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의 세 번째 미국 방문



아인슈타인은 1931년 12월에 세 번째 미국 방문을 위해 대서양 횡단 항해를 하고 있었다.
그는 베를린을 영원히 떠날 것인지에 대해 고민했다.
베를린은 그에게 17년 동안 고향이었고, 엘자는 그곳에서 더 오래 살았다.
이번의 미국 방문은 칼텍에서 두 달 동안 방문교수로 지내기 위한 것이었다.
네덜란드에 있는 아인슈타인의 친구들도 그를 채용하려고 몇 년 동안 노력해왔으며, 옥스퍼드도 그랬다.

아인슈타인은 칼텍의 훌륭한 교수회관인 애서니엄의 사무실에 자리를 잡자마자 또 다른 가능성이 생겼다.
어느 날 아침 미국의 유명한 교육학자 에이브러햄 플렉스너Abraham Flexner(1866~1959)가 그를 찾아와 회랑으로 둘러쳐진 정원을 한 시간이 넘도록 산책했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을 찾아와 점심을 먹으라고 말하는 엘자도 물리쳤다.

록펠러재단의 임원으로 미국 고등교육을 개혁하는 일을 담당한 플렉스너는 학자들이 아무런 학술적 압력이나 강의 부담 없이, 그의 표현에 따르면 “당면한 일의 소용돌이에 휩쓸리지 않고” 일할 수 있는 “천국”을 만드는 중이었다.
1929년 주식시장이 폭락하기 몇 주 전에 백화점 체인을 팔아 엄청난 재산을 가지게 된 루이 뱀버거와 그의 누이 캐롤라인 뱀버거 풀드가 기증한 500만 달러로 세워지는 고등연구소라고 부르는 그 기관은 뉴저지주 프린스턴 대학 근처에 설립될 예정이었다.
이 기관은 공식적으로 프린스턴 대학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플렉스너는 훗날 아인슈타인의 “고상하고 우아한 태도와 그의 진정한 겸손함”에 감명을 받았다고 적었다.
정치적 상황이 더욱 실망스럽게 변해버린 베를린으로 돌아온 직후에 아인슈타인은 강연을 하기 위해 옥스퍼드로 향했다.
이번에도 그는 미국과는 극도로 상반되는 정교한 형식주의를 억압적으로 느꼈다.
그는 미국이 유럽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자유를 제공해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플렉스너가 약속대로 찾아와서 애서니움에서 시작했던 대화를 계속하게 된 것을 기뻐했다.
처음부터 두 사람은 자신들의 대화가 추상적인 논의가 아니라 아인슈타인을 초빙하기 위한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을 프린스턴으로 데려가기 위한 합의는 플렉스너가 카푸트를 방문한 1932년 6월에 이루어졌다.
두 사람은 아인슈타인이 좋아하는 새 집의 베란다에 앉아서 오후 내내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저녁을 지나 아인슈타인이 플렉스너를 밤 11시 베를린으로 가는 버스로 배웅할 때까지 이어졌다.

플렉스너는 아인슈타인이 어느 정도의 보수를 원하는지 물어보았다.
아인슈타인은 잠정적으로 3천 달러 정도를 제안했다.
플렉스너는 깜짝 놀란 것처럼 보였다.
아인슈타인은 서둘러 “오, 그보다 적은 돈으로도 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라고 했다.
플렉스너는 재미있게 생각했다.
그는 더 적은 금액이 아니라 더 많은 금액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아인슈타인 부인과 제가 조정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연봉 1만 달러에 합의했다.
주 후원자였던 루이 뱀버거가 연구소의 또 다른 보석인 수학자 오스왈드 베블런이 연봉 1만5천 달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아인슈타인의 연봉은 더 높아졌다.
뱀버거는 아인슈타인의 연봉도 같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플렉스너는 『뉴욕 타임스』에 프린스턴이 아인슈타인의 주 거주지가 될 것이라고 알려주면서 “아인슈타인은 연구소에서 시간을 보낼 것이고, 방학 중에는 베를린 외곽에 있는 그의 여름 별장에서 휴식과 사색을 하기 위해 외국 여행을 하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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