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에게 이스라엘의 대통령직을 권하다




1921년에 아인슈타인을 미국으로 데려온 끈기 있는 시온주의자 카임 바이츠만이 이스라엘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은 총리와 각료들에게 대부분의 권력이 주어진 체제에서는 명예롭기는 하지만 형식적인 자리였다.
바이츠만이 1952년에 타계하자 예루살렘의 신문들은 아인슈타인이 그의 자리를 물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당시 총리였던 다비드 벤구리온은 여론의 압력에 굴복했고, 아인슈타인에게 요청이 갈 것이라는 소문이 빠르게 확산되었다.

아인슈타인은 바이츠만이 타계하고 1주일이 지난 후 『뉴욕 타임스』에 실린 작은 기사에서 그 소식을 처음 보았다.
처음에는 그와 집에 있던 여성들이 모두 웃어넘겼지만 기자들이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어느 손님에게 “이건 정말 거북합니다. 정말 거북한 일입니다”라고 했다.
몇 시간 후 워싱턴의 이스라엘 대사인 압바 에반으로부터 전보가 도착했다.
그 전보는 대사관에서 공식으로 그를 면담하기 위해 사람을 보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아인슈타인은 “내가 거절한 텐데 왜 그 사람이 그렇게 먼 길을 와야 하나?” 하고 한탄했다.

헬렌 듀카스는 에반 대사에게 전화를 하는 간단한 방법을 생각해냈다.
아인슈타인이 전화를 했고, 에반은 “저는 선생님이 전화로 거절했다고 정부에 보고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행동을 해서 공식적으로 제안을 전달해야만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에반은 결국 보좌관을 보내 아인슈타인에게 대통령직을 맡아달라고 요청하는 공식 편지를 전달했다.
에반의 편지는 “수락하시면 이스라엘로 이사를 가서 시민권을 받아야 합니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에반은 서둘러 아인슈타인에게 “선생님의 일이 극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는 정부와 국민은 선생님의 위대한 과학 연구를 계속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즉 대통령직은 그의 존재가 필요할 뿐이지 실제로 일은 많지 않다는 뜻이었다.

거절편지를 준비해놓은 아인슈타인은 에반의 특사가 도착한 즉시 그 편지를 전달했다.
방문객은 “저는 평생 변호사로 살았지만 제가 설명도 하기 전에 반박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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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의 최후



1954년 3월 동료들이 75회 생일선물로 자신들이 5년 전에 마련해준 음향기기를 바꿔주자 아인슈타인은 베토벤의 「장엄미사곡」이 담긴 RCA 빅터 레코드판을 반복해서 듣기 시작했다.
그는 과거에 베토벤을 “너무 개인적이고 거의 벌거벗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종교적 본능에는 그런 종류의 부속물이 포한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위잔 문제에도 불구하고 아인슈타인은 여전히 산책을 좋아했다.
괴델과 함께 연구소로 가거나 연구소에서 걸어서 돌아오기도 했으며, 마르고트와 함께 프린스턴 근처의 숲을 거닐었다.

버트런드 러셀은 아인슈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핵시대에 평화를 보장할 수 있는 구조를 찾아내는 일을 계속해야 한다고 격려했다.
러셀은 자신들이 모두 1차 세계대전을 반대했고, 2차 세계대전을 지지했던 사실을 기억했다.
이제 3차 세계대전을 예방하는 것이 필수였다.
러셀은 “저는 유명한 과학자가 정부에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재앙을 깨닫게 해줄 극적인 일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했다.
아인슈타인은 답장에서 그들과 몇 사람의 다른 유명한 과학자와 사상가들이 서명할 수 있는 공개선언을 제안했다.

닐스 보어는 거절했지만 막스 보른을 포함한 9명의 과학자들이 서명에 동참할 것을 동의했다.
러셀은 제안문을 단순한 청원으로 마무리했다.
미래의 어떠한 세계대전에서도 핵무기가 사용될 것이 확실하고, 그런 무기가 인류의 지속적인 존재를 위협할 것이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우리는 세계의 정부들이 세계대전으로는 자신들의 목적을 추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공개적으로 인정하기를 요구하며, 결과적으로 국가 간 갈등의 모든 문제의 해결을 위한 평화적 수단을 찾아낼 것을 요청한다.

