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高麗시대의 무속巫俗




무당을 모아 기우제祈雨祭를 드린 것은 고대에 무당으로 하늘에 제사한 증거로 볼 수 있습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고조선古朝鮮」에 다음의 기록이 있습니다.
환웅桓雄이 무리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太白山 꼭대기 신단수神檀樹 아래 내려와 세상에 머물면서 통치했다. 바람신風伯, 비신雨師, 구름신雲師를 거느리고 곡식, 생명, 질병, 형벌, 선악을 주관했으며,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재했다. 그의 아들 단군왕검檀君王儉이 나라를 열어 이름을 조선朝鮮이라 했다.

바람신, 비신을 거느리고 곡식과 생명을 주관하며, 하늘과 귀신을 제사한 것은 고대의 신권군주神權君主가 백성의 생명을 위해 풍년豊年을 기원하고 비를 빌던 무축적巫祝的 신사神事였음을 말해줍니다.
이는 후세에 하늘이 가물어 기근이 들었을 때 무당을 모아 비를 빌었다든지, 시장을 옮겼다든지 하는 것의 근원이 됩니다.
이능화李能和는 『조선무속고朝鮮巫俗考』에서 시장을 옮긴 것을 신시천왕神市天王(환웅천왕을 말함)이 바람신, 비신을 거느리고 곡식, 생명을 주관한 데서 연유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기우방법의 하나로 시장을 임시로 다른 곳에 옮기는 데 대한 가능한 설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시장이 북쪽에 있으므로 음陰에 해당하며, 이 음을 남방으로 옮김으로써 양陽이 지나친 결과인 한발을 중화할 수 있다는 논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설입니다.
둘째, 시장은 더럽고 부정한 것이므로 이를 다른 곳으로 옮기면 하늘이 정화를 위해 비를 내린다는 관념에 기초했다는 설입니다.
셋째, 시장에 사람이 모이는 것은 구름이 모이는 것과 같으므로 시장을 옮김으로써 구름의 이동을 가져올 수 있다는 믿음에 기초했다는 설 등입니다.
그러나 기우제를 지내며 시장을 옮기던 사시徙市는 단순한 민속民俗이 아니라 유교경전에 이론적 근거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예기禮記』 단궁(하)에서 천자天子나 제후諸侯가 죽으면 후계자後繼者가 자책의 뜻으로 시장을 옮기는 것처럼 가뭄 때도 왕이 자책하는 의미에서 시장을 옮긴다고 했습니다.
고려는 국초부터 마지막 왕에 이르기까지 무릇 가뭄을 만나면 반드시 무당을 모아 비를 빌거나, 혹은 시장을 옮기곤 했습니다.
이는 옛 습속이 남아 전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고려사高麗史』 「오행지五行志」에 따르면 고려 제8대 왕현종顯宗(1009-31년 재위) 12년(1021년) 5월, 가뭄이 들어서 무격巫覡(남자 무당)을 모아 비를 빌었습니다.

고려 제15대 왕 숙종肅宗(1095-1105년 재위) 6년(1101년) 4월 15일, 가뭄으로 폭무爆巫해서 비를 빌었습니다.
폭무란 무녀들을 땡볕에 세워두는 기우방법으로 신령神靈과 통하는 무녀를 땡볕에 세워두면 하늘이 불쌍히 여겨 비를 내려줄 것이라는 관념에 기초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폭무기우爆巫祈雨는 무당들에게 큰 고통이었고, 실제 기우에 동원되지 않으려고 도망간 사실도 있습니다.

고려 제16대 왕 예종睿宗(1105-22년 재위) 16년(1121년) 5월 8일, 무당들을 모아 비를 빌었습니다.

