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은 “히틀러 때문에 독일에 갈 수 없다”고 했다




아인슈타인이 패서디나에서 안전하게 머물고 있던 1933년 1월 30일에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의 신임 총리로 정권을 잡았다.
처음에 아인슈타인은 그것이 자신에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했다.
2월의 첫 주에 그는 자신이 4월에 예정대로 귀국하면 봉급을 어떻게 계산할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베를린에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2월 말에 독일 의회가 불타버리고 나치들이 유대인의 집을 약탈하기 시작하면서 사태는 훨씬 더 분명해졌다.
아인슈타인은 어느 여자친구에게 “나는 히틀러 때문에 감히 독일 땅에 발을 딛을 수 없게 되었다”는 편지를 보냈다.

3월 10일 오후에 나치는 엘자의 딸 마르고트가 안에 움츠리고 있던 베를린의 아파트를 두 번이나 급습했다.
그녀의 남편 디미트리 마리아노프는 일을 보러 나갔다가 떠돌이 폭도에게 거의 체포될 뻔했다.
그는 마르고트에게 아인슈타인의 서류를 프랑스 대사관으로 옮긴 후 파리에서 만나자고 연락했다.
그녀는 두 가지 일을 모두 해냈다.
일제의 남편 루돌프 카이저도 네덜란드로 피신하는 데 성공했다.
다음 이틀 동안에 베를린 아파트는 세 차례나 더 약탈당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서류는 안전했다.

칼텍에서 동부로 기차를 타고 오던 아인슈타인은 쉰네 번째 생일 날 시카고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그는 독일에서의 사태에도 불구하고 평화주의 주장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선언하는 청년평화위원회의 집회에 참석했다.
사람들은 그가 그런 주장에 완전히 동의한다는 인상을 받고 떠났다.

며칠 뒤 아인슈타인은 뉴욕에서 열린 평화주의에 대한 자신의 글을 모은 『반전 투쟁 The Fight against War』의 출판기념회에서 독일의 비참한 사태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는 세계가 나치를 도덕적으로 비난해야 한다고 했지만 독일인들을 악마로 취급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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