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이 없는 종교는 눈이 먼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에서 과학과 종교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그는 과학의 영역은 무엇이 사실인가를 확실하게 만드는 것이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종교는 반대의 입장에 놓여있다.
그러나 그런 노력이 함께 이루어진 적도 있었다.
“과학은 진리와 이해에 대한 영감으로 완전히 젖어든 사람들에 의해서만 창조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느낌의 원천은 종교의 영역에서 솟아난다.”

그의 이야기는 신문의 1면을 장식했고, 그의 의미심장한 결론은 유명해졌다.
“그런 상황을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다. 종교가 없는 과학은 다리를 절고, 과학이 없는 종교는 눈이 먼 것이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과학이 받아들일 수 없는 개념이 하나 있다면서 자신이 창조한 것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나 자신이 창조한 대상의 삶에 대해서 변덕을 부리는 성령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오늘날 종교계와 과학계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의 주된 원인은 이런 인격적 신의 개념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아인슈타인의 태도는 그것이 인간 도덕성의 바탕을 완전히 무너뜨린다고 생각한 막스 보른과 같은 친구들을 질리게 만들었다.
그는 아인슈타인에게 “나는 선생이 어떻게 전적으로 기계적인 우주와 윤리적 인간의 자유를 결합시킬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내 입장에서 결정론적 세계는 정말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선생이 옳을 수는 있습니다. 세상은 선생이 말한 그런 식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로는 물리학도 그런 것 같지는 않고 나머지 세상은 더욱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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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의 세 번째 미국 방문



아인슈타인은 1931년 12월에 세 번째 미국 방문을 위해 대서양 횡단 항해를 하고 있었다.
그는 베를린을 영원히 떠날 것인지에 대해 고민했다.
베를린은 그에게 17년 동안 고향이었고, 엘자는 그곳에서 더 오래 살았다.
이번의 미국 방문은 칼텍에서 두 달 동안 방문교수로 지내기 위한 것이었다.
네덜란드에 있는 아인슈타인의 친구들도 그를 채용하려고 몇 년 동안 노력해왔으며, 옥스퍼드도 그랬다.

아인슈타인은 칼텍의 훌륭한 교수회관인 애서니엄의 사무실에 자리를 잡자마자 또 다른 가능성이 생겼다.
어느 날 아침 미국의 유명한 교육학자 에이브러햄 플렉스너Abraham Flexner(1866~1959)가 그를 찾아와 회랑으로 둘러쳐진 정원을 한 시간이 넘도록 산책했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을 찾아와 점심을 먹으라고 말하는 엘자도 물리쳤다.

록펠러재단의 임원으로 미국 고등교육을 개혁하는 일을 담당한 플렉스너는 학자들이 아무런 학술적 압력이나 강의 부담 없이, 그의 표현에 따르면 “당면한 일의 소용돌이에 휩쓸리지 않고” 일할 수 있는 “천국”을 만드는 중이었다.
1929년 주식시장이 폭락하기 몇 주 전에 백화점 체인을 팔아 엄청난 재산을 가지게 된 루이 뱀버거와 그의 누이 캐롤라인 뱀버거 풀드가 기증한 500만 달러로 세워지는 고등연구소라고 부르는 그 기관은 뉴저지주 프린스턴 대학 근처에 설립될 예정이었다.
이 기관은 공식적으로 프린스턴 대학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플렉스너는 훗날 아인슈타인의 “고상하고 우아한 태도와 그의 진정한 겸손함”에 감명을 받았다고 적었다.
정치적 상황이 더욱 실망스럽게 변해버린 베를린으로 돌아온 직후에 아인슈타인은 강연을 하기 위해 옥스퍼드로 향했다.
이번에도 그는 미국과는 극도로 상반되는 정교한 형식주의를 억압적으로 느꼈다.
그는 미국이 유럽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자유를 제공해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플렉스너가 약속대로 찾아와서 애서니움에서 시작했던 대화를 계속하게 된 것을 기뻐했다.
처음부터 두 사람은 자신들의 대화가 추상적인 논의가 아니라 아인슈타인을 초빙하기 위한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을 프린스턴으로 데려가기 위한 합의는 플렉스너가 카푸트를 방문한 1932년 6월에 이루어졌다.
두 사람은 아인슈타인이 좋아하는 새 집의 베란다에 앉아서 오후 내내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저녁을 지나 아인슈타인이 플렉스너를 밤 11시 베를린으로 가는 버스로 배웅할 때까지 이어졌다.

