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선재 미술관에서 강의했습니다

 

 

어제 경주에 내려가 선재 미술관에서 강의했습니다.

120명가량 모였고, 반응이 좋았습니다.

지인이 부산에서 경주에까지 와서 그 차로 양동마을에 갔다가,

부산으로 가 멸치회, 멸치구이, 멸치찌개로 식사를 했는데, 온통 멸치 잔치였습니다.

소주 ‘좋은데이’를 곁들인 식사 흡족했습니다.해운대에서 하루를 묵고 이튿날 점심에는 농어, 광어, 밀치?, 멍게를 회로 그리고 찌개 과식했습니다.

부산에 가면 으레 과식입니다.

오륙도를 보고 이리저리 구경하다가 집에 왔습니다.

강의 하러 멀리에 가는 걸 좋아하지 않지만, 경주에 가는 건 좋습니다.

여행을 곁들이기 때문입니다.

5월은 열두 달 중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달입니다.

어디를 가나 꽃이 만발해 있고 화려합니다.

5월에만은 이리저리 다니고 싶습니다.

내일은 고양시 꽃 박람회에 가려고 합니다.

꽃 하나하나에 누군가가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어느 꽃이라도 아름답기만 합니다.

집에 오자마자 난은 목욕을 시켰고, 설난에는 스프레이로 물을 흠뻑 주었으며, 물을 좋아하는 수국에게는 더 많은 물을 주었습니다.

이틀 새 장미는 두 몽우리를 터뜨렸습니다.

놀라운 생명들입니다.

얼마 전에는 영양도 주고 미생물을 번식시키는 약도 뿌려주어 건강하게 자라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우리 별나라 지구는 온통 꽃밭입니다.

우리 모두는 별님들입니다.

여러 분 봄을 만끽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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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우의 문화읽기(Daum) 방문 80만 명에 대한 소감

 

 

내 블로그에 방문자 수 800000가 눈에 들어왔다. 요즘 하루 평균 500명 혹은 500회 방문하는데 80만에 이른 것이다. 새삼 생각하니 블로그는 매우 유용한 소통이다. 24시간 문을 열어놓고 누구인지 모를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이다. 많은 댓글이 있어 그들 가운데 일부가 어떤 경로로 나와 소통하게 되었는지,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그들의 감사하는 마음을 전해 받고 소통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나 또한 다른 사람들의 블로그를 통해서 많은 지식을 섭렵할 수 있었다. 소수이지만 신뢰할 만한 지식을 창고에 가득 쌓아두고 공유하려는 블로거들을 통해 나는 원하는 많은 지식을 아주 쉽게 얻을 수 있었다. 지식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블로그의 역할이 블로거들에게 얼마나 귀한 소통의 장인지 잘 알게 되었다.

책을 십여 권 출간해보았지만, 책에는 값이 매겨져서 널리 소통되지 않는다. 값이 매겨지지 않아야 소통이 원활해진다. 지식을 거저 얻고 지식을 거저 주어야 한다는 논리가 블로그에서는 성립한다. 나 또한 책에서보다 더 귀한 updated한 지식을 거저 얻은 경험이 많다. 지식을 public goods으로 유통하는 블로그는 미래 지향적인 소통의 장인 것이다.

블로그를 통해 알게 된 것은 소수이지만 정말 열심히 지식을 구하고 전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의 지식은 많은 사람들의 참여로 만들어지고 있다. 오류를 담은 지식은 곧 블러거들에 의해 밝혀진다. 자체로 지식이 걸러지고 정화되는 시스템이 절로 형성되었다. 나는 이를 피라미드 쌓기라고 말한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수십만 명이 쌓은 것이다. 오늘날 수십만 명의 블로거들이 그런 식으로 지식의 벽돌을 하나씩 쌓아올려 거대한 지식의 탑을 쌓고 있다. 그렇게 형성되는 지식은 그 분야의 전공자의 지식보다 더 높고 방대하다.

블로그의 미래가 밝다. 블로그가 존재하는 한 어느 분야이든지 독학이 가능해졌다. 검색 시스템이 보완되고 있어 학력을 대학에서 쌓지 않아도 블로그를 통해 얼마든지 우수한 지력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새삼 블로그에 고마움을 느끼며 몇 자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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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大學>의 논리가 무엇입니까?