고려 제17대 왕 인종仁宗(1123-46년 재위) 원년(1123년) 5월 12일, 가뭄으로 도성청都省廳에 토룡土龍을 만들었으며, 무당들을 모아 비를 빌었습니다.
도성청은 국가의 여러 행사를 주관하고 외교문서의 작성과 발송을 담당하던 상서도성尙書都省의 약칭입니다.
토룡土龍은 깨끗한 흙을 빚어 만든 용으로 물을 지배하는 용을 만듦으로써 비를 불러올 수 있다는 관념에 기초한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기우방법 중에는 용을 만들어 학대하는 것도 있었는데, 이는 용에게 모독을 주어 강우 능력을 발휘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인종仁宗 11년(1133년) 5월 16일, 여자 무당 3백여 명을 도성청으로 소집하고 무당들을 모아 비를 빌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고려 제25대 왕 충렬왕忠烈王(1275-1308년 재위) 10년(1284년) 5월 15일, 가뭄으로 시장을 옮기고, 29일에는 무당들을 도성청에 모아 비를 빌었습니다.
충렬왕 15년(1289년) 5월 2일, 가뭄으로 시장을 옮겼으며, 13일에는 무당들을 모아 비를 빌었습니다.

고려 제29대 왕 충목왕忠穆王(1344-48년 재위) 2년(1346년) 5월 16일, 무당들을 삼사三司에 모아 비를 빌었습니다.
삼사三司란 중외의 전곡錢穀 출납, 회계 사무를 총괄하던 경제관서를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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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高麗시대의 무당




무당이 인귀人鬼가 병의 원인이라 말했다는 것은 고구려 초에 이미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서긍徐兢(1091-1153)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다음의 내용이 있습니다.
고려의 오랜 풍습은 사람들이 병들어도 약으로써 다스리지 않고, 오직 귀신을 섬기고 저주와 염승厭勝만을 일삼았다.

염승厭勝은 주술적呪術的 도구 등을 사용하여 사악한 기운을 꺾는 방술로 압승壓勝이라고도 합니다.
전 40권의 『고려도경』은 1123년(인종 1년) 송宋나라 사신단의 일원으로 고려에 온 서긍의 고려견문록을 말하며, 원래 글과 그림이 있어 도경圖經이라 했으나 현재 그림은 전하지 않습니다.
『고려도경』의 내용으로 미루어 고려에 무풍巫風이 성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무당의 말에 따라 둑을 허물기까지 했는데, 이는 오늘날 세속에서 동토動土하여 살煞을 범하는 것을 꺼리는 것의 연원입니다.
동토動土는 태세신太歲神이 머무는 방향에서 땅을 파거나 집을 지었을 때 생기는 재앙으로 태세신은 12년을 주기로 동-서-남-북으로 순환합니다.
태세신은 처음에는 하늘의 별로 여겨졌으나 후대에는 지하에 머무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태세 관념은 중국의 선진시대에 이미 확인되며, 동토를 우리 민간에서는 흔히 동티났다고 합니다.
살煞은 재앙을 가져다주는 사악한 기운을 말합니다.

『고려사高麗史』 인종세가에 따르면 인종仁宗 24년(1146년), 왕이 병이 들어서 척준경拓俊卿을 다시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복직시키고, 그 자손을 불러 관직을 주었는데, 이는 척준경의 원혼이 병의 빌미가 되었다는 무당의 말에 의한 것입니다.
또 무당의 말을 듣고 내시 봉열을 보내 김제군金提郡에 신축한 벽골지碧骨池의 둑을 허물었습니다.
척준경拓俊卿은 인종 때 이자겸李資謙의 난亂에 가담해 대궐大闕에 불을 질렀으나, 인종의 권유로 1126년(인종 4년) 이자겸을 몰아내는 데 앞장섰고, 그 공으로 문하시랑門下侍郞 동중서문하평사同中書門下平事가 되었습니다.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줄인 것이 문하시랑이며, 중서내하성中書內下省의 정2품 벼슬입니다.
그러나 척준경은 이듬해 정지상에게서 과거 대궐을 범한 죄를 탄핵당해 결국 유배되었으며, 1144년(인종 22년) 고향 곡주에서 등창으로 죽었습니다.
척준경에 의해 제거된 이자겸은 1126년(인종 4년) 12월에 유배지 영광에서 죽었습니다.

