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의 최후



1954년 3월 동료들이 75회 생일선물로 자신들이 5년 전에 마련해준 음향기기를 바꿔주자 아인슈타인은 베토벤의 「장엄미사곡」이 담긴 RCA 빅터 레코드판을 반복해서 듣기 시작했다.
그는 과거에 베토벤을 “너무 개인적이고 거의 벌거벗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종교적 본능에는 그런 종류의 부속물이 포한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위잔 문제에도 불구하고 아인슈타인은 여전히 산책을 좋아했다.
괴델과 함께 연구소로 가거나 연구소에서 걸어서 돌아오기도 했으며, 마르고트와 함께 프린스턴 근처의 숲을 거닐었다.

버트런드 러셀은 아인슈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핵시대에 평화를 보장할 수 있는 구조를 찾아내는 일을 계속해야 한다고 격려했다.
러셀은 자신들이 모두 1차 세계대전을 반대했고, 2차 세계대전을 지지했던 사실을 기억했다.
이제 3차 세계대전을 예방하는 것이 필수였다.
러셀은 “저는 유명한 과학자가 정부에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재앙을 깨닫게 해줄 극적인 일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했다.
아인슈타인은 답장에서 그들과 몇 사람의 다른 유명한 과학자와 사상가들이 서명할 수 있는 공개선언을 제안했다.

닐스 보어는 거절했지만 막스 보른을 포함한 9명의 과학자들이 서명에 동참할 것을 동의했다.
러셀은 제안문을 단순한 청원으로 마무리했다.
미래의 어떠한 세계대전에서도 핵무기가 사용될 것이 확실하고, 그런 무기가 인류의 지속적인 존재를 위협할 것이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우리는 세계의 정부들이 세계대전으로는 자신들의 목적을 추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공개적으로 인정하기를 요구하며, 결과적으로 국가 간 갈등의 모든 문제의 해결을 위한 평화적 수단을 찾아낼 것을 요청한다.

아인슈타인은 76회 생일가지 생존했지만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머서 가 112번지 앞에 모여든 기자와 사진기자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러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다.
며칠 후 그는 과학적 조언자였던 미셸 베소의 사망소식을 들었다.
그는 베소의 가족에게 보낸 위로편지에 “그는 이렇게 이상한 세상에서 나보다 조금 먼저 떠났습니다. 그것은 아무 뜻도 없습니다. 우리 믿음을 가진 물리학자에게 과거, 현재, 미래의 구분은 완고한 환상일 뿐입니다”라고 적었다.

아인슈타인은 1955년 4월 11일에 아인슈타인-러셀 선언문에 서명했다.
훗날 러셀이 밝혔듯이 “그는 미쳐버린 세상에서 제정신으로 남아있었다.
그 문서에서 비롯된 것이 매년 과학자와 사상가들이 모여 핵무기를 통제하는 방법을 논의했던 퍼그워시회의Pugwash Conference on Science and World Affairs였다.

그날 오후 늦게 이스라엘 대사 압바 에반이 유대국 7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예정된 아인슈타인의 라디오 연설에 대해서 의논하기 위해 그를 방문했다.
에반은 그의 연설을 5천만 명이 청취하게 될 것임을 알려주었다.
아인슈타인은 “이제 내게 세계적으로 유명해질 기회가 생겼습니다”라면서 웃었다.

아인슈타인이 다음 날 연구소로 출근했지만 사타구니에 통증을 느꼈다.
다음 날 그는 집에 머물렀다.
이스라엘 영사가 찾아왔다.
방문객들이 떠난 뒤 그는 잠을 자려고 누웠다.
듀카스는 그가 한낮에 화장실로 뛰어가는 소리를 들었고, 그는 그곳에 쓰러졌다.
의사가 그에게 모르핀을 주사하여 잠을 자도록 했으며, 듀카스가 자신의 침대를 그의 침대 바로 옆에 옮겨두고 밤새도록 탈수된 그의 입술에 얼음찜질을 해주었다.
그의 동맥류가 터지기 시작했다.

다음 날 그의 집으로 불려온 여러 의사들은 상의 끝에 힘들어 보이기는 하지만 동맥을 고칠 수도 있는 외과 의사를 추천했다.
아인슈타인은 그런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듀카스에게 “삶을 인공적으로 연장하는 것은 품위가 없다. 나는 내 몫을 했고, 이제 떠날 시간이다. 나는 우아하게 떠나겠다”고 했다.

다음 날 아침 듀카스는 그가 심한 고통을 느끼고 머리를 들지도 못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가 전화로 달려갔고 의사는 그를 병원으로 데려오도록 했다.
구급차의 자원봉사 구급대원은 프린스턴의 정치경제학자였고, 아인슈타인은 그와 활발한 대화를 계속 할 수 있었다.
마르고트는 한스 알베르트에게 전화했으며, 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비행기를 타고 아버지의 병실에 도착했다.
그의 가까운 친구가 된 동료 독일 망명자였던 경제학자 오토 나탄도 뉴욕에서 달려왔다.

일요일이었던 4월 17일에 잠을 깬 그는 훨씬 좋아진 상태였다.
그는 듀카스에게 자신의 안경과 종이 그리고 연필을 가져다달라고 했고, 몇 가지 식을 적어나갔다.
그는 한스 알베르트에게 몇 가지 과학적 아이디어를 이야기해주고 나탄에게는 독일 재무장의 위험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자신의 방정식을 가리키면서 반농담으로 아들에게 “내가 수학을 조금 더 알았더라면”이라고 말했다.

월요일이었던 1955년 4월 18일 오전 1시에 간호사는 그가 알아들을 수 없는 몇 마디의 독일어를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다.
큰 물집처럼 동맥류가 터져버렸고, 아인슈타인은 일흔여섯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침대 옆에는 이스라엘 독립기념일을 위해 준비한 연설문의 원고가 놓여있었다.
그것은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미국 시민이나 유대인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이야기합니다”라고 시작되었다.

그의 침대 옆에는 빽빽하게 쓴 방정식을 지우고 수정한 12페이지의 서류도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자신의 잡히지 않는 통일장이론을 찾으려고 애를 썼다.
그가 마지막으로 잠을 자기 직전에 쓴 것은 자신과 우리 모두를 우주의 법칙에 나타난 정신에 조금 더 가까이 데려다줄 것이라고 바라던 한 줄의 기호와 숫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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