아인슈타인은 76회 생일가지 생존했지만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머서 가 112번지 앞에 모여든 기자와 사진기자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러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다.
며칠 후 그는 과학적 조언자였던 미셸 베소의 사망소식을 들었다.
그는 베소의 가족에게 보낸 위로편지에 “그는 이렇게 이상한 세상에서 나보다 조금 먼저 떠났습니다. 그것은 아무 뜻도 없습니다. 우리 믿음을 가진 물리학자에게 과거, 현재, 미래의 구분은 완고한 환상일 뿐입니다”라고 적었다.

아인슈타인은 1955년 4월 11일에 아인슈타인-러셀 선언문에 서명했다.
훗날 러셀이 밝혔듯이 “그는 미쳐버린 세상에서 제정신으로 남아있었다.
그 문서에서 비롯된 것이 매년 과학자와 사상가들이 모여 핵무기를 통제하는 방법을 논의했던 퍼그워시회의Pugwash Conference on Science and World Affairs였다.

그날 오후 늦게 이스라엘 대사 압바 에반이 유대국 7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예정된 아인슈타인의 라디오 연설에 대해서 의논하기 위해 그를 방문했다.
에반은 그의 연설을 5천만 명이 청취하게 될 것임을 알려주었다.
아인슈타인은 “이제 내게 세계적으로 유명해질 기회가 생겼습니다”라면서 웃었다.

아인슈타인이 다음 날 연구소로 출근했지만 사타구니에 통증을 느꼈다.
다음 날 그는 집에 머물렀다.
이스라엘 영사가 찾아왔다.
방문객들이 떠난 뒤 그는 잠을 자려고 누웠다.
듀카스는 그가 한낮에 화장실로 뛰어가는 소리를 들었고, 그는 그곳에 쓰러졌다.
의사가 그에게 모르핀을 주사하여 잠을 자도록 했으며, 듀카스가 자신의 침대를 그의 침대 바로 옆에 옮겨두고 밤새도록 탈수된 그의 입술에 얼음찜질을 해주었다.
그의 동맥류가 터지기 시작했다.

다음 날 그의 집으로 불려온 여러 의사들은 상의 끝에 힘들어 보이기는 하지만 동맥을 고칠 수도 있는 외과 의사를 추천했다.
아인슈타인은 그런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듀카스에게 “삶을 인공적으로 연장하는 것은 품위가 없다. 나는 내 몫을 했고, 이제 떠날 시간이다. 나는 우아하게 떠나겠다”고 했다.

다음 날 아침 듀카스는 그가 심한 고통을 느끼고 머리를 들지도 못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가 전화로 달려갔고 의사는 그를 병원으로 데려오도록 했다.
구급차의 자원봉사 구급대원은 프린스턴의 정치경제학자였고, 아인슈타인은 그와 활발한 대화를 계속 할 수 있었다.
마르고트는 한스 알베르트에게 전화했으며, 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비행기를 타고 아버지의 병실에 도착했다.
그의 가까운 친구가 된 동료 독일 망명자였던 경제학자 오토 나탄도 뉴욕에서 달려왔다.

일요일이었던 4월 17일에 잠을 깬 그는 훨씬 좋아진 상태였다.
그는 듀카스에게 자신의 안경과 종이 그리고 연필을 가져다달라고 했고, 몇 가지 식을 적어나갔다.
그는 한스 알베르트에게 몇 가지 과학적 아이디어를 이야기해주고 나탄에게는 독일 재무장의 위험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자신의 방정식을 가리키면서 반농담으로 아들에게 “내가 수학을 조금 더 알았더라면”이라고 말했다.

월요일이었던 1955년 4월 18일 오전 1시에 간호사는 그가 알아들을 수 없는 몇 마디의 독일어를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다.
큰 물집처럼 동맥류가 터져버렸고, 아인슈타인은 일흔여섯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침대 옆에는 이스라엘 독립기념일을 위해 준비한 연설문의 원고가 놓여있었다.
그것은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미국 시민이나 유대인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이야기합니다”라고 시작되었다.