사람들을 홀리는데 공창무격空唱巫覡이 가장 심했습니다.
공창무격空唱巫覡은 말을 하지 않는데도 공중에서 소리가 들리도록 하는 술법을 사용하는 무당을 말합니다.
공창은 입술과 이를 놀리지 않고 전혀 다른 목소리를 내는 일종의 복화술複話術로 요즘은 개그맨들이 주로 사용합니다.
조선 초기에 공창의 풍습이 성행했으며, 고려시대부터 전해진 것입니다.

『고려사高麗史』 「안향전安珦傳」에 따르면 충렬왕忠烈王 원년(1275년), 원元나라에서 성리학을 도입한 것으로 유명한 안향安珦(1243-1306)이 상주판관尙州判官으로 부임했습니다.
이때 여자 무당 세 사람이 있어 요사스런 귀신을 받들고 사람들을 현혹시키면서 협주陜州(오늘날의 경남 합천군)에서부터 여러 군현을 거쳐 갔습니다.
가는 곳마다 사람의 소리가 났는데 공중에서 은은하게 길을 비키라고 외치는 것 같았습니다.
사람들이 달려가 다투어 제사를 지냈으며, 감히 남보다 뒤처지려 하지 않았고, 비록 고을의 수령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상중에 이르렀을 때 안향이 매를 때리고 칼을 씌우니, 무녀들은 귀신의 말을 빙자하여 화복으로서 겁을 주었습니다.
상주 사람들이 다 두려워하였으나, 안향은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며칠을 넘기자 무녀들이 애걸하므로 풀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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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高麗시대의 무고巫蠱 사건咀呪




무고巫蠱란 주술적呪術的인 방법으로 다른 사람의 감정을 조절하거나, 남을 해치거나, 저주咀呪하는 술법을 말합니다.
무녀巫女가 저주하는 일은 이미 주周나라와 한漢나라 때의 책에 나타나 있어 그 유래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여자 무당이 저주한 것을 고려 충렬왕 때 처음 보는데, 오늘날 세속의 민간에 이 풍습이 아직 존속합니다.
저주와 같은 일은 요사스런 무당에게서 많이 나옵니다.
저주를 속어로는 방자方子라 합니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충렬왕忠烈王 2년(1276년) 12월 16일 밤에 누군가 익명으로 투서를 했는데, 정화궁주貞和宮主가 공주(원元나라 공주)를 저주했으며, 또 제안공숙齊安公淑과 김방경金方慶 등 43명이 역모를 꾀한다고 모함한 것이었습니다.
정화궁주貞和宮主는 종실宗室 사도司徒 인의 딸로 1260년(원종 1년) 후일 충렬왕이 된 세자와 혼인하여 정비正妃가 될 수 있는 유력한 위치에 있었지만, 세자가 1274년 원元나라 공주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와 혼인함에 따라 후궁의 자리로 물러앉고 말았습니다.
원나라 공주란 원 세조 쿠빌라이의 딸인 안평공주 홀도로게리미실을 말하며, 1274년 충렬왕과 혼인해 충선왕忠宣王을 낳고, 1295년 제국대장공주로 봉해지고 1297년에 사망했습니다.
제안공숙齊安公淑은 현종의 9대 손이며 정화궁주의 사위입니다.
고려 후기의 장군 김방경金方慶(1212-1300)은 삼별초三別抄의 난亂을 진압하고, 몽고군과 함께 일본을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투서로 인해 정화궁주와 숙, 김방경 등이 갇혔으나, 유柳경이 눈물을 흘리며 힘써 간하니 공주가 느끼고 깨달은 바 있어 모두 다 풀어주었습니다.
고려 후기의 대신 유柳경은(1211-89) 최씨 무인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일익을 담당했습니다.
충렬왕 2년(1276년) 12월 24일에 장군 고천백高天伯과 홀랄忽剌대를 원나라에 보내 표表를 올려 말하기를 “저주하는 말은 거짓말에서 비롯된 것임은 성스럽고 밝으신 안목으로 보시면 가히 진실을 아실 것입니다” 운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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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 성황신과 금성산신이 무당에게 내리다