 

 

유교儒敎 경전에서 공자孔子의 가르침을 정통正統으로 나타내는 사서四書 중 하나인 <대학大學>은 중국에서 유교가 국교로 채택된 한대漢代 이래 오경五經이 기본 경전으로 전해지다가 송대에 주희朱熹가 당시 번성하던 불교와 도교에 맞서는 새로운 유학性理學의 체계를 세우면서 유교 경전 중 오경의 하나인 <예기禮記>에서 <대학>과 <중용中庸> 두 편을 독립시켜 사서 중심의 체재를 확립했습니다. <예기>는 주周나라 말기에서 진한秦漢시대까지의 예禮에 관한 학설을 집록한 것으로, <주례周禮>, <의례儀禮>와 함께 삼례三禮라 합니다. 예경禮經이라 하지 않고 예기라 한 것은, 예에 대한 기록 혹은 예에 관한 경전을 보완補完, 주석註釋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기>에서는 <의례>의 해설뿐 아니라, 음악, 정치, 학문 등 일상생활의 사소한 영역에 이르기까지 예의 근본정신에 대해 다양하게 서술하고 있으므로, >예기>를 단순히 <의례>의 해설서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주희는 <대학>에 장구章句를 짓고 자세한 해설을 붙이는 한편, 착간錯簡(책장 혹은 편장의 순서가 잘못된 것)을 바로잡았습니다. 주희는 경經은 공자의 말을 제자 증자曾子가 기술한 것이고, 전傳은 증자의 뜻을 그 제자가 기술한 것으로 단정했습니다. 경에서는 명명덕明明德(명덕을 밝히는 일), 친민親民(백성을 새롭게 하는 일), 지지선止至善(지선에 머무르는 일)을 <대학>의 삼강령三綱領이라 하고,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팔조목八條目으로 정리하여 유교의 윤곽을 제시했습니다. 실천과정으로서는 팔조목에 삼강령이 포함되고 격물, 즉 사물의 이치를 구명究明하는 것이 그 첫걸음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평천하의 궁극 목적과 연결된다는 것이 <대학>의 논리입니다. 전은 경의 설명이라는 뜻입니다.

<대학>의 저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전통적으로는 <중용>과 <대학>을 공자의 손자 자사子思가 지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대학>은 <예기> 가운데 한 편의 형태로 조선에 들어왔을 것이라 추측됩니다. 7세기경 신라시대 충성을 맹세하는 내용을 새긴 비석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에는 <예기>를 <시경>, <서경>과 함께 습득할 것을 맹세하는 화랑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임신서기석은 1934년경 경상북도 경주시 현곡면 금장리 석장사石丈寺터 부근에서 발견되어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비석의 길이가 약 30㎝, 너비는 윗부분이 12.5㎝이나 아래로 내려갈수록 좁아집니다. 소수림왕 2, 즉 372년에 설립한 태학太學을 관장한 사람이 오경박사五經博士였으므로 고구려에서도 일찍부터 <예기>가 교수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통일신라 시기에도 국학 세 과정과 독서삼품과의 과목으로 <예기>는 중요시된 경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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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를 듣고 병증을 갈라내는 것聽聲音辨病證

 

 

『황제내경』에󰡒천식증喘息證 때 목소리를 듣고 고통스러워하는 곳을 알 수 있다. 또한 중초中焦가 성盛하고 오장이 실해서 기운이 왕성하나 무서워한 탓으로 상하면 목소리가 방 안에서 나는 소리같이 된다. 이것은 중기中氣에 습이 생겼기 때문이다󰡓고 적혀 있다.

『영추』에󰡒목소리가 조용하고 잘 놀라면서 소리치는 것은 뼈마디에 병이 있는 것이다. 말을 똑똑하게 하지 못하고 얼버무리는 것은 심격간心膈間(심장과 가름막 사이)에 병이 생겼기 때문이다. 말소리가 나직하고 가늘면서 길게나오는 것은 머릿속에 병이 있는 것이다. 목소리를 듣고 병을 아는 사람이 유능한 의사이다󰡓고 적혀 있다.

『난경』에 󰡒들어보고 병을 안다는 것은 다섯 가지 소리를 듣고 병을 갈라낸다는 것이다. 가령 간肝의 병이면 목소리가 슬프게 나오고 폐肺의 병이면 목소리가 가쁘게 나오며 심心의 병이면 목소리가 궁글게雄 나오며 비脾의 병이면 목소리가 느리게 나오고 신腎의 병이면 목소리가 가라앉고 대장大腸의 병이면 목소리가 길게 나오며 소장小腸의 병이면 목소리가 짧게 나오고 위胃의 병이면 목소리가 빠르며 담膽의 병이면 목소리가 맑으며 방광膀胱의 병이면 목소리가 희미하다󰡓고 적혀 있다.