그의 침대 옆에는 빽빽하게 쓴 방정식을 지우고 수정한 12페이지의 서류도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자신의 잡히지 않는 통일장이론을 찾으려고 애를 썼다.
그가 마지막으로 잠을 자기 직전에 쓴 것은 자신과 우리 모두를 우주의 법칙에 나타난 정신에 조금 더 가까이 데려다줄 것이라고 바라던 한 줄의 기호와 숫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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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의 뇌는 40년 이상 떠돌아다니는 유물이 되었다




아인슈타인의 유언에 따라 그는 세계에 소식이 알려지기도 전이었던 사망한 날 오후에 트렌턴에서 화장되었다.
화장장에는 한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헬렌 듀카스, 오토 나탄과 벅키 가족 네 사람을 포함하여 12명의 사람들이 자리했을 뿐이었다.
나탄은 괴테의 시 몇 줄을 읽었고, 그 후 아인슈타인의 유골은 근처에 있는 델라웨어 강에 뿌려졌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어느 누구도 20세기 지식의 엄청난 팽창에 그렇게 많이 기여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지식이라는 힘을 소유하는 일에 그보다 더 겸손하지 못했으며, 지혜가 없는 힘이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더 확실하게 알지 못했습니다”라고 선언했다.

『뉴욕 타임스』는 다음 날 그의 사망에 대해서 9편의 기사와 사설을 실었다.
인간은 이렇게 작은 지구에 서서, 무수한 별과 파도치는 바다와 흔들리는 나무를 바라보면서 궁금하게 여긴다. 이 모든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지난 300년 동안에 우리 중에 등장했던 가장 사려 깊은 의문을 품은 사람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라는 이름의 사람으로 사망했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마지막 안식처가 병적인 숭배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자신의 유골을 뿌려달라고 고집했다.
그러나 그의 시신 중에서 화장을 하지 않은 한 부분이 있었다.
아인슈타인의 뇌는 40년 이상 떠돌아다니는 유물이 되었다.

아인슈타인이 사망하고 몇 시간 만에 프린스턴 병원의 병리학자 토머스 하비에 의해 부검이 실시되었다.
그는 온화한 성격으로 퀘이커 교도였다.
정신이 나가버린 오토 나탄이 조용히 지켜보는 가운데 하비는 아인슈타인의 중요한 장기를 하나씩 제거해서 살펴보다가 전기톱으로 그의 두개골을 절개해서 뇌를 제거했다.
시신을 다시 꿰매던 그는 허락을 요구하지도 않고 아인슈타인의 뇌를 약품으로 처리해서 보관하기로 결정했다.

다음 날 아침 어느 프린스턴 학교의 5학년 교실에서 교사가 학생들에게 어떤 소식을 들었는지 물었다.
그런 소식을 알려주는 첫 번째 학생이 되려고 애를 쓰던 어느 소녀가 “아인슈타인이 사망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녀의 대답은 교실 뒤쪽에 앉아있던 보통은 조용한 소년에 의해 압도되었다.
그는 “아버지가 그의 뇌를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아인슈타인의 가족은 물론 나탄도 그 사실을 알고 몹시 놀랐다.
한스 알베르트가 병원에 전화를 걸어 항의했지만 하비는 뇌를 연구하는 것이 과학적으로 가치가 있을 수 있다고 고집했다.
그는 아인슈타인도 그것을 원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스는 마지못해 용납했다.

하비는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친구들에게 아인슈타인 뇌의 일부를 현미경 슬라이드로 만들도록 요청했고, 뇌는 조각으로 잘라져서 과자를 담는 유리병 두 개에 넣어졌다.
몇 년이 지났고, 하비는 슬라이드나 뇌 조각들을 자신의 마음에 드는 임의의 연구자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는 엄격한 연구를 요구하지도 않았으며, 몇 년이 지나도 논문은 발표되지 않았다.
그런 사이에 프린스턴 병원을 그만둔 그는 이혼을 한 후 몇 차례 재혼했으며, 주소도 남기지 않으면서 뉴저지주에서 미주리를 거쳐 캔사스주로 이주했지만 언제나 아인슈타인 뇌의 남은 부분을 가지고 다녔다.