조선의 도처에는 무격巫覡들이 모여 기도하는 성황사城隍祠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각 군에서는 별신굿別神事을 했으며, 이때 무격의 무리가 춤과 노래로 흥을 돋우는데 불러서 청하는 것이 모두 성황신城隍神이었습니다.
그 근원은 고려시대에 나온 것입니다.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에 따르면 함유일咸有一이 삭방도朔方道 감창사監倉使가 되었을 때(함유일이 삭방도 감창사가 된 것은 의종 때임) 등주登州(지금의 안변安邊) 성황신이 여러 차례 무당에게 내려와 기이하게도 나라의 화복禍福을 알아맞혔습니다.
함유일咸有一(1106-85)은 고려 중기의 관리로 가는 곳마다 미신타파에 힘쓴 것으로 유명합니다.
삭방도朔方道는 고려 제6대 성종成宗 때 제정된 10도道의 하나로 지금의 강원도 북부지방을 말합니다.
감창사監倉使는 고려시대 동서북면東西北面에 파견한 지방관입니다.
함유일은 성황사에 가서 국제國祭를 지낼 때 읍揖만 하고 절을 하지 않았으므로 담당 관청(유사有司)에서 임금의 비위를 맞추려고 탄핵하여 파직시켰습니다.
국제는 국가에서 국왕의 명의로 지내는 제사를 말합니다.

전라도 나주 금성산 일대에 있던 신당 금성산신錦城山神은 으뜸가는 음사淫祠였습니다.
음사淫祠란 올바르지 못한 신사나 제사를 말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모시는 신이 올바르지 못한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신은 정신正神이라도 모실 자격이 없는 사람이 신을 제사하는 경우입니다.
예컨대 유교의 규정에 의하면 산천은 제후諸侯 이상만이 제사할 수 있으며, 일반인이 제사하면 음사가 됩니다.
금성산신에 무녀들이 떼 지어 모여들어 굿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조선의 풍속에 산신山神에 대한 제사를 도당굿(도당제都堂祭)이라 하는데, 이 역시 무녀巫女를 써서 신을 모시는 것으로 고려시대의 금성신당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고려 충렬왕 때 중신 정가신鄭可臣(?-1298)은 나주羅州 사람입니다.
고종 때 과거에 급제해 화려한 요직을 거쳤으며, 충렬왕忠烈王 3년(1277년) 보문각寶文閣 대제待制에 임명되었습니다.
보문각은 경연과 장서를 맡은 관청이며, 대제는 정5품 벼슬입니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나주 사람들이 말하기를 “금성산신이 무당에게 강신하여 ‘진도珍島와 탐라耽羅를 칠 때 내가 실로 힘을 썼는데, 장수들은 상을 주면서 내게는 녹祿을 주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반드시 나를 정령공定寧公에 봉하라’ 했다.