『내경』에 󰡒목소리는 다섯 가지 소리가 합쳐져 나오는 것이다󰡓고 적혀 있다.

『입문』에 󰡒쇳소리는 쟁쟁하고 흙소리는 흐리며 나무소리는 길고 물소리는 맑으며 불소리는 조燥하다󰡓고 적혀 있다. 흙소리는 깊은 독 속에서 말하는 소리와 같다. 또한 습이 성하면 목소리가 독 속에서 울리는 소리 같으면서 물에 잦아드는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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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자韓非子의 사상은 무엇입니까?

 

 

이름이 한비이고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 한韓나라 사람인 한비자韓非子(기원전 280?∼233)는 호남성湖南省 서쪽에 위치했던 왕족출신입니다. 한비는 젊은 시절에 훗날 진秦나라의 책사가 된 이사李斯와 함께 성악설性惡說을 주창한 순자荀子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워 뒷날 법가法家 사상을 집대성했습니다. 이사가 간지奸智에 뛰어난 변설가辯說家인 반면, 한비는 타고난 말더듬이였으나 두뇌가 매우 명석하여, 학자로서는 이사가 도저히 미칠 바 못 되었습니다.

한비는 국가의 운영을 위해서는 제도가 법제화되어야 하고 성문화된 법은 엄격한 집행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으며, 강력하고 절대적인 왕권이 있어야 이상적인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유가儒家의 인의仁義을 주장하는 유세객들의 주장과 묵가墨家의 겸애兼愛사상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비판했습니다. 한비는 군웅群雄이 할거割據하는 약육강식의 전국시대에는 오히려 정치적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런 주장 때문에 권모술수權謀術數의 대가로 오해받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상적인 제도의 법제화를 통한 올바른 통치를 말한 것이며, 이는 절대군주의 사사로운 판단이나 감정을 배제한 합리적이고 공개된 통치를 주장한 것이었습니다. 한비에 의하면 법은 귀족이라고 해서 예외를 두지 않고 모든 백성에게 공평하게 적용하여 반드시 따라야만 하는 공리성公理性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한비는 한나라 왕 안安에게 수차례에 걸쳐 부국강병富國强兵의 모략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안은 신하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고, 재능 있는 인재를 기용하여 국가를 강성하게 만들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한나라의 상황은 허영과 사치에 빠졌습니다.

기원전 234년 훗날 진시황제秦始皇帝가 될 진나라 왕 정政이 군사를 동원해 한나라를 공격해왔습니다. 오랫동안 천하통일에 힘을 쏟아온 정은 전국칠웅戰國七雄 가운데 진나라를 제외한 여섯 나라, 즉 초楚나라, 연燕나라, 위魏나라, 한韓나라, 조趙나라를 진나라로 흡수 통일하기 위해 여섯 나라를 제거할 결심을 하고 가장 약한 한나라를 우선 공격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한나라를 공격하기에 앞서 정은 한비자의 <고분孤憤>과 <오두五蠹>를 읽고 “이 사람과 교유할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까지 감탄했다고 합니다. 정이 한나라를 공격한 것은 한비자를 얻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정은 한나라 왕에게 한비자를 진나라로 보낼 것을 요구했고, 한나라 왕은 한비자를 사신으로 진나라에 보내야 했습니다. 정은 한비를 진나라에 억류시킨 뒤 한나라를 공격하여 안을 포로로 잡고 한나라를 멸망시켰습니다.

중국을 통일한 시황제는 한비를 보자 크게 기뻐하며 그를 진나라에 머물게 하려 했으나, 이사는 내심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한비를 한나라로 돌려보내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이라고 모함했습니다. 이사는 시황제에게 참언讒言하여 한비를 옥에 가두게 했습니다. 시황제는 옥리에게 한비를 넘겨 치죄하게 했고, 이사는 사람을 시켜 한비에게 사약死藥을 보내 자살하게 했습니다. 한비는 시황제에게 스스로 해명해보려고 했으나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시황제가 나중에 한비의 치죄를 후회하고 사람을 시켜 용서했으나 그때 한비는 이미 죽은 몸이었습니다. 이런 내용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기록되어 있는데, 자신도 한나라 무제에게 직언을 한 죄로 모욕적인 궁형을 당한 사마천은 진시황제에게 충언을 하려다 비명에 간 한비에게 무한한 동정을 보였습니다.