아인슈타인의 손녀 에벌린 아인슈타인은 이혼을 하고 최저 수준의 직업을 갖고 가난과 싸우고 있었다.
그녀는 한스 알베르트와 그의 아내 프리다의 양녀였지만 그녀의 탄생 시기와 상황이 확실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아인슈타인의 딸일 수도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녀는 엘자가 사망한 후 아인슈타인이 여러 여성들과 시간을 보내던 시기에 태어났다.
어쩌면 그런 밀애의 결과로 그녀가 태어났고, 아인슈타인이 그녀를 한스 알베르트에게 입양시켰을 수도 있었다.
아인슈타인 기록의 초기 편집자였던 로버트 슐만과 일을 하던 그녀는 아인슈타인의 뇌에서 채취한 DNA의 연구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를 확인하고 싶었다.
불행하게도 하비가 뇌를 처리한 방법으로는 쓸 만한 DNA를 채취할 수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녀의 의문은 영원히 해결될 수 없었다.

하비가 그동안 아인슈타인의 뇌를 나눠주었던 십여 명의 사람들 중 오직 세 사람만이 중요한 과학적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첫 번째 논문은 마리안 다이아몬드가 이끄는 버클리 연구진이 발표한 것이었다.
그 논문은 아인슈타인 뇌의 두정피질parietal cortex 부위에서 글리아 세포glial cell라고 알려진 것과 뉴런neuron(신경계의 구조적・기능적 단위)의 비율이 높다고 보고했다.
저자들은 그것이 뉴런들이 활용되었기 때문에 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했다는 증거일 수 있다고 했다.

이 연구에서는 그의 일흔여섯 살 때의 뇌를 평균 예순네 살에 사망한 11명의 다른 남성들의 뇌와 비교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비교 대상 중에는 그런 결과가 맞는지를 확인시켜줄 만한 다른 천재의 뇌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근원적인 문제도 있었는데, 평생에 걸친 뇌의 발달을 추적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물리적 특성이 더 높은 지능의 원인일 수 있는지와, 그런 특징이 오랜 세월에 걸쳐서 뇌의 특정한 부위를 사용하고 훈련한 결과일 수 있는지가 확실하지 않았다.

1996년에 발표된 두 번째 논문은 아인슈타인의 대뇌피질cerebral cortex이 5명의 다른 뇌 시료의 경우보다 더 얇았고, 뉴런의 밀도가 더 높았다고 주장했다.
역시 시료가 너무 적었으며 증거가 너무 애매했다.

가장 많이 인용된 논문은 1999년 온타리오Ontario의 맥매스터McMaster 대학의 여교수 샌드라 위텔슨Sandra Witelson의 연구진이 발표한 것이었다.
하비는 자발적으로 그녀에게 팩스를 보내 연구용 시료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이미 80대였지만 손수 운전하여 두정엽lobus parietalis(대뇌 반구의 가운데 꼭대기)을 포함해서 아인슈타인 뇌의 약 5분의 1에 해당하는 덩어리를 캐나다까지 날라다주었다.

35명의 다른 남성들의 뇌와 비교했을 때 아인슈타인의 뇌는 두정엽의 한 부분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짧았으며, 그것이 수학적・공간적 사고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의 뇌에서는 이 부분이 15% 정도 더 넓었다.
논문은 그런 특징들이 이 영역에서 훨씬 더 풍부하고 훨씬 더 통합적인 뇌 회로를 만들어냈을 것으로 추정했다.