‘진도珍島와 탐라耽羅를 칠 때’란 삼별초의 난을 진압한 것을 말합니다.
고려시대에는 신에게 관작을 주는 제도가 있었으며, 이는 신을 국가에서 공인한다는 의미이므로 해당 신을 모시는 지방 세력들에게는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정가신이 나주 사람들의 말에 혹해 왕에게 넌지시 말하여 정령공에 봉했고, 또한 그 고을을 녹미祿米 5섬을 거두어 해마다 그 신당에 보내주었습니다.
충렬왕 3년 나주목사로 하여금 금성산신에게 해마다 쌀 5석을 지급하여 제사하도록 한 조치가 『고려사高麗史』에 보입니다.
충렬왕 초에 관리 沈양이 공주부사公州副使가 되었습니다.
지금의 전라남도 장성군인 장성현長城縣의 어떤 여자가 “금성대왕錦城大王이 나에게 내려 말씀하시기를 ‘네가 금성신당의 무당이 되지 않으면 반드시 네 부모를 죽이리라’고 하기에 내가 두려워 따랐다”고 말했습니다.
금성산신錦城山神을 금성대왕錦城大王이라고 불렀는데, 신神을 대왕大王이라 한 것은 한국과 중국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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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 궁중에서 무당을 좋아하다




『고려사高麗史』 「명덕태후전明德太后傳」에 따르면 “어떤 여무女巫가 요사스런 말로 후궁에 드나들며 자못 신뢰와 사랑을 받았다.”
명덕태후는 홍규洪奎의 딸로 충숙왕의 비이며, 충혜왕의 어머니입니다.

「김자수전金子粹傳」에 따르면 “공양왕 때 김자수(1351-1413, 고려 말의 문신)가 ‘음사淫祠를 금하고 여러 무당들이 대궐에 출입하는 것을 엄히 금함으로써 요망함을 끊고 풍속을 바르게 하소서’라 청했다.
충렬왕忠烈王 25년(1299년) 5월, 개경의 무녀 중에서 노래와 춤을 잘하는 사람을 선발해 궁중에 명단을 만들어 두었으며, 고운 비단으로 만든 옷을 입히고 말꼬리로 만든 것을 씌워 별도로 1대隊를 만들어 남장男粧이라 칭하고, 새로운 소리를 가르쳤습니다.
새로운 소리란 충렬왕이 지은 「삼장三藏」과 「용사龍蛇」란 노래를 말합니다.

고려 제32대 왕 우왕禑王(1374-88년 재위)이 사냥을 나갔다가 밤에 돌아와 생황苼篁을 불며 노래하고 북 치고 춤추면서 무격놀이를 했습니다.
우왕禑王은 아버지가 공민왕恭愍王이 아니라 신돈辛頓이라 하여 이성계 일파에 의해 폐위되었습니다.
생황苼篁은 아악에 사용하는 관악기의 일종입니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공양왕 때 김자수金子粹가 상소했습니다.
나라에서 굿당(무당巫堂)을 설립한 것도 이미 정도正道에서 어긋난 일인데, 이른바 별기은別祈恩을 하는 곳 또한 10여 곳을 밑돌지 않습니다. 사시의 정기적 제사로부터 수시로 거행하는 별제別祭에 이르기까지 1년 동안의 소비되는 경비는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제사 때에는 비록 금주령禁酒令이 엄하다고 해도, 여러 무당들이 무리를 지어 나라의 행사라고 핑계를 대니 담당 관청에서도 감히 꾸짖지를 못합니다. 그러므로 모여서 술 마시기를 태연히 하고, 번화한 거리에서 북 치고 피리 불며 노래하고 춤추는 등 못하는 짓이 없으니, 풍속風俗의 아름답지 못함이 이렇듯 심합니다. 바라옵건대 담당 관청에게 밝은 명령을 내리시어, 사전祀典에 기재된 것 이외에는 일절 음사를 금하고 모든 굿당을 철저히 없애주십시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따르면 김자수가 이 상소를 올린 것은 공양왕 3년(1391년) 5월이었습니다.
사전祀典은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거행하는 각종 유교식 제사에 대한 규정 내지 기록을 말합니다.
국무당國巫堂은 국가에서 인정한 신당이라는 의미와 국가나 왕실 차원의 의례를 담당하는 무격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별기은別祈恩은 국가제사 이외에 왕실에서 사사로이 복을 기원하는 의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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