55편 20책에 이르는 대저大著 <한비자韓非子>는 한비가 타계한 뒤 전한前漢 중기인 기원전 2세기 말 이전에 현재의 형태로 정리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내용은 거의가 법의 지상至上을 강조하는데, 55편을 크게 나누면 다음과 같이 성질이 다른 6군群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한비의 자저自著로 추정되는 <고분孤憤>, <오두五蠹>, <현학顯學> 등으로 인간의 일반적 성질이 타산적이며 악에 기우는 것으로 보고 정치를 논할 기초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따라서 군주는 공론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끊임없이 시세時世에 즉응卽應하는 법을 펴고, 관리들의 평소의 근태勤怠를 감독하여 상벌을 시행하고 농민과 병사를 아끼고 상공商工을 장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둘째, 한비 일파의 강학講學, 토론으로 추정되는 편編들로 그 내용은 한비의 사상과 거의 같습니다. 주목할 것은 ‘난세’편과 ‘정법’편으로, 유가의 덕치론德治論은 물론 법가法家에 속하는 신자愼子, 신자申子, 상자商子의 설까지도 비판하고 수정했습니다.

셋째, 한비 학파가 전한 설화집으로 설화 3백 가지를 독특한 체계에 의해 배열하고, 이야기를 통해 법가사상을 선전햇습니다.

넷째, 전국시대 말기부터 한대漢代까지의 한비 후학後學들의 정론政論으로 추정되는 제편諸編으로 편수編數가 가장 많습니다. 후학들의 주장에서 한비의 사상이 현저하게 조직화되었고, 특히 군신통어群臣統御나 법의 운용運用에 관한 술책이 세밀하게 고찰되었습니다.

다섯 째, 도가道家의 영향을 받은 한비 후학들의 논저인 <주도主道>, <양각揚搉>, <해로解老>, <유로喩老> 등 네 편은 유가의 덕치德治와 법가의 법치法治 모두를 부정하는 도가道家와는 근본적으로 입장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여섯 째, 한비 학파 이외의 논저인 <초견진初見秦>, <존한存韓> 등 두 편 모두 한비의 사적事蹟에 결부시켜 책 첫머리에 편입되어 있으나 전자는 유세가의 작품이고, 후자는 한비의 작품을 모방한 상주문上奏文이 포함된 것으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습니다.

법가法家의 계보는 중국에서 최초로 정鼎(가마솥)에 성문법을 주조한 춘추시대 정鄭나라의 재상 자산子産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자산은 성이 국國(혹은 공손), 이름은 교僑이며 자산은 그의 자입니다. 정나라 목공의 손자이므로 흔히 정자산이라 부릅니다. 기원전 547년 재상에 임명되어 기원전 522년 세상을 뜨기까지 20년 넘게 국내 정치를 혁신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으며, 대외적으로 실용적인 외교활동을 벌여 열강들이 감히 정나라에 칼을 겨누지 못하게 했습니다. 공자는 자산이 타계했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그를 가리켜서 “고대 어짊과 사랑의 풍모를 지닌 화신”이었다며 애통해했습니다. 자산 이후 <법경法經>을 저술한 전국시대 초기 위魏나라의 재상을 지낸 이극李克(기원전 455-395), 법치를 확립한 전국시대 중기 위韋나라의 귀족 출신 상앙商鞅(혹은 공손앙公孫鞅), 전국시대 중기 조趙나라의 신도愼到, 정鄭나라의 천민이었으나 한韓나라 소공昭公(기원전 363-333 재위)의 재상이 되어서 부국강병을 꾀하고 외침을 막아낸 신불해申不害(기원전 385?-337)로 이어져 오다가 전국시대 말기 한韓나라의 한비가 법가 사상을 집대성했습니다.

한비가 등장하기 이전, 법가는 현실 정치 무대에서 활용되는 정치술政治術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한비가 법치法治, 세치勢治, 술치術治를 집대성하는 한편 법가를 하나의 사상으로 체계화함으로써 유가, 묵가, 도가, 법가, 음양가, 명가, 즉 육가에 당당히 이름을 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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