아인슈타인은 말년에 가까워서 “나는 특별한 재능이 아니라 열정적인 호기심을 갖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1930년대 어느 날 아인슈타인은 시인들이 어떻게 일하는지 알아보고 싶어서 생종 페르스Saint John Perse(1887-1975, 1960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를 프린스턴으로 초청했다.
아인슈타인은 “시상이 어떻게 떠오릅니까?” 하고 물었다.
시인은 직관과 상상의 역할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아인슈타인은 “과학자에게도 똑같습니다. 그것은 갑작스런 환상이고 거의 황홀경에 가까운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 후에 지적 분석과 실험으로 그런 직관을 확인하거나 부정하게 됩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상상에 의한 거대한 약진이 있습니다”라고 했다.

아인슈타인은 옥스퍼드에서 발표한 신조에서 “자연은 단순성을 좋아한다”는 뉴턴의 격언과 비슷한 의미로 “자연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수학적 아이디어의 구현이다”라고 했다.
아인슈타인은 단순성과 아름다움을 목표로 했으며, 그에게 아름다움은 무엇보다도 근본적으로 단순성이었다.

세상에는 염치없는 천재들이 많지만 아인슈타인이 특별했던 것은 그의 정신과 영혼이 그런 겸손함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말했다.
정신은 우주의 법칙에서 발현되는 것이며, 우주의 법칙은 인간의 정신보다 엄청나게 뛰어나고, 하찮은 능력을 가진 우리가 겸손하게 느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의 추구는 특별한 종류의 종교적 감정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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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神祀의 폐단弊端



요즈음 사람들은 귀신鬼神을 다투어 믿으며, 무릇 길흉화복吉凶禍福에 대해 한결같이 무당巫堂의 말만 듣고 화상畵像을 그려놓거나 돈을 걸어놓기도 하고, 영혼靈魂을 맞이하여 집안에 들이기도 하며, 공창空唱을 추종하기도 하며, 직접 성황城隍에 제사도 지내며, 노비奴婢를 바치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우리 조정에서 금하는 바로서 『경제육전속전經濟六典續典』에도 실려 있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그 폐단弊端을 깊이 아시고, 또 법을 집행하는 관부(형조, 한성부 등을 가리킴)로 하여금 무당을 모두 찾아내어 도성 밖으로 내쫓게 하셨습니다.
엎드려 보건대 요즈음 금하는 법령이 차츰 해이해짐에 따라, 성 밖으로부터 점점 다시 들어와 부인들을 유혹하고 술과 음식을 낭비시키면서 혹은 액厄(불행한 일)을 물리친다 혹은 병을 구제한다 하니, 비록 대가大家와 거실巨室이라 하더라도 이들을 불러들여 다투어가며 올바르지 못한 행위를 하면서도 조금도 부끄러운 줄 모릅니다.
그런데도 이로 인하여 한 사람이라도 죄를 받았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으며, 북 치고 피리 불며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 길거리나 저자 사이에 끊이지 않고 있으니, 이것은 신들이 의아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행동으로 모범을 보이면서 가르치면 따르고 말로만 가르치면 다투게 된다 했고, 위에서 명령하는 바가 좋아하는 것에 반대되면 백성이 따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지금 성수청星宿廳이 아직도 도성 안에 있고, 기은사祈恩使가 봄가을로 끊이지 않으니, 이렇게 하면서 백성만 못하게 한다면 또한 잘못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기은사祈恩使는 정식 국가제사가 아니라 왕실에서 사사로이 복을 비는 별기은別祈恩을 위해 파견한 사신을 말합니다.)
신들이 일찍이 기은사의 행렬行列을 보니 서울에서 개성까지, 개성에서 적성積城, 양주楊洲의 경계까지 가는데, 말을 탄 사람은 수십 명이 넘고, 그 노복과 짐꾼은 그 배나 되었습니다.
이들이 혹은 가든지, 혹은 머물면서 머뭇거리고 떠나지 않으면 수령들이 몸을 구부리고 숨을 죽이며 오직 은근하게 맞이하여 혹은 음식물을 후하게 주고, 혹은 뇌물賂物을 주면서 만에 하나라도 견책을 당할까 하여 비록 절하고 무릎 끓는 것일지라도 사양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폐단의 큼이 이보다 더할 수가 없습니다.
또 성수청 같은 것은 어떤 귀신이며 어떤 제사입니까?
귀신도 분명한 귀신이 아니고, 제사도 올바른 제사가 아니니, 이 또한 임금님의 정치를 위해 마땅히 먼저 제거해야 할 것입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과단성 있는 정치를 행하시어 풍속을 정돈하고 간사스럽고 음란하고 요망한 것들로 하여금 임금님의 고명한 덕 아래에서는 용납되지 않게 하소서.
이 또한 신들의 소망입니다. 