플렉스너는 아인슈타인이 어느 정도의 보수를 원하는지 물어보았다.
아인슈타인은 잠정적으로 3천 달러 정도를 제안했다.
플렉스너는 깜짝 놀란 것처럼 보였다.
아인슈타인은 서둘러 “오, 그보다 적은 돈으로도 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라고 했다.
플렉스너는 재미있게 생각했다.
그는 더 적은 금액이 아니라 더 많은 금액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아인슈타인 부인과 제가 조정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연봉 1만 달러에 합의했다.
주 후원자였던 루이 뱀버거가 연구소의 또 다른 보석인 수학자 오스왈드 베블런이 연봉 1만5천 달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아인슈타인의 연봉은 더 높아졌다.
뱀버거는 아인슈타인의 연봉도 같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플렉스너는 『뉴욕 타임스』에 프린스턴이 아인슈타인의 주 거주지가 될 것이라고 알려주면서 “아인슈타인은 연구소에서 시간을 보낼 것이고, 방학 중에는 베를린 외곽에 있는 그의 여름 별장에서 휴식과 사색을 하기 위해 외국 여행을 하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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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은 세 모금에 담배를 다 피워버렸다




1932년 여름 독일의 정치적 상황은 더욱 암울해졌다. 계속해서 득표율이 늘어나던 나치가 전국 선거에서 패배하자 여든 살의 피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시원치 않은 프란츠 폰 파펜을 총리로 선택했고, 그는 군사력을 이용해 지배하려고 했다.
그해 여름에 필리프 프랑크가 카푸트를 방문했을 때 아인슈타인은 “나는 군사정권이 다가오는 국민사회당(나치) 혁명을 막아낼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한탄했다.

1932년 12월에 독일을 떠난 아인슈타인은 여전히 자신이 독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확신하지는 못했다.
아인슈타인은 예감이라도 한 듯 엘자에게 “잘 보아두세요. 다시는 보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캘리포니아로 향하는 증기선 오클랜드 호에는 3개월 동안의 여행에 필요한 것보다는 훨씬 많은 30개의 짐이 실려 있었다.

아인슈타인이 패서디나에서 독일-미국 우호를 기념하기 위한 연설을 하기로 했던 것은 어색하고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칼텍의 밀리컨 소장은 아인슈타인이 칼텍에 머무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독일과의 문화교류 증진을 목적으로 하는 오버랜드 신탁으로부터 7천 달러의 후원을 받았다.
아인슈타인이 “독일과 미국의 관계에 도움이 될 방송”을 하는 것이 유일한 조건이었다.
아인슈타인이 도착한 직후 밀리컨은 아인슈타인이 “독일과 미국의 관계를 증진시키는 여론을 형성하기 위해 미국에 왔다”고 밝혔다.
그런 견해는 30개의 짐을 가져온 아인슈타인에게는 놀라운 것이었다.

밀리컨은 NBC 라디오를 통해 방송될 강연을 통해 7천 달러의 오버랜드 후원금을 받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에 앞서 애서니움에서 개최될 정장 만찬에서 많은 후원금도 요청해두기도 했다.

아인슈타인의 인기는 대단해서 표를 사려는 대기자 목록을 만들어야만 했다.
아인슈타인과 같은 테이블에 앉았던 사람들 중에는 뉴욕 출신의 부유한 의약품 제조업자 리언 워터스도 있었다.
아인슈타인이 지루해하는 것을 눈치 챈 그는 옆에 앉아 있던 여성을 건너서 담배를 권했고, 아인슈타인은 세 모금에 담배를 다 피워버렸다.
그 후 두 사람은 가까운 친구가 되었으며, 훗날 아인슈타인은 프린스턴에서 뉴욕을 방문할 때는 5번가에 있던 워터스의 아파트에 머물렀다.

만찬이 끝났을 때 아인슈타인과 다른 손님들은 수천 명의 청중이 그의 연설을 들으려고 기다리던 패서디나 시민회관으로 갔다.
그의 원고는 친구가 변역해주었고 그는 더듬거리는 영어로 연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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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은 “히틀러 때문에 독일에 갈 수 없다”고 했다




아인슈타인이 패서디나에서 안전하게 머물고 있던 1933년 1월 30일에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의 신임 총리로 정권을 잡았다.
처음에 아인슈타인은 그것이 자신에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했다.
2월의 첫 주에 그는 자신이 4월에 예정대로 귀국하면 봉급을 어떻게 계산할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베를린에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2월 말에 독일 의회가 불타버리고 나치들이 유대인의 집을 약탈하기 시작하면서 사태는 훨씬 더 분명해졌다.
아인슈타인은 어느 여자친구에게 “나는 히틀러 때문에 감히 독일 땅에 발을 딛을 수 없게 되었다”는 편지를 보냈다.

