는 정5품 벼슬입니다.
이장권李長坤(1474-1519)은 1504년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거제도로 유배되었습니다.
그러나 연산군燕山君은 이장곤이 문文에다 무武까지 겸했기 때문에 변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처형하려고 하자, 이를 눈치 채고 함흥으로 달아나 양수척의 무리 속에 숨어 살았습니다.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 다시 등용되어 내외의 요직을 두루 거쳤습니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말했습니다.
지금 여자 무당들이 신에게 기도할 때 젓가락으로 고리짝을 긁으면서 노래의 반주로 삼는데, 이것은 여진女眞의 풍속에서 유래한 것이다. 청淸나라 고종高宗 건륭시대乾隆時代에 편찬한 『예기도식禮器圖式』에서 말하기를 ‘연향경륭무악절宴饗慶隆舞樂節이라는 악기는 본조本朝(청나라)에서 대궐 뜰에서 연주하는 절節로 지정했으며, 대나무를 엮어 만드는데, 그 형태는 키와 흡사하다. 춤출 때 이를 긁으면서 음악의 장단을 맞춘다’고 했다. 이것은 여진족이 우리 북관北關과 서로 접해 있기 때문에 그 풍속에 물들어 그렇게 된 것이다.

고리짝이란 대나무나 버드나무로 만든 물건을 담는 그릇을 말합니다.
서울, 경기 지역의 망자천도굿에서 사자死者의 넋을 달래기 위해 합니다.
청淸나라 고종高宗(1735-96)이란 청나라 제4대 황제皇帝를 말합니다.
『예기도식禮器圖式』은 청대淸代 국가의식國家儀式에 사용되는 각종 기물의 그림과 해설을 묶은 책으로 전 28권이며, 건륭乾隆 24년(1759년) 장친왕莊親王 윤록允祿 등이 칙명을 받들어 편찬했습니다.
‘연향경륭무악절宴饗慶隆舞樂節은 청淸나라 궁중연회宮中宴會에서 연주되는 악기로 겉에 호랑이 얼굴이 그려져 있습니다.
절節은 키처럼 생긴 타악기의 일종입니다.
북관北關은 함경북도 지역을 말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