『성종실록成宗實錄』에 따르면 성종成宗 9년(1478년) 11월 30일 홍문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 성현成俔 등이 상소했는데,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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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묘孔子廟의 뜰에서 무당이 음사를 행하다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에 따르면 성종成宗께서 문선왕묘文宣王廟를 배알하고 돌아와서 편찮으셨다.
『오산설림초고』는 차천로(1556-1615)의 수필집으로 한국과 중국의 시화詩話, 일화逸話 등을 모은 것입니다.
문선왕묘文宣王廟는 공자孔子의 사당祠堂으로 조선시대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成均館에 있었으며, 문묘文廟라고도 합니다.
시화詩話는 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일화逸話는 세상에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정희왕대비貞熹王大妃가 이를 걱정하여 무당들에게 물었더니, 모두들 “공자묘孔子廟의 귀신鬼神이 빌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정희왕대비貞熹王大妃(1418-83)는 세조世祖의 왕비王妃이며 성종成宗의 할머니로 예종睿宗 사후死後, 형 월산대군을 제치고 동생인 성종을 왕으로 옹립했으며, 7년 동안 수렴청정垂簾聽政했습니다.
정희왕대비는 궁녀宮女에게 명하여 무당을 이끌고 대성전大成殿 뜰에서 음사淫祠를 행하게 하니, 여러 무당들이 번잡을 떨었고 여러 가지 기교를 어지러이 부렸습니다.
대성전大成殿은 문묘文廟의 중심 건물로 공자孔子와 4성聖, 10철哲의 위패位牌를 모신 곳입니다.
성균관成均館 유생儒生 가운데 선비의 기상이 있는 사람이 앞장서서 유생들을 이끌고, 무당들을 내쫓고 장구와 여러 악기를 방망이로 때려 부셨습니다.
궁녀들이 놀라 흩어졌고, 달려가서 정희왕대비에게 이를 고했습니다.
정희왕대비는 크게 노하여, 장차 모든 유생들을 하옥시키고자 하여, 지관사知館事 이하 모든 유생들을 대궐 앞에서 명을 기다리게 했습니다.
지관사知館事는 성균관의 총책임자로 홍문관弘文館의 대제학大提學이 겸임했습니다.
정희왕대비가 사람을 시켜 성종成宗에게 고하기를 “전하께서 편치 못하셔서 무당들에게 물어보니 모두가 빌미는 공자묘에 있다고 했으므로 궁녀에게 명하여 기도하게 하였는데, 여러 유생들이 대역무도大逆無道하게도 무녀들을 때리고 궁녀들을 협박해 쫓아내었으며 모든 제구祭具들을 발로 차 부수었으니, 이들은 임금도 아비도 없는 놈들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들을 모두 죽이고자 한다고 했습니다.
이에 성종成宗은 베개를 밀치고 벌떡 일어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 태학太學(성균관)의 생도들이 이렇듯 의리와 절개가 있구나” 했습니다.
마침내 사옹원司饔院에 명하여 음식을 준비하게 하고, 지관사 이하 여러 유생들을 들어오게 하여 근정전勤政殿 뜰에서 잔치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사옹원司饔院은 궁중음식을 담당하는 관청입니다.
근정전勤政殿은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고, 즉위식 등 국가의 공식적인 대례를 행하던 곳입니다.
조하朝賀는 조의진하朝儀陳賀의 줄임말로 정월 초하루, 동짓날, 그리고 매월 초하루, 보름 및 왕과 왕비의 생일에는 왕세자를 비롯한 백관百官이 조하했습니다.
조하의 장소가 경복궁일 때는 근정전, 창덕궁일 때는 인정전에서 베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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