3월 10일 오후에 나치는 엘자의 딸 마르고트가 안에 움츠리고 있던 베를린의 아파트를 두 번이나 급습했다.
그녀의 남편 디미트리 마리아노프는 일을 보러 나갔다가 떠돌이 폭도에게 거의 체포될 뻔했다.
그는 마르고트에게 아인슈타인의 서류를 프랑스 대사관으로 옮긴 후 파리에서 만나자고 연락했다.
그녀는 두 가지 일을 모두 해냈다.
일제의 남편 루돌프 카이저도 네덜란드로 피신하는 데 성공했다.
다음 이틀 동안에 베를린 아파트는 세 차례나 더 약탈당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서류는 안전했다.

칼텍에서 동부로 기차를 타고 오던 아인슈타인은 쉰네 번째 생일 날 시카고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그는 독일에서의 사태에도 불구하고 평화주의 주장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선언하는 청년평화위원회의 집회에 참석했다.
사람들은 그가 그런 주장에 완전히 동의한다는 인상을 받고 떠났다.

며칠 뒤 아인슈타인은 뉴욕에서 열린 평화주의에 대한 자신의 글을 모은 『반전 투쟁 The Fight against War』의 출판기념회에서 독일의 비참한 사태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는 세계가 나치를 도덕적으로 비난해야 한다고 했지만 독일인들을 악마로 취급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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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가 아인슈타인의 별장을 급습했다



베를린에서 아인슈타인의 친구이자 주 뉴욕 독일 영사 파울 슈바르츠가 개인적으로 그를 만나 독일로 돌아가지 말 것을 설득했다.
그는 “그들이 선생의 머리채를 잡고 거리로 끌고 다닐 것”이라고 경고했다.

아인슈타인은 1933년 3월 중순에 배를 타고 벨기에로 갔다.
그는 다음 해에 뉴저지 주의 프린스턴에 고등연구소가 문을 열면 매년 4~5개월을 그곳에서 보낼 예정이었다.
출항 하루 전에 그와 엘자는 프린스턴으로 가서 그들이 구입할지 모를 집을 유심히 둘러보았다.

대서양을 가로질러 항해하는 동안에 아인슈타인은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의 무기은닉처를 찾는다는 핑계로 그의 별장을 급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무기은닉처란 있지도 않았다.
훗날 그들은 되돌아와서 밀수에 사용될 수도 있다는 핑계로 그가 좋아한 보트를 압수했다.
카푸트 별장이 습격당했다는 소식으로 아인슈타인과 조국 독일의 관계는 결정되었다.
그는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1933년 3월 28일 그의 배가 안트베르펜에 정박한 직후 그는 차를 타고 브뤼셀에 있는 독일 영사관으로 가서 자신의 여권을 반납하고 자신의 독일 국적을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항해 중에 작성한 사직서를 우편으로 프로이센 과학원으로 발송했다.

19년 전 그를 과학원으로 초빙한 막스 플랑크는 안도했다.
플랑크는 “선생의 그런 생각이 선생이 과학원과의 관계를 명예롭게 단절하는 유일한 방법인 것 같습니다”라면서 “우리의 정치적 의견을 갈라놓은 깊은 바다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우호적인 관계에는 어떤 변화도 없을 것입니다”라는 너그러운 말도 덧붙였다.
플랑크는 과학원의 간사에게 편지를 보냈다.
“아인슈타인에 대한 공식적인 추방절차를 시작하는 것은 내게 가장 심한 양심의 갈등을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정치적 문제에서는 깊은 바다가 그와 나 사이를 갈라놓고 있지만, 나는 앞으로 수백 년 동안의 역사에서 아인슈타인의 이름은 과학원을 빛낸 가장 밝은 별 중 하나로 찬양될 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합니다.”

나치는 공개적으로 신문에 크게 알리면서 국적과 과학원 회원 자격을 포기한 아인슈타인의 행동에 분노를 표시했다.
나치에 동조하는 과학원 간사는 나치를 대신해서 성명을 발표했다.
그 성명은 매우 신중했던 미국에서의 발언을 보도한 신문기사를 인용하면서 아인슈타인이 “잔악한 일당에 참여”하고 “외국에서 선동가로 활동한 것”을 비난하며, “그렇기 때문에 아인슈타인의 사퇴에 대해서 유감스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인슈타인의 오랜 적이었던 노벨상 수상자 필리프 레나르트는 나치 신문에 “자연을 연구하는 데 끼친 유대인들의 위험한 영향을 증명해주는 가장 중요한 예가 바로 아인슈타인 씨였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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